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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민주올레 행사에 다녀왔습니다.
대략 300명~500명 가량의 시민들이 참여하였습니다.(힘들어서 중간에 올레를
포기한 분들도 계시고, 올레길 중간에 합류한 분들도 계셔서 정확한 집계는
어렵지만 최소 300명에 최대 500명 가량의 시민들께서 참여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비가 내린 탓에 생각한 것 보다 사람들이 많이 나오지 않아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알찬 행사였습니다. 우리가 잊고 있던 3.1절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의
숭고한 정신과 함께, 우리가 일상적으로 지내던 공간에 과거 순국선열들이
피를 흘리며 민족의 자유를 위해 싸워왔던 공간임을 되세겨 주는 행사였습니다.
3.1 민주올레의 코스입니다.
중앙보고 기숙사에서부터 서대문형무소 역사 박물관에 이르기까지 장장 6시간이
넘는 긴 올레길이었습니다. 지금부터 사정이 있어 올레길에 참여하지 못하신
분들께서는 저와 함께 그 자취를 살펴보도록 하지요^^
3.1일 운동이 처음 논의 되었던 중앙고등학교 기숙사 앞에서 출발한
올레행령을 제일 먼저 만해 한용운 선생의 옛 집이 있던 곳으로 왔습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옛집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의 통합 모임이 이루어진
곳으로 그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큰 곳입니다. 또한 과거의 모습에서 크게
보수하지 않아 옛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아직까지 서울시로부터 문화제로 지정 되지 않아 언제
허물어질지 모르는 곳이기도 합니다. 하루빨리 이곳이 서울시의 문화제로
지정되어 역사적 가치에 맞는 합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올레 행사를 따라 유적지에 도착할 때마다 이렇게 유적지에 관한 설명이 담긴
피켓을 들고 있는 도우미 분들이 계셨습니다.
오늘 하루 종일 올레 행사를 위해 고생하신 도우미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피켓 드는 건 저도 아주 잘 하는지라 조금 미안해 지더군요^^;
1인 시위 238일로 단련 된 피켓 들기의 능숙함을 썩힌 채 태연하게 행사에
참여하는거 같아 죄송했습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옛 집터에 이어서 올레 행렬이 온 곳은 바로 손병희 선생의
옛 집터입니다. 이곳은 민족대표 33인이 처음으로 얼굴을 대면한 곳입니다.
1919년 2월 28일 저녁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양전백, 길선주, 이명룡, 김병조,
정춘수, 나인협, 홍기조, 양한묵, 백상규를 제외한 23인이 서로 얼굴을 익히고
독립선언식의 절차를 협의하기 위해 이곳 손병희 선생의 집에서 회합을 가졌습니다.
현재 이곳에는 북촌미술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올레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아름다운 돌담길을 따라 걷고 있는 모습입니다.
서울의 옛 고택들이 즐비하게 모여 있는 곳을 두루두루 걸은 탓인지 서울이
고도로 발달한 문명의 도시가 아닌, 옛 문화의 풍취가 살아 있는 도시 처럼
느껴져 매우 기분이 좋았습니다.
서울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된거 같이 기쁩니다.
올레 행사에 참여하여 시민들과 함께 길을 걷고 있는 이해찬 총리님이십니다.
이번 3.1절 민주올레 행사의 아이디어를 직접 제시하셨다고 합니다.
총리님 덕분에 좋은 역사 공부를 하게 된 거 같아 너무 기쁩니다.
총리님께선 앞으로 4.19 민주올레와 6.10 민주올레도 할 예정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오늘 3.1 민주올레에 참여하지 못한 분들께서는 4.19와 6.10의
민주올레 행사 때 꼭 참여해 주세요!^^
천도교 중앙총부의 옛 터입니다.
이곳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하던 천도교와 기독교계 인사들이 모여 마침내
3.1 운동의 합작을 논의하게 되었습니다. 3.1 운동을 탄생 시킨 역사적인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이 곳에는 덕성여자중학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보성사의 옛 터가 있는 자리입니다.
보성사가 있던 자리에는 현재 조계사가 위치해 있으며,
이곳에서 3.1 독립선언문의 인쇄가 이루어 졌습니다.
이곳은 2008년 촛불들에게 매우 익숙한 안국동 사거리가 있는
지역입니다. 2008년 5월 31일에 이곳에서 수많은 촛불들이
바퀴벌레 처럼 몰려드는 수많은 전경들의 군화발에 짓밟혀
피를 흘려야만 했던 곳입니다.
