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인즈 & 하이예크 시장경제를 위한 진실게임
박종현 / 김영사 / 2008 / 241p / 9,500원
자유주의를 지키며 사회주의와 맞선 케인즈와 하이에크는 평생 동지였지만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어떻게 운영할지 서로 다른 가치관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박종현.연세대 경제학과. 진주산업대 화폐금융학 교수. 저서 <미국식 민주주의와 사회민주적 대안> <케인즈의 경제학> <빅셀 이후의 거시경제 논쟁> 등.
프롤로그 - 낯선 경제학 마을로 떠나는 짧은 여행
그리하여 우리가 그 책을 다 읽었을 때
그 책이 훌륭한 책이라면,
그 책을 읽기 전에 견주어 자신이 약간 달라졌다는 것을...
우리 자신이 변한 것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 어슐러 르 권. <어둠의 왼손>.
Chapter 1. 초대 - 시장경제를 위한 진실 게임
인류는 한 가지 가치만을 맹신하며 이를 사회 전체에 강요하는 근본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공산주의가 과거의 근본주의였다면, 오늘날에는 시장 근본주의가 인류의 안녕을 위협하고 있다.
케인즈와 하이예크의 삶과 사상을 살펴보는 짧은 여행을 마친 후, 여행 그 이전과는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하여 낯선 거리에서 문득 자신의 새로운 얼굴과 마주할 수 있게 되기를...
Chapter 2. 만남
1. 사회주의와 맞서다.
자본주의는 사회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윤을 얻는데 생산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상품을 과잉 생산하는 내적 경향을 띤다.
페이비언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의 이상을 긍정하면서도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그 이상을 실현하려 했던 케인즈의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사회주의가 사람들의 이타적 충동을 사회에 봉사하는 방향으로 이끌었고, 대담한 실험을 행할 수 있는 용기를 지녔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다.
그럼에도 케인즈는 사회주의보다 더 매력적인 사회가 자본주의 속에서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의 주된 관심은 자본가로부터 자본주의를 지키는 것이었다.
케인즈는 다수의 지배, 다시 말해 민주주의에 대해 조금은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나는 노동자 계급의 일원이 아니며, 정의나 공공선을 추구하지만, 만일 계급간의 전쟁이 벌어진다면 교육받은 부르주아의 편에 설 수 밖에 없다."
능력있고 사심없는 엘리트들이 대중의 비합리적 압력으로부터 벗어나 충분한 재량권을 가지고 실용적인 정책을 펼치는 것이야말로 공공선을 달성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 엘리트주의.
소련을 방문한 후, 그에게 소련은 미래의 의심스러운 이익을 위해 현재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세계였다.
그가 특히 문제로 삼았던 것은, 기존 제도들을 무너뜨리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생각하는 지적 안일이었다.
이미 정착된 사회적 합의를 자의적으로 변경하는 것은 삶의 불확실성만을 키울 뿐이며, 정치적 안정, 물질적 풍요, 지적 자유를 위협함으로써 공동체의 구성원들에 의한 윤리적 선의 추구도 방해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대학을 직장을 얻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곳 정도로 치부했지만, 하이예크는 이 공간을 마음이 끌리는 주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연구할 수 있는 방법과 기술을 연마하는 장소라고 생각했다. ☞ 배우는 사람의 태도는 이래야 하는 것이다.
그에게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것은 강의실이 아니라 동료 학생들과 함께 조직한 사적 연구회였다. ☞ 배움의 기회는 수업료와 상관없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라면 현존하는 곤궁을 인식하는 한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겠지만, 경제학을 연구하는 사람은 보수적인 관점을 가질 수 밖에 없다."
1930년대 중반 영국의 지적 지형은 한층 왼쪽으로 이동했다. 중도를 표방하며 계획의 이름으로 사회주의를 뒷문으로 끌어들이는 지적 흐름이었다.
1944년 발간된 <노예의 길>은 당시 옥스퍼드 대학생이었던 마거릿 로버츠의 손에 들어가 40년 후 세상을 바꾸는 결정적인 촉매가 되었다.
사회는 자연현상과 달리 법칙성이나 필연성과 같은 것이 없다고 보았으며, 개별적이고 특수한 역사현상의 연속으로 보았다.
