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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아벨의 제사
창 4: 1~7
○ 가인과 아벨의 출생
1.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레2:12, 민18:12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잠21:27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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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 쫓겨난 세상은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이 지배하는 곳이요, 죄로 인해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곳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행복하게 살던 한 사람이 죄를 지어 모든 자유를 박탈당하여 먹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교도소에 들어간 것과 같습니다. 교도소에서는 극히 제한적이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복된 삶을 보장받았던 우리들이 죄를 지어 쫓겨남으로 먹을 것과 죽음과 질병을 걱정해야 하고 자녀문제로 평생 눈물을 흘리고, 속이고 속는 생존경쟁의 치열한 삶속에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으로 추방된 아담과 하와에게 일어난 첫 번 째 사건은 1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예언의 성취
첫 번 째 사건은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하와가 임신을 하게 됩니다.
1절에서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라는 두 단어가 인생의 중요한 이야기를 모두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와가 임신했을 때 그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표현을 했는데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아이를 낳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첫째 하나님이 나에게 아들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아마 이 말을 할 때 하와는 한 예언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뱀은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라는 말입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았을 때 뱀으로 말미암아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저주스러운 이 삶이 회복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하와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후회를 했을 것이고 에덴동산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길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이 아들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해서 다시 에덴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낳은 아들’이라는 말 속에는 ‘너는 해산하는 고통이 있을 것이다’를 생각하게 했을 것입니다. 해산의 날이 되었을 때 기가막힌 고통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죽을 것 같은 고통이라고 합니다. 이 고통 중에 여자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요? 아마 ‘이 고통을 극복하게 해 주세요. 도와주세요’라고 했을 것입니다. 고통이 크면 클수록 아이를 낳았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더욱 컸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말을 했습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가인을 낳게 해 주신 사실 앞에 그들은 죄에 대한 회개가 있을 것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에 대한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자녀가 인류의 첫번째 자녀입니다. 그후에 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사람을 가리켜 ‘아벨’이라고 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인류 최초의 형제입니다. 2절을 보면 두 아들의 직업이 있습니다.
둘째 아들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짓는 자였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남자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얻게 될 것이고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는 예언을 상기할 수 있습니다.
노동은 신성하며 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만물을 관리하도록 인간에게 관리권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후에는 관리나 노동은 축복이 아니라 부담과 고통이 되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농사와 목축업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목축업과 농사꾼의 삶은 하나님이 주신 기쁨보다는 가시를 내고 엉겅퀴를 내는 땅에서 쉼없이 수고로 땀을 흘려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현대를 사는 많은 남자들은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시달리며 출근해서 하루 종일 고통을 겪다가 집에 돌아옵니다. 그러면서도 회사에서 쫓겨날까봐 걱정하면서 가족을 부양해야 합니다. 그나마 그런 직장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직장이 있거나 없거나, 가난하거나 부요하거나, 건강하거나 병들거나, 일찍 죽거나 오래 살거나, 예수 안에 있으면 복이 있습니다.
군대를 3년이나 의무복무를 한다고 생각하면 고통스럽지만 군대에 3년 동안 선교사로 간다고 생각하면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보십시오.
하나님을 찾는 가인과 아벨
가인과 아벨은 시간이 지난 후에 철이 들었습니다.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이 철이 들면 부모를 생각하듯이 인간이 철이 들면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제사를 드린다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제사로 나타나게 됩니다. 사람들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이방인과 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초자연적인 상대와 관계를 맺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외로움과 고독과 한계를 깨달을 때 영적인 절대자를 찾게 됩니다.
3절과 4절을 보십시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인과 아벨도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야 자신의 소산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동물에게는 제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동물입니다.
사람은 제사를 드릴 줄 압니다. 그래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의 영적인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것이 인생의 본분입니다. 죄를 짓기 전에는 제사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매일 만나고 교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생명나무를 만질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과 단절되었습니다.
인생의 가장 큰 고독은 돈이 없거나 먹을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잃어버린 영원하고 절대적인 고독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보고 싶어 하고 가까이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원인은 죄 때문입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갈라놓은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한다면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거룩과 죄는 본질적으로 만날 수 없습니다.