2008년 촛불집회가 있을 때 이곳에 참 많이 왔었는데,
90년 전에 이미 이곳에서 독립운동을 위한 순국선열들의 얼이
자리하고 있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90년이라는 긴 시간의 터널 속에서 '독립'과
'민주주의'라는 숭고한 신념을 통해 한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민족을 잔인하게 짓밟은 이토 히로부미의 조선총독부와
츠키야마 아키히로의 2MB 정부는 민중을 폭력으로 억압한다는
점에서 참 닮은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보성사의 사장이던 이종일 선생의 옛집 터입니다.
1919년 2월 28일에 이곳에서 3.1 독립선언서가 전국 각지로 배포되어
거족적인 독립운동의 발판이 마련 되었습니다.
이곳은 현재 수운회관의 뒷자리로, 소파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운동
기념비가 서 있는 곳입니다. 소파 방정환 선생께서는 손병희 선생의
사위로, 천도교 기관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이종일 선생을 도와
<독립신문>을 발행하여 중학생들의 도움으로 돌리다가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고문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곳은 인사동의 태화관 옛 터입니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 중에 29인이 참석한 가운데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장소입니다. 이곳은 본래 인조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인데 이후, 세도가인
안동김씨 김흥근의 저택이 되었다가 현종의 후궁 김씨의 순화궁으로 그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1907년 매국노 이완용의 소유가 되었다가
요리집 명월관이 이완용에게 이곳을 임대 받아 태화관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술집과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몰려 있는 인사동 골목 안에 위치한 곳으로
현재는 건설자재 생산업체인 성신양회의 사옥이 위치한 곳입니다.
인사동에서 사람들과 술을 마시거나 데이트를 하면서도 이곳에 이처럼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여태 모르고 있었던 것이 부끄럽습니다.
인사동의 승동교회입니다.
이곳에서 3.1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의 지도부가 모여 역할을 배분하고
회의를 했던 곳입니다. 승동교회 건물은 1902년 11월에 준공되어
1958년 12월에 증개축 하였습니다. 때문에 과거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진 않지만, 아직도 절반 가량은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민주올레 행렬이 드디어 탑골공원 입구에 도착하였습니다.
탑골공원 입구에서는 3.1절 행사가 한참 진행 중이었습니다.
3.1 운동의 발화지인 탑골공원에 위치한 손병희 선생의 동상입니다.
독립선언문이 적힌 비석 앞에 3.1절을 기념하는 화환들이 모여 있습니다.
기분 나쁜 것은 '츠키야마 아키히로'씨가 보낸 화환이 중앙에 가장 크게
놓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츠키야마 아키히로 씨의 화환을 보며 민주올레에 참여한 모든 분들께서
이를 갈았는데, 등산복을 입은 어떤 아저씨께서 용감하게 스티커 한 장을
화환에 붙여 주셨습니다.
나쁜건 딱 끊어야지요!
대한민국 국민여러분, 대한민국을 좀먹는 한나라당과 조중동, 뉴라이트 같은
암적인 존재들은 이제 그만 모두 끊읍시다!!
여러분의 자녀분들까지 이런 암적인 존재들 때문에 피해를 입게 됩니다.
탑골공원에서 국악인께서(이름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ㅜ_ㅜ)
안중근 의사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판소리로 불러주셨습니다.
본래 행사의 주최인 시민주권 모임에서 음향시설을 준비했으나
경찰들이 탑골공원 안에 음향시설을 가지고 들어가지 못하게 해서
어쩔 수 없이 이동형 소형 마이크로 공연을 하셨습니다.
성남 봉국사의 주지이신 효림스님께서 나오셔서 민주주의가 다시 일어서기를
기원하는 시를 읊어 주셨습니다.
탑골공원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을 절절하게 울리는 좋은 시였습니다.
탑골공원을 나와 종각 쪽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1인 시위를 하는 분을
만났습니다. 이번 설에 서울역에서 제가 1인 시위를 할 때 피켓을 들고
나와 옆에서 1인 시위를 하셨던 익명의 참여자 분이셨습니다.
이렇게 민주올레 행사에서 또 뵈니 몹시 반갑더군요^^
서울 시민이라면 거의 대부분이 알고 있는 종로에 위치한 YMCA 빌딩입니다.