2. 케인즈, 대공황으로부터 자본주의를 구출하다.
사람들이 사회주의에 이끌린 것은 유토피아로서의 매력 때문이었지만, 자본주의의 내재적 약점 또한 사람들을 사회주의로 내모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경제학에서는 국민경제 차원에서 상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문제가 되는 기이한 현상을 공황이라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팔리지 않은 상품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대공황으로 인해 미국에서 5천 개의 은행이 파산하고 9백만 명이 예금을 잃어버렸다. ☞ 당시 미국 인구는 1억 명 정도였다.
1929년 하이예크는 聯準의 확장적 통화정책이 호황을 인위적으로 연장시켜, 과잉자금이 증권과 부동산에 몰려 자산가격에 거품이 생겼다고 경고했다.
1928년 말 케인즈는 인플레이션이 없는데도 주식시장의 과열을 냉각시키려는 聯準이 불필요한 긴축정책이 경기만 냉각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다시 말해 케인즈와 하이예크는 원인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관점을 제시했지만 공황의 가능성을 경고했다.
"공급은 자신의 고유한 수요를 창출한다."는 세이의 법칙으로, 이후 경제이론의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대표적인 기준이 되었다.
일시적으로 물건이 팔리지 않더라도 조만간 가격의 자동조절기능으로 수요가 창출될 것이므로, 자유방임주의가 최선의 정책이 된다.
케인즈는 세이의 법칙을 부정하고, 공황은 유효수효의 부족 때문이라고 보았다.
하이예크는 신용이 발달한 경제에서는 호황과 불황이 잇달아 일어나는 경기변동이 일어나게 마련이라고 보았다.
신용, 투자, 이윤이 서로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호황과 불황이 번갈아 발생하게 마련이며, 호황은 불황의 씨앗을, 불황은 호황의 씨앗을 품고 있다.
허버트 후버는 공황을 자연이 준 선물이라며, 불이 저절로 진화될 때까지 기다릴 것을 고집했고, 결국 루즈벨트에게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
케인즈는 경제가 장기적 균형을 회복하는 힘이 있으므로, 정부의 개입이 필요없다는 고전학파, 하이예크, 슘페터 등의 생각에 비관적이었다.
"장기란 현재 사태에 대한 잘못된 지침이다. 장기에는 우리 모두 죽는다. 경제학자가 장기를 얘기하는 것은,,,사태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개별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최선의 선택이 전체의 차원에서는 사태를 악화시키는 상황을 구성의 모순이라고 한다.
구성의 모순이 일어나는 상황에서는 개별 주체들의 자발적인 선택으로부터 전체적으로 바람직한 결과가 도출되기를 기대하기가 매우 어렵다.
따라서 공황으로부터 경제를 구출하려면 구성의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운 제3의 경제주체인 정부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이예크는 계속해서 케인즈의 처방을 공격해, 동료이자 친구인 리오넬 로빈스로부터 다음과 같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연못에 빠진 취객에게 애초의 증상이 고열이었다는 이유로 담요를 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자유방임을 끝까지 고집한 것은 학자로서의 하이예크의 일생에서 가장 큰 실수였다."
3. 하이예크, 시장을 옹호하다.
애덤스미스에게 시장은 사회적 분업을 의미했다. 분업은 자연스럽게 잉여생산물을 발생시켜 다른 사람의 잉여생산물과 교환하게 되었다.
이 교환이 규칙적이고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장소가 바로 시장이다. 잉여생산물과 시장이 생겨나면 생산의 목적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공동체 내에서 생산의 목적이 자신과 사회의 생존에 있었다면, 이제는 보다 많은 이윤을 획득하는 것, 곧 돈벌이가 생산의 목적이 되기 때문이다.
시장 교환을 위한 생산은 생산자들에게는 기회이자 위험이 된다. 경쟁자보다 양질의 제품을 싸게 제공할 수 있다면 큰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시장 교환의 규모가 커질수록 경쟁에서 낙오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마련이고 이들은 생존 자체를 위협받게 되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이해관계가 개인의 노력에 달려 있는 한, 사람들은 더욱 열심히 오래 현명하게 일하게 되고, 이는 곧 생산의 증가로 이어진다.
