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26일 연중
제17주일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요한 6,1-15)
When Jesus
raised his eyes and saw that a large crowd was coming to him, he said to
Philip, “Where can we buy enough food for them to eat?”
말씀의 초대
엘리사 예언자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여러 기적들을 일으켜 “하느님의 사람”이라 불렸다. 어느 날 그는 빵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였는데, 이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었다(제1독서). 에페소서에서는 신자들에게 성령 안에서 일치를 보존하라고 권고한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하느님도 한 분이시며
믿음도 하나이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이시어, 당신께서 이스라엘이 기다려 온
종말의 예언자이심을 드러내신다. 요한 복음 6장에서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은 성체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복음).
☆☆☆
오늘의
묵상
일반적으로 음식을
준비할 때 대부분의 주부들은 양을 조절하여 음식을 남기지 않으려고 합니다. 실수로 음식의 양을 맞추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래도 정확히
계산하여 준비하는 것이 주부의 마음일 것입니다. 혹시라도 음식이 모자라면 덜 먹으면 되겠지요. 그런데 적지 않은 주부는 이와는 달리 생각합니다.
음식은 남아야지 부족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명절이나 잔치 음식은 많이 장만하여, 찾아오는 이들에게 싸 주기까지 하는 것이 넉넉한
인심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지지하시는 듯합니다. 제1독서에서 엘리사도
보리 빵 스무 개로 백 명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는데, 과연 빵은 남았습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전하는데, 먹고 남은 조각만 해도 열두 광주리입니다. 열두 광주리, 충만한 양을 뜻합니다. 남은
것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그 빵을 먹은 이들이 배고픔만 간신히 해결한 것이 아니라 가득 채워졌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표징을 본 이들은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합니다. 그분을 통하여 인간의 기다림이 남김없이 충족되는
순간입니다. 오늘 복음 다음에
이어지는 요한 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빵을 먹는 이들에게, 당신께서는 배를 채울 빵만이 아니라 생명의 빵을 주시는 분이심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분명 빵의 기적은 위대합니다. 그러나 성체성사의 기적은 더 위대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 영육 생명의 근원이시고, 또한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 몸을 우리에게 내어 주심으로써 우리를 당신과 결합시키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 그분께서는 우리를
넘치도록 가득 채워 주십니다. “당신은 손을 펼치시어,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은혜로 채워 주시나이다”(화답송 참조).
저는 새벽 묵상
글을 올린 뒤에 전자 우편을 확인하고 자료들을 모으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합니다. 그리고 아침 운동을 하지요. 그런데 어제 새벽에는 뜻밖의 일이
생겼습니다. 묵상 글을 올린 뒤에 전자 우편을 확인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컴퓨터가 퍽 꺼지는 동시에 제 주변에 암흑이 찾아온 것입니다. 글쎄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전체에 정전이 된 것입니다.
아침 운동을 하려고
했지만 비가 오고 있어서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아침식사라도 하려고 했지만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준비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상태라 책을 읽기도 힘들었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할 수 있는 것들이 없자 점점 기분이 나빠집니다. 언제 전기가 들어오는지를 묻기 위해 관리실로 인터폰을 해도 받지를 않고, 직접 찾아가니
관리실은 비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정전이 한 시간을 넘어서자 마음속에서 화가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한전에서의 문제로 정전이 되었다는 공지가 두 번 정도 나온 뒤에 드디어 전기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제야 저는 제가 해야 할
일들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문득 예전에는 전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불편함을 잘 몰랐던 것 같은데, 이제는 전기 없이는 살기가 힘들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너무나 당연하게 사용하면서 지내면서 감사하지 않고 살았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주님과의 관계를 떠올려 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그
모든 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감사하게 살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내 뜻에 차지 않으면 불평불만을 던지기도 했었던 것은 아닐까요?
전기 없이 살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주님 없이 살기란 불가능한데도 말이지요.
오늘 복음은 빵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만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다는 것이지요. 이 놀라운 기적에
군중들의 반응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추대하면 예수님도 좋아하리라 생각했겠지요. 세상
사람들은 높은 자리, 즉 남을 누르고 지배하는 자리에 오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세상의 지위로 예수님께 환심을 사려고 했을 때,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복음은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지위로는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기 없이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
없이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음을 기억한다면 어떻게 함께 할 것인지를 늘 마음속에 담아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주님의 기준을 따라야
할 것이며, 세상의 지위를 탐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 뜻을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언제나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 없이 살 수
없는 우리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지금 해야 할 것들이 명확해지지 않습니까?
뒤처졌다고
분노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앞서 가는 자의 뒷모습도 소중한 교훈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당신도 누군가의 길이 될
것입니다(김원준).
행복한 삶이란?
건강검진을
받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검진 결과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아까운 시간과 비싼 돈을 치러 받은 건강검진에 대해서 후회를 할까요?
그래서 돈 낭비했다고 괴로워하면서 ‘다시는 건강검진을 받지 않겠다.’라고 다짐하십니까? 아닙니다. 병이 있다는 사실보다는 병이 없다는 사실에 더
기분이 좋아집니다. 중요한 것은 내 몸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이지요.
주님을 믿는다는
것에 대해 의심을 갖는 분들을 봅니다. 그분들은 지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서 신앙생활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식으로 말씀하십니다.
어렵고 힘들 때에만 주님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오히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음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어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서 굳이 성당에 다닐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주님과 일치하면서 그 안에서 참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음을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빵인
예수님
-박재식신부-
요즘 들어
선서(禪書) 「지월록」(指月錄, 명나라 구여직 저술)에 나오는 현상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신문과 방송은 핵심 사안에 대한 언급을 피하고
주변적인 것에 관심을 집중합니다. 정확한 근거를 대기보다는 소문을 언급하며 진실을 외면하려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 씀을 묵상하며 더욱 여실히 느낍니다. 오늘 복음에 대해 제가 접한 강론은 대개 세 가지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생명의 빵과 관련된 강론, 빵 두 개와 물고기 다섯 마리를 봉헌한 아이의 행동에 대한 강론, 마지막으로 물질적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강론입니다. 과연 복음서 저자가 요한복음 6장에서 간절하게 전달하고자 했던 내용이 이런 것이었는지
생각해봅니다.