제사란 인간 안에 더러운 모든 죄와 하나님이 싫어하는 모든 죄를 감추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제사의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제물이 없는 제사는 없습니다. 본문을 보면 가인과 아벨도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려고 시도합니다. 가인은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농산물을, 아벨은 목축업을 했기 때문에 양의 첫 새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모색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일은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받지 않으시는 제사도 있다는 교훈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이 오늘 비가 오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어떤 사람의 예배는 받으시고 어떤 사람의 예배는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심각한 일입니다. 20여년동안 예배를 드려왔지만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찬송가를 부르고 기뻐했어도 하나님이 듣지 않으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가 있고 기뻐하지 않는 예배가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예배의 겉모습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 중심을 보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형태를 가진 예배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이사야 1장 10~17절을 보면 하나님은 예배가 피곤하고 제물을 가져오고 성회를 베푸는 것과 찬송으로 기쁘게 하려는 모든 것도 귀찮고 싫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죄를 회개하지 않은, 피가 있는 손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악을 버리지 않은 채 거짓되고 속이는 제사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이나 사람들을 속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예배는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심에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와 예레미야 선지자가 살던 시대의 모든 예배를 하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예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23~2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용서하지 않고 분노를 가지고 와서 예배드리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형제에게 원망을 들을만한 일이 있거든 돌아가서 화목하는 것이 예배라고 가르치십니다. 참된 예배는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분노하고 미워하면서 드리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한국에 많은 교회가 있고 오늘 이 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없거나 목사가 없거나 헌금이 없거나 설교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풍성해도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를 드리지 않고, 예배는 드리면서 계속 죄를 짓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을 합니다. 그것은 종교적인 부흥과 업적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참된 예배는 결코 아닙니다.
본문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신앙적인 상처를 받게 됩니다. 늘 열심히 해왔는데 하나님이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면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우리는 이 히브리서 11장 4절에서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과 아벨의 제사를 받은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드린 제사
▶ 첫째,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참된 예배는 형식과 전통이 아니라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수 십년 동안 드려왔던 예배의 형식 안에는 참된 예배가 없습니다. 그것은 순서와 프로그램의 반복되는 행위일 뿐입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교통사고를 당할까봐 드리는 예배나 습관적으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을 보십시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가인과 아벨이 어떻게 예배를 드렸는지 성경에서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잘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벨은 믿음으로 예배를 드렸고 가인은 종교의식과 형식으로 예배드렸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의 예배가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기를 원합니다. 율법의 예배가 아니라 은혜의 예배요, 문자의 예배가 아니라 영의 예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살아있는 예배, 성령의 예배,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방자하고 교만하고 전통적인 이유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왔지만 사람만 봅니다. 예배가 진지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에게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기 계십니다. 그 분 앞에 믿음으로, 영으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입니다.
예배는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
▶두번 째, 참된 예배는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아벨은 예배를 드린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의롭다’는 증거를 얻었습니다.
‘의롭다’는 것은 죄가 감추어졌다는 것입니다. 가인이 드린 곡식의 제물은 마치 무화과잎으로 드린 것과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 나뭇잎으로 수치를 가리려했지만 결코 그 수치가 가려지지 않았던 것처럼 가인이 드리는 예배는 가인의 죄를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은 죄를 지은 그대로 제사에 나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무화과 나무잎을 거두시고 동물을 죽여 가죽옷을 지어입힘으로 말미암아 아담과 하와의 죄를 가리워 준 것처럼 양의 제사는 양이 죽음으로 피 흘린 제사였습니다. 이 피는 죄를 가리워 주었습니다. 그래서 아벨이 드린 제사는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죄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죄가 가리워진 것입니다.