따라서 국가의 부를 늘리고자 한다면, 경제활동의 더 많은 부분이 시장을 중심으로 운영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애덤스미스의 교훈이다.
한편 애덤스미스는 시장이 발달하려면 무엇보다도 사유재산권 및 경쟁원리를 철저하게 보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국가가 사유재산권과 경쟁원리만 철저하게 보장하고 나머지는 경제주체들에게 일임하면 가격기구가 보이지 않는 손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시장경제 또는 자본주의 경제를 인류가 발견한 최선의 경제 시스템이라고 보았다.
한편 애덤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의 전제조건으로 공감(sympathy)의 중요성도 함께 강조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되, 상대방의 처지에 놓이더라도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즉 반칙하지 말고, 규칙을 지키며 경쟁해야만 개인은 물론 사회 전체의 이익도 극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이예크는 현장에 있는 사람의 지식이 갖는 특징은 미세한 변화를 끊임없이 반영한다는 점에 있다고 보았다.
이 변화에 사회가 신속하게 적응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이 사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각 개인에게 문제의 해결을 맡기는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 제한적인 지식을 전제할 경우, 시장과 계획경제의 성과는 크게 다를 수 밖에 없다.
계획경제에서는 우유는 몇천 톤, 신발은 몇만 켤레를 생산하라는 중앙당국의 지시에 따라 생산이 실행된다.
같은 신발이라도 질과 취향이라는 점에서 천차만별이므로 '최근 유행하는 젊은이들이 좋아할 신발을 생산하라.'고 명령을 내릴 수는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생산자와 소비자들은 정해진 가격에 기계적으로만 반응하므로, 개인의 창의에서 비롯되는 효율성을 결코 기대할 수 없다.
시장경제의 존재 이유는 경제를 한층 풍요롭게 해주는 지식들을 발굴하고 교환하며 사회 전체로 확산시켜가는데 있다.
그에게 시장은 개인들로 하여금 자유와 정의를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해주는 공간이다.
제한된 지식만을 가지며 비합리적일 뿐 아니라 오류에 빠지기도 쉬운 개인들이 모여서 만들었는데도 질서가 있는 공간이 바로 시장이다.
시장의 자생적 질서를 계획이나 정책을 통해 바꾸려는 것은 인간의 치명적 오만으로, 사태를 오히려 악화시킬 뿐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경쟁이란 무엇이 가장 우수하고 가장 저렴한가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를 만들어 내 새로운 가능성과 기회를 알린다.
그는 시장을 가능한 한 순수한 형태로 유지시켜야 하며, 사회의 보다 많은 영역이 시장에 의해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가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이유는 가격기구가 갖는 정보전달 수단으로서의 경제성, 자원배분의 적합성과 효율성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게임의 결과를 바꾸려 한다거나 결과의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비도덕적이며 정의에 어긋나게 된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시장의 결과를 분배의 정의라는 이름으로 수정하는 것은 이익집단에 이용되는 결과만을 가져올 뿐이다.
그의 견해는 시장에 대한 일급의 옹호이며, 시장은 좋은 것이라는 선험적 가치판단 위에 이상적인 모습만 제시하고 있어 시야가 편협하다.
이상적 시장을 상정하고, 일치하지 않으면 '자유로부터의 일탈' 또는 '노예의 길'이라 주장하는 것은 현실의 시장을 포착하겠다는 의도와 다르다.
4. 케인즈, 시장의 문제점을 지적하다.
19세기 자유방임주의자들의 시장옹호론은 자유방임 시장을 비현실적인 가정 위에서 정당화하는 방법론 자체가 잘못되었다.
하이예크의 이론은 현실의 시장이 아닌 이상화된 가상의 시장을 설정해놓고 그 우월성을 주장했다. 이는 비현실적이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케인즈는 개인의 경제적 자유를 억압한 소련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경제적 자유가 일종의 천부인권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경제적 자유를 존중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사회를 유지하고 공공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제한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사유재산권에 대해서도 일정한 제한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특히 문제를 삼은 것은 부의 세습이었다.