요한복음서 전반부인
‘표징의 책(1,19-12,50)’에는 7가지 표징(기적과는 차이가 있음)이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라는 복음서 기록 목적의 일부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즉 표징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생명을 얻도록 도움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내용은 네 번째 표징입니다. 저자는 첫 번째 표징인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정결례에 사용될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과 성전 정화 사건을
기술합니다. 성전의 참된 의미를 가르쳐주며 예수님 자신이 성전임을 선포합니다(요한 2,1-2,22). 왕실관리의 아들을 살리는 두 번째
표징(요한 4, 43-54)에서는 죽음의 상태에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보여줍니다. 왕실관리는 가나의 표징을 체험하고 자신의
주관적인 관점(소원)으로 참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떠나며 참 신앙을 회복하게 됩니다.
세 번째 표징은
38년간 앓는 병자를 치유해 주는 것입니다(요한 5,1-18). 아마도 환자는 병과 주위의 선입견 때문에 진정한 안식을 체험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의 생명을 억압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모든 형식과 내용을 예수님께서 과감하게 제거하셨습니다. 바로 당신과 함께하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안식이며,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삶이라는 것을 선포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네
번째 표징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내 살을 먹고 내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5-56)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표징을 지켜본 무리는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선언하면서 자신들이 체험한 참 예언자(신명 18,15-22)인 모세나 다윗과 같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으로 모시려 합니다. 예수님을 로마 식민 통치 아래에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겪는 불의와 고통을
겪는 이들을 해방시켜줄 예언자로 생각하였음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현상적이고 현실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을 포함하고 초월하는 참 예언자이자 스스로가 영원한 생명임을 선언하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 표징을 통하여 이적, 신비, 기이한 현상 그리고 작은 기도에 거대한 하느님의 응답을 바라는 당대 유다인들의 외향 중심주의
신앙생활에 대해 비판을 가하시면서 진실한 생명의 양식은 바로 말씀이 사람이 되신 당신 자신임을 밝히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이
중요시하는 속죄일(정결 예식), 성전, 안식일 규정 등 외적인 것에 근거를 둔 신앙생활에서 하느님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신앙생활로 전환을
요구하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6월 25일 강론에서 참된 예언자는 “말을 들을 줄 알고, 들어서 자기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의
힘으로 행하는 사람이 진정 참된 예언자”라고 선언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인 예수님의 몸과 피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앞에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양승국신부-
공생활
절정기 예수님의 행적은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발길 닿는 곳 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몰려왔고, 평생 괴로움 속에 살아왔던
환우들이 그분 치유의 손길을 통해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교활하고 야비하기 짝이 없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도 예수님의 명쾌한 논리
앞에 꼬리를 내렸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는 기적을 통해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요한복음 6장 10절)
보십시오.
빵과 물고기로 배를 불린 군중의 수는 장정만도 오천 명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신앙 공동체 신자 수를 주도하는 분들은 여성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장정 오천 명에다가 장정에 두 배 정도 되는 여성 만 명에다가, 아이들까지 합하면 거의 2만 명에 달하는 군중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엄청난
수효의 군중을 이끌고 다니시며,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더불어 그들의 평생소원을 원 없이 채워주시던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를 부끄럽게도
만들며 부럽게도 합니다. 때로 달콤한 들 꿀 같고 때로 시원한 생명수 같은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좋았으면 사람들은 식음까지 잊고 예수님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거기다가 군중들의 주린 배까지 헤아리는 참으로 자상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예수님께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 앞에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 한 가지를 떠올려봅니다.
이제
기적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이제 더 이상 하늘만을 바라보지 말아야겠습니다. 이제 더 이상 특별하고 신기한 현상을 추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졸라대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제
기적은 우리 각자의 손에서 시작되어야겠습니다. 우리 각자 안에 잠재되어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들여다봅니다. 인간이 때로 아주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엄청난 가능성과 무한한 성장의 능력을 지닌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가능성을 최대한 발휘해서 이웃과 세상의 선익을 위해
아낌없이 사용하는 것, 바로 이 시대 기적입니다.
어제의
죄, 과거의 어둠, 지난날 우울의 장막을 걷고 또 다시 내일을 향해 활짝 창문을 여는 행위 역시 이 시대 기적입니다.
정말이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용서하는 모습이 또 다른 기적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사랑의 역사를 써내려가고자 하는 마음, 이 시대 기적입니다.
나도
배고프지만 더 굶주린 이웃을 향해 내 손에 들려있는 빵 한 조각을 양보하는 일이 또 다른 기적입니다. 내일 하느님께서 부르신다할지라도 오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그 사랑의 길을 걷는 발걸음이 또 다른 기적입니다.
때로
한심해보이고 때로 실망스러워보일지라도 또 다시 나를 존중하고 나를 소중히 여기며 내 인생이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또 다른
기적입니다.
수많은
군중을 배불리시기로 결심한 예수님 앞에 필립보가 말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복음 6장 7절)
인간의
눈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 앞에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 원하기만 하라 >
-전삼용신부-
황창연 신부님은
신학생 때부터 교회의 미래가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를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외국처럼 소득이
높아지고 5일제 근무가
시작되면 주일에 미사 드리기 위해 집에 남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란 예측을 하였고,
그래서 사람들이
놀러갈 수 있는 곳에 성당을 지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신학생 때부터 경치
좋은 곳에 땅을 보러 다녔다니 놀랍기만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실이
알려져서 교구에 기부 받은 땅이 황 신부님에게 맡겨졌습니다.
모금을 해야 했지만
김창린 필립보 원로신부님이 가진 모든 재산을 내서 평창 생태마을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여주에 더
큰 땅이 주어졌고 제 2
생태마을이 지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잠비아에서
알게 된 수녀님들을 도와주다가 그 곳에도 엄청난 땅을 받아서 농기계들을 보내 농사도 짓게 하고 앞으로 생태마을도 세울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어떤
분이 수십억을 기부해서 인도에 대학을 세운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일 년 동안 그분의
손을 거쳐 나가는 돈의 액수가 수십억이 될지 수백억이 될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통
사람은 꿈도 꾸기 힘든 액수가 들어오고 나가고 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그분이 열심히
일해서 그만한 돈을 벌 수 있었을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분이 가졌던
유일한 보물은 ‘원의(願意)’였습니다.
