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서 창조된 사람, 하늘에서 온 인간(1코린 15,47)
레위 25,1-17; 마태 14,1-12 /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2023.8.5.; 이기우 신부
아담으로 대표되는 ‘사람’은, ‘땅에서 나와 흙으로 된’ 존재인 데 비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대표되는 새 ‘인간’은 ‘하늘에서 온’ 존재입니다(1코린 15,47).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사람에게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 하고 물으시는데, 이는 인간을 향한 부르심입니다.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지식에 이르게 되는”(콜로 3,10) 이 존재는 사람으로서 지은 죄를 벗어버리고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하느님을 따라 창조된”(에페 4,24) 새 인간입니다.
‘사람’과 ‘인간(人間)’은 한글 표현과 한자 표현일 뿐 의미가 같은 말이지만, 성서를 한글로 번역한 학자들은 위에서 인용했다시피 의미상 구분하여 번역해 놓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 기준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으뜸이며 재산에 대한 태도가 그 다음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맺는 관계는 재산을 사용하거나 소유하는 태도를 결정짓습니다. 따라서 누가 재산을 사용하거나 소유하는 양식 내지 태도를 보면, 그가 하느님과 맺고 있는 관계가 어떠한지도 자연스럽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재산의 사용과 소유에 있어서 하느님의 뜻을 도외시한다면 이는 명백한 우상숭배 행위가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태 6,24)고 말씀하시고, 오히려 재물을 나눔으로써 “하늘에 보화를 쌓으라.”(마태 6,2)고 강력하게 권고하셨습니다. ‘사람’과 ‘인간’이 여기서 나누어집니다. 이를 반영하여, 공의회 문헌에서도 예수님께 대하여 ‘새 인간 그리스도’(사목헌장, 22항)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인 레위기 25장에서 기록해 놓은 희년(禧年)은 파스카 정신을 회복하고 점검하는 제도로서, 하느님과 맺는 영적인 관계를 물질적인 차원에서도 구현할 수 있게 해 줌으로써 땅에서 창조된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늘에서 온 인간이라는 존재로 변화될 수 있게 해 주는 사다리입니다.
노예살이하던 히브리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하느님께서는 이 백성이 당신의 빛을 비추게 하심으로써 인류를 당신 나라로 이끌어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집트 탈출 사건을 비롯한 여러 가지 기적을 일으키시기도 하고 여기서 연원되는 십계명이라는 법도 주셨는데, 십계명에 담긴 파스카 정신을 점검하기도 하고 회복시키기 위해서 주어진 제도가 희년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칠진법의 셈 방식을 도구로 한 지혜가 활용되었는데,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레째 되는 날에 쉬시며 창조된 모든 것이 참으로 좋다고 바라보신 것처럼, 사람은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레째 되는 날에는 노동을 쉬면서 하느님과 세상과 자신을 좋다고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에 대한 경탄에서 나오는 이 경외심이 안식일 제도의 정신인데, 이로써 엿새 동안의 노동의 성과가 매듭지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안식일 법은 칠년 마다 땅과 사람이 쉬는 안식년 법으로 보완되었다가 다시 칠년을 일곱 번 지내고 맞이하는 첫 해인 오십 년째에 희년을 지내라는 법으로 강화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안식년과 희년에 관한 법은 안식일 정신이 충분히 구현되지 못한 역사적 경험에서 도입된 보완조치로서 하느님께서 원하신 사회적 매듭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희년법은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1열왕 21,1-16)에서 드러나듯이, 우상숭배자인 왕비 이제벨의 사악한 계략에 빠진 임금 아합과 이에 빌붙어 군림하던 귀족들에 의해서 무시되고 짓밟히기 일쑤였습니다. 사람이 짓는 전형적인 죄, 특히 나눔을 거절함으로써 하느님께 대적하는 죄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희년의 취지에 따라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달력의 숫자로 헤아린 것이 아니라 그분의 존재와 활약 자체가 이 복음을 앞당긴 희년이었으니,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의 예언(이사 61,1-2)을 통해 희년을 ‘은총의 해’로 선포하신 것이 그 시작으로서 공생활 내내 그분이 선포하신 복음, 즉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온 하느님 나라야말로 희년법의 내용이었습니다(루카 4,18-21). 