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사람이 한 세상을 살면서 이름을 남기기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그것도 대의를 위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기란 쉽지 않다. 특히 한 시대를 이끌고 나가던 지식인들에게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역사 격변기에 가장 나약한 사람들이 바로 지식인들이다. 그래서 지식인들 가운데 변절자들이 많이 나오는 모양이다. 그런 반면에 지식인이 의지적 용단과 행동을 보였을 때, 그 파급효과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지식인들에게는 세속적인 욕망을 탐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는 행동양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특히 일반인들이 암흑의 세계에서 갈 길을 못 찾고 헤매는 시기에는 더욱 절실한 것이 바로 이러한 지식인들의 지조이다. 비정상적인 시대일수록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는 막중한데, 그것은 지식인의 행동과 말 하나하나가 사회적 여론의 풍향을 가르는 나침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과연 나도 허명뿐인 지식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를 반문해 보며, 암울한 시기를 살다간 한 지식인의 지조있는 모습을 『청구일기(靑邱日記)(이하 일기)』라는 자료를 통해 엿보고자 한다.
일기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이 일기는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1842~1910)라는 유학자가 대한제국이 일제의 강압에 의해 멸망한 뒤, 24일간 전개했던 단식 순국의 과정을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기록한 것이다.
이만도의 자는 관필(觀必)이고, 호는 향산(響山)으로 예안(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퇴계 이황의 11세손으로 조선말기의 학자이자 청렴한 관리였으며, 안동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중의 한명이다. 그의 가문은 퇴계를 배출한 명가로서 영남사림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뒤에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계부(季父) 이휘철(李彙澈)이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출계하여 가업을 계승했다. 이러한 집안의 배경에도 불구하고 어릴 적의 모습은 그저 평범한 집의 아이처럼 기대만큼의 자질을 보이지 못했다고 한다. 이것이 오히려 자라면서 그에게는 자극제가 되어 학문에 남다른 열성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15세 때 부친이 과거에 급제한 것에 자극받아 자신도 입신양명을 통해 경륜을 펼치겠다는 결심을 하고 과거공부에 매진하였다. 그 결과 1866년(고종 3) 정시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었다가 병조좌랑에 제수되었다. 이어 사간원정언에 임명되고, 홍문관부수찬으로서 남학교수(南學敎授)를 겸하였다. 또한 대신(문신)으로서 선전관을 겸하기도 하였다. 이후 부교리·장령·지평·우통례(右通禮)·병조정랑·충청장시도사(忠淸掌試都事)·교리·응교·사간원 집의·중학교수(中學敎授) 등을 역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명성이 높았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 최익현(崔益鉉)이 반대 상소를 올리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한목소리로 공격을 하였다. 그때 집의로서 탄핵문의 문구가 사리에 맞지 않다고 없앴다가 대사헌의 미움을 받아 집의직을 삭탈 당하였다. 그 뒤 다시 복직되어, 사성·응교·장악정(掌樂正) 등을 역임하였다. 또 그 해 가을 양산군수에 제수되어 굶주리는 백성을 보살피고 탐관오리를 소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878년에는 다시 집의에 임명되어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882년 통정대부에 올라 곧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였으며, 다시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어수선한 세상을 등진 그는 백동(柏洞)에 작은 서재를 짓고, 경서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선성(현 예안)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또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의 매국죄를 통렬하게 공박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후 1907년 순종이 즉위한 뒤 가선대부에, 1910년 자헌대부에 승자되었다. 하지만 그 해 8월 일제에 의해 한국이 병탄되자 유서를 남긴 뒤 단식 24일 만에 순국하였다.
