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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통행로사유의 유격전을 위한 현대의 교본
저자 발터 벤야민
번역 조형준
출판사 서평
20세기에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산 지식인이자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독창적인 사유를 펼쳐 보인 사상가로 평가받고 있는 발터 벤야민의 보석 같은 사유와 상식을 뒤엎는 몽타주적 글쓰기의 전범으로 널리 알려진 ??일방통행로??가 국내 초역으로 나왔다. 뷔퐁은 이미 18세기에 ‘문체는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말했지만 벤야민에게서 그것은 ‘문체는 바로 그의 삶이다’라는 말로도 확장될 수 있는데, 우리는 이 ??일방통행로??에서 사유의 번뜩임이 기상천외의 몽타주적 글쓰기와 얼마나 절묘하게 결합될 수 있는지를 볼 수 있다.
벤야민은 그동안 아포리즘적 사유, 몽타주적 글쓰기, 사유의 이미지의 조탁가 등으로 알려져 왔으나 막상 그의 이러한 면모의 진상을 보여주는 글은 번역되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예를 들어 아래와 같은 짧은 단상 하나만 읽어보아도 우리는 당장 ‘벤야민적인 사유와 글쓰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쉽게 포착할 수 있다.
“내 글 속의 인용문들은 노상강도 같아서 무장한 채 불쑥 튀어나와 여유롭게 걷고 있는 자에게서 확신을 빼앗아가 버린다.”
즉 이것은 전복(顚覆)의 사유의 전형을 넘어서 사유의 본질 자체에 대한 벤야민의 생각을 간략하게 전달하면서 기존의 상투적인 글쓰기와 날카롭게 각을 이루는 것이다.
진리는 ‘돌발적인 것이고’, ‘놀라움’에 기반한 것이라는 것, 그리고 인용이라는 극히 상투적인 아카데미즘의 도구를 바로 그러한 돌발적이고 섬광 같은 사유를 위한 무기로 사용한다는 것 등은 그의 사유가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것은 그의 연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벤야민에게서 ‘사랑’은 ‘놀라움’과 뜻밖의 선물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불원천리하고 러시아의 리가에 살고 있는 연인 아샤 라시스를 불시에 찾아가며, 여행에서는 받는 사람을 깜짝 놀래킬 선물을 고르는 것에서 고통과 희열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 엄숙주의와 사유의 고루함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던 기성 제도에 맞서는 벤야민식의 사유의 도전이었다. 아마 ‘책과 매춘부’를 결합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벤야민뿐일 것이다.
“책과 매춘부는 침대로 끌어들 수 있다.” “책과 매춘부 ― 양자에게는 저마다 이들을 갈취하고 괴롭히는 남자들이 달라붙어 있다. 책에는 비평가들이.” “책과 매춘부 ―
전자의 각주가 후자에게는 양말 속의 돈(foot-note).” 이러한 아포리즘을 읽으며 우리는 어느덧 통상 지식인들이 생각하는 바와 달리 책이 무슨 성스러운 정신의 산물인 것만이 아니라 이미 상품 물신주의의 회로에 포섭되어 있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는 벤야민의 혜안과 함께 오늘날의 기계적인 비평과 제도화된 글쓰기를 반성하는 우울한 시선에 공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벤야민에게서 정작 놀라운 것은 그의 빼어난 현대성이다. 벤야민은 살아생전에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같은 비판적 마르크스주의 진영, 브레히트 같은 좌파 작가들, 칼 슈미트와 같은 우파 이론가들과 다양한 정도의 친소 관계를 맺었지만 막상 그가 가장 매료된 것은 마르셀 프루스트와 19세기의 파리였다. 그는 당시의 대학이란 제도 밖에서 이방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지만 사유에서도 철저한 아웃사이더로서 고독한 단독자의 사유를 펼쳐 보인 바 있다. 하지만 당대에는 홀대받았던 그러한 이방인적 사유와 단독자적 시선만큼 20세기도 다 저물고 21세기의 정보화 시대에 접어든 지금의 우리 현실에 살갑게 다가오는 것도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비평의 죽음 또는 문학의 죽음과 관련해 벤야민의 다음과 같은 글을 읽어보자.
“바보들이나 비평의 쇠퇴를 이야기한다. 비평의 명맥이 끊어진 지 오래인데도 말이다. 비평이란 정확하게 거리를 두는 문제이다. … 그런데 오늘날 사물의 핵심에 가장 본질적으로 가 닿는 시선은 광고라고 불리는 상업적 시선이다. … 하지만 일반 사람들에게 사물들이 그런 식으로 다가오도록 하는 것, 사물과 적절하게 접촉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돈이다.”