본래 YMCA회관은 1908년 12월에 준공되어 옆에 있는 한미전기회사와 더불어
1900년대 초기 종로의 전통적인 경관을 근대적인 경관으로 바꾸는데 일등
구실을 했습니다. 그러나 1950년 전쟁으로 인해 소실되었다가 1960년부터
1967년에 걸쳐 현재의 빌딩으로 준공 되었습니다.
과거 다양한 시국강연회가 열리던 장소로 3.1운동 초기에 학생대표자들의
모임 장소로 사용되었던 곳입니다.
YMCA빌딩 앞의 종로 지하도를 모르는 분은 거의 없으실 것입니다.
YMCA빌딩의 맞은편에 과거 종로경찰서가 있었으며, 그 종로경찰서에서
3.1운동에 참여했던 독립투사들이 수도 없이 고문을 당했던 곳입니다.
지금은 종로의 먹자골목이 형성되어 젊은이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곳에 모여 술을 마시며 노는 곳인데, 과거에는 이 곳에서 독립투사들이
고문을 당하면서도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곳입니다.
YMVA빌딩 앞에 위치한 지하도 옆에 김상옥 의사의 거터기념비가 있습니다.
독립운동의 영웅인 김상옥(1890년~1923년) 의사는 서울의 어의동(지금의
효제동)에서 출생했는데 아버지는 구한말의 구인이었습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성장한 김상옥 의사께선 14세 부터 낮에는
철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공부하면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김상옥 의사께선 23세(1912년)부터 철물상회를 열어 경영 하였으며,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김상옥 의사께서는 3.1 운동이 일어나자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는데, 1919년 4월 동대문교회 안의
영국인 피어슨여사 집에서 혁신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혁신공보>를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계솜, 고취하였습니다.
3.1운동의 열기가 가라앉자 1919년 12월 민족반역자 처단 암살단을
조직하였으며, 1920년 4월에는 친일민족반역자 수명을 처형하고 오성
헌병대분소를 습격하여 장총 3정 등을 탈취하였습니다. 또한, 1920년 8월
미국의원단이 동양 각국을 시찰하는 길에 내한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환영을 나오는 사이토 총독을 암살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일본경찰에게
사전에 탐지되어 동지들이 붙잡혀 홀홀단신으로 거사를 추진 하였으나
여의치가 않아 1920년 10월에 상해로 망명을 하게 됩니다.
상해 도착 직후인 1920년 11월에 의혈단에 가입하였으며, 1921년 7월에는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국내로 다시 들어와 충청도, 전라도 등지에서
자금을 마련해서 다시 상해로 돌아갔습니다.
1923년 1월 사이토 총독이 일본제국의회 참석차 동경행을 하는 것을 기회로
암살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하였다가, 압록강철교를 건너면서 경비경관을
사살하고 신의주에서는 세관검문소 보초를 권총으로 때려눕혔습니다.
상해주재 일본 경찰의 통보로 당시 서울은 이미 삼엄함 경비에 들어가 사이토
총독의 암살은 결국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김상옥 의사는 1923년 1월 12일 밤에 종로경찰서를 향해 폭탄을
던졌습니다. 폭탄 테러는 성공을 거두었으며, 위의 사진에 나온 터가 바로
김상옥 의사께서 폭탄을 던졌던 곳입니다.
후에 김상옥 의사는 경찰들에게 쫓기다가 1923년 1월 22일 효제동 은신처에서
기마대와 무장경관 수백 명을 상대로 두 자루 권총을 든 채 단신으로 3시간 30분
동안 총격전을 벌여 10여명을 사살하였으나, 탄환이 떨어지자 마지막 남은 권총
한 발로 벽에 기댄 채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자결, 순국하셨습니다.
한 사람의 젊은 청년이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싸워온 곳이 바로
지금 21세기의 젊은이들이 매일같이 술에 취해 있는 곳입니다.
김상옥 의사의 거터 기념비에서 술에 취해 앉아 있거나 토악질을 하는 사람들을
과거 여러차례 보아왔기 때문에 몹시 가슴이 아팠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서울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순국열사들의 얼이 남아 있는
유적을 항상 생각하며, 역사 앞에서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3.1 운동이 벌어졌던 종로의 거리입니다.
지금은 술에 취한 젊은이들로 가득한 거리입니다...
