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목포에 다녀오는 길에 백수해안도로를 지나왔다. 원래는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서울 방향으로 곧장 달릴 예정이었지만 영광 IC에서 핸들을 꺾어버렸다. 칠산 앞바다를 굽이도는 10km 해변길, 백수해안도로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다. 평일이라 유난히 고요했던 그 길 위를 아주 천천히 달렸다. 때마침 들어온 밀물 위로 발갛고 맑은 노을이 비쳤다. 갓길에 차를 세우자 나의 시간도 잠시 멈췄다. 이 아름다운 길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졌다. 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
칠산정에서 바라본 백수해안도로
엄마와 함께 다시 찾은 영광 백수해안도로
"여행 언제 갈 거야? 평일이면 연차 미리 쓸게."
아직 일손을 놓지 못한 엄마는 아껴왔던 연차 얘기부터 꺼냈다.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소녀처럼 밝다. 바쁘게 산다는 핑계로 얼마나 무심하게 굴어왔는지 새삼 깨닫는다. 자식들을 타지로 내보낸 부모님은 처녀총각 시절 그랬던 것처럼 어느덧 당신들만의 새로운 인생을 꾸렸다. 하지만 자식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언제나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나는 알면서도 외면했던 것 같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본가인 천안에서 약 3시간을 달려 백수해안도로에 도착했다. 백수해안도로는 영광 8경 중 제 1경에 속한다. 칠산 앞바다의 구불구불한 해안선과 크고 작은 섬들을 바라보며 달릴 수 있어 삼척 새천년해안도로에 필적할만한 서해 대표 해안도로로 꼽힌다. 포털에서 백수해안도로를 검색하면 홍곡리가 시점으로, 대신리가 종점으로 나오는데 드라이브를 하려면 그 반대로 달려야 한다. 그래야 바다를 도로 가까이 두고 풍경을 즐길 수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영광대교부터 백암해안전망대까지, 약 10km 구간이 바다를 볼 수 있는 길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커 갯벌이 훤히 드러나기도, 길 앞까지 바닷물이 차기도 한다. 바다타임(http://www.badatime.com/111.html) 영광 물때표를 참고하면 스케줄을 잡기 편하다. 주말은 평일보다 차량이 많지만 도로 중간에 넓은 주차장이 많아 언제든 원하는 풍경에서 쉬어갈 수 있다.
[왼쪽/오른쪽]배롱나무가 반기는 길 /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 같다.
그 길 위에서
일단은 드라이브삼아 종점까지 달리기로 했다. 도로 자체가 구불구불해 속력을 내기 힘든 구조다. 오히려 다행이다. 덕분에 10km 남짓 짧은 거리를 천천히, 오래 들여다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칠산 앞바다는 가을 햇살을 받아 하얗게 반짝였다. 시선을 조금 더 멀리 던지면 크고 작은 섬들이 눈에 담겼다. 언덕배기 배롱나무는 분홍색 꽃망울로 색감을 더했다. 그 모든 것들이 지루할 틈 없이 시선을 빼앗았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이것 역시 그림이다.
해안도로 끝까지 달린 후 원점으로 되돌아와 할미여 바위 근처에 위치한 제 7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이제부터는 천천히 걸어볼 참이다. 여기서부터는 나무데크길이 이어져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달콤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근원은 해당화였다. 몇 송이 남지 않았는데도 데크길 전체가 향기로 가득 찰 만큼 그 농도가 진했다. 남은 꽃들마저 잎이 시들한걸 보니 무더운 이 계절도 끝물임에 틀림없다. 엄마는 시시콜콜한 생각이나 하는 내 앞에서 해당화를 좋아했던 외할머니 얘기를 꺼냈다. 내가 며칠 전 이곳에서 엄마를 생각했던 것도 비슷한 이치일까.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소중한 것을 떠올리며 걸었다.
한없이 걷고 싶게 만드는 데크로드
365계단은 높이가 낮아 누구나 쉽게 오르내릴 수 있다.
이윽고 365계단에 다다랐다. 이제부터는 수백 개의 계단을 오르내려야 한다. 계단이 365개일 거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1년 365일 건강을 지켜준다는 뜻이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바위틈새 바닷물이 드나드는 것까지 구경하고 올 수 있다. 계단 높이가 낮고 발 디딜만한 공간이 넓어 관절이 약한 어르신들도 천천히 오르내리기 좋다. 앉아 쉴만한 곳도 몇 군데 보였다. 계단 옆으로는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꽃무릇이 군락을 이뤘다. 해당화가 완전히 지면 꽃무릇이 만개할 테니, 지금쯤이면 붉은 융단을 볼 수 있겠다.
백수해안도로 최고의 전망대 칠산정. 더운 한낮에도 바람이 불어 시원하다.
365계단 맞은편에는 칠산정(七山亭)이 있다. 하얀 몸통에 검은 기와를 얹어 단정하고 깔끔한 느낌이다. 나선형 계단을 따라 정자 3층 꼭대기에 올라가면 백수해안도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달리면서 볼 땐 그저 구불구불한 길이지만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해안도로는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입체적이다. 두어 대의 푸드트럭과 포장마차도 보인다. 간단히 허기를 채우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왁자지껄하다. 간이의자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옥수수, 핫도그 따위를 나누어 먹는 모습이 군침을 돌게 한다.