문학의 죽음이나 비평의 죽음은 비평-광고-돈이라는 삼각형과 관련 있다는 벤야민의 솔직하고 정곡을 찌르는 지적은 새삼스레 ‘인문학의 죽음’, ‘정신의 패배’ 운운하고 있는 현금의 우리의 아카데미즘의 ‘바보들’에게도 경종이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의 소개는 뒤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오히려 인문학, 비평, 문학이 모두 죽음의 조종을 울리고 있는 우울한 지금, 글쓰기와 사유의 본질에 대해 오히려 많은 것을 시사하고 암시해줄 것이다.
우선 이 책의 목차만 본 독자들은 도대체 무슨 제목이 이런 식으로 되어 있나 하고 의아함과 낯설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선 제목만 전부 훑어본 독자라면 이 책의 소제목들로만으로도 벌써 어떤 여행을, 그러니까 20세기 초의 독일의 어느 대도시를 여행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남성용’이라는 화장실 표시(여성용은 보이지 않는다), ‘돌아오너라! 모든 걸 용서하마!’라는 신문의 광고 문구, ‘계단 주의’, ‘독일인이여, 독일 맥주를 마시자!’라는 선동적인 문구, ‘거지, 잡상인 사절’ 등 그때나 지금이나 대도시 어디에서나 부딪힐 수 있는 세목들이 이 책의 소제목들로서 하나의 우주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 도시는 ‘독일인이여, 독일 맥주를 마시자!’라는 선동적인 문구와 ‘마담 아리안느’와 같은 점 집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대도시에 걸맞게 활기차고 민주적인 어떤 도시가 아니라 파시즘으로 향하고 있는 듯한 짙은 조짐을 보이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이러한 제목의 몽타주는 대조와 충돌을 통해 대도시의 삶에 대한 독특한 일별을 가능하게 해주는 동시에 각 소제목 아래의 글들과도 충돌과 대조를 통해 사유의 불꽃을 튕겨 올린다. 예를 들어 ‘독일인이여, 독일 맥주를 마시자!’라는 소제목하의 글은 우중(愚衆)의 계산성에 대해, 그리고 ‘거지, 잡상인 사절’에서는 거지를 환대하던 과거의 전통과 거지가 공개된 치부가 된 현대를 대조하고 충돌시키면서 노동의 본질에 대해 되묻는다. 이런 식으로 벤야민은 아우라를 환기시키는 동시에 지우는 등의 방법으로 몽타주적 글쓰기를 통해 돌발적 선물로서의 사유를 실천해 보인다. 마치 현대의 짧은 광고 문구나 선전 용어보다 더 빼어나게 온갖 도시의 사물의 핵심을 찌르고 있는 벤야민의 보석 같은 아포리즘들은 우리가 잃어버린 사유의 힘을 되돌려줄 수 있는 최고의 자극제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주유소
아침 식당
113번지
남성용
표준 시계
돌아오너라! 모든 걸 용서하마!
영주의 장원처럼 고풍스러운 가구를 비치해놓은 10칸짜리 아파트
중국 도자기 공예품
장갑
멕시코 대사관
알리는 말씀: 우리 모두 산림을 보호합시다
건설 현장
내무성
깃발……
…… 조기 위치에
카이저 파노라마관
지하 공사
까다로운 숙녀 분을 위한 미용사
계단 주의!
공인 회계사
교재
독일인들이여, 독일 맥주를 마시자!
벽보 부착 금지!
13번지
무기와 탄약
응급 처치
실내 장식술
문방구
장신구
확대 사진들
골동품
회중시계와 금은 세공품
아크등
로지아
습득물 보관소
마차 세 대까지 주차 가능
전몰 용사 기념비
화재경보기
여행 기념품
안경점
장난감들
외래 환자 진료소
세놓음
사무용품
한 개씩 포장한 화물: 운송과 포장
재단장을 위해 폐업함!
셀프서비스 레스토랑 ‘아우게이아스’
우표상
예, 이탈리아어 할 줄 압니다
응급 기술 원조
잡화
세금 상담
궁핍한 사람들을 위한 법적 보호
야간용 의사 호출 벨
마담 아리안느, 좌측 두번째 안뜰
가장용 의상 대여점
마권 판매소
비어 스탠드
거지, 잡상인 사절!
플라네타리움에 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