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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20. 묵상글 (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 단식의 2중(二重) 목적.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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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20.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2.20 02:04
- 단식의 2중(二重) 목적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오늘 독서와 복음은 단식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가르쳐주는데
이런 단식의 의미와 목적을 어제 독서의 기도 제2 독서에서
성 레오 교황은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들이 제정한 이 사순절을 단순히 음식을 절제하는 것으로써만 아니라,
우리의 악습을 금하는 것을 뜻하는 단식을 행함으로써 지내야 합니다.
거룩하고 합당한 단식과 가장 잘 어울리는 것으로 애긍시사 이상의 것이 없습니다.
애긍시사라고 하는 자선 행위는 여러 가지 좋은 일을 함으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단식을 우리가 실천하는 이유는
미용 단식이나 건강 단식이 아님은 물론
단식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식 그 자체가 목적이라면 자기학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리고 교회가 단식하라 하니 억지로 하는 것도 아니어야 합니다.
레오 교황이 얘기한 대로
하나는 악습을 끊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행을 실천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는 자기 사랑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 사랑 때문입니다.
그런데 건강을 위해 단식하는 것도 자기 사랑이고,
미용을 위해 단식하는 것도 자기 사랑의 단식이지만
악습을 끊는 것이 최고의 자기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단(斷) 곧 끊는 것 중의 끊는 것은 단식(斷食)이 아니라
단욕심(斷慾心)이요 단악습(斷惡習)일 것입니다.
이것이 건강하게 살게 하고 행복하게 살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가치 있고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은
악습을 끊는 것보다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레오 교황은 얘기하는데
이것은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가르침 받은 그대로의 인격적 단식입니다.
오늘 독서는 굶주린 이들에게 양식을 나누기 위한 단식을 얘기하고
오늘 복음은 신랑의 수난과 함께하는 Compassion의 단식을 얘기합니다.
옛날 우리 신자들은 성미를 모아 바쳤지요.
이것은 성미(誠米)라고 할 수도 있고 성미(聖米)라고 해도 좋을 텐데
사순 시기 매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형편껏 한 숟가락 또는
한 움큼씩 떼어 놓은 쌀이었지요.
이것은 지금 돈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보다 더 뜻깊게 다가옵니다.
쌀 한 톨이 귀하던 때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한 번에 툭 내는 것보다 매 끼니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턱내는 것은 금액으로는 더 많은 것을 주는 것이겠지만
성미는 매 끼니 가난한 이를 생각하며 나누는 것이기에
더 정성과 사랑이 들어간 것이라는 데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전에 북한 일할 때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문과
주님의 기도를 제가 짓고 식사 때 바치는 기도도 지었는데
그것을 소개하는 것으로 오늘 나눔을 마치겠습니다.
“주님, 은혜로이 내려주신 이 음식과 저희에게 강복하시고,
굶주리는 북녘의 형제들에게도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사순절만이라도 굶주리는 모든 이를 기억하며 이 기도를 다시 바쳐야겠습니다.
그러면 식욕이나 식도락으로 밥을 먹지 않게 하고
사랑으로 밥을 먹게 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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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20.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지식보다 체험!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우리는 사막의 지혜를 스스로 체험해야 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사막과 변모
지식보다 체험!
2026년 2월 19일 목요일
트라피스트 수도자 토머스 머튼(1915–1968)은 그리스도교 안에서 관상 전통을 되살리는 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는 사막 교부들의 잠언집을 번역하며, 짧은 이야기와 말씀을 통해 전해지는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머튼은 단순히 지식을 아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그 지혜를 우리 스스로 체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는 이러한 단순함을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들 속에 반영된 체험을 다시 붙잡아야 합니다. 여기서 강조해야 할 단어는 바로 "체험"입니다. 이 책에 인용된 짧은 구절들은 단순한 정보로서는 거의 가치가 없습니다. 그저 "교부들이 이런 말을 했다"는 사실만을 가볍게 메모하는 것은 무익한 일입니다. 단순히 그런 말씀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이 실제로 살아내어진 것이며, 그것이 인간 존재의 더 깊은 차원에서 흘러나온 체험이라는 점입니다. [1]
사막의 신비가들을 연구한 학자 베네딕타 워드(Benedicta Ward)는, 사막의 교부(Abba)와 교모(Amma)들이 사용하는 단순한 언어가 그 안에 담긴 깊은 지혜를 감추고 있을 수 있음을 설명합니다:
이 말씀들은 단순한 언어 속에 담긴,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사막의 지혜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서로 항상 일치하지는 않으며, 언제나 주어진 맥락 안에서 읽혀야 합니다. 이는 무차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 속에서 실제로 주어진 말씀의 사례들입니다.