이웃을 돕고 자연을
돕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하느님은 그
원의만을 바라십니다.
나머지는 당신께서
다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이 원의의 차이가
결국 우리 이웃은 물론 우리들 또한 가난하게도 하고 부유하게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필립보를 ‘시험’하십니다.
장정만도
5천 명이나 되는데
그들을 먹일 빵을 어디에서 구하면 되겠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습니다.
세계에서는 아직도
5초에 한 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그러면 우리는
대답합니다.
“저도 먹을 것이
부족합니다,
그런 돈을 어디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저들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러나 아주 가끔
어떤 이들은 “제가 가진 것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라며 예수님의 눈을
쳐다볼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렇게 바쳐진 것을 가지고 당신의 능력으로 배고픈 이들을 다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게 만드십니다.
과연 우리가 세상
모든 사람을 배고프게 할 수 없을까요?
내 작은 것을
봉헌하여 주님께서 그것을 기반으로 모든 이들을 먹이시게 하고 싶은 ‘원의’만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은 아직도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런 마음만 있으면
축복이 넘치도록 그 사람을 통해 전달되게 해 주십니다.
마더 데레사는
“저는 하느님 나라를
가난한 사람으로 꽉 채우고야 말겠습니다”라는 원의를
지니셨습니다.
어느 날 대규모
고아원을 건립하겠다고 발표를 했습니다.
한 기자가 수녀에게
물었습니다.
“준비 되어 있는
건축자금은 얼마나 됩니까?”
데레사 수녀는
주머니에서 동전 3개를 꺼내 보이며
“가진 것은
이것뿐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기자들은 그 말을
농담으로 여기고 실소를 터뜨렸습니다.
그러나 데레사
수녀는 정색을 하며 진지한 낯으로 말했습니다.
“이 동전과 저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이
동전이 합하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예수님의 ‘시험’을 통과하신
것입니다.
더 주고 싶다면 더
많이 채워주십니다.
원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태석 신부님도
수단의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해 무언가 해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6년 만에 말기 암
진단을 받고 그들을 더 이상 도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한
그 일을 다른 사람들이 이어서 하고 있습니다.
재물은 피와
같습니다.
피는 흐르면 모두를
살리지만 멈추면 그 곳이 썩어 죽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해외원조는 매우 저조합니다.
못하는 것도
아니지만 더 잘 살려는 원의만 가득해서 썩어가는 냄새를 풍깁니다.
사해가 되지 말고
갈리래아 호수가 되어야합니다.
물을 끊임없이 빼내
주어야 우리나라가 살아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가진 것들로 가난한 사람들을 물질적으로도 영적으로도 배부르게 하여서 그들도 살고 우리도 살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해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시험하고 계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그러면 이렇게
대답합시다.
“저희가 가진 것을
드리겠습니다.
당신이 그것으로
저들을 배불리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을 원합시다.
다른 것을 원하면
주님이 원하는 것을 원할 수가 없습니다.
그분이 원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뿐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내가 주는 것으로
예수님은 저들을 먹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 것도 열두 광주리나 가득 차게 만드실 것입니다.
세상을 적시고
배부르게 하고 깨우쳐주는 축복의 통로가 됩시다.
원하기만 하면
됩니다.
기적을 낳는 믿음의
사람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느끼려면 그만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는 은총을 입으시길 기도합니다. 기도를 많이 해서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함으로써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으로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열왕기 하권 4장
42절-44절에 보면, 어떤 사람이 맏물로 만든 보리빵 스무개와 햇곡식 이삭을 자루에 담아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가져왔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시종에게 “사람들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하고 일렀습니다. 그러자 시종은 “이것을 어떻게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 놓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엘리사가 “사람들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주님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하셨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내 놓으니 과연 주님의 말씀대로 사람들이 먹고도 남았습니다.
우리 삶에도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겠는가?”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저 많은 사람들에게 무슨 소용이 될까?” 계산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인간적인
생각을 뛰어넘어 풍요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바로 그러한 분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보잘것없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너무 부족해!’라는 생각을 접고, “나누어 주어라” 는 말씀만을 기억할 때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야말로 기적이 믿음을
낳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기적을 낳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믿게 하려고(탈출4,2-5), 그리고 복음 전파를 위해(마태11,4-6)서 또한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마르16,20)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기적을 위한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시고 믿음을 기반으로 능력을
체험케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났다고 하는 곳을 쫓아다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믿음을 성장시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믿음으로 내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지 못한다면 신비로운 것을 아무리 많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기적의 체험은 특별한 체험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게 됩니다. 더 큰 신비한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서 다져진 믿음이 중요합니다. 말씀이 영혼의
양식입니다. 어떤 신비한 현상이 기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기적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또는 성모님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얻는 것보다 하느님을, 성모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순종하며 우리를 위한
사랑에 목말라 하신 예수님의 삶을 오늘 내가 살아야 합니다. 어머니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의 뜻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기에 복되십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쫓지 말고 기적을 낳으시길 바랍니다. 기적이라는 현상을 과거에 묶어놓지 말고 오늘 내가
주님의 손이 되고 발이 되어 기쁨과 평화를 이루십시오. 그것이 기적입니다.
