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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 http://cafe.daum.net/Europa/1AT/23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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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3년 봄, 안티옥의 반란」
레오와 사브리소 3세가 안티옥에서 ‘총대주교의 반란’이라 불리게 되는 반란을 일으키자 아베디스는 그럴 줄 알았다고 화내며 반란 진압을 명했다.
하지만 이미 귀족들 중에도 레오의 지지자가 있었다.
알레포를 지키던 카르카르의 아르타시르는 수도 귀족과 가톨릭교도들만 끼고도는 아베디스 왕을 싫어했다.
아르타시르는 성문을 열고 항복해버렸고 알레포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왕자와 총대주교를 환영했다.
북시리아의 중요 도시인 알레포가 반란군에게 넘어갔다는 보고가 티그라노케르타로 들어가자 아베디스는 주위 사람들을 믿지 못하고 측근들만 신뢰하였다.
그의 동성애인인 에데사 공작 카프리엘 예르반드-왕의 친척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왕과 에데사 공작을 더욱 혐오했다.-가 병력을 이끌고 레오를 상대하려고 했지만 이내 팔미라와 아인타브가 레오 편으로 넘어가고 투르베셀의 수비병력이 항복했다는 소식이 잇달아 들어왔다.
삽시간에 반란군의 규모가 커지자 카프리엘은 잠깐 고민하다가 투르베셀을 탈환하려고 시도했으나 레오의 군대가 한발 빨랐다.
이미 반란군이 투르베셀에 입성한 것을 확인한 카프리엘은 후퇴하여 에데사로 들어가 적을 기다렸으나 레오의 목적은 오직 티그라노케르타로 돌격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에데사 내에서도 레오를 지지하는 여론이 높아지자 카프리엘은 망설였다.
「왕의 애인, 에데사의 공작 카프리엘」
카프리엘이 에데사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레오는 진격하면서 주위 지역을 포섭하려고 했다.
아베디스는 네스토리우스교도가 아닌 가톨릭신자이며 총대주교에게 즉위식을 받지도 않았으니 처음부터 아르메니아 왕이 아니었다고 주장했고 거기다 아베디스가 왕의 자리를 탐내 아이반을 사고로 위장해 죽였다는 소문까지 퍼트렸다.
쿠르디스탄의 지배권을 뺐기고 사냥 중에 납치까지 당하는 등 아베디스에게 여러 모욕을 당한 모술 공작 야사르는 레오를 지지함을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야사르는 대놓고 레오에게 지원군을 보내면서 아베디스와 완전히 척을 졌다.
다비트 헤툼도 아베디스의 찬밥 대우에 불만을 품고 재상에서 내려와 카린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며느리와 불륜을 저지른 것이 들통 나 곤욕을 치루고 있었다.
다비트의 후계자인 아들 아쇼트가 왕을 뵙기 위해 수도로 갔는데 급한 사정이 생겨 왕궁에서 오랫동안 머무르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비트가 자기보다 13살이나 많은 아내에 질린 상태였다.
아내는 아르타바즈드 파크라두니의 딸이었는데, 파크라두니 가문과 인맥을 맺기 위해 결혼했지만 남편과 아내의 나이 차가 많이 나 다비트는 나이든 아내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 아쇼트가 아내를 두고 수도로 가자 다비트는 며느리를 유혹했다.
그러나 아쇼트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고 그 사이 아쇼트의 아내는 다비트의 아이를 임신해버렸다.
상황이 이리되자 다비트의 바람이 들키게 되었고 다비트와 며느리는 아내, 아들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게 되었다.
이럴 때 레오와 총대주교의 반란이 터지자 다비트는 반란군과 국왕군 사이에서 저울질하다 레오에게 항복하는 이가 늘어나자 대세를 따르기로 했다.
일단 자리를 비워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수치도 가릴 겸 다비트는 아예 레오의 군대에 종군했다.
