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초기 기독교의 계급적 기반
20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역사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은 형성기의 기독교는 사회 취약계층의 운동이었다는 데에, 즉 로마의 노예와 빈곤한 대중들의 도피처였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 했다. 이 견해의 초기 주창자였던 프레드릭 엥겔스에 의하면 “기독교는 원래 억압받는 민중의 운동이었다. 기독교는 노예와 해방된 노예,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빈민층, 로마에 의해 예속되거나 흩어진 민족들의 종교로 처음 그 모습을 드러냈다”(마르크스와 엥겔스 1967: 316). 이런 견해가 처음에 지배적인 정설이 된 것은 독일 학자들 사이에서였다. 신약 학자들은 이 견해의 계승자로 다이스만을 지목하며, 그에 비해 사회학자들은 실상 모든 종교 운동은 ‘하층민’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편 트뢸취를 계승자로 본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같은 시기 독일의 카우츠키를 지목한다. 카우츠키는 엥겔스의 관점을 유리하게 확장하여 기독교가 프롤레타리ㅣ아 운동이었으며 잠시나마 진정한 공산주의를 실현했다고까지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많은 학자들은 초기 기독교인의 사회적 출신 배경에 관한 이런 개념화의 근거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쓴 첫 서신을 자신 있게 지목한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믿음으로 부름 받은 사람 가운데 지혜롭고 권세 있고, 신분이 고귀한 사람이 많지 않다고 썼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기독교인의 출신 배경에 관한 이 견해에 도전장을 내미는 이가 없었다. 저명한 예일대학교의 역사학자 어윈 R. 구디너프는 널리 채택된 대학 교재에 이렇게 기술했다. “로마인이 기독교를 마땅치 않은 눈으로 바라봤음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은 개종자의 압도적인 다수가 사회 최하위 계층이었다는 사실이다. 예나 지금이나 지배계급은 사회의 하층민과 노예를 공고한 비밀 조직으로 규합하는 이런 운동을 우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1931:37).
그러나 최근 수십 년간 신약 역사학자들 가운데 초기 기독교 운동의 사회적 기반에 대한 이런 개념화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E. A. 저지는 아마도 현(現) 세대의 주요 학자 가운데 최초로 반대 의견을 격렬히 제기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귀한 신분의 기독교인이 적다는 발언은 별 의미가 없다고 평가했다.
만일 기독교인 집단이 사회의 하위계층으로 구성되었다는 흔한 주장이 함의하는 바가 로마 계급 구조 내에서 상류층을 포섭하지 못했다는 것이라면 그 관찰은 옳은 동시에 무의미하다. 지중해 동편 지역에서 로마 귀족의 일원이 현지의 신종교 집단 모임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은 지당한 일이었다. …[아울러 귀족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극미했다.
문헌에서 언급된 사람들의 계급 서열과 직업을 신중히 분석한 후 저자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사회적으로 위축된 집단이기는커녕 …오히려 대도시 인구 가운데 사회적 허세가 있는 그룹이 주류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기독교 집단의 구성원은 아마도 사회 지도층 가구에 종속된 피부양자들의 인적 구성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이는 폭넓은 계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도시 가정에 속한 구성원은 사회의 밑바닥 집단이 전혀 아니었다. 그들은 자유의 제약은 있었지만 그대로 물질적인 안정과 소박하나마 풍요를 누리던 사람들이었다. 농민계층과 토지에서 일하는 노예들이 가장 불우한 계층이었으며, 이들은 기독교에서 거의 접근하지 않았다.