여러분의 죄가 가리워져야 예배가 가능해 집니다. 죄가 가리워지지 않은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예배는 소용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예배는 예수의 피가 여러분의 죄를 가려줄 것이며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겨 주실 것입니다. 그때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당시에는 가죽옷을 입히고 어린양을 바친 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망원경을 볼 때 초점이 맞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초점이 잘 맞으면 사물이 정확하게 보입니다. 이와 같이 정확하게 보인것이 바로 갈보리언덕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누구든지 그 피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회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이 예배가 가죽 옷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벨의 어린양으로 드린 제사와 염소와 송아지로 제사장이 날마다 제사를 드렸지만 그것은 완전할 수 없었습니다. 갈보리 언덕에서 예수로 드린 제사로 우리의 죄가 비로서 눈과 같이 희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는 바로 ‘의로운 자’, 거룩한 자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가 있는 자의 기도는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인간의 죄를 가릴 수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 단순히 설교만 듣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죄가 가리워지고 하나님앞에 의로운 자가 되어서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 참된 예배가 됩니다. 이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받으십니다.
히브리서 9장 6절~14절을 보면 우리는 송아지의 피나 염소의 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양심이 깨끗해지며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예배가 형식적이고 종교적인 예배가 아니라 아벨이 드린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는 예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예배 드릴 때 성령께서 우리의 양심까지 깨끗케 하시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느끼며 하나님의 구원과 죄용서를 경험하고 능력이 내안에 들어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셨고 가인의 예배는 거절하셨습니다.
이 말씀 앞에서 실족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가인이 무슨 죄가 있는가? 직업이 농부이기 때문에 농산물을 드릴 수 밖에 없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인은 동생에게 찾아가 양을 빌려야 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실족하는 이유는 자존심 때문입니다. 큰 자는 작은 자를 섬겨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서를 택하지 않고 야곱을 택하여 복을 주셨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지만 직업과 상관없이 양으로 제사를 드렸어야 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가인은 자기의 제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첫 번 째 거절감이라는 중요한 단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깊은 상처는 ‘거절감’입니다.
잘못된 예배로 인한 거절감의 상처
낙태를 하려고 했던 아이에게는 성장해도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또 아이들이 자라면서 부모에게 입는 상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결혼해서도 남편이 자기를 거절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비위를 맞추려고 애씁니다. 사회는 온통 거절당하는 것의 연속입니다. 학교에 떨어지고 청혼에서도 거절당합니다. 거절감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사람들이 자신을 환영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들은 거절을 당하지 않으려고 방어기질을 발휘해서 먼저 공격합니다.
거절감이 생긴 이유는 잘못된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리면 거절감의 상처가 치유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오면 어렸을 때 부터 받았던 거절감의 상처가 치유됩니다. 가인은 자기의 제물이 열납되지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사람은 얼굴이 불편해지고 원망과 불평을 하고 작은 일에도 화를 냅니다. 그러나 참된 예배를 드린 사람은 기쁨이 충만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거절감이 오늘 모두 치유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거절하지 않고 영접하십니다. 여러분을 사랑하고 돌아오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부모는 자식이 아무리 잘못해도 다시 품어 줍니다. 그것이 부모입니다.
거절당한 사람의 마음 속에는 항상 분노가 있습니다. 이 분노는 사람의 얼굴을 사납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곁에 가려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도 ‘안색이 변하니’라고 말합니다. 좋은 향수를 뿌리고 좋은 화장품을 발라도 여러분의 안색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충만하면 화장품이 필요 없습니다.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거절당하면 분노가 생기며 분노가 생기면 안색이 변합니다.
이것이 가인이었습니다. 여인의 후손으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해줄줄 알았던 기대감은 무너지고 더욱 나빠졌습니다.
여러분,
참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십자가의 보혈의 예배, 성령의 예배, 사랑의 예배, 용서의 예배, 감격스러운 예배가 드려질 때 여러분의 예배는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예배가 온전히 드려질 때 여러분 안에 있는 분노와 거절감의 상처가 사라질 것이며 여러분의 얼굴의 상처가 치유될 것입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가인의 인생은 비참해졌습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여러분은 아벨의 후예인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에 이 모든 저주가 떠날 것이며 거절감도 떠날 것이며 분노도 떠날 것이며 안색이 변하는 인생은 살지 않을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을 기쁘게 하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예배를 드리십시오. 보혈의 피로 드리는 예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줄 믿습니다.
>출처/저자| 하용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