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 경전인 5부 니까야에서
쌍윳따 니까야(Saṃyutta Nikāya, 약호 SN)는 상응부(相應部)의 이름을 가진다. 즉, 相應의 내용에는 서로가 상응하거나 맞물린 뜻을 가진다는 것이다.
필자는 서로가 상응하거나 맞물리는 바로서 연기와 법에 대한 올바른 앎을 이들 쌍윳따 니까야의 정리를 통해 그동안 경험하였고 계속 노력하고 있다.
즉, 쌍윳따 니까야 SN1.1의 '피안'을 필두로
SN12.15 <가전연경>의 정견과 중도 그리고 12연기 등 법의 유래에 관한 설명들과,
'생노사'를 함께 생겨나는 연기에 설명한 SN12.20 <조건경>과
삼매에서 색수상사식 등 오온의 집멸을 관찰한다는 것이 곧 삼매이라는 SN22.5 <삼매경>과
오온에 나라고 할바가 없다는 S35:73 <무아상경>과
SN56.11<초전법륜경>의 '집법즉멸법'의 연기 요소를 중도에 의해 깨달아 법과 사성제 등을 밝히고 있고,
오온을 세상의 구성요소에 밝힌 SN22.94<웁타경> 등 대다수 쌍윳따 니까야 상응부(相應部)의 경전들은 피안과 열반의 목적을 위하여 '연기와 법'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대승의 불자로서 그동안 몇권의 대승 불교 경전을 편찬하였다.
수지 독송하고 그럴 때 <지장경>에서 나오는 불보살 이름들 즉, 청정연화목여래에서 '청정'한 연꽃과 각화정자재여래와 정자재보살의 '정자재'를 선정 삼매에 매진한 인욕의 수행승 '보살'에 칭하고 있다. 또한,
<반야심경>과 <천수경>에 나오는 '관자재'보살이 법을 알아차리고 법을 마음에 챙기라는 뜻과
관세음보살의 뜻이 세상의 이치 혹은 말[세음]은 '이근원통'처럼 대상을 갈구하는 수행자 마음에 의해 반연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며 마음에 챙기라는 뜻이다.
세상의 관심사에 무위하고 감각적 욕망과 삿된 견해들의 아상 인상 중생 수자상 등 각종 상相에 응하는 바에 없이 머물라는 즉, 지금 여기를 알아차리고 법을 마음에 챙기라는 뜻의 '응무소주이생기심'하여 '통달 무아법자'하라는 <금강경>과
육종진동의 경이로움과 정안형제 법화 삼매 육신통 37조도품등이 나오고 있는 <법화경>과
몸과 마음의 청정한 경지의 '십지'와 코구멍 주변에 수없이 들락거리는 내외입처 형성들의 수행을 통해 법을 마음에 챙기는 보현보살행법이 나오는 <화엄경> 등의 내용들도 수행을 통해 그 뜻을 음미하면
전래 당시의 취지에 살펴보면 초기 불교 경전에서 정각을 이루어 나가는데 필요한 바와 상통한다.
'서건동진'의 대승 불교가 전래 과정에서 그 당시의 토착문화와 어울러 중생들의 고통과 두려움에 피안으로 그 뜻을 확대 설명한 경우의 경전이라고 할수가 있다.
쌍윳따 니까야는 상응부 이름 즉, 전해온 가르침 이라는 아가마 4부 경전의 한가지이다.
반면 앙굿따라 니까야(AN) 잡아함경은 <출현경>A3.134에서의 삼법인 혹은 <중간경>AN6.61에서의 연기와 중에 대한 이해처럼,
법을 이해하는데 보충적거나 부수적인 설명을 모아둔 경전이다.
그래서 '염불"은 지금 여기에 마음챙겨[염] 법을 즉, 붓다의 각성[불]을 밝히라는 바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SN1:1 <피안품>---
발판 얻기 전에는 [격류 따라 흘러가며]
강에서 사지를 아등바등하지만
발판 얻어 땅 위에 이미 올라선 자는
더 이상 아등바등하지 않게 되나니
그는 이미 저 언덕에 도달했기 때문이라.(Yāva na gādhaṃ labhati nadīsu,
Āyūhati sabbagattebhi jantu;
Gādhañca laddhāna thale ṭhito yo,
Nāyūhatī pāragato hi sova [soti (sī. pī. ka.), hoti (syā. kaṃ.), so (?)].)
“세존이시여,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멈추지 않고 아등바등하지 않아서 폭류를 건넜습니까?”
“도반이여, 내가 멈출 때 나는 가라앉아 버렸다.
도반이여, 내가 아등바등할 때 휩쓸려 버렸다.
도반이여, 이처럼 나는 멈추지 않고 아등바등하지 않았기 때문에 폭류를 건넜노라.”
(‘Yathā kathaṃ pana tvaṃ, mārisa, appatiṭṭhaṃ anāyūhaṃ oghamatarī’ti?
‘Yadākhvāhaṃ, āvuso, santiṭṭhāmi tadāssu saṃsīdāmi;
yadākhvāhaṃ, āvuso, āyūhāmi tadāssu nibbuyhāmi [nivuyhāmi (syā. kaṃ. ka.)].
Evaṃ khvāhaṃ, āvuso, appatiṭṭhaṃ anāyūhaṃ oghamatari’’’nti.)
비구들이여, 그러나 비구가 무명을 제거하여 명지가 생기면 그에게서 무명은 빛바래고 명지가 생기기 때문에
그는 공덕이 되는 의도적 행위도 짓지[형성] 않고
공덕이 되지 않는 의도적 행위도 짓지 않고
흔들림 없는 의도적 행위도 짓지 않는다.”
(Yato kho, bhikkhave, bhikkhuno avijjā pahīnā hoti vijjā uppannā,
so avijjāvirāgā vijjuppādā neva puññābhi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
na apuññābhi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 na āneñjābhi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
註) saṅkhāra(saṅkhata)는
saṁ(saṅ)+karoti[作, 하다]
“의도적 행위[형성]를 짓지 않고 의도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세상에 대해서 어떤 것도 취착하지 않는다.
취착하지 않으면 갈증 내지 않는다. 갈증 내지 않으면 스스로 완전한 열반에 든다.
그는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Anabhisaṅkharonto anabhisañcetayanto na kiñci loke upādiyati;
anupādiyaṃ na paritassati, aparitassaṃ paccattaññeva parinibbāyati.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ti.)"
----<홀로경> SN36:11-----
Atha kho pana, bhikkhu, mayā anupubbasaṅkhārānaṃ nirodho akkhāto.
비구여, 나는 더 나아가서 형성된 것들[行]이 차례로 소멸함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Paṭhamaṃ jhānaṃ samāpannassa vācā niruddhā hoti.
초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말(시나리오)이 소멸한다
Dutiyaṃ jhānaṃ samāpannassa vitakkavicārā niruddhā honti
제2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소멸한다
Tatiyaṃ jhānaṃ samāpannassa pīti niruddhā hoti
제3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희열이 소멸한다
Catutthaṃ jhānaṃ samāpannassa assāsapassāsā niruddhā honti
제4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들숨날숨이 소멸한다.
→ 몸과 마음의 형성을 닦아야 형성의 뜻[상카라 지음☞업, 행온]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