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를 피하려 양평 콘도를 다녀오다가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기념관과 생가' 안내 표시판이
시야에 들어와 한번 찾아가 보았다.
몽양 여운형 선생(1886~1947)에 관해서는 어릴 적에는 많이 들었으나 나이들고서는 거의 관심을 갖지
못했는데, 오늘 기념관 방문으로 선생에 관해 많은 사실을 알게 돼 방문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특히 광복 70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선생의 발자취를 회고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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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1886년 5월 25일 ~ 1947년 7월 19일) 선생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곡(妙谷)에서 태어나 파란만장한 62년의 생애를 보내다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차량으로 이동 도중, 백의사의 집행부장 김영철이 선정한
한지근(본명 이필형)외 다섯 명의 저격을 받고 암살되었다.
사후 2005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대통령장, 2008년 다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훈 1등)을 추서했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여운홍의 친형이고, 철학자 박찬기의 외삼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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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신년에 김문갑에게 써준 휘호 ‘分則倒合必立’(나뉘면 쓰러지고 합치면 반드시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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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타리에서 저격 당했을 때의 복장과 저격 지점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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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은 몽양선생의 생가(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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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附記]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에 대한 1990년대 이후의 평가[편집]
사회주의 운동 이력으로 독립운동의 업적을 인정받지 못하다가, 2002년 7월 몽양 여운형 선생
추모 사업회가 조직되어, 여운형에 대한 재평가와 독립유공자 서훈을 추서하기 위한 운동을 하였다.
2005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하지만 그가 받은 건국훈장은 2급훈장이어서,
조선의 독립과 청년들을 위해서 헌신한 여운형의 업적에 비해 너무 인색하다는 비평도 있다.
그동안 여운형에 대한 건국헌장 추서는 '오랜시간 동안 제대로 사상문제로 대접받지 못하던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재조명의 시작'이라는 평가도 있다. 또한, 오늘날 남북한 모두 존경받는 지도자로
평가받기도 한다.[166]
재일교포 출신으로 와세다 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로 지내는 강덕상 교수는 '독립운동의 중심은
김구도 아니고 이승만도 아니다. 해방 후 외세의 간여가 없었다면 여운형이 민족의 지도자가 됐을 것이다.
'라고 평가하였다.[167]
미국의 대학교수 이정식은 "힘든 과정을 통해서 몽양은 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주었고, 그들을 격려했고,
이끌었습니다. 몽양 자신은 때를 잘못 만났기에 꽃을 피우지 못했으나 그는 겨레의 스승의 한 사람으로
길이 남을 것"이라고 평가했으며,[113]
이어서 이정식 교수는 "여운형은 마르크스주의자같은 공산주의자가 될 수도 없는 사람이었어요.
국내에서 5년간 기독교 전도사를 했고, 중국 상하이 한인교회에서도 3년간 전도사를 했던 것을 보면
유물론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저 제국주의에 반대했던 겁니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연설한 것을 보면
미국의 제국주의에도 반대했고, 소련도 '스탈린 집권 후 제국주의로 변질했다.'는 점을 간파했죠."라고
평가하였다.[166]
외조카이며 여동생 여윤숙의 차남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박찬기에 의하면
"해방정국에서 영국과 소련은 한국의 대통령으로 여운형을 꼽았고 미국은 이승만을 꼽았지요.
김구는 없었어요. 김구는 여운형을 제거했고, 이승만은 김구를 쳤지요. 이것이 우리의 비극입니다.
단합과 화해보다 분열과 대립의 추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고, 이것이 우리 정치에 그대로 오염돼버렸다[143]"며 아쉬워했다.
국가 보훈처에서는 2005년 2급인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으나, 2008년 2월 21일
퇴임 직전 노무현 대통령 정부로부터 최고 등급(1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다시 추서받았다.[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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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건국훈장 수여증
그 외에 '여운형은 박헌영과 같은 과격한 공산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계열이라기보다는
민주사회주의쪽에 가까운 인물로 사회주의의 오래된 미래'라는 재평가가 있다.[169][170] [171]
또한,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개념으로 인민 본위의 정치를 옹호하였으나 권력을 잡지 못하였고,
좌우 양쪽에서 존경을 받는 정치인이자 지도자 였다는 점에서 쑨원(孫文)과 비슷하다는 평가도 있다.
실제로, 중국어 논문 중에 여운형과 손중산을 비교연구한 논문도 발표되었다
(위키백과에서 발췌)
[동영상]몽양 여운형 선생 장례식(인민장) / the funeral of Lyuh Woon hyung <kBS1>.
첫댓글 여운형 독립가 생가를 잘 봤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