「왕국의 재상에서 불륜자로, 불륜자에서 반란군으로.」
대아르메니아 호족들은 억압당한 자치권을 되찾고자 하는 마음이 강했고 사도 교회에 대한 충성심도 높았다.
가톨릭으로 개종한 아베디스가 고울 리가 없으므로 그들도 왕의 처지를 방관했다.
시리아 공작 타차트는 오직 아이반하고만 친했고 같이 자란 예르반드 왕자들과는 사이가 나빴다.
게다가 아이반의 사고사를 수상하다고 여기고 왕자들을 의심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 왕자들이 서로 싸운다고 하니 타차트는 한발 물러나 상황을 관망하기로 했다.
이렇듯 아르메니아 귀족들이 방관하거나 레오 편으로 넘어가자 국왕군 중에도 탈주해 반란군으로 넘어가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심지어 왕이 쿠르디스탄을 다스리도록 했던 장군 베스드도 왕국 내 귀족들의 추세가 심상치 않자 왕의 명령을 무시하고 레오의 눈치를 봤다.
상황은 갈수록 심각해졌고 대대로 왕실 영지인 중아르메니아에서도 레오와 아베디스의 정통성을 놓고 논쟁하는 여론이 생겨나자 아베디스는 빠른 시간 안에 반란군을 처리하지 않으면 자신이 궁지에 몰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오는 안티옥에 모여든 다양한 계층과 종류의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고 총대주교를 구워삶을 정도로 사람 다루는 데 능숙한 자였다.
아베디스는 도시와 요새, 마을들을 싸움 없이 혓바닥만으로 설득해가는 레오를 빨리 처단해야했다.
왕은 중 아르메니아에서 군대를 긁어모으는 한편 타론 백작 아르타시르에게 진영을 명확히 하라고 명령했다.
아르타시르 루벤은 수도 티그라노케르타와 가까운 타론을 다스리며 자연히 왕의 눈치를 봐야하는 입장이었는데, 반란이 성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고심했다.
그러던 차에 협박이 담긴 아베디스의 편지를 받게 되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성에 틀어박혔다.
그는 제발 반란군이 타론을 무시하고 지나가달라고 빌었지만 반란군은 스테파노스가 세운 아르메니아 왕국의 첫 번째 수도를 그냥 지나갈 생각이 없었다.
반란군이 도착하고 동방 총대주교 사브리소 3세와 왕자 레오가 아르타시르를 설득했다.
사브리소 3세와 레오가 눈앞에 나타나자 아르타시르는 성문을 열어야한다는 유혹에 시달렸다.
그러나 아베디스가 급하게 징집한 군대를 이끌고 타론에 나타났다.
망설이던 아르타시르는 레오에게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지만 아베디스의 군대를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타론 백작이 중립을 지키겠다는 태도를 보이자 아베디스는 보복하겠다며 이를 악물었고 레오는 적어도 타론이 아베디스에게 넘어가지 않았으니 본전치기라 여겼다.
「타론에서 만난 두 형제」
1280년 5월, 타론에서 마주한 레오와 아베디스는 서로를 비난하면서 싸움의 전조를 나타냈다.
총대주교가 형식적인 태도로, 지금이라도 아베디스가 네스토리우스교로 다시 돌아오고 형제가 화해하길 제안했으나 아베디스는 당연히 무시했다.
결국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는데, 레오의 군대가 머릿수는 더 많았지만 아베디스의 군대는 우수한 전문군인들이 많았다.
레오가 유럽에서 용병을 고용하고 오는 길 동안 추가적으로 영주들의 병력을 징발했지만 아베디스의 중앙군은 수년간 전투에서 구른 정예들이었다.
비록 아베디스 측에도 급한 대로 징병한 어중이떠중이들이 많았지만 엄연히 군대의 핵심은 수천에 달하는 상비군이었다.
비록 지방에 배치된 왕실 군대 상당수 레오에게 넘어왔다지만 티그라노케르타 근방에 주둔 중이던 왕실 군대 대다수는 왕에게 충성을 유지했다.
