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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21. 묵상글 (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 복구자와 파괴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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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21.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2.21 03:51
- 복구자와 파괴자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오늘 복음의 말씀 중에서 두 가지 단어 곧
“그러자”와 “그래서”가 눈에 특히 들어왔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그래서’ 투덜거리는데
레위는 ‘그러자’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릅니다.
공동체에는 항상 이런 두 부류가 있습니다.
공동체를 깨는 부류와
공동체를 건설하는 부류입니다.
투덜이들은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처럼 주님께서 뭘 가르치셔도,
주님께서 무슨 일을 하셔도 주님을 따르려고 하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동체 형제들에게 투덜거리며 더 나아가 쫓아냄으로써 공동체를 깹니다.
이들의 시선은 주님께 가 있지 않고,
늘 다른 사람에게 가 있으면서 불평불만하고,
단죄하고, 쫓아내기만 함으로써 공동체를 깹니다.
그런데 이들이 그렇게 단죄하며 공동체에서 쫓아낸 이들을
주님께서는 제자로 부르시고 도구 삼아 공동체를 세우십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라고 세리 레위를 부르시고
그러자 그는 즉시 주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제자들이 모두 보이는 자세입니다.
복음을 보면 주님의 첫 제자들이 그러했고
프란치스코도 그러했음을 전기 작가 토마스 첼라노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프란치스코는 환희에 넘쳐 방금 들은 말을 완수하기 위해 서둘러 댔다. 그리고
자기가 들은 바를 심혈을 기울여 이룩하는 데에 있어서 시간이 경과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는 즉시 발에서 신발을 벗어버리고 손에서는 지팡이를
치워버리며 한 벌의 옷에 만족하고 허리띠는 가느다란 새끼줄로 바꾸어 버렸다.”
이리하여 그는 산다미아노 십자가의 주님께서 “가서, 무너져 가는 내 집을 고쳐라.”
라고 하신 말씀을 완수하게 되고 오늘 독서가 얘기하는 ‘복구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동체의 복구는 선행의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이사야서의 하느님은 어제에 이어 오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준다면
주님께서 늘 너를 이끌어 주시고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리라.
그러면 너는 오래된 폐허를 재건하고 대대로 버려졌던 기초를 세워 일으키며,
갈라진 성벽을 고쳐 쌓는 이, 사람이 살도록 거리를 복구하는 이라 일컬어지리라.”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이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다 죄인이고 죄인 아닌 사람 없습니다.
다만 죄인인 줄 모르는 죄인이 있는가 하면 아는 죄인이 있고
단죄하는 죄인이 있는가 하면 회개하는 죄인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단죄하는 죄인은 그럼으로써 공동체를 깨는 데 비해
회개하는 죄인은 주님의 부르심 받은 레위가 다른 죄인들도
주님의 식탁에 초대하듯 죄인들의 회개 공동체를 이룰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의 이 사순 시기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도 회개의 공동체로 부르시며 죄인일지라도
같은 죄인에 대한 연민으로 사랑할 줄 아는 죄인이 되라 부르시는데,
‘그러자’ 즉시 주님을 따르는 우리입니까? 내일로 미루는 우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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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21.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살아있는 전통!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영적 성숙의 참된 시험은 그것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사막과 변모
살아있는 전통
2026년 2월 19일 목요일
저자 리사 콜론 들레이(Lisa Colón DeLay)는 초기 사막 영성의 가르침과 이야기 속에 흔히 등장하는 금욕의 목적에 대해 성찰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 대략 서기 300년에서 600년 사이의 시기는, 신자들이 금욕적 삶을 공동체 안에서 살아감으로써 하나의 본격적인 역사적 운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금욕주의자'(ascetic)이라는 말은 본래 그리스어 askesis(아스케시스)에서 온 것으로, 이는 절제와 결핍을 동반한 힘겨운 운동 훈련을 뜻합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사막의 수도자들은 단순히 경기나 놀이를 위한 선수가 아니라, 삶 전체를 걸고 치르는 영적 투쟁의 선수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불필요한 것을 삶에서 제거하고, 쉽게 얻을 수 없는 영적 승리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사막의 금욕가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은, 그들을 어떤 '초인적 성인'이나 완한 은수자로—엄격한 규율을 따르며 모든 육적 욕망과 즐거움을 완전히 제거한 이들로—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1]
사막의 교부들(abbas)와 교모들(ammas)의 영적 계보 안에서, 우리 또한 평생에 걸친 영적 훈련과 하느님과의 친밀한 일치에 대한 헌신으로 초대받고 있습니다.
