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라다 뻥이다 라고 하기에는 당시의 군편제는 치밀합니다.
서양의 편재와 다르게 동양편제는 상당히 체계화 되었는데
몇천년간의 전투에서 다듬어진 거죠.
또한 당시 삼국시대의 군편제에 대해서는 수당군편제보다 5호 16국의 군편재와 연관이 있는가에 대한 연구가 진행중입니다.
수당군 편재는 당시로서는 최고의 선진 편제라는 가정하에서 보는거죠.
만일 학교교사가 수나라 100만이 뻥이라고 하시는 분이시라면 그분은 아마 군편재사를 제대로 공부안한 분이라고 할수 있죠.
사학쪽에서 국사교사나 세계사 교사가 제대로 공부안하고 아무렇게나 생각나는데로 이야기 하면 밑에 제자들은 그것을 스스럼없이 진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나중에 이런 토론방에서 엄청나게 감정싸움이 되는 원인이 되죠.
참고자료로 보시기 바랍니다.
기본적으로 군대 기초는 군 軍이라는 개념으로 존재를 합니다.
지금의 군단 개념 또는 규모가 큰 사단개념입니다.
상장(上將)과 아장(亞將)을 각각 1명씩 두고
군은 전투병인 보병 4개 단과 기병 4개 단
보급대인 치중대 4개 단으로 편성되었습니다.
단團의 구성 隊를 기준으로 하고 기병인 경우 10대가 1단이 되고
1개 대는 100명씩이다. 따라서 1단은 10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다.
보병인 경우 20대가 1단이 되고 1개대는 100명씩이다.
따라서 1단은 20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된다.
1개 군은 보병 8000, 기병 4000 보급대 8000 으로 대략 2만병의 수로 구성되었으며
전투원대 비전부원 비율은 1.5:1 의 비율입니다.
각 부대는 군>단>대 개념으로 나뉘어 지며 기본적으로 지방 단위별로 소대가 결성되기도 합니다.
또한
기본적인 군편재는 4:4:4 즉 12단이 기본적인 편제이기는 하나
당나라의 인 경우 4:8:4 즉 16단이 기본 편제라고 하는 학자도 있어
18단이나 24단인 경우도 있지 않는가 하는 추측도 있습니다.
물론 군이 소모되어 부대가 소실되지 않고 명맥만 이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 다시 원래 군이 속한 지역에 돌아가지 않는한 보충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이러한 경우는 1년이상의 계속적인 전투가 벌어지는 것이지 출군할때의 군 사 수는 기초적인 전량을 채우는 것이 원칙으로 합니다.
당시 문헌상으로 군은 징집병으로써 3년 임관이 기본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즉 지금 한국의 군대처럼 징집되는경우로 보시면 됩니다. 기본적으로 비전시시 3년임관에 순환근무이고 전시시에는 순환근무보다 결원 충원개념으로 바뀌게 됩니다만 어떤식으로 유지되고 운영되는지는 아직 국내의 연구가 심화되지는 않은 편입니다.
당나라 좌우군은 24개군 으로 편성이 되어 일반 군의 편재로 따지면 48만병정도가 출진했다고 보며
이들 군단 뒤에 어영군이 있어 어영(御營) 안에 12위(衛)·3대(臺)·5성(省)·9시(寺)를 합쳐서 나누어 소속시켜서 어영군이 존재했으며
뒤에 후군으로 6군 즉 12만을 어영을 보호하는 후군으로 출발 시켰다고 봅니다.
즉 총 개별 30군 60만에 어영군 20만명 정도로 구성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며 나머지는 탁군이라는 기지나 점령한 전진기지나 적영지에 주둔하는 주둔병이지 않았는가 합니다.
단 어영군에 편제에 대해서는 저도 깊이 공부안해서 어떤 구조로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고 정확히 몇명인지 애매합니다. 또한 어영군과 후군이 같은 병인지 독립적인 병인지에 대해서도 확신은 없습니다.
그러나 보통 114만군이라는 수에 대해서는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보통 중국에서 천단위 이하로 군수를 명시하는 경우는 대체로 정확하게 체크를 했다고 보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탁군에 모인 군수는 총 114만인 것은 명확하고 고구려 국경을 넘은 군수는 정확히 114만 대군인지 명확하지 않으며
추가적으로 보급과 식량을 운반하는 운반치들은 그의 두배인 200만병이 넘었다고 하니
기본적으로 려수전쟁 2차전은 수나라는 기본적으로 300만병이상이 동원된 대규모 전투였다고 봅니다.
또한 당시 수당군은 보병이 특별히 궁,검,창,월 의 병과개념으로 독립적이지 않고 혼용개념이 아닐까 판단이 됩니다.
수군의 개념은 당군의 개념과 약간은 틀리나 당군의 기마 보병의 개념은 약 1:3의 개념 수군은 1:2 의 개념이지 않는가 추측을 합니다.
그리고 위촉오의 삼국의 100만이 뻥이다 라고 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으나 당시 삼국의 인구수와 명나라 인구수와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추측입니다. 물론 한나라, 당나라의 폭발적인 인구증가보다는 못하지 만 말입니다.
또한 고구려의 예를 들어서 고구려의 수가 이정도이기 때문에 당시 당나라나 수나라 수도 이정도일것이라고 추측하는 분들도 계시는데 고구려의 영토는 비록 백제의 5배이상이 되나 인구는 씨익~
대충 말안해도 아실듯합니다.