거기다 왕의 오른팔인 아르센은 일개 병사에서 왕실군의 총지휘관으로 출세한 인물로 아베디스가 직접 뽑았고 왕을 따라 가톨릭으로 개종까지 한 인물이라 아베디스를 배신할 확률은 전혀 없었다.
「아베디스의 충신 아르센」
반란군의 우두머리는 사브리소 3세였지만 사실상의 지도자는 레오였다.
아베디스의 군대를 깨뜨릴 방법을 궁리하던 레오는 적을 앞뒤 양면에서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국왕군의 앞을 레오 자신이 잡고 있는 사이 별동대로 적의 후면을 공격하겠다는 것인데, 그러면 별동대는 누가 맡을 것인가?
레오는 파크라두니 가문과 접선을 시도했다.
대아르메니아 공작령의 주인인 파크라두니 가문은 대 아르메니아에 주어진 자치권 때문에 공작령 안에서 별 힘이 없었다.
그렇지만 왕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권력을 누릴 수 있었는데 헤툼 파크라두니는 대 아르메니아의 반란군에게 강제로 우두머리로 세워졌다가 반란군이 아이반에게 진압당하면서 왕가와의 사이가 멀어졌다.
아이반은 헤툼 파크라두니에게 무척 실망하여 그를 처형하려고 했지만 선왕 아르타바자드 때부터 왕을 모신 것과 억지로 떠밀려서 반란에 동참하게 된 사실을 감안해달라는 궁정 사제 아부가마르 예르반드의 조언을 듣고 눈을 뽑는 것으로 형을 낮췄다.
같이 눈이 뽑힌 다른 반란자들은 합병증으로 몇 년 넘기지 못하고 죽었지만 헤툼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장님이 된 헤툼은 아내와 동생들의 도움으로 영지를 경영해갔지만 왕의 군대가 반란군을 퇴치하기 위해 몇 년 동안 대아르메니아 구석구석을 뒤집고 다니느라 땅이 피폐해진 상태였다.
티그라노케르타의 아이반도 헤툼을 냉대했다.
이는 아베디스가 즉위한 후에도 바뀌지 않았다.
아베디스도 형처럼 파크라두니 가문을 신뢰하지 않았고 대아르메니아인들은 그들의 공작가를 우습게 여겼다.
눈을 잃은 뒤 우울증이 약해져 조금 정신을 차린 헤툼은 왕가와 화해할 방법을 모색했고, 왕에게 처벌을 받고 자치권이 약해진 대아르메니아 안에서 가문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내전이 시작되자마자 레오는 헤툼에게 자신은 헤툼의 억울함을 잘 알고 있으며 자신이 왕이 된다면 파크라두니 가문은 다시 티그라노케르타 왕성에서 왕의 옆에 서있을 수 있을 거라며 도움을 요청했다.
거기다 몇가지 혜택을 더 약속하기로 하자 헤툼은 레오의 부탁을 바로 받아들였다.
「대아르메니아 공작 헤툼 파크라두니는 눈을 잃고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레오와 헤툼이 밀약의 조건을 정하는 동안 타론에선 몇 번의 전투가 벌어졌다.
레오에게 항복한 영주들은 일단 레오의 편에 서긴 했지만 전투에 있어서 그리 열성을 보이지 않았고 아베디스가 이길 것 같으면 언제든지 다시 편을 바꿀 준비가 되어있었다.
레오도 영주들의 속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군대보단 자기가 직접 고용한 용병들을 신뢰했다.
자기 군대에 자신이 있던 아베디스가 먼저 공격해왔고 레오의 군대는 방어적으로 적을 요격했다.
타론 성주 아르타시르가 성벽 위에서 전투를 지켜보며 어느 쪽으로 넘어갈까 주사위를 굴리는 동안 아베디스는 레오와 회전을 벌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레오는 헤툼의 원군이 오기 전까진 이길 것이란 확신이 없었기에 결판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레오는 헤툼과 몰래 계약을 진행 중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숨기고 있었고 이를 아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고 보인다.
