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훈(月暈)
박용래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습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 둑, 그 너머 강기슭에서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갱(坑) 속 같은 마을, 꼴까,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 콩깍지처럼 후미진 외딴집, 외딴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木果)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너머지 무를 깎기도 하고 고무를 깎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 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 후루룩 처마 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溫氣)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오래, 노인의 자리말에 밭은기침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는 울지요. 떼를 지어 웁니다. 벽이 무너지라고 웁니다.
어느덧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月暈)
(『문학사상』 42호, 1976.3)
[어휘풀이]
-허방다리 : 함정(陷穽)
-봉당 : 안방과 건넌방 사이의 마루를 놓을 자리에 마루를 놓지 아니하고
흙바닥 그대로 둔 곳.
-시나브로 : 모른 사이에 조금씩
-짚오라기 : 짚의 올, 지푸라기
-월훈 : 달무리
[작품해설]
향토적인 생활 정서에 뿌리박고 있는 박용래의 시는 문명의 때[垢(구)]가 묻지 않은 토속 세계를 통하여 삶의 무상하을 정지적(靜止的) 언어로 표현한다. 형식면에서는 주로 시각적이거나 청각적인 비유에 의존하고 있으며, 대상을 형상화시키기 위하여 그가 즐겨 사용한 방법은 ‘소묘법’이다. 비록 단조로운 단색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서 간결하고 날카로운 소묘는 회상물의 대상을 객관화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의 많은 시가 정상적인 구문(構文)보다 명사나 명사형 어미로 시행을 끝밎고 있는 것도 그의 소묘적 방법의 한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행간의 여백을 중시하는 것도 바로 그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 시는 겨울 산촌의 외딴집에서 홀로 사는 노인의 고독과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는 연 구분이 없는 산문시 형태로, 화자는 원경에서 근경으로 시선을 이동하며 시상을 전개시킨다. 한자어를 배제한 토속어와 경어체 구문의 사용, 명사 종결 어구의 삽입, 향토적 정서에 바탕을 둔 비유와 다양한 감각의 이미지, 그리고 쉼표와 의태어의 적절한 사용 등은 이 시의 주세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데 도움을 준다. 특히 끝 부분에서 나타나는 귀뜨라미로의 감정 이입능 노인의 고독을 더욱 심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시는 먼저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다는 다소 환상적인 공간을 설정한다. 그러나 그곳은 단순히 아름답고 신비로운 동화 속 같은 세계가 아니라, 현대 문명과 동덜어진 원시적 토속 세계이다. 노인이 살고 있는 귻은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조그맣고 개 ㅇ소같이 파묻힌 마을로, 노루꼬리 만큼 짧은 겨울해가 저물면 각 집들은 봉당에 불을 매단다. 그런 마을의 한구석에 위치한 노인의 ‘외딴 집’ 창문에 이슥하도록 켜진 불빛은 마치 잘 익은 ‘모과빛’같이 싱그럽기만 하다.
깊어 가는 겨울밤, 노인은 문득 잠에서 깨어나 시장기를 느끼고는 무나 고구마를 깎으며 행여 누군가 찾아 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다림으로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노인은 짚단과 짚오라기의 서걱 거림에서부터 처마 깃의 이름 모를 새의 작은 날개 짓에 이르기까지 청각을 집중해 보지만, 자기를 찾아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그 외로움에 절망한다. 노인의 이러한 행위는 그의 외로움과 그리움의 깊이를 증폭시켜 주는 동시에, 시인이 가지고 있는 섬세한 감각을 드러내는 징표로서의 기능을 갖는다.
한동안 계속되는 노인의 밭은기침 소리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벽 속에서는 겨울 귀뚜라미가 떼를 지어 벽이 무너지라고 울어댄다. 여기서 ‘겨울 귀뚜라미’는 동료로부터 떨어져 나와 외톨이가 된 귀뚜라미를 일컫는 것이며, ‘떼를 지어’ ‘벽이 무너지라고’ 우는 것은 겨울밤의 고요를 깨는 귀뚜라미의 울음소리가 그만큼 크게 들린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외톨이가 된 귀뚜라미와 가족과 떨어져 홀로 살고 있는 노인의 처지가 교묘히 일피함으로써 결국은 귀뚜라미는 노인의 감정이 이입된 대상이 된다. 이때 문밖에선 가는 ‘눈바링라도 치는지’ 또는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어디선가 희끄무레한 달무리가 떠오른다.
[작가소개]
박용래(朴龍來)
1925년 충청남도 부여 출생
강경상업학교 졸업
1956년 『현대문학』에 시 「가을의 노래」, 「황토(黃土)길」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61년 제5회 충남문학상 수상
1969년 『현대시학』 제정 제1회 작품상 수상
1980년 제7회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1980년 사망
시집 : 『싸락눈』(1969), 『강아지풀』(1975), 『백발의 꽃대궁』(1980), 『먼 바다』(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