밑에 자료는 역사제작모임에서 퍼온자료이고 여기서 불가사리 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시는 분의 자료입니다.
참고자료로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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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고(고구려)수 전쟁에서의 수나라군 편성도 (요악)
수문제의 5남인 한왕(漢王) 양량(楊諒)과 왕세적(王世積)을 행군원수로 임명하고
그 아래에 야전 지휘관 50여명을 행군총관으로 배치한 수륙군 30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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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고(고구려)수 전쟁에서의 수나라 24군 편성도
<...중략>
610년에 총동원령을 내려 고구려 원정군을 탁군에 집결시키도록 하였다.
한편 대릉하 이서 지역의 노하진과 요하 이서 지역의 회원진에는
원정기간 동안 소요될 군량을 집적시키고
부유층 백성들에게 전마(戰馬)를 상납하도록 징발령을 내려 출전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고 이듬해(611) 2월부터는 양제 자신이 탁군으로 이동하여
전쟁 준비상황을 직접 감독하면서 결전태세를 강화하였다.
이어서 양제는 유쥬총관 원홍사(元弘嗣)를 산동반도의 동래에 파견하여
해안에서 전선 3백천을 신속히 건조하도록 명령하고,
양자강과 회하 이남 지역에서 수병 1만명과 노수(弩手) 3만명을,
영남(광동,광서)지방에서는 배찬수(단창병) 3만명을 차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하남, 회남, 강남 지역에서는 융거(戎車:전차) 5만량을 제작하여
하북 고양에서 천막 등을 싣고 탁군(북경 근처)으로 집결하도록 명령하였다.
7월에는 다시 양자강 회하 이남 지역의 인부와 선박을 동원하여
여양(하남 준현)과 낙구(산동 제남) 지역에 보관중인 군량을 탁군으로 이송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612년 1월에 이르기까지 탁군 일대에 집결한 총병력수는
113만 3800명으로서 대내외에 '2백만 대군'이라고 선전하였다.
이들은 각 군을 전투 기본 단위로 하여 편성되었는데,
군의 예하에는 전투부대로서 보병 4개 단(8천명)과 기병 4개 단 (4천명) 이외에
치중대 4개 단(8천명)으로 편성되었다.
따라서, 군의 총사령관인 대장은 2만여 명의 군사를 지휘하였다.
한편, 각군에는 적의 항복을 접수할 수항사자 각 1명씩이 별도로 배치되었는데,
이들은 소속 군의 최고지휘관인 대장의 통제도 받지 않고
오직 황제의 명에 의하여 투항자를 위무하는 독자적인 임무를 띠고 있었다.
이와 같이 독특한 체제를 갖춘 군은 좌우군 각각 12군씩 모두 24군이 편성되었다.
그리고, 각 군은 고유한 진군로를 부여받고 있었는데,
각 제대별 편성과 진군로 및 지휘관계는 다음과 같다.
<...중략>
수나라군은 철군할 때 제3차 침공을 염두해두고
무려라성에 일부 병력을 잔류시켜 전진기지로 삼고자 함.
무려라성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요동군을 둠.
군사조직으론 통정진을 설치하여 군정을 실시
수양제는 좌둔위 대장군 토만서로 하여금 좌군 제4군을 거느리고
요동군과 통정진을 수비하면서 고구려 침공을 준비하도록 조치함.
여양, 낙구, 태원 등지에 비축되어 있던 군량을
요서지역의 망해돈(금주 근교)일대로 이송하도록 하였다.
또, 섭좌무위 장군 번자개를 탁군의 유수로 임명하여
우군 제5군을 거느리고 전쟁준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612년 9월, 2차 침공에 참전한 주요 장수들의 패전 책임을 물어
그들의 관직을 삭탈하고 서민으로 강등시킨다.
특히 우중문의 진중에 찾아온 을지문덕을 생포하려던 것을 만류했던
위무사 유사룡(劉士龍)은 참형에 처했다.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와중에, 3차 침공을 서두른 수양제는
613년 정월에 조서를 내려 전국의 정병 30여만명을 탁군으로 소집시키고
요동에 고성(古城)을 수축하여 이곳에 군량을 이송하도록 지시하였다.
자신의 출정기간 동안 태자 양유(楊侑)에게 황제를 대리하여 국정을 처리하도록 하고,
형부상서 위현에게 태자를 보좌하도록 시킨다.
또, 삭탈관직했던 우문술 등의 죄를 사면하고
그들을 재기용하면서 동시에 군사 지휘권을 다시 부여한다
좌광록대부 곽영(郭榮)과 태사령 유질(庾質)이
3차 원정을 친정하는 것을 극력 반대하나 수양제는 이를 외면한 채
친정의지를 거듭 천명한다.
613년 3월, 예부상서 양현감(楊玄感)에게
여양을 거쳐 탁군에 이르는 영제거 운하를 이용하여 군량을 수송하도록 시킨다.
4월 3차 침공이 시작된다.
주공부대는 우문술과 양의신의 지휘하에 유성-의현-회원진을 거쳐
요하를 건너 요동성으로 진출하였다.
선두부대인 전군 왕인공부대는 수군의 주공부대가 요동성에 이르러
포위태세를 갖추기 시작할 무렵인 5월 중순에 요하의 지류인 훈하 서안을 따라 동북진하여
고구려의 신성을 공략할 태세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중략>
첫댓글 고맙습니다 지영님.
썩을~ 본명을 밝히다니 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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