요한복음 6장
1절에서 15절을 보면, 배고픈 군중을 바라보는 예수님과는 달리 필립보는 빵을 살 돈을 걱정했고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도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하고 실망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현실적인 자기입장에서 바라보고 자기 생각에만 갇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계신 주님을 간과 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인간적인 계산을 먼저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끊임없는 유혹입니다. 이 유혹을 단호하게 끊어 버리십시오! 그리하면 그 때 비로소
주님의 능력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이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보리빵 다섯 개를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자리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먹고 남은 조각으로 열 두 광주리를 가득 찼습니다. 인간의 생각은 불가능해 보여도 주님의
손을 거치면 가능합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무리 적어도 모두를 내놓을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아도 내 놓을 수 있는 마음이 없다면 결코 많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작아도 전체는 항상 부분보다 큽니다. 아무리 많아도
부분은 모두보다는 적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한 아이가 건네준 빵과 물고기를 사용하여 배고픈 이들의 부족함을 채워주셨습니다. 인간의 협력을
높이 사신 것입니다. 많든 적든, 크던 작던 상관없습니다. 주어진 모두를 가지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먹고도 남았습니다. 이렇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면 더 크게 감사할 수 있는 은혜를 입게 됩니다.
덕이 출중한 성자가
여행 중에 다른 두 명의 여행자를 만났습니다. 이들은 동행이 되어 함께 걷다가 헤어질 때가 되었는데 성자가 말했습니다.“오늘 이렇게 만난 것이
은총이니 당신들에게 선물을 주겠소. 소원을 하나씩 이루어줄 테니 청하시오. 그런데 먼저 말한 사람의 소원이 이루어지면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의 두
배를 받게 될 것이오.”
무엇이든지 소원을
하나씩 들어준다는 성자의 이야기를 듣고 두 사람은 너무 좋아서 얼른 소원을 말하고 싶었지만 말을 하려다 말고 멈췄습니다. 두 번째로 말하면
앞사람의 두 배로 받는다는 것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서로에게 눈치를 주다가 결국 한 사람이 고심한 끝에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한 쪽
눈을 멀게 해 주십시오.”그렇게 해서 동시에 한 사람은 애꾸눈이 되고 나머지 한 사람은 장님이 되었답니다.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과 끝없는
욕심은 삶을 파멸로 몰고 갑니다.
로또 당첨자의 자살
소식이 있었습니다. 40대의 젊은이는 1등에 당첨이 되었는데 상금이 23억 원이나 되었습니다. 세금을 제외하고 18억 원을 수령했으나 5년 만에
다 잃고 급기야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로또 당첨자3명중 1명은 5년 내 파산을 한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외국의 사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살,
알콜중독, 마약, 도박, 이혼등 행복보다는 불행한 삶을 사는 이가 더 많답니다. 저도 로또복권을 선물로 받은 적이 있는데 당첨이 안 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릅니다.
사도 바오로는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 들입니다"(2코린9,6). 하고 말했습니다. 은총을 심는 이는 은총을 거둡니다.
사랑을 심으면 사랑을 거둡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이것이라도”하고 사랑을 담아 내 놓으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풍요롭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눔의 기적을 낳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나누면 나눌수록 풍요로워지고 버리면 버릴수록 자유로워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풍요와 자유를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배고픔에 지친
사람들이 빵을 먹고 배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또 배고프게 됩니다. 그러므로 수천 명이 배부르게 빵을 먹은 현상에만 관심을 두지 말고 이
사건을 통해 가르치신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능력을 지니시고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기적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하여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나눔의 기적을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당신의 생명을 내놓기까지 사랑하십니다. 더더욱 미사 안에서 당신자신을 성체의
형상으로 끊임없이 내어 주심으로써 우리를 영적으로 살찌우고 풍성하게 하십니다. 영성체를 할 때 마다 사랑의 실천을 다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성급하게 주님의
낙원을 꿈꾸고 기다리며 기적을 쫓지 말고 지금 여기서 주님처럼 사랑하고, 주님처럼 섬기고, 주님처럼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주님,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기적을 낳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그러나 요즘은
착하면 곰이라고 놀리고, 안착하면 여우라고 욕한답니다@@ 한번 마음이 구부러지면 모든 게 굽어보인답니다.
마음을 곧게 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
-이수철신부-
긍정적,
낙관적으로 보려해도 자꾸 부정적, 비관적이 됩니다.
오늘날
현실을 대할 때의 느낌입니다.
아름다운
자연이나 때로 지인간 주고 받는 아름다운 카톡 사진이 비현실적으로 보입니다.
온통
문제 투성이들인데 답은 보이지 않습니다.
디지털
문명의 시대라 어느 때보다 소통의 시대 같으나 역설적으로 단절과 불통의 시대입니다.
모두가
시야와 공감을 잃어버린 우물안의 개구리, 흡사 고립단절된 섬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연결과
소통의 생명의 시대가 아니라 단절과 불통의 죽음의 시대같습니다.
하여
약육강식, 각자도생, 승자독식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으며,
두려움과
외로움에, 속출하는 자살자들입니다.
청소년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전방위로 확대된 자살자들입니다.
혹자는
이런 상태를 내전상태에 비교하기도 합니다.
내전으로
희생되는 숫자에 버금간다는 것입니다.
늘
말세라 하지만 오늘날 시대는정말 말세 같습니다.
생존에
급급하다보니 대부분의 삶이 참 초라하고 비루하고 궁색하다는 느낌입니다.
존엄한
인간 품위를 유지하기가 참 어려운 시대입니다.
주변에
힘들게 살아가는 많은 분들을 보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기적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불無不의
시대, 상실의 시대입니다.
무의욕,
무기력, 무감각, 무감동, 무절제, 무의미 등 무無의 시대에,
불신,
불통, 불화, 불목, 불평, 불만등 불不의 시대입니다.
이어
꿈과 영혼을, 생각과 시야를, 깊이와 시야를, 공감과 배려를, 존중과 신뢰를 잃은 상실의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쁘고 힘차게 살아야 합니다.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선적으로
삶의 중심을, 삶의 의미를, 삶의 목표를, 삶의 방향을 찾아야 합니다.
바로
하느님을 찾으라는 것이며 하느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계시기에 살만한 세상입니다.
인간이
문제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 바로 이게 유일한 답입니다.
다음
주님은 바오로 사도를 통해 오늘의 우리 모두를 향해 간곡히 당부하십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살아야 아름답고 성공적인 공동생활입니다.
하나하나가
유일무이한 부르심의 성소입니다.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이 부르셨기에 이렇게 필연적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우리들입니다.