보수당이 지향하는 개인주의적 자본주의가 봉건주의의 운영원리, 특히 세습제를 그대로 답습한다는 점에서 치명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능력에 따른 분배라는 시장경제의 원칙이 준수되고, 동시에 자본주의의 역동성이 함께 지속되려면, 고율의 상속세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었다.
개인의 경제적 자유는 신성불가침의 절대적 권리가 아니며, 사회적 가치와의 조화를 위해 때와 장소에 따라 제한될 수 있는 상대적인 개념이었다.
무엇보다도 시장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대등한 힘을 가지고 만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의 시방에서 생산자와 소비자는 비대칭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그리고 경제적 조정에는 긴 시간이 소요되며, 경제주체들의 의사결정 과정에서는 무지가 지식을 압도하고, 독점과 결탁이 존재한다. 이런 조건들은 모두 교섭의 평등성을 훼손시키는 조건들이다." - <자유방임주의의 종언>.
능력,기회,교섭력에 차이가 있는 거래 당사자들에게 경제적 자유라는 미명 아래 거래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맡기는 것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았다.
교섭력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 당사자들 간의 거래에서는 결과의 우발성을 기대할 수 없다. ☞ 결과의 우발성은 사람들의 참여율을 대폭 높이는 요인이다.
시장참여자들의 불평등한 관계가 유독 두드러지는 곳은 노동시장이다.
생산수단과 자본을 통제하는 자본가는 교섭력의 불균형을 이용해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를 통제할 뿐 아니라 노동자가 생산에 기여한 것에 비해 적은 임금을 지불할 수 있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생각이었다. ☞ 케인즈는 임금착취론엔 동의하진 않았지만, 힘의 불균형을 줄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인정했다.
케인즈에게 경제적 자유란 정치적 자유의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결코 아니었다.
"이리 떼의 자유가 양 떼에게는 죽음을 뜻하는 경우가 흔하다." 대등하지 않은 경제주체들 사이의 자유경쟁은 약육강식의 정글과 다를 바 없다.
경제적 자유의 이름으로 약육강식의 무제한적 경쟁이 옹호되는 세상은 승자의 탐욕과 패자의 굶주림으로 양극화된다.
실질적 자유를 실현하는 수단에 불과한 경제적 자유가 목적으로 변질되면, 수익성 논리가 사회를 지배하여 실질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가 훼손된다.
인간의 가능성과 존엄성을 실현하려면, 즉 실질적 자유를 수호하려면 주거권, 건강권, 노동권 등을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
불확실성이란 의사결정에 필요한 지식이나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한 상황을 의미한다. 특히 자본주의적 생산이 확대될수록 불확실성은 커진다.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상황, 곧 진정한 지식과 정보를 갖지 못한 상태에서는 기대에 의존해 행동할 수 밖에 없는데, 기대의 토대는 대단히 취약하며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
탐욕,무지,공포,모방과 같은 인간본성은 생각보다 강하므로, 불확실성이라는 조건과 결합할 경우 균형을 향한 시장의 자동조정 기능을 교란시킨다.
미인선발대회에서 심사위원들은 자신이 미인이라고 생각하는 후보에게 투표하기보다는 다수가 누구를 선택할까를 염두에 두고 투표하게 된다.
주식을 사고파는 사람들 또한 기업의 내재가치를 따지기보다는 어떤 주식이 다른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을지를 가늠하는데 시간과 재능을 쏟기 때문에, 결국 주가는 평균적 의견에 대한 다수결로 결정된다. ☞ 주가는 단기적으로는 인기투표 계수기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체중계이다.
자본가의 투자결정이 주가에 의해 인도되는 것은 국민경제의 번영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케인즈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강점을 효율성과 높은 생산성에서 찾았다. → 반면 하이예크는 시장의 본질을 개인의 경제적,정치적 자유의 보장에서 찾았다.
그에게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경제적 효율의 측면에서는 가장 우월한 체제이지만, 개인들의 금전욕에 편승하고 이를 조장한다는 점에서 도덕적으로는 극히 불쾌한 사회였다. '사이비 도덕률과 경제적 효율성의 딜레마'에 직면한 사회, 이것이 케인즈의 눈에 비친 자본주의 사회였다.