아울러 저지는 “증거 텍스트”인 고린도전서 1:26-28은 과잉해석되었다고 예리하게 지적했다. 그러니까 바울이 말한 바는 그의 추종자 가운데 학식과 권세와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 전무하다는 게 아니라 “많지 않다”는 뜻이었으며 그 뜻은 “어느 정도는”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다수의 학자들이 1929년 고린도에서 발굴된 한 새김 문자와 로마서 16:23, 디모데후서 4:20을 근거로 고린도 교인 가운데 “시 재정관(재무관)”인 에라스도(에라스투스)가 있었다는데 이제 의견을 같이한다. 그리고 역사학자들은 57년에 타키투스가 “이방 미신”을 따른다는 비난을 받았다고 보고한 상원의원 계급에 속한 여성 폼포니아 그레시나가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을 수긍한다. 마르타 소르디에 의하면 폼포니아의 경우는 고립된 사례가 아니었다. “믿을 만한 출처를 통해 우리가 알게 된 바는 1세기 후반에 [로마]귀족 가운데 기독교인이 있었다는 점이다.(아실리우스 글라브리오와 크리스턴 플라비안스). 그리고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기 이전인 1세기 전반에도 그러했을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저지가 초기 교회를 프롤레타리아로 보는 견해에 최초로 도전장을 내민 이래 신약 역사학자들 사이에는 기독교의 기반이 중상류층이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이 맥락에서 쟝 다니엘루와 헨리 머로우는 초기 교회의 여러 일상에서 “부유한 시혜자들”의 역할이 두드러졌다고 했다. 로버트 M. 그랜드(1977:11) 역시 초기 기독교가 “프롤레타리아 민중 운동”이었다는 점을 부정하며 “대부분이 중산층 출신인 다소 작은 규모로 구성된 매우 열심 있는 집단”이었다고 주장한다. 아브라함 J. 말러비(1977:29-59)는 초기 교회 저술가들이 사용한 언어와 문체를 분석한 후 그들이 학식과 교양을 갖춘 사람들이라고 결론지었다. 1세기의 고린도 교회에 관한 세밀한 연구를 통해 거드 타이센(1982:97)은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부유한 기독교인들이 존재했음을 규명했다. 로빈 레인 폭스(1987:311)는 “귀한 신분의 여성”이 존재했다고 썼다. 실상 저지의 책이 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하인츠 크라이시히(1967)는 프롤레타리아 논제 포기를 선언했다. 크라이시히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사회적으로 충분히 자리 잡은 장인, 상인, 자유로운 전문직으로 이루어진 도시민 부류”에서 유입되었다고 규명했다.
신기하게도 이 새로운 관점은 더 초기의 역사적 전승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에드워드 기번은 프롤레타리아 설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곧 잘 인용되었다. -“기독교라는 신흥 분파는 거의 전적으로 인구의 찌꺼기들, 농민과 기술공, 어린 소년과 여성, 걸인과 노예로 이루어져 있다” - 하지만 실제로 기번은 이 인용글 직전에 이것이 “매우 거부감이 드는 책임 지우기”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오히려 역으로 기독교에 하층민이 다수 포함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이는 단지 인구 대부분이 하위 계층에 속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기번은 기독교인 가운데 하층민이 차지하는 비중이 유달리 높았으리라고 간주할 근거는 없다고 보았다.
19세기에 이르러 여러 역사학자들이 기번보다 한 발 더 나아가, 초기 교회에서 하층민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 인구 대비 하층민의 비중보다 오히려 ‘낮았다’는 주장을 전개했다. 실제로 W.M. 램지는 그의 고전적 연구에서 기독교는 “못 배운 사람보다 배운 사람들 사이에서 더 빨리 확산되었다. 기독교가 가장 큰 장악력을 보인 곳은 다름 아닌…황실과 궁중이었다.(1893:57)고 주장했다. 램지는 저명한 독일 고전주의자 테오도어 몸젠도 비슷한 견해를 표명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아돌프 하르낙(1908)은 동시대의 독일학자 다수가 프롤레타리아설을 주창할 때, 이그나티우스가 로마의 기독교 교인에게 쓴 서신에서 교인들이 자신의 순교를 가로막을까 봐 걱정된다고 말했던 대목을 주목했다. 하르낙에 의하면 이그나티우스는 로마의 기독교인이 자신을 사면시킬 만한 “힘”이 있다고 보았으며 “만일 로마 교회에 이런 식으로 뇌물을 쓰거나 개인적 연줄을 사용하여 개입할 만한 부와 명망을 소유한 교인이 없었는데도 이런 우려를 했다면 그건 비이성적”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회귀한다. 기독교의 발흥에 관해 이해하려면 응당 기본적인 교인 모집 기반에 관해, 즉 “누가 기독교에 합류했는가?”에 관해 무언가를 알아내야 한다. 나는 역사학자들 사이에 새롭게 대두된 이러한 관점이 본질적으로 정확하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기독교의 사회적 기반에 관한 ‘어떠한’ 주장도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적어도 직접적 증거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미 우리 수중에 있는 단편적인 역사적 데이터를 훨씬 능가하는 무언가를 입수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이 문제에 달리 접근할 수 있다. 바로 신흥종교 운동의 사회적 토대와 관련하여 이미 검증된 사회학의 명제들을 사용함으로써 기독교의 개연성 있는 계급적 기반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실상 이 주제는 역사학자들의 의견이 크게 엇갈리는 영역이 아니라는 점에서 나의 재구성 시도의 출발점으로서 최상일 듯하다. 나의 이론적 결론과 역사학자들이 취합한 데이터 간에 밀접한 상관 관계가 있음을 보여줄 수 있으므로 후자는 나의 재구성 작업 자체에 더 큰 신빙성을 부여할 것이다. 근본적인 논제를 단순화하자면 이렇다. 만일 초기 교회가 훌륭한 데이터가 존재하는 다른 모든 신종교 운동과 같았다면, 초기 교회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아니라 좀 더 기득권층에 기반을 둔 운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