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로(天路)를 걷는 삶(10/19)
-무엇을 위해 사는가-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사십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과 ‘평안’ 등을 위해 오늘을 살아가며 이를 위해 일을 하고 공부한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행복을 위하면서도 사람은 정작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떠나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 같다. 이는 죄인된 자로서 무지하고 소경이기 때문이다.
이에 교회로서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신앙생활을 하고 예배 생활을 잘하려는 것도 행복해지거나 기쁨과 평안을 누리려는 생각으로 하는 것 같다.
이는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과 육체의 삶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며, 예수 안에서의 신앙 생활마저도 예수님이 중심이 아니라 자아가 중심이기 때문이다.
성도와 교회는 첫째도 둘째도 하나님을 찬송함과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며 영벌에서 영생의 영광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성도들간 위로나 안부를 물을 때에 대부분이 행복하기를 바라며 그저 육체의 편안을 바라는 소원들을 주고받는다.
바울은, 성도의 존재적 가치와 십자가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분쟁과 다툼으로 가득찬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복음으로 훈계를 하면서 이렇게 가르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성도와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최우선이며 모든 중심이다. 여기에 성도의 고난과 환난, 핍박도 당연히 주의 영광을 위해 즐겨 받으며 삶 전체를 주께 맡기고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영광을 받으시는데 그 영광을 자녀들을 통해 받으신다. 즉 억지나 만들어진 것들로 받지 않으시고 은혜의 감동을 통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받으신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가장 큰 영광은, 나 자신이 ‘예수 안’에 있는 것이며 그의 머리에 예수의 면류관이 얹혀져 있는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은, 자기 자녀들이 신령적으로 당신을 닮아가는 것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바울의 삶 전체가 십자가의 삶, 고난의 삶이었으면서도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간 힘은 예수님의 영광을 바라보았고 그리고 예수 안에 있는 쉼 그리고 영원한 안식이었다.
성도와 교회가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힘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봄이다. 스데반 집사가 그러했으며 베드로도, 요한도, 또한 앞서간 한국 기독교 역사의 신앙의 선배들이 그러했다.
바울 사도는 주의 영광을 위한 삶에 대해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라고 한다.
사도 요한은 고난의 밧모섬에서,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계21:23)는 주의 음성을 듣고 기록하여 교회에 전해주고 있다.
부디 오늘의 고난과 환란 가운데서도 주를 바라보고 의지하면서 승리하시기를 기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