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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는 세명의 여왕이 있었습니다.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 세명의 여왕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편견이 많고 오해가 많은 여왕이 바로 진성여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다시 읽는 여인열전]
‘淫女(음녀)로 몰린 성군’ 진성여왕
*“국정혼란은 내탓”…왕위 넘겨 책임정치 실천
신라가 진성여왕(재위 887~897) 때문에 망했다는 통설은 과연 맞는 것일까.
진성여왕은 신라의 51대왕으로 56대 경순왕까지 다섯 명의 후대 임금들이 더 있다.
그럼에도 신라는 진성여왕 때문에 망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인데, 이런 시각의 원조는
김부식의 ‘삼국사기’ 진성왕 조(條)이다.
“진성왕이 전부터 각간 위홍(魏弘)과 통하였는데〔통〕, 때에 이르러 항상 궁중에 들어와
일을 보게 하였다…홍이 죽자 혜성대왕(惠成大王)이란 시호를 추증했다. 이때부터 2~3명의
미소년을 가만히 불러들여 음란한 짓을 자행하고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국정을 위임하니
이로 말미암아 임금의 총애를 받는 자들이 방자하게 날뛰고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졌으며,
상벌이 공정치 못하여 기강이 문란해졌다…."
일연의 ‘삼국유사’도 이런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제51대 진성여왕이 임금이 된 지 몇 해 만에 유모(乳母) 부호부인(鳧好夫人)과 그의 남편
위홍 등 3·4 명의 총신(寵臣)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사용해 정사를 어지럽히자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근래에 발견된 황룡사 탑지에서 황룡사 9층목탑의 중수책임자였던 위홍이 진성여왕의 아버지
경문왕의 동생이라는 내용이 나오자 그녀는 ‘역시’ 음녀였다며 그녀 때문에 신라가 망했다는
시각이 맞음을 재차 확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성여왕과 위홍의 관계는 신라 당대인들의 시각에서는 불륜이나 추행이 아니었다.
‘위홍이 죽자 혜성대왕(惠成大王)이란 시호를 추증했다’는 ‘삼국사기’기록이나 ‘삼국유사’
‘왕력(王曆)’조의 “왕의 배필은 위홍 대각간(大角干)이다”라는 기록은 둘 사이가 공인된
관계였음을 말해준다.
둘이 신라 사회의 성 윤리를 어기고 간통한 사이였다면 죽은 위홍을 ‘대왕’으로 추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오빠 정강왕의 유조(遺詔:임금의 유언)도 음녀와는 거리가 멀다.
“나는 불행히 사자(嗣子)가 없으나 누이동생 만(曼:진성여왕)은 천성이 명민하고 골상(骨相)이
장부와 같으니 경 등은 선덕·진덕여왕의 고사에 의거해 그를 왕위에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정강왕이 진성여왕을 후사로 삼은 것은 위기타개를 위한 일종의 승부수였다.
선덕·진덕여왕이 위기의 신라를 구해내고 신라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것과 같은 역할을
진성여왕에게서 기대했던 것이다. 진성여왕 즉위 당시 신라는 붕괴의 길을 걷고 있었다.
진골 귀족 사이에 반란이 잇따랐다.
진성여왕 때부터 역순으로 잠시 살펴보면 50대 정강왕 2년(887년)에 이찬 김요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49대 헌강왕 5년(879년)에 일길찬 신홍(信弘)이, 48대 경문왕 14년(874년)에
이찬 근종(近宗), 6년(866년)에 이찬 윤흥(允興)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불과 20년 사이에 4번의 반란이 일어났으니 연례행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강왕은 여왕을 세워 위기를 극복하려 한 것이었다.
진성여왕은 정강왕의 믿음에 보답하듯 즉위하자마자 죄수를 대사(大赦)하고 모든 주군(州郡)의
조세를 1년간 면제했다.
그녀는 백성들의 고통을 가슴 아파하는 애민군주였던 것이다.
그러나 진성여왕에게는 자신의 구상을 집행할 인재들이 없었다.
