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난 신앙인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도덕교사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행복의 비결을 남긴 현자나 소원을 들어주실 영험한 분으로 여긴 것도 아닙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목격하고 체험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당신 외아들을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버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사랑을 증거하신 성자, 그리고 사랑 그 자체이신 성령을 체험하고 믿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의 파스카 신비를 통해서 당신의 사랑을 결정적으로,
그리고 더 이상 넘어설 수 없는 방식으로 알려주셨음을 알게 된 신앙인들은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런 까닭에 신앙 공동체는 애초부터 예수님의 일대기 같은 것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전기나 일대기는 과거에 살았던 위인을 기리고 본받는데 필요한 것이지, 오늘 살아계신 그분을 만나는 데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들은 대신 그분의 수난과 부활을 선포하는 복음서를 기록하고 전했습니다.
또 사순과 부활 시기를 한 해의 중심으로 삼아 성대하게 거행합니다.
부활 시기가 끝나자마자 삼위일체 대축일로 더 분명하게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고,
이어서 성체 성혈 대축일을 경축하며 성체성사가 살아계신 그분을 뵙는 자리라고 알려줍니다.
오늘 말씀들은 이런 배경을 두고 선포됩니다
.■ 성체성사로 하느님을 뵙고 모신다먼저
첫째 독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이끌어 내셔서 만나를 먹게 하신 하느님의 뜻을 전합니다. 그
것은 인간이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신명 8,3)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만나는 인간의 존재가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살고 있음을 상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먹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1코린 16,16)라고 할 때, 성체성사의 역할이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지요.
우리가 그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며 동참한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에 동참한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에서 예수께서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고 말씀하신 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함께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사랑에 동참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 나눔과 일치로 이끄는 성체성체는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사제는 성체를 영하기 전에 성체의 작은 부분을 떼서 성혈 안에 넣습니다.
옛날에 교황님께서 성체를 쪼개서 로마의 모든 성당에 보내어 나눠 먹음으로써 우리가 같은 빵을 나누어 먹는 형제자매임을 상기시켰던 전통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체는 나눔과 일치의 수단이고,
나눔과 일치가 있는 곳에 하느님께서 참으로 함께 계신다는 것이 성체성사의 핵심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세우는 자리에서 일치를 위하여 기도하셨지요.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그렇게 성체는 그것을 받아모시는 사람들이 하느님과 사람들의 일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성체를 받아 모시는 사람은 일치를 위해서 이기심의 성벽 밖으로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초기의 교회 신자들은 나눔과 일치라는 성체성사의 의미를 잘 이해하였고 잘 살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미사를 봉헌하면서 사도들의 말씀을 듣고 함께 기도하였으며, 함께 문제를 논의하고,
성체를 나누어 먹음으로써 “이를 행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했습니다.
사도행전이 그런 모습을 증언합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사도 2,42-45)
■ 공동체의 성사, 성체성사결국 성체가 나눔의 실천을 가져오지 않고,
참된 일치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데에 기여하지 않는다면, 성체성사는 하나의 의례로 전락하고 맙니다.
사도 바오로는 일상생활에서 욕심만 차리고 가진 것을 나누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성체를 받아먹기에 부당한 사람이라고 봐서 그런 이들을 책망합니다: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1코린 11,20-22)
미사 때 모시는 성체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몸인지 알고 싶다면,
우리가 성체를 영하면서 이 나눔과 일치의 신비를 살고 있는지를 돌아볼 일입니다.
우리가 부족하나마 끈질기게 이기심과 무관심에 대항하면서 나눔과 일치에로 움직여 간다면,
거기에는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식탁에 함께 앉아 잔치를 벌이는 것은 그렇게 나눔과 일치를 위해 사는 사도로 살기 위해 힘을 얻는 과정인 것입니다.
--- 박용욱 미카엘 신부 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잔칫집에 가면, 사람들이 모여서 그 잔치의 주인공을 축하해 준다.
그리고 그날 잔치의 기쁨을 나누고 음식도 나눈다.
음식을 나누는 것은 기쁨을 함께 나누는 일이 된다.
옛날에는 잔치가 끝나면 하객들이 떠나갈 때 잔칫집에서 음식을 싸주기도 하였다.
대접받은 것만 해도 고맙고 기쁜 일인데, 집에 가서 다른 이들과 나누라고 음식까지 싸주는 것이었다.
근래에는 이것이 없어지고 답례품이나 기념품 같은 것으로 대신하기도 하는데, 가정의례준칙으로 금지한 때도 있었다.