아마 사브리소 3세 정도만이 알고 있었으리라 본다.
6월이 되고도 판세가 확실치 않자 레오파의 영주들 중 영지로 귀환하거나 아베디스에게 선을 대려는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레오가 초조해 할 무렵 헤툼의 군대가 타론 근방에 접근했다고 연락이 왔다.
그제야 레오는 아베디스의 회전에 응했다.
6월 15일, 레오도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어 전투에 나섰다고 생각한 아베디스는 당연히 맞서 싸웠다.
아베디스는 약 8000명, 레오는 그 두 배 이상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베디스의 병사들은 경험 많고 사기가 높았다.
아베디스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레오를 무찌르기 위해 과감하게 카타프락토이들을 돌격시켜 적의 선봉대를 붕괴시킨 다음 병력을 몰아붙이려고 했다.
하지만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레오는 자신이 가장 아끼던 중보병을 내세우고 전열을 고착화시켜 시간을 끌었다.
아르센이 이끄는 카타프락토이의 돌격을 중보병이 막는 동안 레오가 용병으로 고용한 유목민들을 투입해 적의 가운데를 사격하도록 하자 아베디스의 병사들을 방패를 높이 들고 버텼다.
아르메니아는 전쟁에 나설 때 기독교도든 이슬람교도든 상관없이 유목민들을 용병으로 고용해 궁기병을 충원했는데 레오는 총대주교가 지원한 금으로 용병이 될 만한 주위 유목민들을 모조리 포섭했다.
아베디스 역시 유목민들을 고용하려고 했으나 과거에 대금을 지불하지 못하던 왕의 모습을 기억하던 유목민들은 현금 박치기를 하는 레오에게 넘어가 버렸다.
덕분에 아베디스는 적 궁기병의 공격에 방어태세만을 펼쳐야 했다.
수백 카타프락토이의 돌격이 효과가 없자 아르센은 적 진형을 돌아 후위를 공격하려고 했는데 레오는 아예 자신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방어진을 짜고 버티기에 들어갔다.
레오가 시간만 끌자 이러다간 하루 종일이 지나도 전투가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베디스 역시 화살이 다 떨어지면 자신에게 유리하게 진행될 것을 알고 방어만을 유지했다.
카타프락토이들이야 지속적으로 전투를 진행할 수 있겠지만 유목민들은 화살이 떨어지면 도망치든 가까이 붙어 싸우든 결정해야만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베디스는 레오가 헤툼을 포섭한 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점심에 시작된 전투가 해질 때까지 이어졌는데, 먼저 지친 자들은 레오의 군대였다.
카타프락토이의 계속된 위협에 불안해지고 지친 병사들의 방어가 해이해지자 아르센은 틈을 놓치지 않고 찌르고 들어왔다.
그에 비해 레오의 궁기병들은 곧 화살이 떨어질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헤툼의 군대가 아베디스군의 뒤에서 나타나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헤툼의 동생인 마미곤 파크라두니가 이끄는 군대가 아베디스 군대에 돌격하자 역시 힘이 빠져있던 아베디스의 병사들의 움직임이 느렸다.
그 틈 사이로 들어온 마미곤이 자신을 노리자 겁을 먹은 아베디스는 도주했다.
왕이 전장에서 겁쟁이처럼 달아났다는 소식이 퍼지자 용맹한 직업군인들조차도 더 이상 싸울 의욕을 잃고 말았다.
아르센도 자기 기병대를 이끌고 왕을 따라 전장에서 이탈하자 우두머리를 모두 잃은 중앙군은 레오에게 항복해버렸다.
왕의 군대가 패배하는 모습을 본 아르타시르는 바로 성문 밖으로 달려나가 레오에게 무릎을 꿇었다.
레오는 아르타시르의 비겁한 태도를 경멸했으나 딱히 처벌을 내리진 않았다.