과연
부르심의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존재이유입니다.
불러주셨기에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과연
하느님 불러 주신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고 있는지요.
성경의
사람들의 특징은 주님이 부르시면 한결같이 “예 여기 있습니다.”하고 주님 앞에 나섰습니다.
오늘
미사도 우연히 내가 오고 싶어 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이 선행한 것입니다.
오늘
본기도가 은혜롭게도 이런 진리를 잘 드러내며 오늘 복음을 요약합니다.
“아버지,
파스카를 경축하는 이 주일에 저희를 부르시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을 주시니,
저희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세상의 빵을 나누며,
영혼과
육신의 온갖 굶주림을 채우게 하소서.”
오늘
본기도의 내용이 참 적절하고 깊습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모습이 환히 계시됩니다.
오늘
강론은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에 대한 묵상나눔입니다.
첫째,
주님과 일치의 삶이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입니다.
일치의
반대는 분열입니다.
하느님은
일치를 원하고 사탄은 분열을 원하고 부추깁니다.
분열의
죄가 참 큽니다.
내적분열,
외적분열로 망가지고 무너지는 개인이요 공동체입니다.
나라안이
분열로 만신창이가 된 현실입니다.
나라만
아니라 분열된 가정은, 공동체는 얼마나 많은지요.
분열의
치유제는 주님과의 일치 하나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분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온누리에
충만한 하느님 한분 안에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주님과의 일치안에서 비로소 통합된 하나의 삶입니다.
진정
주님과 일치될 때 저절로 이웃과의 일치도 뒤따릅니다.
분열의
유일한 치유제는 주님과 일치의 성사인 이 거룩한 미사뿐입니다.
둘째,
최선을 다하는 삶이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믿음의 삶이 아름답습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도 최선을 다하는 삶입니다.
최선을
다할 때 하느님도 감동하고 사람도 감동합니다.
최선을
다하는 이들은 하느님을 신뢰하는 이들이요 결코 절망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늘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진정
믿음의 사람은 진인사 대천명, 최선을 다하고 주님의 처분을 기다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믿음이 놀랍습니다.
제자들의
회의적 시각에도 아랑곳 없이 최선을 다하십니다.
그
많은 굶주린 군중들의 모습에 추호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자리잡게 하여라.”
이어
예수님께서는 빵에 손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하십니다.
그대로
최선을 다해 기도하는 모습이요 저절로 하느님의 기적이 뒤따릅니다.
셋째,
나눔의 삶이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입니다.
나눔의
반대는 독점입니다.
독점이
죄입니다.
없어서
빈곤이 아니라 나누지 않아 빈곤입니다.
독점할
때는 늘 부족하지만 나눌 때는 차고 넘칩니다.
오늘
빵의 기적은 나눔의 기적입니다.
사랑으로
나눌 때 기적입니다.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 역시 거듭 나눌 것을 촉구합니다.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주님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의
계산법과 하느님의 계산법은 다릅니다.
하느님의
계산법은 사랑의 나눔입니다.
하느님의
계산법에 능통한 엘리사요 이런 엘리사를 훨씬 능가하는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목되는 사람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입니다.
이
아이의 나눔이 있었기에 주님의 기적도 가능했습니다.
아이가
가진 것 모두를 내 놓았을 때 주님은 정성을 다해 기도하셨고,
모인
사람들 모두 이에 감동하여 가진 것을 다 내어 놓아 나눴기에 모두 배불리 먹었습니다.
사랑의
기적, 나눔의 기적입니다.
아이와
예수님의 모습에 감동하신 하느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으로 움직여 가진 먹을 것을 다 내어놓게 하셨음이 분명합니다.
결국은
하느님의 기적입니다.
독점이
아닌 이웃과 끊임없이 유형무형 나누는 삶, 바로 이것이 기적이요 부르심에 합당한 삶입니다.
넷째,
환상幻想이
아닌 관상觀想이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입니다.
오해와
착각의 환상이 걷힐 때 하느님을 봅니다.
저절로
지족知足과
자족自足의
삶에 진실과 겸손입니다.
거짓과
위선, 자만이 사라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빵을 배불리 먹은 사람들은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착각했고
자기 환상대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일으키신 표징에 대한 이들의 반응입니다.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환상
속에 메시아로,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승리의 왕, 현세적 권력의 메시아로 착각한 것입니다.
하여
이들은 억지로 예수님을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합니다.
참
어처구니 없는 착각입니다.
환상없이
제대로 믿기는 얼마나 힘든 일인지요.
참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들은
환상
없이 ‘있는 그대로’의 주님을, 자기를 보고 응답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섯째,
이탈의 삶이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입니다.
끊임없는
주님을 향해 떠나는 이탈의 삶이 아름답고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입니다.
주님은
환상이 없었던 분입니다.
결코
세상 인기에 편승하거나 유혹에 빠질 분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대목을 놓쳐선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든 제자리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산이
상징하는바 예수님이 아버지와 만나는 제자리입니다.
당신의
일이 끝나자 훌훌히 떠나 산의 제자리로 떠나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위해
세상
속에서도 매일 얼마간 이런 홀로의 제자리 공간과 시간 마련은 필수입니다.
주님을
만나면서 환상에서 벗어나 잊었던 자기를 발견하고 영적시야를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집착하면서 세상으로부터 저절로 이탈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확인하고 강화하는데 이 거룩한 미사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1.주님과
일치를 추구하십시오.
2.매사
최선을 다하십시오.
3.나눔의
삶에 충실하십시오.
4.환상이
아닌 관상을 추구하십시오.
5.이탈의
삶을 사십시오.
바로
이것이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당신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 손을 펼치시어 저희를 은혜로 채워주소서.”(시편145,16참조).
아멘.
합심(合心)
-김상호
신부-
오늘의 복음 말씀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이
이야기를 저는 합심의 결과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합심의 구심점이 되는 분입니다.