선덕·진덕을 보필했던 김춘추와 김유신같은 인재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재위 3년(889년) 상주 지방에서 원종과 애노가 주도하는 난이 일어나자 진성여왕이
진압하라고 보낸 내마(柰麻) 영기(令奇)가 성을 장악한 반군이 두려워 가까이 가지 못할
정도였다. 이 반란의 계기가 ‘국내 여러 주군에서 납세를 하지 않아 창고가 비고 국가재정이
결핍되어 국왕이 사신을 파견해 납세를 독촉한 것’ 때문이라는 ‘삼국사기’ 기록은 이 무렵
신라의 국가시스템이 붕괴했음을 말해준다.
위홍은 그녀의 일급 참모였지만 이런 위기상황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황룡사 9층목탑을 중수하고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향가집 ‘삼대목’(三代目)을 편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문화의 인물이지 위기관리 인물은 아니었고 또 일찍 사망했다.
‘삼대목’ 편찬 등은 진성여왕과 위홍의 신라전통문화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당시 신라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비상수단을 통한 안정이었다.
재위 5년 양길(梁吉)의 부장 궁예(弓裔)가 강릉지역을 공격하고, 재위 6년에는 견훤(甄萱:진훤)이
완산(完山:전주)에서 후백제를 세우는 등 혼란이 가중됐다.
이런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그녀가 던진 승부수가 최치원이었다.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당나라에 문명을 떨친 최치원은 헌강왕 11년(885년) 17년간의
체당(滯唐)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그는 세계제국 당나라에서 익힌 정치철학과 행정능력을 신라에서 발휘하고 싶었으나 진골이
아니면 고위직에 오를 수 없는 폐쇄적인 신라에서 중하위 지방관을 전전하는데 그치고 있었다.
그런 최치원에게 진성여왕은 재위 8년(894년) 난국타개책을 작성해 올리라고 명령했다.
최치원은 이에 따라 시무 11조를 올렸는데 여기에는 당연히 신분보다는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을
요구하는 내용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진성여왕은 이를 즉시 가납하고 최치원을 6두품 중의 최고 관직인 제6관위 아찬에 봉했다.
그러나 그의 시무책은 진골귀족들에 의해 거부되고 말았다.
이는 신라 개혁안의 좌절을 의미했다.
그 결과 재위 10년에는 빨간 바지를 입은 도적인 적고적(赤袴賊)이 지방은 물론 서라벌의
모량리까지 약탈하는 등 통제불능의 상황에 빠져들었다.
진성여왕은 이런 사태에 책임지고 왕위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했다.
재위 11년(897) 6월 “근년 이래 백성들이 곤궁해지고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니 이는
나의 부덕(不德) 때문이다”라며 큰오빠 헌강왕의 서자(효공왕)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36대 혜공왕 이래 국왕이 피살되거나 자결하는 등 신라 하대의 혼란은 오래되었어도
스스로 책임을 통감하고 양위한 임금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왕위를 내놓고 북궁(北宮)에서 거주하다가 6개월도 안된 그해 12월 세상을 떠난 데서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결단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책임정치 실현은 후대에 신라 망국의 책임에 대한 자인(自認)으로 악용됐다.
그러나 진성여왕 당대에 세워진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문’에서 최치원은 “(진성여왕의)
은혜가 바다같이 넘쳤다”고 적어 그녀를 성군으로 묘사했다.
당대의 성군과 후대의 음녀 중 여성에 대한 편견을 제거하면 진실은 자명하다.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충남 보령시 성주면(聖住面)에 있는 통일신라 말의 고승 무염(無染·801~888)의 탑비로서
신라 것 중 가장 큰 비석이다(높이 4.55m). 국보 8호로 지정됐다. 낭혜는 진성여왕이 내린
시호이고 원법명은 무염인데 태종무열왕의 8세손으로 애장왕 2년(801)에 태어났다. 당(唐)나라에
20여년 체류했으며 귀국 후 성주사에 있다가 진성여왕 2년 입적(入寂)했다. 이 탑비는 거대한
외형이나 힘찬 조각과 글씨로 보아 신라 석비의 대표라고 할 만하다. 최치원 같은 비판적 지식인이
진성여왕을 극찬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특히 이 글은 진성여왕에 의해 최치원이 중용되기 이전에
쓴 글로, 후대 기록인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가 그녀를 극도로 폄하한 데 대한 당대의 반론이란
점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덕일·역사평론가]
한마디로 진성여왕은 망해가는 신라의 어찌보면 마지막 희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의 곁에는 현명한 대신이 없었고 그나마 파격인사로 등용했던 최치원마저
6두품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진골들의 반발로 무산되버렸죠.(우리 조상님 ㅠㅠㅠㅠㅠㅠ)
만약 진성여왕이 끝까지 자신의 정책들을 추진할수있었더라면 아마 신라의 역사는 조금
바뀌지않았을까 감히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저 글을 보니까 김부식이 한층더 싫어지네요.