사막 영성의 본질은 가르쳐진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붙잡아진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전체적인 삶의 방식이었지, 난해한 교리나 미리 정해진 금욕 수행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아빠(Abba)"는 불교의 선사(禪師)와 같은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막 교부들의 기도 방식이나 영적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방법은 사실상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체계적 방법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몸과 마음과 영혼의 모든 부분을 하느님께로 돌리려는 수고와 체험이 있었고, 바로 그것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말한 '기도'란 하루 몇 시간만 행하는 활동이 아니라, 삶 전체를 끊임없이 하느님께 향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빠 아가톤(Abba Agatho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란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이어지는 큰 수고와 치열한 싸움이다." 또한 아빠 롯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사막의 교부들과 교모들에 관한 묵상들을 깊이 감사히 받아들였습니다. 어느 날 묵상 후에 잠시 관상에 머무르던 중, 제 마음에 이런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단순하게 살아라, 깊이 용서하라, 두려움 없이 사랑하라." 이 말씀이 제 마음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습니다.
—David W.
References
[1] The Wisdom of the Desert: Sayings from the Desert Fathers of the Fourth Century, trans. Thomas Merton (New Directions, 1960), 11.
[2] Benedicta Ward, The Desert Christian: Sayings of the Desert Fathers: The Alphabetical Collection (Macmillan, 1980), xviii-xix.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Dan Grinwis, untitled (detail), 2017, photo, Namibi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사막으로 자유롭게 걸어 들어가는 순간, 구도자는 어떤 제도나 구조를 넘어서는 광대한 변혁의 자리에서, 스스로 사고하고 온전해질 수 있는 능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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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저거… 예수님께서 문을 두드리시는 소리 아닌가요?"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 제가 어렸을 때를 기억해 보면 강론이나 주일학교 교리 때에 지옥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또 성당이나 수도원 등에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자아내는 그림들이 더 많이 걸려 있었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삶을 살아가면서 기쁨보다는 고통과 비참함에 더 익숙해져 있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두려움은 사람들을 쉽게 조종할 수 있는 수단이었고, 지옥의 신화적 이미지들은 상상력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현세의 삶 속에서든 내세에서든, 고통은 기쁨보다 더 실감나게 다가오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것을 강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더 현실적이고 긴급하며, "손에 잡히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에게는 일종의 음울한 매혹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예전에 세상 종말을 이야기하는 사이비 종교들이 사람들을 매혹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예수님의 죽음만이 아니라 그분의 부활을 선포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은 어려운 길을 보여주지만 그 끝은 영원한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단순한 행복과는 다릅니다. 행복은 어느 정도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지만 영속적이지 않고 모호합니다. 그러나 기쁨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기쁨 없는 신앙은 하느님을 가장 깊이 부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만일 신앙 안에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인간 자신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그렇다면 하느님이 필요하지 않게 됩니다. 부활의 빛, 즉 부활의 기쁨이 믿는 이 안에서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음만을 선포하는 것이며, 부활 없는 십자가를 전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라고요.
어제도 언급해 드렸습니다만.... 성령의 열매 가운데 기쁨은 사랑 다음에 언급됩니다. 성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신의, 온유, 절제"(갈라티아서 5,22)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없는 신앙을 참된 그리스도교라 할 수 없듯, 기쁨이 없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 외에 성령의 다른 열매들도 마찬가지고요....
기쁨은 단순히 고통과 슬픔을 피한다고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고통과 슬픔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야만 참된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복음의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며, 변형의 체험이 이루어집니다. 이 과정을 피한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길에는 기쁨이 없고, 끝없는 절망적 도피만 있을 뿐입니다.