합심이란 마음을
모은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합심이 될 때 엄청난 결과를 가져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갈라질 때 즉 분심이 될 때는
아무 일도 못 하고 또 아무것도 안 되는 현상도 역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되는 군중을 먹이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 사건을 예수님의 위대한 기적으로만 알아들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자연 이적의 사건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천사를 시켜 하늘에서 빵을 가져다가 그 사람들을 먹일 수도 있고 또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게
하여 사람들의 굶주림을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예수님의 전능하심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되는 군중을 먹이실 때 예수님께서 군중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셨고 또 이 합심의 결과로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줍니다. 예수님과 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자기의 것을 서로 내어놓고 나누어 먹는 것으로 마음이 모아졌다면 문제
해결은 간단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기가 가져온 것을 자기와 자기 가족만 먹는다면 어떤 사람들은 배가 터지도록 먹고도 남은 찌꺼기는 버릴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알맞게 가져와서 가볍게 요기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사 먹을 데도 없는 그곳에서 쫄쫄 굶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누어 먹게
된다면 남자만 오천 명이 아니라 수만 명이 되는 군중이라도 다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들을 모으게 되면 우리 인간들 사이에는 기적과 같은
일들이 항상 일어날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모아지는 것은 감동을 받을 때입니다. 강제와 완력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모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감동을 받았고 스스로 자발적으로 참여할
때 그때 마음이 모아졌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선한 일과 아름다운 일들을 보았을 때 감동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힘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힘입니다.
우리가 내 놓아야
할 차례
-조정제신부-
지난 주일 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군중들을 측은히 여기시고 여러 가지로 기적을 베푸시며 가르쳐 주셨다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군중들이 예수님의 뒤를 계속 쫓아 다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정들만도 5000명이나 되는 군중을 배불리 먹게
하십니다. 군중들은 성체 성사 를 미리 예표하는 빵의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의 깊으신 참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거저 눈앞에 보이는
,그래서 우선 이 세상에서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현실의 빵 때문에 눈이 어두워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그러면 앞으로도 한세상을
배불리 잘 먹고 지낼 수 있겠다는 얄팍한 속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군중들의 잘못된 착각을, 그들의 부질없는 환상을 깨뜨리시고 산으로 피해 가십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는
기적의 진정한 뜻을 헤아려 보지 못하고 눈앞에 보이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만족에만 정신없이 빠져드는 그러한 군중들의 모습을 보시고 참으로
비통하고 가슴 아픈 마음으로 그들을 떠나 산으로 올라 가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우리는 그러한 군중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참뜻을 헤아려 보아야 하겠습니다.
군중들은 우선 빵을
배부르게 먹게 되어 만족해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가만히 있어도 그러한 기적이 늘 계속될 수 있도록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그러나 빵을 많게
하는 그 기적의 출발은 참으로 미약했으며 보잘 것 없었습니다. 즉 어떤 어린 아이 하나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내어 놓음으로 해서, 예수님의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은총으로 시작됩니다. 이렇게 기적은 우리 인간이 다른 사람을 위한 작은 협력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오늘날 너무나도
많은 종교인 (신앙인들과는 다름 ) 들이 현세 기복적이고 물질적인 축복만을 바라는 그릇된 신심에 빠져 들고 있습니다. 즉 우선 내 자신만이 오직
내 가족만이 나아가 우리 집안만이 이 현세에서 계속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라면서 정신없이 이곳 저곳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러한
기적이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면 직접 자기 손으로 그러한 기적을 만들어 내겠다고 온갖 작태를 부리면서 이
사회를 점점 혼탁하고 어지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적중의 기적이요 당신 사랑의 극치인 성체성사의 신비를 미리
보여 주시면서 우리 인간의 미약하지만 아름다운 협력과 나눔의 정신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불림을 받은 우리가 이제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어 놓아야할 사람들입니다. 작은 그리고 보잘 것 없는 우리의
나눔이지만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우리 이웃을 , 우리 사회를 사랑으로 배불리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체의 삶을 통해 모두가 풍요로워
지기를 바라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 아멘
”
행복은 나를 아는
즐거움이다(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박영식신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아리랑’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가장 널리 즐겨 부르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구전민요다.
이 노래는
언제,
누가 부르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리랑은 개인이나
공동체나 한민족 전체가 참된 자아와 삶의 뿌리를 찾는 철학이 담긴 노래,
자기완성과 공동체의
완성의 길을 찾아나가는 한민족의 얼과 혼을 깨우는 민요라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겨레의 울분과 한을 드러내는 저항의 노래로 불리기도 했던 것이다.
아리랑은
2012년
12월
5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최근에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작곡가들로
이루어진 심사위원들이 아리랑 민요에 대해 82퍼센트라는 높은
지지율을 보여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 1위에
선정했다.
이 심사위원들
중에는 한국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은 아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 노래인지 거듭 강조해준다.
아리랑 노랫말의
뜻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그럴듯해 보이는
해석은 서로 사랑하는 남녀의 이별노래라는 설명 말고 심오한 철학적인 뜻이 있다는 설명이 있다.
이별가라고 보는
설명은 이러하다(신용하).
‘아리랑’의
‘아리’의 첫째 뜻은
‘고운’의
뜻이고,
‘랑’의 뜻은
‘님’이다.
‘아리’가 고대 한국에서
‘고운’
‘곱다’
‘아름다운’
‘아름답다’의 뜻으로 쓰인
흔적은 현대 한글 ‘아리따운’(=
아리
+
다운)에
나온다.
‘아라리’는
‘가슴아리’(가슴앓이)처럼 상사병을
뜻하는 한글 고어인 것 같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는 노랫말에서
고개는 우리나라에서 마을공동체의 활동범위를 차단하는 곳을 상징하고 ‘이별’을
의미했다.
위 설명을
요약해보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곱고 그리운
임,
곱고 그리운
임,
사무치게 그리워
상사병이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
곱고 그리운 임이
이별의 고개를 넘어간다.
이와
달리,
아리랑 민요가
철학적인 뜻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참된 나를 깨달아
인간완성에 이르는 기쁨을 노래한 깨달음의 노래라는 것이다.
아리랑我理朗이라는 말에서
아我는 참된
나,
근원적인
‘나’,
우리 각자의 내면에
숨어있는 진짜 ‘나’를
뜻한다.