아르타시르에게서 타론의 병력을 징발해 병력을 보충한 뒤 레오는 티그라노케르타로 출발했다.
「우유부단했지만 눈치는 있었던 아르타시르 루벤」
아베디스는 당황한 나머지 전장에서 벗어났으나 이내 자신이 실수를 했음을 알게 되었다.
번번히 짧은 생각에 일을 저지르던 아베디스는 거의 모든 병력을 상실하면서 재기가 힘들어졌고 그의 옆에는 아르센과 그를 따라온 수백 명의 중기병들 뿐이었다.
강하다면 강한 병력들이었으나 타론에서 승리한 레오에게 대다수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충성을 맹세했고 이제 레오의 병력은 갑절이 되었다.
레오는 항복한 중앙군에게 아무 잘못도 묻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들은 대대로 왕실을 모시는 왕의 직할군인만큼 레오가 왕이 되면 사용할 군대였기에 레오는 그들에게 해를 끼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자 왕실 군대도 도망친 왕보단 승리자를 모시는 게 낫다는 걸 납득한 모양인지 레오의 명령에 고분고분 따랐다.
어찌되었든 레오 역시 예르반드였으니까.
게다가 티그라노케르타 안에서도 태후 굴리코가 왕성 내부에서 정권을 잡은 뒤 레오에게 성문을 열었고 레오는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도시로 들어갔다.
아베디스는 이제 왕국 내에선 재기가 불가능해졌고 그나마 남은 병사들조차도 하나둘 도망쳐 레오에게 항복했다.
아르센은 절망한 자기 주군에게 망명을 제안했다.
아베디스와 아르센은 아라비아 사막을 넘어 예루살렘 왕국으로 가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그러나 유프라테스 강을 넘으려고 할 때 시리아 공작 타차트 바크탄기안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아베디스가 타차트에게 자신을 보내달라고 애걸했지만 타차트는 사무적인 태도를 보이며 그들을 레오에게 바쳤다.
「사로잡힌 왕」
「국외로 망명하려던 왕을 생포한 시리아 공작 타차트」
아베디스는 티그라노케르타로 다시 오게 되었는데, 도시를 나설 때는 왕이자 지휘관이었지만 돌아올 땐 사슬에 묶인 죄수의 모습이었다.
시민들은 네스토리우스교를 버린 왕을 싫어했기에 아베디스가 볼품없는 모습으로 끌려오자 돌을 던지고 비웃음과 욕설을 내뱉었다.
아베디스는 자신을 저주하는 시민들을 멍하니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베디스가 성 그리고르 성당, 일명 계몽자 성당에 들어오자 수많은 귀족과 군인들, 차려입은 귀부인과 언제나 그렇듯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궁정 사제들, 호기심 가득한 외국인 외교관들, 그리고 왕의 옷을 입고 왕관을 머리에 쓴 레오와 총대주교 사브리소 3세가 그를 기다렸다.
1283년 7월 1일, 사브리소 3세는 그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아베디스가 배교함으로서 왕의 권리를 잃었음을 발표하고 레오에게 공식적인 즉위식-안티옥에서 한 것은 약식 즉위식이었다.-을 치러주었다.
레오는 일부러 아베디스가 보는 앞에서 즉위식을 치러 패배자 형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새 왕은 시작부터 자신의 잔혹한 일면을 드러냈다.
아베디스는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찬탈자 왕 레오 예르반드」
즉위식이 끝나고 아베디스는 궁정 깊숙한 곳에 유폐되어 아무도 볼 수 없게 되었다.
평민 출신이었던 아르센은 모든 직위를 빼앗긴 채 추방되었다.
그 다음날 7월 2일 아베디스는 시체로 발견되었다.
레오는 아베디스가 절망감으로 자살했다고 발표했고 형의 죽음을 슬퍼했다.
불과 하루 전 형 앞에서 즉위식을 치러 일부러 절망감을 주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비록 퇴위 당했지만 레오는 아베디스를 국왕에 준하는 예우로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의 모든 귀족들은 아베디스를 누가 죽였는지 알고 있었다.