어찌 보면 단식은 단순히 음식을 끊는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그분 은총의 기쁨을 기다리는 자세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신랑을 빼앗길 날"이란, 물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볼 때 더 근본적인 것은 우리 안에서 주님 사랑의 기쁨이 부재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내면에서 주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새롭게 무한한 사랑의 하느님과의 관계성 안으로 들어서라는 초대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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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도 한 번 들려 드린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전에 어떤 신부님의 글에서 읽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어떤 소아과 병동의 한 간호사는 아이들의 가슴을 청진하기 전에 먼저 청진기를 자신의 귀에 꽂아 주고 아이들로 하여금 자기 심장 소리를 들어보게 하곤 했습니다.
아이들의 눈은 언제나 놀라움으로 반짝였지만, 그 어떤 반응도 네 살 된 데이빗의 말만큼 인상 깊지는 않았습니다.
간호사는 다정하게 청진기를 그의 귀에 꽂아 주고 심장 위에 청진기의 원반을 대었습니다.
"들어보렴." 하고 그 간호사가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이게 무슨 소리라고 생각하니?" 하고 물었습니다.
데이빗은 눈썹을 찌푸리며 이 낯선 소리, 즉 자기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에 잠시 빠져들더니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며 대답 대신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저거… 예수님께서 문을 두드리시는 소리 아닌가요?"
사순 시기는 바로 우리가 마음 안으로 깊이 들어가 "예수님께서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도록 부름받는 아름다운 시기입니다.
오늘의 독서들은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강한 울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예언자 이사야의 권고를 통해 단식의 참된 의미를 깨닫도록 이끌어 줍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며 우리를 당신과의 참된 사랑의 관계성으로 초대해 주신다는 사실을 더 깊이 마음에 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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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20.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말씀 전례>는 ‘참된 단식’과 ‘신랑의 때’에 대한 말씀입니다.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그릇된 단식, 곧 당시의 유대인들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단식을 질타하면서, ‘참된 단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이는 ‘참된 단식’이란 곡기를 끊고 생명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살리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곧 ‘단식의 참된 정신’이 ‘타인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오늘 <입당송>에서는 “들으소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라고 하고, <화답송>에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주소서.” 라고 노래합니다.
사실, ‘단식’은 <레위기>(16,29-34)에 따르면, 잘못을 속죄하고 정결해지기 위해 행하는 것이었고, 예수님께서도 단식을 배척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우리가 ‘재의 수요일’ 복음에서 보았듯이,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기도와 자선과 함께 경건한 생활의 핵심으로 인정하셨습니다. 단지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단식을 배척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마태 9,15)
이는 당신이 누구신지, 그 신원과 동시에 지금이 어느 때인지를 드러내줍니다. 곧 당신이 ‘신랑’(묵시 19,6-9)임을 계시함과 동시에, 지금이 ‘신랑이 함께 있는 때’임을 드러냅니다.
사실, <구약성경> 여러 곳에서 하느님을 ‘신랑’으로 계시하고 있고(이사 54,5-6; 62,4-5; 호세 2,16-20),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요한 3,29)이라 불렀습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하늘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하시면서 당신을 ‘신랑’(마태 22,2)으로 비유하셨고,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과 교회 혹은 신자들과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비유하고 있습니다(2고린 11,2;에페 5,23-32).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
이는 당신의 수난 예고와 당신이 수난 받는 야훼의 종임을 드러냅니다. 동시에, 새로운 의미의 단식, 곧 감사와 사랑의 단식을 예고해주십니다.
하오니, 주님 이제 새로운 마음의 단식을 하게 하소서.
저를 결박하는 마음 속 생각을 멈추고, 당신의 뜻 따르게 하소서.
몸으로는 단식하면서도, 마음은 다투고 주먹질하지 않게 하소서.
제 자신을 섬기는 일을 단식하고, 주님과 형제를 섬기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태 9,14)
주님!
저를 결박하는 마음 속 생각을 멈추고
당신의 뜻 따르게 하소서.
몸으로는 단식하면서도
마음은 다투고 주먹질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선물인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식하지 않고
내어놓음으로 당신의 생명이 퍼져가게 하소서.