공평동 옛 경성지방법원의 터입니다. 과거 이곳에서 독립투사들이 재판들
받던 곳입니다. 현재 종각의 제일은행 빌딩이 있는 곳으로, 3.1운동의
주요한 유적지입니다. 이곳에 위치했던 경성지방법원 건물은 6.25때도
파괴되지 않았으나, 1957년에 재개발 되는 과정에서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재개발 건축업자들 앞에서 역사의 유적지는 늘 무시 당하곤 하지요...
광화문에 위치한 비전입니다. 이곳은 3.1운동 독립만세 시위가 벌어졌던
현장입니다. 비전의 비는 '대한제국대황제보령망육순어극사십년칭경기념비'
라는 긴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고종황제의 즉위 40년을 기념하는 비석입니다.
광화문 네거리의 교보빌딩 앞에 위치한 곳으로 오늘날에는 문화제 보호를 위해
각을 설치하여 비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촛불집회 때 많은 시민들이 시위를 구경하겠다고 이곳 비각 안으로 들어갔었는데,
그때 지킬 건 지키자며 비각에 올라가는 시민들로 하여금 밖으로 나가도록 계속
설득하고 주변에 널린 쓰레기를 줍던 일이 생각납니다.
3.1운동의 현장이었던 광화문 네거리는 그 정신을 이어받은 촛불시민들에 의해
2008년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역사는 뫼비우스의 띠 처럼 반복 된다는 말이 정말 맞는것 같습니다.
비각이 위치한 광화문 네거리 일대에는 경찰병력들이 철통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청와대에서 츠키야마 아키히로씨께서 몹시 겁이 났나봅니다.
경찰이 없으면 단 하루도 유지될 수 없는 정권... 참 불쌍한 정권입니다.
그리고, 그런 정권의 통치 아래에서 살고 있는 우리 국민들은 정말
불쌍한 국민인 것 같습니다.
이 지긋지긋한 역사의 고통이 언제 쯤 끝나게 될까요?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대한문 앞입니다.
과거 3.1운동 때 만세시위가 벌어졌던 곳입니다.
그리고... 2009년 여름에 노무현 대통령님의 분향소가 위치했던
곳이기도 하지요...
경찰의 닭장차가 대한문을 가로막은 채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님께
분향하려는 시민들의 발걸음을 가로막는 만행을 저질렀던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서울경찰청장 주상용이 닭장차 덕분에 분향소가 아늑해 졌다는
망발을 일삼기도 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막장도 정말 이런 막장이 없습니다.
이놈의 막장 정권은 도대체 언제 쯤 끝나게 되는 것일까요?
미국영사관과 정동제일교회 앞입니다.
미국영사관 앞에서는 3.1운동 만세시위의 행렬이 길게 늘어섰으며,
정동제일교회에서는 기독교계의 민족대표들이 서명을 하고
고보학생 대표들이 모였던 곳입니다.
또한 이 곳에는 배재학당의 기숙사가 위치했던 곳으로, 3월 5일에 있었던
남대문역 앞 학생연합시위의 예비모임이 있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유관순 열사의 우물터입니다. 이화여고 안쪽에 위치한 곳으로,
과거 유관순 열사께서 이곳에서 빨래를 하셨다고 합니다.
유관순(1904~1920) 열사는 충남 천안에서 출생하셨습니다.
1916년 기독교 감리교 공주교구의 미국인 여자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의 교비생으로 입학하셨습니다.
1919년 3월 1일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화학당 고등과 1년 생으로
참가하셨습니다. 3월 5일 남대문역 앞 학생연합시위에 참가한 후
학교가 휴교하자 고향으로 내려가셨습니다.
고향에서는 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가 일어났는데,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는 지령리 교회(현 매봉교회)의 두 기둥이었던
조병옥 박사의 아버지 조인원 선생과 유관순 열사의 아버지인 유중권
선생께서 참여한 시위였습니다. 수천 명이 모인 만세시위에서 유관순
열사는 선봉에 서서 시위를 벌였는데, 일본헌병들은 이곳에서 총을
발포하여 잔인하게 시위를 진압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유관순 열사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본헌병의 총칼에 피살당했으며, 유관순 열사께서는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의 주동자로 검거되어 무자비한 고문을 받게 됩니다.
유관순 열사께서는 공주지방법원에서 3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이에 불복,
항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의 한국침략을 규탄, 항의하고, 일제법률에 의하여 일제법관에게
재판을 받는 것은 부당함을 역설하다가 법정모욕죄를 적용 받아 징역 7년을
선고 받게 되었습니다.
유관순 열사께서는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에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불굴의 투혼으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옥중투쟁을 계속 하다가
1920년에 17세의 나이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셨습니다.