「아베디스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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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디스 예르반드 Avedis Yervand
1253. 10. 4 ~ 1283. 2. 7
예르반드조 아르메니아 제 5대 왕 (1280. 3. 19 ~ 1283. 7. 1), 티그라노케르타 (중아르메니아) 공작, 가톨릭 숭배자.
27세에 군주의 자리에 올라 30세에 왕위와 목숨을 모두 잃다.
결혼은 하지 않음.
개인특성 : 노련한 전술가, 동성애자, 용기, 순결, 야망, 정직 / 조직자, 평지 전문가.
-가족 관계-
아르타바즈드 예르반드 : 아버지, 아르메니아 제 3대 왕.
두다 바그라티오니 : 어머니, 조지아 공주, 아베디스를 낳자마자 사망.
헤르니카스 예르반드 : 형, 유아기 사망.
아이반 예르반드 : 형, 아르메니아 제 4대 왕.
케란 예르반드 : 누나.
레오 예르반드 : 동생, 아베디스에게서 왕위를 찬탈, 아르메니아 제 6대 왕.
베드로스 예르반드 : 동생, 막내.
-인간 관계-
아르센 : 평민 출신 근위대장. 자신을 출세시켜준 아베디스에게 충성함. 추방된 이후로 기록이 끊김.
카프리엘 예르반드 : 에데사 공작. 아베디스가 총애하는 동성 애인이었으나 카프리엘 본인은 아베디스에게 별 애정이 없었던 모양. 레오에게 전투에서 패배하자 내전이 끝날 때까지 에데사에서 조용히 있음.
타차트 바크탄기안 : 시리아 공작. 자신을 키워준 아이반과는 친했으나 같이 자란 왕자들 아베디스, 레오하고는 사이가 무척 나빴다. 예루살렘 왕국으로 망명하려던 아베디스를 잡아 레오에게 바쳤으나 레오하고도 다투었다.
베스드 브 다르바사크 : 쿠르디스탄 백작. 중앙군 출신의 하급 귀족으로 공을 세워 쿠르디스탄 백작이 됨, 아베디스의 가톨릭 개종에 실망하여 레오의 반란에도 쿠르디스탄에서 벗어나지 않음.
헤툼 파크라두니 : 대아르메니아 공작. 내전 동안에 중립을 지키는 듯 했으나 몰래 레오와 약조를 맺고 아베디스의 군대를 공격해 레오의 승리에 큰 공헌을 세웠다.
다비트 헤툼 : 카린 공작. 아베디스의 방만한 국정 운영과 측근 싸고돌기에 조언했으나 아베디스가 무시하자 말다툼을 벌이고 재상직을 반납.
카린으로 돌아왔으나 며느리와 불륜을 저지른 것이 들키자 레오의 반란에 참가하여 영지에서 자리를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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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반 플레이 중에 사이가 안 좋아서 레오가 동방 총대주교 부하로 들어가는 바람에 “으악 내 천재 동생!” 비명을 질렀습니다.
결국 왕위가 아베디스에게 넘어가자 동방 총대주교에게 공격받으려고 별짓을 다하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니까 사브리소 3세가 열 받아서 레오로 왕위 클레임 전쟁 거네요.
일부러 져주고 왕위를 레오에게 넘겼습니다.
그다음엔 Kill 콘솔을 켜서 빠른 자살ㄱㄱ.
일이 있어서 다음편은 다음주 말에나 올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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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봤습니다.
캄솨합니다.
이제 레오는 자신을 도와준 새어머니랑 불타는 읍읍읍읍(아이반의 아내인 형수도 접수 읍읍)
크토미 유저가 또!
@회색실패작 태후는 아이반이랑 불륜한다는 카더라가 있었으니 현실로 만들어주죠!
@노스아스터 신실한 아르메니아인이라면 누구나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카더라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