"신축적 임금정책은 급격하고 대폭적이며 전반적인 변화를 행정명령으로 시행할 수 있는 고도로 권위적인 사회에서만 성공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
<일반이론>에서 임금의 경직성에 대한 태도는 케인즈가 임금이나 노동조건을 비경제적인 변수로, 곧 하나의 제도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이예크는 시장의 자생적 질서론을 주장했지만, 칼 폴라니는 시장은 오히려 국가의 폭력적 개입을 통해 출현한 것이라 주장했다.
"자유방임은 계획된 것이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노동,토지,화폐가 국가에 의해 상품화되는 거대한 변환 속에서 출현했다." - 칼 폴라니.
시장사회의 출현은 결코 자생적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국가의 강력한 개입과 경제적 자유주의 이념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품화 과정은 인간의 사회적 생활을 시장의 변덕에 종속시키며, 마침내는 인류의 생존 그 자체를 위협하기에 이른다.
5.『노예의 길』논쟁
1944년 하이예크는 중앙 계획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의 내용을 담은 <노예의 길>을 발표했다.
케인즈는 하이예크와 달리 이념에 그렇게 집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상황에 따라 견해를 바꾸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가격과 생산> 케인즈의 서평, "이 책은 철저한 이론가가 오류에서 출발했을 때 어떻게 정신병원 입원으로 끝나는가를 보여주는 보기 드문 사례"
그는 교조주의를 반대하고 현실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구체적 처방을 제시하려는 실용적 입장을 나이가 들어서도 변함없이 추구했다.
"세상은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개인주의와 연결되어 있는 실업을 더 이상 인내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문제에 대한 올바른 분석을 통해 효율과 자유를 보존하되 질병은 치유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 그는 하이예크가 치국보다는 이념을 앞세운다고 비판했다.
불황을 막을 수 있는 정책적 처방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유주의적 가치에 대한 환멸이 생겨났다고 보았다.
"계획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정신이 사회구성원들의 도덕적 입장에 부합된다면 온건한 계획은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생각과 감정이 올바른 공동체에서는 위험해 보이는 행동도 안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대공황이 없었다면 히틀러의 집권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자유주의에 대한 환멸을 낳은 것은 하이예크가 속한 무능한 자유주의 그 자체였다.
"경제학자들이 유틍한 치과의사처럼 겸손하게 처신할 수 있다면 참으로 보기 좋을 것이다." → 하이예크에게 자본주의를 넘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시장을 넘는 어떠한 선한 삶에 대한 지식도 의미가 없었던 반면, 케인즈에게 자본주의란 끊임없는 도덕적 갱신의 대상이었다.
법의 지배가 진정으로 의미를 가지려면, 기득권층의 진지한 자기성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6. 자유방임경제에서 혼합경제로
적절히 제어되지 않는 무한경쟁은 인간을 승자의 탐욕과 패자의 불안으로 가득한 약육강식의 정글로 몰아넣는다.
나아가 수단이 목적을 지배하는 반윤리적 사회를 낳는다.
이런 사회에서 사적 이익과 사회적 이익이 조화를 이루며, 개인의 자유를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꿈이 된다.
"시장경제 최대의 경제적 해악은 위험, 불확실성, 무지이다. 특정한 개인들과 거대기업이 불확실성과 무지를 이용해 이익을 얻고, 그 결과 극단적인 부의 불평등이 생기기 때문이다." → 세기 말의 자본주의는 자유방임주의가 지배하는 가운데 대공황을 경험했다.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려면 시장의 폭력에 대한 규율과 개인의 진정한 자아실현을 위한 상호협력과 합의를 이끌어 낼 여러 제도가 도입되어야 한다.
특히 정부의 공공지출이 사회보장(의료,교육,인프라)에 사용됨으로써 시장경제의 불가피한 속성인 빈부격차를 완화하고 사회통합에도 기여할 수 있다.
1950년 하이예크는 LSE를 떠나 자유시장주의의 본산인 시카고 대학으로 거처를 옮겼다.