이곳의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던 한 어린 소녀의 삶입니다...
이곳은 백범 김구선생이 거주하셨던 경교장입니다.
강북삼성병원의 안쪽에 위치해 있어서 마치 부속건물처럼 보이지만,
이곳은 별개의 건물입니다.
경교장은 파란 많은 해방정국에서 임시정부의 공관, 한국독립당의 활동,
반탁운동의 중심지로 사용되어 역사적인 의미가 매우 큰 곳입니다.
1949년 6월 26일 정오에 백범 김구 선생님께서 안두희의 총탄에 피습당해
서거하신 곳도 바로 이곳 경교장입니다.
올레길에서 마주친 홍난파 선생의 옛집입니다.
동화 속의 집처럼 예쁜 집이더군요.
올레길을 걷다가 그냥 잠시 마주친 유적지입니다.
계동에 위치한 딜쿠샤 가옥입니다.
딜쿠샤는 흰두어로 '행복한 마음', '희망', '기쁨, '이상향' 등을 의미합니다.
딜쿠샤 가옥은 UPI 통신의 서울특파원이었던 알버트 테일러가 살던 집입니다.
알버트 테일러는 일본의 철저한 감시를 뚫고 독립선언문과 3.1운동에 대한
기사를 미국에 보냈으며, 그로 인해 전세계에 3.1운동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딜쿠샤 가옥은 아직도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딜쿠샤 가옥의 맞은편에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우뚝 솟아 있습니다.
이곳이 임진왜란 때 도원수를 지냈던 권율 장군의 옛 집터인데,
저 은행나무는 권율 장군이 심은 나무로 추측 되고 있습니다.
독립문입니다.
본래 독립문의 위치는 이곳이 아닌데, 1979년 성산대로 공사를 하면서
효율만 앞세운 개발지상주의로 인해 독립문은 이곳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독립문의 건립을 제안했던 서재필 선생의 동상입니다.
독립문에서 서대문 형무소로 향하는 길에서 아까 종로에서 1인 시위를 하던
분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투표를 독려하는 피켓으로 바꾸어
드셨습니다.
마침내 서대문형무소 역사 박물관 앞에 도착하였습니다.
3.1절 민주올레의 긴 여정의 막을 내리는 장소입니다.
과거 이곳 서대문 형무소에서 수많은 순국선열들이 모진 고문을 당하며
옥고를 겪어야만 했던 곳입니다.
6시간 동안의 긴 민주올레 행사를 완주하신 KBS 정연주 사장님이십니다.
많이 힘드셨는지 자리에 털석 주저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고 계십니다.
함께 민주올레를 걸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기념사진도 함께
촬영했는데, 참 인간적이고 좋으신 분 같습니다.
인간적인 면모가 MBC의 사장이셨던 최문순 의원님에 버금 가는 것 같습니다.
참여정부 시절에 방송국 사장을 지내신 분들은 다들 왜 이렇게 인간적이고
푸근한 걸까요?^^;
서대문 형무소로 향하는 길에서 아까 종로에서 1인 시위를 하던
분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투표를 독려하는 피켓으로 바꾸어
드셨습니다.
민주올레를 무사히 완주한 어떤 가족분들이 이해찬 총리님과 기념사진을
촬영했습니다. 이해찬 총리님의 옆에 서서 기념사진을 촬영한 소녀의 가슴에
달린 메달이 바로 민주올레 완주 메달입니다.
판화가인 이철수 화백이 제작한 메달이더군요^^
중앙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서대문 형무소 역사 기념관까지의 길고 긴
민주올레가 끝났습니다.
그동안 역사가 우리 주변에 함께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었는데, 이번 민주올레 행사를 통해 과거의 역사와 지금의
나와 함께 숨쉬고 있으며, 지금 우리의 역사가 다시 과거가 되어 미래의
사람들과 숨 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민주올레 행사는 역사의 산 교육 현장으로써 정말 모든 분들께 추천하고픈
좋은 문화 프로그램인 것 같습니다. 4월 19일과 6월 10일에도 이번 3.1절
민주올레와 유사한 형태의 민주올레 행사가 있을 예정이니, 이번 3.1절
민주올레 행사에 참여하지 못한 분들께서는 꼭 4.19 민주올레와
6.10 민주올레에 참여해 주세요!^^
시간이 흐른 후에 아마도 2008년 촛불 민주올레가 생겨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