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어른
추적추적 비 내리던 날, 우산에서 떨어진 빗물로 버스 바닥이 젖어 있었다. 미끄러질까 조심스레 뒤쪽으로 가는데 왜소한 할아비지가 차에 올랐다 사람들을 비집고 뒤쪽으로 오는 노인의 눈은 '좌석 탐색기'였다 뒷문 바로 앞에 앉아 계셨던 어느 분이 선뜻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다 오직 좌석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노인은 고맙단 인사도 없이 철푸덕 앉았다 그리고 뒤이어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뒤쪽으로 왔다. 학생 하나가 일어나 자리를 양보해주었다. 훈훈한 광경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허리굽은 할머니와 좌석 탐색 할아버지는 부부였고, 자리에 먼저 앉았던 할아버지는 뒤 따라온 할머니를 거들떠보지 않고 당신만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리를 양보한 분은 중절모를 쓴, 키가 훤칠한 할아버지였다. 결코 자리를 양보받은 할아버지보다 어리다고 할 수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그 배려 깊은 태도는 그분을 젊고 멋진 신사로 보이게 했다. 몸이 불편하고 힘이 드니 않기를 바랐던 노인분의 심정은 헤아릴 수 있으나, 않는 자리만 탐한 노인은 아마도 자신에게 자리를 양보한 분이 자신보다 결코 어리지 않음을 생각도 못 했을 거다. 모른 척한 게 아니라 보지 못한 거라 믿고 싶다. 중절모 할아버지는 자신보다는 삶에 지쳐 노곤해 보였던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셨으리라. 미끄러운 바닥에 힘없는 노인이 위태롭게 서 있기보다는 젊으니 자리를 양보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젊은 누군가가 비켜주겠지.'가 아니라 당신이 주저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
누구나 나이를 먹고 늙어가고 노쇠해진다. 그럼에도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는 각자의 태도와 선택에 달려있다. 20여 년
전에 만났던 아름다운 신사분을 나는 선명하게 기억한다.
제자리를 계속 디디며 걷는 걸음은 멀리서부터 시선을 잡아끌었다 아침 일찍 필라테스를 하고 집으로 가기 위해 대로변 신호등 앞에 멈쳤다. 지팡이 짚은 백발의 할아버지가 발걸음을 재촉하며 부지런히 걷고 계셨다. 하지만 그 걸음은 거의 러닝머신 위의 제자리r걸음이었다. 지하철 출입구를 물어보셨는데 바로 옆이 지하철 출구였다. 코앞에 있는 출구 번호도 고개를 들고 찾아보기 버거우신 듯했다. 다른 출구 번호를 다시물으셨고 50m 정도의 옆 출구였다. 결국, 알고 싶은 건 에스컬레이터 유무였다. 늘 다니는 길이었음에도 그 출구를 이용하지 않으니 에스컬레이터가 있는지 없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보았으나 보지 못해 머리에 남아있지 않았다. 인간은 역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운동 후에 맥이 빠진 상태여서 잠시 망설였다. 이른 아침부터 태양은 뜨겁고 땀에 젖은 몸은 얼른 씻기를 원하고.. 핑계다. 귀찮았다. 할아버지가 "그것까진 잘 모르죠?"라고 묻고는 신호등 너머 엘리베이터를 쳐다보셨다. 그리고 다시 바로 앞 지하철 출구를 쳐다보며 망설이셨다. 대로변이라 길 건너의 엘리베이터까지는 한참을 걸어야 하고 그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서도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는 또 거리가 있고, 할아버지 걸음에 계단은 너무 무리일 테고.. 동선을 가늠하며 '짱구' 를 굴렸다. 그러다 옆 출구에 갔다 오는 게 빠르겠다는 뒤늦은 행동력을 발휘했다.어차피 땀은 흐르고 있었다.
유레카! 옆 출구에서 나는 발견하였다. 정말 다행이었다. 물론 할아버지에겐 여기까지도 먼 거리일 테지만. 기쁜 마음으로 할아비지에게 달려가는 내 발걸음이 날았다. 가까이 가기도 전에 "에스컬레이티가 있어요" 들뜬 나의 외침에 푸른 신호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쳐다보았다. 별일도 아닌데 그 몇 초를 왜 망설였을까. 할아버지는 두 손을 합창하며 90도 인사를 하셨다. 나도 죄송한 마음과 어르신의 그 마음을 받아 90도 인사로 화답하였다. 그러는 동안. 신호등은 바뀌어 사람들이 건너갔다. 얼굴이 밝아진 할아버지는 옆 출구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고, 나는 조심히 가시라는 인사를 건넸다. 그늘도 없는 한여름 땡별에서 보람찬(?) 땀을 홀리며 나는 신호가 바뀌길 다시 기다리며 할아버지의 걸음을 지켜봤다. 저절로 노래가 흥얼흥얼 흘러나왔다. 유쾌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나 역시 노인이 되어가리라. 그렇더라도 마음까지 늙고 싶지는 않다. 나이와 상관없이 사람에게 배려하는 멋쟁이 할아버지처럼, 젊은(?) 사람의 별일 아닌 사소함을 별일로 받아들이며 고마움을 표하는 백발 할아버지처럼, 아름답게 나이 들고 싶다. 그런 '어른'이 되어야 할 텐데. 하루하루 아름다운 나날을 살 수 있을까? 한 번씩, 가~끔이라도 아름답게 살아보자. 아자!
손지안
varan1404@hanmail.net
젊음과 나이 듦이 순식간에 교차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22살로 살아가고픈, 철들지 않은 사람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