사막의 은수자들과 수도자들의 삶은 우리의 일상과는 크게 달랐지만, 그들을 괴롭혔던 인간적 나약함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우리를 괴롭니다. 영적 성숙의 참된 시험은 외딴 산속의 오두막이나 상쾌한 피정센터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변모되어 그 성숙이 일상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역사 속에서 이름 없이 잊혀진 이들 대부분이—평범한 삶의 긴장과 혼란 한가운데서도 고요와 평화를 발견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그들은 셀 수 없이 많은 이름 없는 평범한 성인들이며, 우리를 응원하는 '거대한 증인들의 구름'입니다….
사막의 교부들과 교모들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영적 성숙이나 평화는 단번에 얻는 특별한 깨달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상황과 투쟁, 그리고 계절의 겹침 속에서 점차 깊어지는 것임을 말입니다. 하늘 나라의 상속은 곧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며; 이 상속은 오랜 세월 동안 부지런히 배우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조금씩 나누어집니다. 이는 몇 주나 몇 달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우리 한 평생 혹 심지어 다음 세대에까지 이어집니다. 이 길은 더딥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속도에 익숙해지고, 긴 여정을 위해 마음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사막의 교부들과 교모들이 한때 구도자들의 기름진 영혼의 밭에 심었던 영적 씨앗은, 1,500년이 지난 지금도 당신 안에서 아름답게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방식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느님 영광의 현현입니다. [2]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사막의 교부들과 교모들에 관한 묵상들을 깊이 감사히 받아들였습니다. 어느 날 묵상 후에 잠시 관상에 머무르던 중, 제 마음에 이런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단순하게 살아라, 깊이 용서하라, 두려움 없이 사랑하라." 이 말씀이 제 마음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습니다.
—David W.
References
[1] Lisa Colón DeLay, The Way of the Desert Elders: How the Wisdom of the Ancient Christians Sustains Us Today (Broadleaf Books, 2026), 5.
[2] DeLay, The Way, 198.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Dan Grinwis, untitled (detail), 2017, photo, Namibi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사막으로 자유롭게 걸어 들어가는 순간, 구도자는 어떤 제도나 구조를 넘어서는 광대한 변혁의 자리에서, 스스로 사고하고 온전해질 수 있는 능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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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흔히 사람은 그가 어울리는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다고들 합니다. 당시 사람들, 특히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 같은 이들은 이 세상적 지혜로 예수님을 판단했기에, 그분을 배척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멸시받는 자들,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 죄인들과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세상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지혜이며,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세상의 눈으로 보면 "어리석음" 그 자체입니다(1코린 1,21).
세리들은 언제나 죄인들과 함께 묶여 사회적으로 멸시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단 한 명이 아니라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계십니다.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곧,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의 삶 속으로 내려오셨다는 뜻입니다. 교부 히폴리토(†235)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말씀이 하늘에서 동정녀의 태중으로 뛰어내리셨고, 어머니의 태에서 십자가의 나무로 뛰어내리셨으며, 십자가의 나무에서 저승으로 뛰어내리셨습니다." 곧, 하느님의 본성은 끊임없이 낮은 곳으로 내려오시는 사랑의 움직임입니다!