또한 희년 정신이 잊혀지고 짓밟혀져 있는 당시 이스라엘의 현실을 고발한 인물이 세례자 요한이었고 그래서 헤로데 영주 같은 권력자들이 그를 박해하고 끝내 목을 베었다면(마태 14,1-11), 그 박해를 무릅쓰고서 끝내 희년 정신을 구현하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희년이 되면 노예를 해방시켜야 하고, 그동안 거래로 뒤바뀐 땅주인 대신 원래의 땅주인에게 땅을 되돌려주어야 했으며, 각종 부채도 탕감되었습니다(레위 25,13). 사람이든 땅이든 본래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라는 희년의 취지에 따라서(레위 25,23) 그분이 본래 창조하시고 계획하셨던 본래의 질서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입니다(레위 25,10).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스라엘 역사에서 희년 정신이 선포되기만 했을 뿐 예수님께서 기적처럼 이룩하신 이래로 인류 역사에서 온전히 구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진보는 인류가 이 희년의 정신을 온전히 구현하는 날을 앞당기는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것이 아담에게서 예수로, 즉 땅에서 흙으로 창조된 사람-존재가 하늘에서 온 인간-존재로 진화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따라서 파스카 과업을 수행하도록 반포된 가톨릭 사회교리에서는 이 희년 정신을 ‘재화의 보편 목적 원리’로 가르칩니다. 이 원리는 모든 재화가, 그러니까 땅과 땅에서 난 모든 소출 그리고 그 소출로 인간이 가공해 낸 모든 것들과 사람 모두가 보편적인 목적 즉 하느님의 소유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재화의 사적 소유권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절대적인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재화 소유권이란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절대 소유 안에서 제한적이고 임시적인 사용의 권한임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용권도 모든 재화의 절대 소유자이신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다른 이들 특히 그 재화가 절실히 필요한 이들에게 그 사용 혜택을 허용하도록 행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재화의 소유를 절대적으로 신성시하는 자본주의가 우상시될 수 있는 여지가 여기서 생겨나는데, 그래서 자본주의와 가톨릭 신앙이 첨예하게 대치할 수밖에 없는 전선(戰線)이 소유권 문제이고 따라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 문제입니다. 가톨릭 사회교리에 따르면 소유는 사용을 위한 관리의 책임을 의미하는 것이고 따라서 모든 소유권 행사에는 사회적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소유는 내 마음대로 한다”는 사고방식이야말로 우상숭배적 죄악이며, 재화가 결핍된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사용의 혜택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 복음선포의 명령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발달한 과학과 기술의 열매가 정작 그 혜택이 필요한 이들에게까지 주어질 수 있도록 법률과 사회정책과 사람들의 의식과 문화로 나타날 때까지, 희년의 정신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파스카 정신을 구현함에 있어서 포기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사회적 매듭입니다. 교우 여러분! 땅에서 창조된 우리는 하늘에서 온 인간으로 거듭 나야 합니다.
첫댓글 고정댓글: 모처럼 가톨릭 사회교리를 강론에서 다루었습니다. 독서인 레위기 25장에서 희년(禧年)을 선포했던 이스라엘의 고귀한 전통에 대해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고정댓글 2: 이제 막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우리나라의 형편에 있어서나, 진작부터 중산층이 두텁게 신자들의 주류로 자리잡은 우리 교회의 사정에 비추어서도, 이 희년(禧年) 주제와 상통하는 ‘재화의 보편 목적 원리’는 피해갈 수 없는 문제입니다.
고정댓글 3: 자본주의를 선도해 온 서구 여러 나라들이 모두 이 주제를 정면으로 다루지 못해서 현대 물질문명이 ‘비인간화의 덫’에 빠졌습니다. 그 나라들의 교회와 신앙인들도 이 덫의 위험성을 경고하기는 했으나 예방하지도 치료하지도 못했습니다.
고정댓글 4: 이제 우리나라와 우리 교회가 서구화의 늪에 빠지지 않고 신앙적 정통성을 진정으로 성경 안에서 구현하려면, 이 문제와 주제를 정면으로 직시해야 합니다. 이는 보수와 진보의 이념이나 좌와 우의 노선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사람’이냐 ‘인간’이냐를 결정짓는 근본적인 차이를 낳는 문제요 주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