이렇게 옛 전통의 잔치는 단순히 음식을 나누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하객들에게 잔치 음식을 싸서 나누어줌으로써, 하객들은 그 음식을 집에서 가족들과 또다시 나누게 된다.
그러면 그 가족들은 음식을 나누면서 잔치에 관한 이야기로 기쁨을 또다시 나누게 된다.
이것은 우리 전통의 아름다운 풍습이었다.
잔치와 축제의 기쁨을 축하객들의 가족에게까지 확대시켰던 조상들의 깊은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은 좋은 것 같다.
옛말에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진다고 하였다.
우리는 부활시기를 지내면서, 생명이 가져다주는 기쁨을 나누었다.
마치 한 아이의 탄생에 온 가족이 기뻐하듯이,
또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난 사람의 가족들이 기뻐하듯이 새 생명에 대한 기쁨을 나누었다.
리고 50일 간에 걸쳐 오랫동안 그 기쁨을 나누고 축제를 거행하였다.
여덟번째 되는 주일에 우리는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내고 부활시기를 마감하였다.
이제 성령께서 우리 교회 안에 머물러 계시고 함께 계신다.
그런데 부활시기가 끝나고 이어지는 주일들에 계속해서 주님의 축일들을 지낸다.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주일이 '삼위일체 대축일'이다.
이 대축일은 하느님 아버지, 성자 그리스도의 구원사업(파스카 사건)
그리고 성령 강림으로 삼위일체의 신비가 드러난 것을 기념하는 신학적 축제이다.
또 그 주간 목요일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 대축일을 성대하게 지내려고 주일로 옮겨서 지낸다.
이 축제는, 이제 성령 강림으로 온전히 태어난 교회가 성체성사의 신비를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말해주는 축제이다.
파스카 신비를 통해 교회는 온전히 주님의 힘으로 산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 안에 성령이 함께 계신다. 마치 몸 안에 영혼이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교회의 자녀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다. 이제 이 몸은 그리스도의 몸, 곧 성체이다.
그래서 교회의 본질은 성체성사인 것이다.
이제 믿는 이의 몸(교회)은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을 기념하고 축제를 지내며, 잔치를 벌이는 것이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이다.
그렇다면 이 축일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본래 이 축일은 13세기에 성체께 대한 신심에서 유래되었다.
당대에는 성체 신심이 많이 실천되던 시대였다.
또 이 시대에 오르비에토(Orvieto)에서 성체성사의 기적도 일어났다.
여행을 하던 한 사제가 성체성사에 의심을 품고 미사를 봉헌하던 중
빵과 포도주가 실제의 살과 피로 변하는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우르바노 4세 교황은 교서를 반포하고 이 축일을 이날 목요일에 지내도록 결정했다.
그리고 14세기에 와서 전 교회가 모두 이 축일을 지내게 되었다.
이것은 성체성사가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 기적 사건이다.
또 이 사건과 신자들의 신앙 때문에 교회가 자신의 몸(교회)에 대한 축제를 지내게 된 것이다.
이날 축제는 더할 나위 없이 '성체'께 대한 것이다.
주일마다 교회 공동체가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 이미 '성체성사'의 신비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이날은 이를 특히 더 강조한다.
이날 독서의 내용은 모두 성체성사의 신비를 말해준다.
구약 독서는, 멜기세덱의 제사(가해), 시나이산의 계약제사(나해), 사막에서 만나를 먹음(다해)으로 성체성사에 관한 구약의 예형들이다.
또 복음은 생명의 빵에 관한 예수님의 설교(가해), 최후만찬(나해), 빵을 많게 한 기적(다해)으로 성체성사에서 말하는 '나눔의 의미'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성체성사의 의미는 명료하다.
나눔의 신비이다.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이나 최후만찬 이야기, 또는 빵을 많게 한 기적에서 보듯이 기적은 '나눔'에서 생긴다.
생명은 기쁨이며, 기쁨은 나누어야 더 커지고 많아진다.
그게 기적이다.
'모인 이들 우리끼리만' 나누고 즐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라는 범위에 한정되지 않는다.
마치 잔칫집과 같다. 집으로 돌아가는 하객들이 잔치 음식을 싸들고 가듯이,
우리도 또다시 나눌 기쁨을 싸들고 세상에 나아가 '다른 이들'과 나누어야 한다.
자신의 '몸'을 '생명'이 되는 '음식'으로 내어주신 그리스도,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나눔의 신비를 오늘 묵상해 보자.
--- 나기정 신부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