1974년 스웨덴 왕립 아카데미는 군나르 뮈르달과 하이예크를 그 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결정했다. → 스웨덴 사회 민주주의의 상징적 인물이자 저명한 케인즈주의자였던 뮈르달을 염두에 둔 것이었지만, 자국 이기주의라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보수적인 인물을 공동 수상자로 선택함으로써 균형을 맞추려 했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진실이야 어떻든, 왕립 아카데미의 선택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 時代錯誤的인 낡은 유물이었던 하이예크를 다시 무대의 중앙에 세웠을 뿐 아니라, 경제학의 지적인 무게중심을 자유시장에 대한 신뢰로 옮기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후 지적 헤게모니는 고전적, 경제적 자유주의 쪽으로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으며, 대처와 레이건의 집권과 함께 세상은 새로운 자유주의의 원리를 중심으로 새롭게 조직되기 시작했다.
하이예크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객관적으로 조명하기보다는, 자유방임 자본주의를 정당화하고 옹호하는 것 자체에 목표를 둔 이데올로그였다.
그는 평생동안 선과 악의 이분법을 버리지 않았던 극단주의자였다.
금산분리 정책 - 산업은 사업을 확장하고, 금융은 산업을 배후에서 돕되 그 결정이 옳은지에 대해 견제하고 감시하는 것이 시장원리에 부합된다.
인간의 두뇌는 자신보다 덜 복잡한 질서의 작용만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대상을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원리의 설명이나 패턴의 인식만이 가능할 뿐이다.
7. 케인즈주의의 위기와 신자유주의의 출현
전후 케인즈주의를 바탕으로 했던 황금시대도 영원히 지속되지는 못했다. 근본적 원인은 자본의 수익성, 곧 이윤의 하락이라고 할 수 있다.
황금시대 내내 상승하던 이윤율이 1960년대 말을 분기점으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흔히 세 가지 요인으로 지적된다.
1) 임금이 노동생산성 증가율보다 더 빠르게 상승하면서 자본이 가져갈 이윤의 몫이 줄기 시작했다. → 노동조합의 교섭력이 커졌기 때문이다.
2) 노동생산성의 상승폭이 둔화되기 시작한 것도 이윤율 하락을 가져온 중요한 요인이었다. → 포드주의, 테일러주의가 한계에 이르렀다.
3) 기업간 경쟁격화에 따른 과잉투자도 이윤율을 떨어뜨렸다. → 과잉투자는 과잉설비를 초래했다.
생산성은 하락하는데 임금은 유지됨에 따라 황금시대를 가능케 했던 高생산성 - 高임금 - 高이윤 - 高구매력의 선순환 고리에 균열이 일어났다.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났다. 기존 케인즈주의 경제학의 이론체계로는 인플레이션이 심화되는 가운데 불황이 지속되는 새로운 현상을 설명할 수 없었고, 이것은 케인즈주의 경제학을 몰락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 이러한 상황에서 케인즈주의 경제학에 대한 반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 반격의 중심은 프리드먼이 이끌던 시카고 대학이었는데, 하이에크도 여기에 몸담고 있었다.
이들은 케인즈주의에 기초한 방만한 재정운영과 통화공급의 남발이 인플레이션의 주범이라고 공격의 날을 세웠다.
하이예크는 세계적으로 격화되는 스태그플레이션 속에서 시장질서의 불가피한 파국을 보았고, 그 원인을 케인즈의 처방에서 찾았다.
"오늘날 인플레이션의 책임은 유감스럽게도 전적으로 케인즈의 학설을 무비판적으로 따른 경제학자들에게 있다. 우리는 케인즈의 경제학적 귀결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특히 그는 1970년대 들어 본격화한 영국병의 원인도 케인즈의 오류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완전고용은 정부의 책임이라는 전후 케인즈주의적 이데올로기가 高실업과 高인플레이션의 악순환을 가져왔다고 믿었다.
정부의 확장적 거시정책에 의한 고용유지 정책은 노동조합의 과도한 임금인상 요구를 부추겨 영국경제의 쇠퇴라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1973년 유가충격은 스태그플레이션 기조를 더욱 강화했고, 1976년 영국은 결국 IMF의 긴급구제금융을 받아야 하는 처지로까지 내몰렸다.