"바리사이"란 "분리된 자"라는 의미를 지니는 단어인데, 이들의 명칭처럼, 이들은 자신들의 의로움으로 다른 이들과 구별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세리와 죄인들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그래야 자신들이 "거룩한 무리"로 드러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그 "죄인들" 한가운데 계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줍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의 구분과 경계를 넘어, 모든 이에게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적 지혜"와 "복음의 지혜", 즉 "하느님의 지혜"가 얼마나 다른지를 알려주시면서 우리에게 이 지혜를 깊이 새겨보라고 초대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지혜, 즉 복음의 지혜를 잘 드러내 주는 예수님의 권고 중 하나는 산상수훈에 들어 있는 황금률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그런데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이해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전에 저는 이 황금률에 대해 생각하면서, 상대방이 원하는 바를 헤아려서 그 사람에게 대해 주어야지 상대방이 나에게 대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즉 '내'가 원하는 대로 상대방에게 해 주는 것은 이기주의적 발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에게 보여주시는 사랑의 모범을 통해 황금률의 본 뜻이 무언지를 잘 알려 주십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나'에게 섭섭하게 대해 주었다면, 우리는 보통 그 사람에게 비슷한 대응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황금률을 적용해 본다면, 나에게 잘못한 그 사람에게마저 사랑과 자비로 대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내'가 원하는 대로 상대방에게 해 주는 것이 황금률이 아니라, 그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이, 복음의 정신 안에서 그 사람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해 주는 것이 바로 황금률의 핵심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지혜요,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깊이 새기고 따르라고 초대해 주시는 복음의 지혜인 것입니다!
그냥 그저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죄인인 '나'에게 대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해 주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이 하느님의 자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식사 자리를 함께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고 하신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순 시기가 어떻게 깊어지고 있으며, 주님께서 우리를 회개와 변화의 길로 강하게 부르시는지를 묵상합니다. 사도이자 복음 저자인 마태오의 모습은, 개인의 과거나 죄, 혹은 복잡한 상황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 일에 협력자로 불러 주시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의심을 없애시기 위해, 세리 레위를 첫 번째 복음 저자로 세우십니다. 그에게 단순히 "나를 따라라"(루카 5,27) 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세상의 '현명하다'는 사고방식이나 '정치적으로 올바른' 기준과는 정반대의 선택이었습니다. 레위는 동족들에게 배척받던 인물이었습니다. 세리라는 이유만으로 로마의 협력자, 즉 매국노로 여겨졌고, 세금을 거두며 가난한 이들을 압박하는 불의한 죄인으로 낙인찍혀 있었습니다. 그런 그를 예수님께서 부르시고, 심지어 같은 식탁에 앉으셨다는 사실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선택을 통해 주님께서는 당신 나라를 확장하는 데 오히려 이런 이들을 기꺼이 쓰신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셨습니다."(1코린 1,27)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주님은 의롭다고 자처하는 이들이 아니라, 죄인과 약한 이들을 부르십니다. 그들은 의사가 필요한 병자들이며, 동시에 다른 이들도 의사가 필요함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깨끗하고 흠 없는 이력'을 요구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역사는 오직 성모님께만 준비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사순 시기를 살아가는 구원의 대상이자 회개의 주인공으로서,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성 아우구스티노가 말한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힘을 주시기 위해 너를 약한 자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시편이 노래하듯, 바로 이런 마음을 하느님께서는 결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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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21.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과 ‘레위의 집에서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루카 5,27)
사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하기 때문입니다. 곧 앵무새처럼 입으로만 혹은 다람쥐처럼 몸짓으로만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화답송>에서 말해주듯이, ‘진리 안에서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 가치관, 방식에 있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불결한 이들과의 접촉은 그도 불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더불어 식사를 하십니다. ‘식사를 함께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과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입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앞세우기보다,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자비를 베푸십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먼저’ 죄인을 찾아오시고,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먼저’ 죽으시고, ‘먼저’ 당신을 건네주시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루카 5,27),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
이는 우리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다는 말씀임과 동시에,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은 의인들인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야 하는 죄인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사람은 모두 죄인입니다.”(로마 3,9.23 참조).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되었습니다.”(로마 3,24).