제 자신 섬기기를 멈추고
당신을 주인으로 섬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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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20.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여행은 즐거운 일입니다. 순례는 거룩한 일입니다. 여행은 마음을 설레게 하고, 순례는 영혼을 정화해 줍니다. 좋은 날씨만 계속되기를 바라지만, 때로 바람도 불고 비가 오듯이 여행과 순례 중에도 때로 뜻하지 않는 일들이 생기곤 합니다. 부쳤던 가방이 오지 않기도 하고, 지갑을 도난당하기도 하고, 여권을 분실하기도 하고, 몸이 아프기도 합니다. 그래서 늘 긴장의 끈을 놓지 않도록 강조하고, 안전한 여행과 순례가 되도록 기도합니다. 현명한 인솔자는, 경험이 많은 사목자는 비가 오는 상황도, 바람이 부는 상황도 ‘전화위복’의 기회로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전체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여행과 순례의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가방이 오지 않았던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많은 분이 가져온 것을 나누었습니다. 나중에 가방을 찾았을 때는 모두 기뻐해 주었습니다. 지갑을 도난당한 형제님께도 ‘선물’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몸이 아픈 분을 위해서는 모두 기도하였고, 다행히 건강을 회복하여 순례에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보고타 여행 중에 좋은 일이 많았습니다. 주교님과의 만남도 있었고, 음악 하는 가정에서 미사도 봉헌했습니다. 6월에 있을 서울대교구 사제 모임 일정도 확정하였습니다. 보고타의 명소인 소금 성당에서 십자가의 길과 대성전을 보았습니다. 보고타 주교좌 성당, 황금 박물관, 보테로 미술관, 몬세랏도 올랐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작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점심 먹고 식당에서 내려오는 길에 계단에서 넘어지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약을 바르고 센터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더 크게 다치지 않는 것이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몬세랏에서도 케이블카에서 내려 걸어가다가 계단에서 넘어지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구조요원이 있었고, 병원으로 가서 치료받은 후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더 크게 다치지 않는 것이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왜 그런 일이 하루에 2번이나 있느냐?’라고 불평할 수도 있지만, 더 크게 다치지 않는 것이 감사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습니다.
“見月望指(견월망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달을 보라고 달 쪽을 향해 손짓했더니,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 끝만 본다.’라는 뜻입니다. 돌아가신 성철 스님께서 말씀하신 뒤로 여러 사람에게 알려졌습니다. 작은 일에 신경을 쓰다가 큰일을 잊는 다거나 본질을 잊고 곁가지에 한눈을 파는 경우를 이르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에게 이와 같은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하는 근본적인 의미,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시면서 이야기하셨습니다. 제자들이 하늘나라에서 차지할 자리에 대해서 서로 다툴 때도, 예수님께서는 참된 제자의 길이 무엇인가를 설명하시면서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많은 비유의 말씀들은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지 말고, 참된 진리를 볼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고 계십니다.
교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성전 건축에 쓰인 금액, 헌금의 액수, 신자 수 등을 먼저 보게 되는 경우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교회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와 활동입니다. 본당의 예산은 찬조와 나눔을 위해서 쓰여야 합니다. 지역의 현안을 함께 고민하고, 지역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서 연대하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교회는 지금의 현실에 안주하려 하고, 외적인 성장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바로 그런 우리들의 신앙을 바로 잡아주고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그릇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릇에 ‘무엇을 채우는가!’입니다. 나의 몸을 채우는 것이 ‘사랑, 자비, 희생, 나눔’이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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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20.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의 단식이 보다 진정성 있는 단식이 되기 위하여
사순시기만 되면 돌아가신 선교사 신부님 얼굴이 떠오릅니다. 항상 넉넉한 웃음과 뼈있는 농담으로 후배들을 즐겁게 해주시던 분이셨습니다.
한번은 신부님께서 사순시기를 시작하며 새싹 같은 젊은 형제들에게 훈화 말씀을 하셨는데, 저도 마침 그 자리에 앉아 있었기에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이렇게 운을 띄우셨습니다.
“우리 살레시안들은 사순시기에 더 잘 먹어야 합니다.”
저도 당시 수련자들의 선생 역할을 하고 있던 중이라, 신부님의 말씀에 살짝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뒤따라 나오는 말씀에 안심을 하였습니다.