이만도의 일생은 불의와 타협하기를 거부한 충의(忠義)로 일관된 것이었다. 이러한 삶의 저변에는 기본적으로 그가 가학(家學)인 퇴계학(退溪學)을 토대로 형성한 현실인식과 대응자세가 자리 잡고 있었다. 거기에다 19세기 이후 정재학파(定齋學派) 사이에서 대두한 위정척사론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는 이를 제국주의의 침탈에 따른 민족적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시대적 요구에 그대로 투영했던 것이다. 이는 그의 현실에 대한 깊은 사유와 연계된 학문적 자세와 함께 앎(知)과 행동(行)을 일체화시킨 행동규범의 산물이었다. 그의 학문과 행동이 정체성을 지니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그의 영향을 직접받은 아들 이중업(李中業)과 며느리 김락(金洛)을 비롯해 손자 이동흠(李棟欽)·이종흠(李棕欽) 형제, 그리고 동생 이만규(李晩煃) 등이 모두 항일투쟁에 참가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그에게 배운 많은 제자들이 항일운동에 투신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일기에 담겨 있는 이야기들
이 일기는 그동안 이만도의 후손인 이동석씨가 보관하고 있던 것으로, 2002년에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되었다. 이것은 한문 필사본으로 되어 있으며, 크기는 가로 28㎝, 세로 19㎝이며 총 64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기의 제목은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만도가 24일간 단식으로 자정순국하였던 장소, 즉 ‘청구동(淸邱洞)’에서 유래한 것이다.
일제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도발하면서 한일의정서를 통해 소위 시정개선권(施政改善權)을 확보한 다음 시정개선의 1단계로 그 해 8월 한일협약을 늑결하고, 제2단계로 1905년 11월 이른바 을사조약을 강요하였다. 일제는 을사조약에 광무황제가 비준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기정사실인 양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여기에 이르자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 을사오적에 대한 원성이 자자하였다.
일제의 침략 야욕이 구체적으로 들어나고 있던 그때, 이만도는 종기(腫氣)로 고생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청구동의 큰집(만화공댁)에서 병을 치료하고 있던 중 그러한 사실을 접하고, 아들 중업을 시켜 상소로 항거하였다. 그 내용은 왜적을 물리치기에 앞서 을사오적을 처단하라는 것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고행의 길을 자초하였고, 일기의 시작이 바로 이러한 그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일기의 첫 면은 일월산 산중의 광덕(廣德)·모암(某岩)·명동(明洞)·사동(思洞)·고림(高林) 등의 산촌으로 들어가 남루한 옷으로 산채를 먹으며 죄인을 자처하며 유랑했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遂入日月山之明洞 通德郞公墓下以罪廢自處 惡衣惡食 居友不恒其所 流寓廣德 某岩思洞 高林…乙巳抗章以後 不復家居 棲息於廣德 某岩 明洞 高林等處). 특히 아버지 묘소가 있는 재산(才山)(경북 봉화) 묘막에 자주 머물며, 죄인의 고행을 닦았다. 일기에 의하면 집에 돌아오지 않고 5년에 걸쳐, 특히 1907년 7월 광무황제가 일제에 의해 퇴위당한 뒤 3년 동안은 유가에서는 보기 드문 고행수도의 길을 걸었다. 그것은 관직에 있던 사람으로 나라의 운명을 그르친 죄인의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러한 고행을 자초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1907년 8월(음)에는 일본군이 퇴계종택을 방화하여 소각하는 참상을 당하자 국가의 멸망이 눈앞에 다가온 듯하였다. 그때 최후의 결심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나라도 망하고 종택도 불탄 마당에 그는 갈 길이 자정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일기가 전해 주는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24일간의 단식 자정순국한 과정의 기록이다. 자정 순국에는 음독(飮毒)·도해(蹈海)·단식(斷食) 등의 방법이 있었고, 단식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수절단식이었다. 그런데 이만도는 모든 방문객을 만나 대화하면서 그런 가운데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단식을 고집한 독특한 행보를 보였다. 그는 아버지 묘소가 있는 재산에서 단식을 시작했으나, 이후 친족들의 요청으로 장소를 큰집으로 옮기게 된다. 이때부터 일련의 과정이 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때 비로소 이만도의 단식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를 아끼는 친지들은 함께 단식을 하며 뜻을 꺾고자 하였으나, 모두 부질없는 짓이 되었다. 이 자료에 의하면 그는 단식 기간동안 친구들과는 인생을 담론했고, 제자들에게는 경학을 강의했고, 자식들에게는 가전(家傳)교훈을 논했으며, 자신의 사후 장례 문제까지 유언했다. 그리고 부녀자들에게는 부녀자로서의 도리를, 어린 손자들에게는 유학 원리를 강의하였다. 특히 어린 손자들에게 1866년(병인) 자신이 급제한 후에 엄지손가락을 폈다는 입지(立志)의 생애를 전하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등 지식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방법을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심어 주었다.