그렇습니다. ‘용서해야 하는 일을 소명을 받은 죄인들’입니다. 곧 이미 사랑과 자비를 입었기에, 또한 그렇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소명을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루카 5,27) 하심은 우리 역시 죄지은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당신은 죄인인 까닭에 저를 부르셨습니다.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찾기도 전에 먼저 부르시고,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먼저 찾아오시고 먼저 용서하시고
저도 먼저 형제를 용서하라 하십니다.
오늘, 제가 그렇게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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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21.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보고타 여행 중에 많은 분을 만났습니다. 저와 일행을 위해서 아름다운 음악으로 미사를 준비해 준 가족이 있습니다.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분들입니다. 그분들의 삶에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해집니다. 안나 자매님이 있습니다. 아직 세례는 받지 않았지만, 센터와 신부님을 도와주시기에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와 같다고 해서 미리 세례명을 정해 드렸습니다. 저와 일행을 위해서 기꺼이 저녁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아우스팅 형제님이 있습니다. 작년에 제가 갔을 때 세례명을 미리 정해 드렸는데 지난 성탄 무렵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대사관에서 일하면서 교민들의 민원을 잘 해결해 주고 있었습니다. 요한 형제님이 있습니다. 아직 세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6월에는 세례를 받을 거라고 합니다. 형제님은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새로 시작하는 식당을 축성 받았습니다. 신자인 어머니의 말을 듣고 성당에 올 때는 가장 깨끗한 옷을 입고 온다고 합니다. 이번도 6월에는 세례를 받을 거라고 합니다. 이 모든 일이 가능한 것은 바오로 사도처럼 센터에서 복음을 전하는 신부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부님과 몬시뇰도 만났습니다. 신부님은 콜롬비아에서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저와 같은 성씨였습니다. 족보를 따지니 저에게는 조카와 같았습니다. 이름이 저의 조카와 같았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물으니, 저와 같은 돌림 자였습니다. 멀리 타국에서 조카와 같은 신부님을 만나니 반가웠습니다. 사람은 늘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신부님은 저를 위해서 좋은 술을 가져왔고, 저도 신부님을 위해서 용돈을 드렸습니다. 교황 대사관에서 사목하는 몬시뇰도 만났습니다. 몬시뇰은 르완다에도 있었고, 벨기에에도 있었다고 합니다. 작년에 콜롬비아로 왔다고 합니다. 이야기하다 보니 제가 아는 신부님과 로마에서 같이 공부했다고 합니다. 짧은 시간의 만남이었지만 신부님과 몬시뇰과 대화하면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외국에 살아도 전혀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저만 해도 외국에 살면서 ‘주눅’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신부님은 ‘K Culture’의 세대였습니다. 몬시뇰도 겸손하면서도 당당한 모습이 멋져 보였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경쟁의 삶을 말하지 않습니다. 나눔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예수님께서도 경쟁의 삶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여러분 중에 첫째가 되려고 한다면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따르려고 한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신앙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용서하고, 사랑하고, 인내하며,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배반했을지라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죄를 묻지 않으시고 평화를 주십니다.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던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속을 지키고, 계명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비록 나약해서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을지라도,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크시기 때문에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혼인을 앞둔 젊은이에게 해 주는 덕담이 있습니다. 서로의 조건을 보기보다는 서로에게 감추어져 있는 가능성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평강공주는 온달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온달은 평강공주를 신뢰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그럴 수가 있나.’라고 불평하기보다는 ‘본당 신부님이 그럴 수도 있지.’라고 이해하면 더 큰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보좌 신부가 그럴 수가 있나.’라고 험담하기보다는 ‘보좌 신부가 그럴 수도 있지.’라고 받아들이면 더 큰 신뢰가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마음으로 죄인을 받아 주셨고, 아픈 이를 위로해 주셨고, 배고픈 이를 배부르게 하셨습니다. 넘어진 이의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강도당한 이웃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돌아온 탕아를 넓은 마음으로 품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며,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자비입니다. 사순 시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해하고, 용서하고, 받아 주는 신앙이면 좋겠습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며 불평하고, 원망하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라며 받아 주고, 품어주는 신앙이면 좋겠습니다. 콜롬비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신부님과 공동체에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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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21.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제나 파격적이고 관대한 예수님의 선택!
