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살고 싶은 이유
낯선 도시에서 비밀스러운 삶을 살고 싶은 게 내 꿈이다.
내가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이지 않을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낯선 사람들에게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라도
나는 실제 있는 그대로 보다
더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보였으면 싶다.
예를 들어서
실제로 어떤 나라를 가보아서 알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모르는 척하고 싶다.
내게는 익숙한 어떤 사상을 누가 장황하게 이야기한다면
나는 그런 것을 처음 듣는 것처럼 하고 싶다.
누가 나의 사회적 지위를 묻는다면
나는 지위를 낮추어 대답하고 싶다.
내가 실제로 감독이라면 인부라고 말하고 싶다.
유식하게 떠드는 사람의 말을 듣기만 할 뿐
이의를 말하지 않았으면 싶다.
나는 ‘격’이 낮은 사람들과 왕래하고 싶다.
- 장 그르니에의《섬》중에서 -
* 장 그르니에가 파리를 좋아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적은 대목이다. 장 그르니에는 프랑스의 작가이며 철학 교수를 지낸 사람이다. 68뇬 프랑스 정부가 주는 문학대상을 받기도 했다. 《섬》은 그가 쓴 여러 에세이집 중 하나다. 그가 파리를 좋아하는 이유가 재미있다. “무엇인가 감출 것이 있는 사람들에게”알맞는 도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2중, 3중 혹은 그 이상의 생활도 영위할 수 있는 곳이 파리라는 것이다. 뭔가 감출 만한 일이 있는 사람이 어찌 장 그르니에뿐일까. 나를 포함해서 우리 주변에도 장 그르니에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서울은 파리에 못지 않은 훌륭한(?) 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