1979년 영국 국민은 보수당을 선택했고, 마거릿 대처는 고비용 저효율의 영국병 치료에 나서게 된다. → 그녀는 하이예크의 처방을 선택했다.
하이예크의 처방전은 크게 완전고용정책의 폐기, 디플레이션 요법, 노사관계 개혁, 공기업 민영화로 요약할 수 있다.
정부의 완전고용정책을 포기하고, 고용이 정치논리가 아닌 시장원리에 의해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악순환으로부터 해방되려면 인플레이션 체질을 개선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대대적인 긴축통화정책에 의한 일시적인 충격이 불가피하다고 믿었다.
디플레이션을 감수해서라도 사람들의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를 꺾어 임금이 노동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되도록 하고, 총수요 관리정책을 포기하고 대신 통화가치의 안정과 시장 메커니즘의 회복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노조의 특권을 박탈하고, 단체교섭 제도를 등에 업고 이루어지던 정치적 소득결정과정을 깨뜨리자는 것도 이때 제시된 처방전의 하나였다.
결국 대처 정권은 공공부문의 차입 억제, 공공지출의 삭감, 통화량 축소라는 형태로 디플레이션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을 잡는 데는 성공했지만, 하이예크의 기대와는 달리 고용은 늘지 못했고 경기후퇴는 오히려 심화되었다.
하이예크의 세계에서는 실업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실업 그 자체가 문제해결의 일부가 되는 역설이 일어난다.
처방의 진자 목표는 실업을 줄이고 고용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실업을 늘려 노동조합이라는 최대의 압력집단을 무력화시키는 데에 있었다.
이후 영국사회는 정책결정의 메커니즘과 경제적 질서가 자본 쪽으로 선회했고, 이 과정에서 시민사회가 확보했던 권리들도 크게 줄어들었다.
군나르 뮈르달은 자신의 조국인 스웨덴이야말로 하이예크의 이론이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생생한 사례라고 주장했다.
스웨덴은 하이예크의 시각으로 보자면 영국보다 훨씬 더 분배에 치중하는 복지국가였고, 노사정 삼자의 타협에 의해 인플레이션 억제와 완전고용 유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사회 민주주의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의 비효율이나 전체주의의 출현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포드주의의 위기, 스태그플레이션의 등장, 케인즈주의의 종언과 더불어 새로운 시대정신이 출현한다.
하이예크가 촉발하고 그의 동료 및 제자들에 의해 구체화된 신자유주의가 그것이다.
하이예크는 자신이 제안하는 자유주의가 19세기의 고전적 자유주의(old liberalism)는 물론 케인즈의 새 자유주의(new liberalism)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신자유주의(neo liberalism)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때 그가 특히 강조한 것은 경제적 자유의 중요성과 더불어 법의 지배에 의거한 경제정책이었다.
정부의 경제적 개입은 시장 메커니즘이 원활히 기능하도록 일반적인 테두리를 설정하는 것으로 제한되어야 하며, 특정의 목적을 위한 서비스(복지정책, 사회보장제도)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메시지는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각종 개입을 철회하는 것이었다.
특히 금융시장 및 노동시장에 대한 규제의 철폐가 강조되었다. 정부가 이자율의 상한선을 제한하던 기존의 관행을 철폐하고, 자본의 자유로운 국제적 이동을 보장하며, 기업이 고용,해고,임금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자본이동에 대한 규제철폐의 일차적 이유는 기업의 수익성 회복을 겨냥한 것이었지만, 이 과정에서 정부가 경제를 통제할 수 있었던 토대를 없앤다는 부수적 성과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자본이 자유롭게 외국으로 빠져나갈 수 있게 됨에 따라 대규모 재정적자를 운영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게 되었다.
재정적자가 누적될 경우 정부는 이자부담과 원금상환을 위해 돈을 찍어 내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국내의 자본이 한꺼번에 외국으로 빠져나가 국민경제를 곤경에 빠뜨리게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통화관리를 잘못할 경우에는 외환위기라는 혹독한 징벌을 겪게 된다.
197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이념은 작은 정부론, 복지국가 축소론, 세율 인하론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 by 마틴 펠드스타인. 하버드 교수. 1970년대 초.
첫댓글 한권의 책을 읽는듯하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