돌아보니 참 다양한 곳에 초대를 받아 강의를 했습니다. 교도소, 군부대, 대학교, 본당이나 교구 여러 단체, 수도회, 수녀회...그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곳이 있습니다. 한 기업체 신입사원 연수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신입사원들에 대한 인성교육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당시 강의실에 앉아 있던 신입사원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어찌 그리 다들 깎아놓은 밤톨처럼 반듯하고 늠름하던지? 어찌 그리고 예의 바르고 성숙한지! 꿈에도 그리던 성소자들이 거기 우르르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고스란히 단체로 성소의 길로 안내하고 싶었습니다.
생사고락은 물론이고 미래와 운명을 함께 할 인재를 모집하는 과정에서 누구나 꿈꿀 것입니다. 지적이고, 예의 바르고, 성실하고, 열정이 넘치고, 균형이 잡히고, 능력도 탁월하고...
그런데 오늘 당신의 복음 선포 사명의 첫째가는 협조자인 제자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선택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제가 예수님 같았으면 한점 흠 없고 무죄한 청년, 세파에 물들지 않은 신앙심 깊은 젊은이를 제자로 선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선택을 보십시오. 그분의 파격적인 선택, 말도 안되는 선택에 지켜보던 사람들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입을 다물지 못한 지경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던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레위는 세리였습니다. 이미 세상의 단맛 쓴맛을 다 맛본 사람, 갈 데까지 간 사람이었습니다. 세파에 닳고 닳은 사람, 인간 세상의 잔혹함과 비정함을 온몸으로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로마 제국은 식민지 국가를 대상으로 한 세금징수권을 목돈을 받고 매도했습니다. 세금징수권을 매입한 개인이나 회사는 자신들이 투자한 목돈을 만회하기 위해 엄청난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이러한 세금 청부제의 악용은 가난한 백성들의 허리를 휘청거리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세리들이 저지른 악행이 얼마나 큰것이었는지를 추측케 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세례를 받으러 찾아온 세리들을 향해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아마도 세리들은 적정선의 세금이 아니라 두배, 세배로 세금을 후려쳤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지독했던지, 그리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리는 더도 덜도 말고 그냥 도둑!” 키케로는 세리를 향해 “인간 군상들 가운에 가장 천한 족속!” 이라고 외쳤습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바치는 세금이 결국 침략자인 로마 제국 호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이기에,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세리들을 향해 매국노, 배신자, 배교자라 칭했습니다.
세리들은 법정에 증인으로 나설 수도 없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눈에 세리는 언제나 이방인들과 접촉하였기에, 상시적으로 율법을 어겼으므로, 쓰레기 중에 쓰레기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놀랍게도 그토록 세상 사람들로부터 증오와 멸시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선택은 바리사이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던 의로움에 대한 도전장이었습니다.
그날 밤 레위의 집은 그야말로 가관이었습니다. 오랜 친구 레위가 떠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동료 세리들, 죄인들, 나름 한 주먹 한다는 사람들, 어둠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죄다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숱한 죄인들 사이에 태연히 앉으셔서 주거니 받거니 포도주잔을 기울이고 계셨습니다.