여기서 지식인으로서의 그의 모습을 음미할 수 있는 대목을 소개하고자 한다. 당시 안동의 대표적 지식인이었던 그의 단식은 제자뿐만 아니라 친족, 그리고 이 지역의 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영향은 그가 자정순국 이후 안동지역에서 10여 명이 자정순국의 길을 걷게 하였고, 특히 가까운 친척인 이중언(李中彦)과 을미의병의 동료이자 제자였던 김도현(金道鉉)은 각각 단식과 도해 순국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의 자정순국의 여파가 이렇게 컸다면, 순국과정에서의 영향력이란 쉽게 집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단식 소식이 알려지자, 일제는 청구로 경찰을 보내 강제로 미음을 먹이려 하였다. 그때까지 혼수상태였던 이만도는 “누가 감히 나를 설유하고 나를 협박하려 하느냐”고 호령을 해서 자제들까지 감탄케 하였다(…日人曰 精神在時雖勤必不食 而今旣無精神 則侍者何不進飮食乎 速取米飮來吾當用强制以飮食之 先生卽起勵聲曰 吾欲以吾命自盡矣…連聲大呼 日人遂惶遽閉戶以避之曰 吳輩此行非吾輩之心也 乃是承上部命說諭也 先生又連聲呼曰 我是堂堂朝鮮正二品官也 何漢敢說諭我 何漢敢恐脅我也 汝是何漢也 汝是何漢也…). 이 일이 있은 3일 후, 단식은 끝을 맺었고, 일기도 더 이상 쓰여지지 않았다.
이만도가 자정순국한 청구동에는 해방 후 정인보(鄭寅普)가 글을 쓰고, 김구(金九)가 글씨를 쓴 ‘향산이선생순국유허비(響山李先生殉國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일기가 우리에게 남기는 것들..
이 일기를 통해 우리는 세 가지 정도의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죽음이 가르쳐 준 교훈의 생명력이다. 사형수처럼 타의에 의하여 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죽으면서 손잡고 타이르는 교훈의 효과는 어느 교훈에도 비길 수 없는 효력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그의 자진이 임박할 무렵 삼종질이며 함께 을미의병을 일으켰던 이중언이 역시 단식에 들어가 27일 만인 10월 4일에 순국하였다. 그리고 이만도가 낙향한 후에 백동서당에서 가르친 문도만 해도 적지 않았는데, 그가 단식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문인들은 모두 문후 인사를 왔는데, 그 자리에서 마지막 얻은 교훈이 어느 경서보다도 감명 깊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문인 가운데 적어도 친일파는 없었던 것도 다 이러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두 번째, 자진의 방법이 단식이었다는 점에 남다른 의미가 있다. 을사조약 이래 자정순국한 사람은 많았지만, 그 방법은 거의 음독 자결이었다. 그런데 이만도는 고행의 단식을 선택하였다. 거기에는 24일간의 고통이 따랐다. 그것도 누워서 일체 사람을 만나지 않는 수절 단식이 아니라, 일일이 방문객을 맞이하여 학문과 인생을 논하며 단식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단식투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계기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일제에 항거하고, 나아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또한 21일에는 천전에서 온 사람에게 신학교(협동학교)에 대한 우려도 남기는 등, 당시를 살아가던 유학자로서 또한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세 번째,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유림이나 당대 지식인의 양심적 향방을 보면 의병으로 항쟁하거나, 망명하여 지조를 지키며 독립운동을 하거나, 자정의 길을 택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양심이 추구하는 방편의 차이였으므로 서로 엄격히 구분할 것은 아니다. 거기에서 이만도는 거의항쟁과 자정의 길을 추구하였다. 그것으로써 한국인의 양심 또는 민족지성을 지키고 선양했다는 데에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는 구시대의 생각과 삶 그리고 구시대 방식의 자정으로 새 시대 독립운동의 길을 닦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자정 순국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지식인들의 삶의 목적과 행동양식의 범주를 설정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렵고 힘들 때, 바로선 지식인의 양심과 행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심상훈, 한국국학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