“더 잘 먹고, 대신 더 많이 사랑하면 됩니다. 더 자주 아이들에게 다가가고, 더 많이 그들을 참아주고, 더 많이 인내하고, 더 기쁘게 헌신하는 것, 그것이 우리 살레시안들에게 참된 단식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단식하지만,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기도와 단식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늘 독서 말씀과 어찌 그리 일맥상통하는지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러하냐?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 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이사 58, 3-5)
또 다시 사순 시기를 맞아 우리는 교회 권고에 따라 단식과 금육을 실천합니다. 교회는 왜 우리에게 단식하라고 강조할까요? 어찌 보면 단식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강제로 억제시키는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자연스레 고통이 따를 것입니다. 허기로 인한 표시가 얼굴에 드러날 것입니다. 심기가 날카로워진 나머지 작은 일로 이웃과 싸우기도 할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그것은 단식도 뭣도 아니다, 차라리 그런 단식은 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고 가르칩니다. 애써 단식을 했다면, 그 단식이 이웃 사랑, 하느님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어야 마땅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6,6-7)
이번 사순절, 단식제와 금육제를 실천할 때 마다, 대체 왜 단식하고 금육하는지? 그 이유를 먼저 한번 헤아려보고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단식이 보다 진정성 있는 단식,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단식이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겠는지 고민해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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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20.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9,14–15
제자들이 묻습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신랑이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그때에 단식할 것이다.”
이 말씀은 단식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단식의 핵심이
‘규칙을 지켰는가’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있는가,
무엇을 그리워하는가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욕망의 방향”으로 자주 설명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이미 그쪽으로 움직인다고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기쁨은 단순한 기분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있음에서 오는 중심의 안정입니다.
반대로 단식은
먹지 않는 기술이 아니라
주님을 잃어버린 자리에서 다시 주님을 갈망하는 사랑의 형태입니다.
평화/인내 주간의 금요일,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 나는 주님을 “가까이 모셨는데도” 마음은 여전히 배고픈가?
• 내 단식(절제)은 나를 예민하게 만드는가, 아니면 사랑을 더 맑게 하는가?
• 공동체 안에서 내가 만드는 분위기는 “불평의 금식”인가, “갈망의 기도”인가?
주님이 함께 계실 때는
기쁨으로 사랑을 연습하고,
주님이 멀게 느껴질 때는
단식으로 사랑을 다시 정렬합니다.
이 두 리듬이 함께 갈 때,
우리 안에 평화가 자랍니다.
주님,
제가 단식으로 의로움을 증명하려 하지 않게 하소서.
갈망으로 당신께 돌아가게 하시고,
기쁨으로 공동체를 살리게 하소서.
제 욕망의 방향을
오늘 다시 당신께로 돌려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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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20.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7:20 추가
<예수님은 우리를 먹이려고, 또 살리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4-15)”
1) 성경에서 ‘메시아 시대’를 ‘잔치’로 표현할 때가 많습니다.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이사 25,6).”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 없이 술과 젖을 사라.
너희는 어찌하여 양식도 못 되는 것에 돈을 쓰고, 배불리지도 못하는 것에 수고를 들이느냐? 들어라,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좋은 것을 먹고 기름진 음식을 즐기리라(이사 55,1-2).”
“지혜가 일곱 기둥을 깎아 자기 집을 지었다. 짐승을 잡고 술에 향료를 섞고 상을 차렸다.
이제 시녀들을 보내어 성읍 언덕 위에서 외치게 한다.
‘어리석은 이는 누구나 이리로 들어와라!’ 지각없는 이에게 지혜가 말한다.
‘너희는 와서 내 빵을 먹고, 내가 섞은 술을 마셔라.
어리석음을 버리고 살아라.
예지의 길을 걸어라.’(잠언 9,1-6)”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마태 22,2).”
<‘메시아 시대’를 잔치로 표현한 것은, ‘기쁨, 행복, 풍요로움’ 등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하늘나라 잔치에 참석하라는 ‘초대’와 같고, 신앙생활은 그 초대에 대한 ‘응답’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기쁨의 생활’입니다.
2)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단식은
‘신심을 드러내기 위한’ 단식이었습니다.
14절의 ‘많이 하는데’ 라는 말은, 그들이 “단식은 많이 하면 할수록 좋은 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들의 단식은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슬퍼하는’ 단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단식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안 믿는다는 뜻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하면 안 되는 단식’이었습니다.