삼국사기...................어쩜 그렇게 편협하고 자기마음대로 쓸수있는지....
단재 신채호선생께서도 삼국사기에 대해서 많은 비판을 했다던데 신채호선생보다도
아는게 거의 없는 제가 봐도 감히 참 별로인 역사서다 라고 말하고싶어집니다......
아무튼 진성여왕에 대해서 지금이라도 편견이 있었다면 조금은 바꿔보시는게 어떨지.
첫댓글 김부식..어찌나 편협하신지
진짜 편협해요, 김부식. 개인적으로 저는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성공했다면 좋았을걸 이라는 생각 많이 합니다. 김부식...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지않아 ㅠㅠㅠㅠㅠ
그러나 진성여왕 자체도 똑똑한 여왕은 아니었던거같아요~ 그저 이미지가 변질되서 불쌍하고 안타까운 것은 있지만...정치적 포부도 별로 없었고..또 뒷받침해주는 신하들도 별로 없었고....
김부식이 쓴 말 중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하는데, 여왕의 재위를 겪으면서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실로 다행이다' <- 이게 참...정말 싫긔 어찌나 유교적 잣대에 충실하신지
그런데 당시상황을 생각해보면 진성여왕은 왕위직에 대해서 회의를 많이 느낀거같아요. 자기가 믿고따를수있는 신하가 한명도 없었으니...대신들이라곤 다 자기들 잇속만 챙기니 뭘 하고싶어도 할수가 없어서 좌절한듯도 해요. 물론 님의 말씀대로 포부가 부족한점도 있었겠지만요..
김부식 사대주의도 엄청나고 삼국사기에는 고조선 역사도 없잖아요. 너무 싫다구
근데 묘청의 서경천도운동도 취지는 좋은데..너무 비현실적이어서..성공했다쳐도 큰 결과를 낳을 수 있었을런지..라는 생각 해본다긔 물론 굉장히 진취적이고 신선한 바람이었긴 하지만 말이죠..아 모르겠다ㅠㅠㅠㅠㅠㅠ이런 걸로 머리 쓰는게 역사의 골치이자 재미죠ㅋㅋㅋㅋㅋ
우와..... 자료 감사합니다
참 김부식이 싫어지는 자료네요..ㅠㅠㅠㅠ 그리고 저 이런자료 진짜 좋아해요~ 많이 많이 올려주세요~
국사샘이 하던말.. 김부식! 부식될 놈이라고~ .. 정말 최치원은 정말 아숩고 또 아숩긔
삼국사기가 아쉬운 점도 있지만 사대주의에 찌들어서 자기맘대로 왜곡해 쓴 역사서는 아니에요. 엄밀히는 창작물이 아니라 그동안 전해오는 역사서들를 토대로 편집한거구요. 사실 신채호 선생 역시도 비판받을 점은 받고 있어요. 그리고 최치원 말이 나와서 생각난 건데, 삼국사기에 이런 부분이 나옵니다. 최치원이 지은 한 책에 신라 상고기 왕들의 칭호를 원래 신라말대로 거서간이나 이사금, 마립간 등으로 쓰지않고 (이를테면 유리이사금,내물마립간 뭐 이렇게;) 무슨 왕, 무슨 왕 으로 (즉, 중국식, 유교식으로 유리왕, 내물왕) 고쳐서 칭한 것은 그말이 촌스러워서인가, 신라 역사를 기록할 때 신라 말을 보존해 쓰는 것이 마땅하다.
이렇게 김부식이 오히려 주체적인 사관을 보이며 최치원을 비판하고 있는 부분도 함께 기억하면 좋지요 ^^
님 앞으로도 이런 자료 아쥬 많이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