리理는
‘알다,
다스리다,
통하다’를,
랑朗은
‘즐겁다,
밝다’를
뜻한다.
따라서 아리랑은
‘참된 나를 찾는
즐거움’이라는
뜻이다.
자기를 알아야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과 삶의 뜻을 깨달을 수 있다.
‘아라리요’는
‘나를 깨닫는 기쁨을
다 같이 누립시다.’라는
의미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에서
‘고개’는
언덕,
깨달음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나를 찾기 위해
깨달음의 언덕,
피안의 언덕을
넘어간다는 의미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는 노랫말의 뜻은
참된 나를 버리고 거짓된 나를 위해 욕망에 빠져 사는 자는 얼마 못가서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다.
삶의 참된 의미를
실현하지 않고 쾌락을 추구하는 자는 얼마 못가서 고통에 빠질 뿐만 아니라 인간완성을 이루지도 못한다.
‘십리’는 거리를
뜻한다기보다 ‘십’이라는 수는 완성을
상징하는 뜻이다.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는 노랫말은 자기가
누구인지 깨닫지 못해 인간완성의 경지에 다다를 수 없어 고통을 받는다는 뜻이다.
위 설명에 따라
아리랑 노랫말을 현대 한글로 옮겨보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 “나를 깨닫는
즐거움이여,
나를 깨닫는
즐거움이여,
나를 깨닫는
즐거움을 다함께 누립시다.
나를 깨닫는
즐거움의 경지를 넘어가자.
참된 나를 깨닫지
못하는 자는 완성의 경지에 다다를 수 없어 고통 받는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다.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가장 참담한 비극이요 지옥이다.
불행하게도,
사람이란 존재는
다른 사람을 잘 보아도 자기를 잘 보지 못한다.
자기 목소리도 목의
진동 때문에 잘 모르고 녹음을 해보아야 잘 알 수 있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면 자기를 기만하게 된다.
“남에게 기만당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스스로 자기를
기만하는 것이다.”(괴테)
우리 가운데 가장
용감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구나 자기를 겁낸다.
자기가 예측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를 알고 자기를
다스릴 수 있는 이가 가장 강한
사람이다(탈무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사는 목적은 바로 하느님의 생명을 누리기 위함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구원받지 못해 하느님의 생명을 누리지 못 하는 우리를 위해 빵 표징을 일으키셨다.
예수님이
만들어주시는 빵을 받아먹어 그분 자신을 마음속에 모시고 그분을 닮아야 하느님의 생명을 누릴 수 있다.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
즉
사랑,
기쁨,
열정을 지녀야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존재다.
그러기 위해 매
순간 호흡하듯,
하느님과 끊임없는
관계를 보존해야 한다.
하느님의 참된
모상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하느님과 관계를 보존할 수 있다.
이 관계 속에
하느님의 생명이 있다.
참으로
행복하게,
보람 있게 살기
위해서는 열정을 품고 서로 사랑하며 기쁘게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자유롭게 하고 하느님의 생명을 베풀고 계신다.
오늘 미사 때
말씀을 듣고 성체를 모실 때 열정,
사랑,
기쁨을 선물로
받자.
기적적으로 빵을
많이 만들어주신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예수님을 죽인 유다인들처럼 인생의 의미를 배불리 먹는 일에서 찾지
말자.
예수님을 현세의
삶을 다복하게 만들어줄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여 기꺼이 목숨을 희생하신 주님으로 모시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는다.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관계를 맺으려면 이웃을 만나야 한다.
대인관계는 서로
주고받는 쌍방교류로 이루어진다.
나를 낮추고 남을
높여줘야 내가 높아진다.
나를 주장하지 말고
남을 더 귀중한 존재로 섬겨야 내가 인정받을 수 있는 법이다.
내가 가장 소중하게
아끼는 것을 남에게 주어야 그가 애지중지하는 것을 받을 수 있는 존재다.
내가 인색하면 남도
나에게 인색해진다.
우리의 인생은 얻는
것이라기보다 힘껏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버려야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존재다.
우리 조상들이 참된
자아를 찾는 기쁨을 누리자고 아리랑 민요를 즐겨 불렀다.
아리랑 민요를 부를
때마다 우리의 참된 자아가 하느님과 이웃과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고 기쁘게 살 수 있음을 되새기자.
다 함께 아리랑
민요를 부르며 민족의 일치와 화합을 도모했던 조상들처럼,
우리도 이 민요를
부르며 가정과 공동체와 사회와 온 인류가 하느님 안에서 하나 되어 빈부격차와 원한과 증오와 전쟁을 버리고 서로 사랑으로 화합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나를 깨닫는
즐거움이여,
나를 깨닫는
즐거움이여,
나를 깨닫는
즐거움을 다함께 누리자.
참된 나를 버리는
자는 완성의 경지에 다다르지 못해 고통을 받는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에페 4,1)
-오상선신부-
여러분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생각하세요? 왜
미국땅이 아니라 한국땅에서
태어났고 왜
이런저런 보잘것없는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왜
가톨릭 신자가 되었고 왜
지금의 짝을 만나서 살게
되었고 왜
이런 직업을 가지고 살게
되었을까요?
내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내
뜻과는 상괸없이 주어진
것이지요.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나를 그렇게
불러주셨다고 믿고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지요.
오늘은 내가
어떤 삶을 살도록 하느님께서
불러주셨는지 그리고
어떤 소명을 주신 것인지 되새겨
보고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길이 무엇인지 한번
찾아보면 어떨까요?
나는
잘 모르지만 분명
하느님께서는 뜻한 바가 있어 나를
이런 모습으로 불러주셨을
겁니다. 그걸
찾아야 내
인생은 참으로 의미있는 인생이 됩니다.
-한상우신부-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버려진
것을 모으시는
분은 언제나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관계의 조각을
모으면 언제나 깨닫게
되는 놀라운 신앙의
신비입니다.
조건없이
주님께서는
우리를
받아들이십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삶이
충만하여집니다.