메시아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었으니,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을 하면 안 되고, 메시아와 함께 기뻐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라는 말씀은, “지금은 슬퍼할 때가 아니라, 기뻐해야 할 때”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손님들’이라는 표현은, 신앙인들이 손님이라는 뜻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직접 잔치를 준비하시고 베푸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일 뿐입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잔치의 ‘주인공’입니다.>
3) 예수님은 우리에게 단식을 시키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를 먹이려고 오신 분인데, 그런데 아무나 ‘하늘나라 잔치’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격’을 갖춘 사람만 먹을 수 있습니다.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1-14).”
‘혼인 예복’은 잔치 음식을 먹을 자격을 뜻합니다.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자격을 뜻합니다.
그 자격을 갖추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4) 15절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단식’은 ‘회개의 단식’을 뜻합니다.
‘회개의 단식’ 가운데에서 가장 유명한 예는, 요나서에 나오는 ‘니네베 사람들’의 단식입니다.
“요나는 그 성읍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하룻길을 걸은 다음 이렇게 외쳤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 옷을 입었다(요나 3,4-5).”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요나 3,10).”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의 단식’은 글자 그대로 ‘살고 싶어서 실행한 단식’입니다.
혹시라도, “하느님을 안 믿고 살던 사람들이 멸망 선포 때문에 겁이 나서 한 일이니, 진정성 있는 단식이라고 말할 수 없다.” 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회개를 인정하셨습니다.
<우리가 실행하는 ‘회개의 단식’도 ‘살고 싶어서’,
즉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단식이란, 원래는 죽기를 각오하고 하는 일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지 않으면, 그냥 이대로 죽는 것이 낫다.” 라는 심정으로 하는 일입니다.
사실 신앙생활 자체가 목숨을 걸고서 하는 생활입니다.
구원과 멸망 가운데에서 구원을 선택하고, 생명과 죽음 가운데에서 생명을 선택하는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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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20.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07:30 추가
■ 생활묵상 : 한국에 잠들길 원한 한 영국노병의 전우애
6.25전쟁에 참전한 한 영국노병이 장장 30년 세월을 계속 자비로 한국을 찾아왔다. 척추암이라는 암말기 상태로 생을 마감했는데 마지막 소원이 영국에서 묻히지 않고 한국 부산 유엔공원에 묻히기를 소원했다는 사실을 보고 감동이 밀려왔다. 사실 그 이유는 바로 같이 전쟁터에서 전우에게 남긴 약속이 주 원인이었던 것 같다. 돌아오겠다는 약속. 이 정도의 세월이면 잊혀질만도 한데 그렇치 못한 건 뜨거운 전우애였던 것이다.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마지막은 고국이 아니라 전우가 묻힌 땅에서 영원을 같이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참 고결한 것 같다. 난 이걸 보고 인간적으로도 감동이 됐지만 묵상한 게 있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여러 있는 듯하다. 한 프랑스 아내가 유골함을 가지고 한국에 왔는데 남편의 유골이었다. 프랑스 군인이었다. 이 군인 역시 6.25참전용사였다. 이 용사 역시 한국에 전우들이 있는 곳에 묻히기를 원했다. 이 전우는 부인도 있었다. 참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아내와는 죽어서 떨어져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떨어져 먼 이국 땅에 묻히고 싶었던 그 이유는 단 하나 그건 바로 생사를 같이 나눈 전우와 함께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렇다. 이 세상에는 피보다 더 진한 우정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우정은 단순한 우정이 아니고 형제애와 같은 것이다. 연휴 때 이 영상을 보며 내 가슴을 울린 건 바로 내가 지금 그 기분을 잘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 때문에 가족과 사이가 예전과 완전히 다르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형제애를 느낄 수 없다. 과거 피로 맺어진 형제로 인해 생긴 우애는 이제 찾아볼 수 없다. 마지막으로 기댈 곳은 단 하나, 바로 성당 내에 있는 형제자매들과의 나누는 형제애밖에 없다. 솔직히 고백하면, 이젠 이들이 어떤 경우는 피를 나눈 형제보다는 더 진짜 피를 나눈 형제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싶다. 인간적으로는 외롭지만 어쩔 수 없다. 견뎌야 할 운명이라면 견뎌야 한다.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일어난 외로움이라면 하느님을 선택해서 생긴 외로움이라면 그 외로움 때문에 하느님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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