자칭 의인들인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잔뜩 화가 나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넌지시 묻습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루카 5,30)
어깨너머로 들려오는 쫌생이, 찌질이들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의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고, 오늘 우리 죄인들에게 너무나 큰 선물로 다가옵니다. 언제나 파격적이고 관대한 예수님의 선택 앞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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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21.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5,27–32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같은 식탁에 앉으십니다.
사람들이 따집니다.
“왜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이들에게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성 암브로시오는 복음의 이런 장면들을 해설하며
주님이 “죄를 미화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남아 있는 회복의 가능성을 보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주님은 “깨끗해진 뒤에 오라”고 부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부르심이 먼저이고,
그 부르심 안에서 사람이 새롭게 시작합니다.
평화/인내 주간의 오늘 복음은
“누가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를 따지는 마음을 멈추게 합니다.
평화는 경계선을 더 그어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처럼 식탁을 넓혀 얻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묻습니다.
• 나는 사람을 “분류”하는가, “부르는가”?
• 나의 신앙은 누군가를 더 고립시키는가, 다시 공동체로 돌아오게 하는가?
• 내 인내는 ‘참고 견딤’인가, 아니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음’인가?
주님,
제가 안전한 거리에서 평가하는 사람이 아니라
당신처럼 부르고 초대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배제의 습관을 끊고,
한 사람을 다시 살리는 식탁을 차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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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21.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5:25 추가
『‘모든 사람’의 회개와 구원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1) 하느님은, 죄인들이 모두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돌아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에제 33,11)”
“의인이 자기 의로움을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는 그 불의 때문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 자기의 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그것들 때문에 살 것이다(에제 33,18-19).”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오신 분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마태오복음 18장과 루카복음 15장에 있는 ‘되찾은 양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애쓰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비유입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유다인들이나 그리스인들이나 다 같이 죄의 지배 아래 있다고 고발하였습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깨닫는 이 없고, 하느님을 찾는 이 없다. 모두 빗나가 다 함께 쓸모없이 되어 버렸다. 호의를 베푸는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로마 3,9ㄹ-1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로마 3,22-24).”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세리들도 만나셨고, 바리사이들도 만나셨습니다. “우리만 만나셔야 한다. 저 사람들은 만나시면 안 된다.” 라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일’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2)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지만,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예수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강제로 구원하는 것은 구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착한 목자는 ‘잃은 양’ 하나를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만,
스스로 떨어져 나간 양은,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양은, 데리고 갈 수가 없습니다.
배반자 유다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배반자 유다도 ‘잃은 양’이었지만, 그 자신이 ‘스스로 떨어져 나간 양’이 되었고, 결국 멸망을 향해서 갔습니다.
<배반자 유다는 자기 죄를 뉘우쳤습니다. 그러나 그 뉘우침이 회개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마태 27,3-5).
유다의 뉘우침은 그냥 ‘후회’입니다. 아마도 지옥은, “나는 죄가 없다.” 라고 주장하는 죄인들과 자기 죄를 뉘우치긴 하지만 회개는 하지 않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다는 말은,
‘바로 나를’ 구원하려고 오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는 구원받아야 할 존재일 뿐이다.”를 인정하는 것이 믿음과 회개의 출발점입니다.
4)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가 특별히 더 점검하고 반성해야 할 것은,
자기의 내면에 숨어 있는 ‘위선’입니다. 주님에게서 떨어져 있으면서도 함께 있다고 착각하거나, 아니면 항상 주님과 함께 있다고 우기거나...... 말로는 “나도 회개해야 할 죄인이다.” 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특별히 무슨 죄를 지은 것은 아니다.” 라고 생각하고 있거나...... 회개하는 척 하는 것과 진짜 회개를 구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이 스스로 판단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나는 진짜로 ‘밀’인가?”
“아니면 밀처럼 보이는 ‘가라지’인가?” 위선과 교만과 자만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기도.’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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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21.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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