노을과 만나는 두 가지 방법
잠시 쉬며 목 좀 축일 겸 카페 '쉘부르'에 들렀다. 집 떠나기 전 미리 찾아둔 카페였는데, 실제로 보니 보테니컬 인테리어와 전망 좋은 테라스가 더욱 인상적이다. 근처 카페들 중 바다와 가장 가까워 인기가 꽤 좋았다. 테라스에 앉을 수 있었던 게 행운일 정도. 우리는 에이드를 주문한 뒤 나란히 바다를 마주보고 앉았다. 그리고는 사진을 찍거나 풍경과 관련한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엄마는 친구이자 스승이자 인생이라는 여행의 동반자다.
그러고 보니 엄마와의 이번 여행은 내 방식과 사뭇 다르다. 나는 성격이 급해서 짧은 길을 오래 두고 걷지 못한다. 게다가 꽃무릇이니 해당화니 배롱나무니 하는 것들도 관심이 별로 없다. 하지만 엄마는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아니, 놓치려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둘만의 여행이 그만큼 소중해서? 관심사를 표출하고 싶어서? 모두 맞는 얘기겠지만 아직도 내 앞에서만은 척척박사이고 싶은 '엄마 마음'이 아닐까, 감히 헤아려본다.
백수해안도로에서 만난 일몰
시간은 일몰에 가까워졌다. 수평선 너머로 저무는 해가 하늘에 바알간 흔적을 남기며 타올랐다. 시야 방해 요소가 없는 테라스는 해넘이 관망에 적합한 장소였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옆 노을전시관에서 오늘의 해를 배웅하기로 했다. 노을전시관까지는 약 500m, 걸어서 10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노을전시관은 노을의 생성원리와 세계 각국의 노을풍경 등을 전시한 박물관이다. 3층 전망대에는 성능 좋은 망원경이 설치돼 있어 칠산 바다를 구석구석 살필 수 있다. 벽이 통유리라 굳이 망원경을 통하지 않아도 바다와 노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해가 저물면 유리벽에 그날의 노을이 담기는, 말 그대로 '노을 전시관'인 셈이다. 노을전시관은 하절기(3월~10월)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동절기(11월~2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운영한다. 노을을 감상하기에는 폐장이 다소 이르나 건물 밖에도 등대, 벤치, 테라스 등 일몰 감상 포인트가 많으니 아쉬워 할 필요는 없다. 9월 30일부터 10월 1일까지 해수온천랜드 일원에서 영광백수해안도로 노을축제도 열린다.
[왼쪽/오른쪽]밥도둑이 모인 영광굴비 한상 / 그중에서도 영광굴비 맛이 제일이다.
여행 마무리는 영광굴비로
숙소에 들어가기 전 저녁을 먹기 위해 법성포로 향했다. 법성포는 백수해안도로의 시점인 영광대교 부근에 위치해 금세 오갈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거의 모든 식당들이 굴비를 취급해 아무 곳으로나 들어가면 된다. 우리의 선택은 주차가 쉬우면서 건물이 크고 깔끔한 '풍성한 집'. 장사가 잘 돼 지난해 확장 이전했다. 메뉴는 '풍성한정식'(1인 20,000원) 한 가지다. 주문과 동시에 식당에서 직접 말린 굴비 두 마리와 돌솥밥을 기본으로 보리굴비, 고추장굴비, 조기매운탕, 대하장, 가자미찜, 병어회, 간장게장 등 고급스러운 곁들이 음식을 차려낸다. 미리 덜어놓은 흑미밥에 고소하고 짭조름한 굴비 한 점 올려 먹는 맛은 줄어드는 밥이 아까울 정도다. 2인에 한 마리씩 제공되는 큼지막한 간장게장도 짜거나 비린 맛이 전혀 없어 밥도둑 노릇을 톡톡히 한다. 더운물과 함께 불린 밥은 보리굴비, 고추장굴비와 찰떡궁합이다. 대부분 간이 적당해 밥 없이 따로 먹을 수 있다.
구수한 숭늉을 끝으로 저녁식사가 마무리됐다. 남은 일정은 숙소에서 푹 쉬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여행 내내 지친 기색 없던 엄마는 숙소에 돌아와서야 졸린 눈을 비볐다. "거봐 힘들지?" 물으니, 끝까지 "눈만 피곤해" 한다. 이젠 이곳에 누구와 다시 오더라도 하루의 피로를 감추려 더 해맑게 웃는 엄마 얼굴이 먼저 떠오르겠지. 어느새 잠든 엄마를 바라보며, 우리 둘만의 밤이 더 많아지길 바랐다.
여행정보
- 주소 :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읍 해안로
-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선정
- 주소 :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읍 해안로 957
- 문의 : 061-350-5600
주변 음식점
- 풍성한집 : 굴비정식/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면 법성포로3길 60/ 061-356-0733
- 일번지식당 : 굴비한상 /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면 굴비로 37 / 061-356-2268
- 명가어찬 : 굴비한정식 /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면 굴비로 51 / 061-356-5353
숙소
- 숲쟁이펜션 :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면 숲쟁이길 77-22 / 010-2023-33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