나누어야 채워지고 흘러가야 충만하여지는 새로운
기쁨입니다.
나누기에 충분한 우리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지니고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사랑으로 끌어안을
때 모든 것은
감사가
됩니다.
하느님 사랑을
가장 잘 알게하는
성사는 단연코
성체성사입니다.
모든
것에서 우리를
살게하시기 때문입니다.
일용할
양식에서부터 십자가를
지고가는 모든 삶을
통해 주님의
섭리는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랑의
섭리로 살아가기에 과거와
오늘 이 모든
것은 사랑이
됩니다.
내려놓아야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버려진
것을 사랑으로 끌어안는 감사의
주일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주님 말씀과
주님의
성찬입니다.
주님 사랑의
양식에 참여하는
길은 봉헌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는
봉헌으로 더욱
충만하여집니다.
봉헌이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갈릴래아 호수 근방 어느 산등성이에서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셨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서는
복음서들 중 가장 늦게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복음서의 저자는 이미 기록된 세 개의 복음서들 안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주제들을 선택하여 순서를 정하고,
하나의
명상록으로 엮었습니다.
복음서들이
전하는 기적 이야기들을 읽을 때,
우리는
그것이 실제 있었던 일인가를 묻기 전에,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알리려는 것인지를 먼저 물어야 합니다.
복음서들은
정확한 역사적 사실만 알리는 현대의 역사서가 아닙니다.
초기
신앙인들의 회상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
그리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믿던 바를 기록한 복음서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에는 초기 신앙공동체들이 실천하고 있던 성찬을 상기시키는 표현들이 보입니다.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는
말로써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하신 파스카,
곧
해방절 식사를 상기시킵니다.
그
식탁에서 예수님은 빵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주면서 그것을 당신의 몸,
당신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이 그 파스카를 언급하는 것은 오천 명을 먹인 오늘의 이야기를 예수님의 최후만찬과 연계하여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나누어
주셨다.’는
오늘 복음의 말은 예수님이 최후만찬 식탁에서 하신 일을 연상하게 합니다.
초기
신앙공동체들은 성찬의례를 하면서 그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갈릴레아 호숫가에서 오천 명을 먹인 오늘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 시대 신앙공동체가 이미 하고 있던 성찬을 상기시킵니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로
엘리사 예언자에 관한 열왕기 하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를 발생시킨 공동체는 엘리사에 관한 그 고사(故事)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인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저자가 엘리사의 이야기도 참고했다는 말입니다.
열왕기의
엘리사는 보리 빵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였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였습니다.
엘리사
예언자는 빵 한 개로 다섯 명을 먹인 셈이지만,
예수님은
빵 한 개로 천명이나 되는 사람을 먹였다는 말입니다.
복음서
저자는 오늘의 이야기로써 예수님은 구약의 엘리사 예언자를 훨씬 능가하는 분이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를 헤맬 때,
하느님이
그들을 먹이셨다고 말합니다.
그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구원하신다는 사실은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면서,
그들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자유로운
땅에 와서 살도록 하셨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하느님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셨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먹고 마시지 못할 때,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하셨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해방하지 못하는 곳에 하느님이 해방시키는 구원의 체험입니다.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들은 엘리사 이야기에 보면,
사람들은
그들이 가진 빵이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기에는 어림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두
이야기에서 모두 빵은 사람들의 눈에 형편없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나누었더니,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고도 남았습니다.
나누는
곳에 하느님의 축복이 있고,
나누는
곳에 풍요로움이 있다는 말입니다.
나눔은
하느님의 일입니다.
하느님이
당신의 숨결을 나누어 주셔서 인간 생명이 출현하였다고 창세기는 말합니다.
우리도
가진 것을 나누어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비록 우리 눈에 부족해도,
나누는
우리의 실천이 있으면,
그것은
하느님의 축복이 되고 풍요로움이 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많은 사람을 먹였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성찬전례에서 사용되는 표현을 쓴 것은,
성찬이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자기
한 사람만을 위해 살던 사람이 성찬에서 예수님의 몸이라는 빵 나눔에 참여하면서,
나눔이
하느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알아듣고,
지금까지
인간이 생각하지 못한 축복과 풍요로움을 자기 주변에 발생시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에 집착하여,
예수님을
왕으로 삼아,
먹거리를
해결하려는 군중을 예수님은 떠나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의식주(衣食住)를
해결해 주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눔을 발생시킨 분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은 우리만을 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도,
지식도,
자격증도
모두 우리 자신을 가꾸고,
우리
자신을 풍요롭게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에게 조금 바쳐서 많은 것을 얻어낸다고 믿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정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례 받을 때,
끊어버리겠다고
약속한 유혹입니다.
유혹은
우리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게 하는 마음입니다.
세례
때,
우리는
예수님을 믿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준 나눔의 풍요로움을 살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그
약속을 실천하는 사람이 신앙이 어떤 축복이며 어떤 풍요로움인지를 압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나눔으로 말미암은 풍요로움을 살라고 권합니다.
나눔은
하느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기적입니다.
기적은
자연법이 설명하지 못하는 불가사의(不可思議)
한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라 우리 눈에 놀랍게 보이는 것이 기적입니다.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우리가 오늘 존재한다는 사실도 성서에는 하느님이 하신 기적입니다.
모두가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고,
자기
한 사람만 풍요롭게 살겠다고 노력하는 세상에,
이웃의
장애를 돕고,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이웃을
도우면서 행복한 사람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풍요로움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기적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성당 안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생사(生死)의
대권을 쥐고,
우리를
위협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바친 만큼 받겠다는 우리의 약삭빠른 이해타산에 동조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이 하셨듯이,
자기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는 사람 안에 살아계십니다.
이웃의
아픔에 참여하고,
그
고통을 함께 나누어 십자가를 지는 마음 안에 하느님은 살아 계십니다.
내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어서 이웃이 하느님의 축복과 풍요로움을 맛보게 하는 데에 하느님은 살아 계십니다.
우리가
나누어서 이웃이 축복과 풍요로움을 맛보게 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지만,
하느님이
하시는 기적이기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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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