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이름 붓다
여래의 공덕을 찬탄함이란 붓다 안에 이루어져 있는 이미 '붓다되어 있음'을
찬탄할 뿐 아니라 중생의 삶 안에 갖추어진 '본래 붓다됨'을
찬탄하고 그것을 중생의 닫혀진 현실 속에 구현해가는 일이다
붓다는 세계의 연기적 본질을 자신의 한 몸 안에 남김없이 실현하고
세상에 한없는 대비를 시현하는 분이다. 그래서 붓다는 '붓다'라는 이름만으로
떠받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갖가지 거룩한 이름으로 그의 해탈된 삶이 기술 된다.
붓다에 관한 여러 가지 이름은 초기 경전에서부터
여래십호로서 정리되어 붓다에 대한 경건한 우러름의 언어가 되어왔다.
여래십호란 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세존이다.
여래는 진리 그대로 오신 분 진리대로 살아가시는 분이란 뜻이다.
십호 가운데 두번재 응공이란 응당 공양햘 분이란 뜻이다.
붓다는 늘 대중을 섬기고 대중의 요구를 체현하며 세상의 뭇 삶들을 위해
지공무사의 삶을 산 분이다. 붓다는 바로 세상을 받듦으로
세상으로부터 받들어지며 지극히 낮춤으로 지극히 높게된 분
그러므로 마땅히 세상으로부터 공양받아야 할 분이 된 것이다.
또 붓다는 치우침 없이 존재의 실상을 바르게 아시는 분
(정변지), 이론과 실천, 지혜와 행이 늘 하나된 분(명행족)이다.
그래서 다시 붓다는 생활 속의 모든 곤란과 장애를 뚫고 잘 앞으로 나아가는 자,
고통과 질곡의 이 언덕에서 니르바나의 저 언덕으로 잘 간 자(선서)이며, 역사와
사회의 합법칙성을 바로 이해한 자(세간해)이며, 위없는 스승(무상사)이다.
그는 진리로서 세상을 잘 길들이는 위력있는 자(조어장부)이며, 천상과
인간 모든 계급과 계층의 참된 스승(천인사), 세간 속에 존귀한 자(세존)이다.
경전의 표현대로 하면 중생은 중생이 아니라 여래장이며 무량공덕장이고
묘법장이다. 중생은 다만 여래장. 묘법장을 전체적으로 쓰지 못하고
스스로 끊어내고 닫아 버리고 뒤틀리게 하는 자일뿐이다.
여래의 공덕을 찬탄한다는 것은 지금 소외된 모습으로 발현되고 있는
여래장의 공덕을 전면적으로 발현하는 일이며 지금 왜곡되게
드러나고 있는 묘법장을 올곧음로 밝혀가는 일이다.
그래서 천수천안대비심대다라니경(천수경)에서는 대비심대다라니를
외워 모든 허위의식을 끊어버리면 중생 자신의 일상활동이
여래공덕의 역사적 발현이라는 뜻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수대비주를 외워 지니는 자는 이 사람이 바로 붓다의 몸
자체(불신)인 줄 알아야 하니 갠지스강의 모래알과 같은 붓다가
그를 아껴 사랑하기 때문이며 이 사람이 바로 광명의 몸(광명신)인 줄
알아야 하니 일체 여래가 광명으로 비추기 때문이다.
또 이 사람이 바로 한량없는 자비의 곳간(자비장)인 줄 알아야 하니
늘 다라니로써 뭇 삶들을 구제하기 때문이며, 이 사람이 다함 없는 묘한 존재의
곳간(묘법장)인 줄 알아야 하니 일체 모든 다라니문을 널리 거두기 때문이며,
이 사람이 곧 어지러움 없는 선정의 곳간(정장)인 줄 알아야 하니
백천삼매가 늘 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며, 이 사람이 허공처럼 끝없는 생명의
곳간(허공장)인 줄 알아야 하니 늘 공한 지혜로써 뭇 삶들을 살피기 때문이다.
이때 여래장은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중생 자신이 대비주를
외워 허위의식과 왜곡된 삶의 양식을 능동적으로 지양할 때 드러난다.
그러므로 허위의식에서 반야로 고통과 장애의 삶에서 열반과 해탈의 삶에로
결단해가는 반야운동, 행원운동을 통해서만 여래장은 역사적으로
자신의 열려진 가능성을 실현하게 된다.
곧 생각 생각 깨달음의 바른 뜻을 떠남이 없이 모두의 행복과 번영을
구현해내는 보살의 사회적 실천을 통해서만 여래의 공덕은
비로소 올바로 찬탄되어지며 여래장은 역사화 되는 것이다.
세주묘엄품에서는 보살의 행을 통해 여래의 참몸을 보게 되고 여래장에
갖추어진 진리의 작용을 현실에서 밝혀갈 수 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량없는 뭇 삶들의 모임 가운데
갖가지 믿음과 바른 이해로
그 마음을 언제나 깨끗이 하면
여래지혜 누구나 깨쳐 들어서
일체의 장엄경계 통달하리라.
누구든지 깨끗한 원 발해 일으켜
보살의 여러 행 닦아나가며
한량없는 부처님께 공양한다면
여래의 참된 몸을 뵐 수 있으며
일체의 묘한 작용 볼 수 있으리.
-법성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