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60222. 묵상글 ( 사순 제1주일. - 유혹의 효능. 등 )
----------------------------------------------------
260222. 사순 제1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2.22 03:28
- 유혹의 효능
사순 제1주일은 유혹과 죄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데
오늘 독서와 복음을 보면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유혹은 꼭 나쁜 것인가?
유혹받으면 죄는 피할 수 없는 것인가?
그런데 오늘 독서와 복음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유혹받으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유혹이 그 자체로 죄이거나 짓게 하기에 나쁜 것이라면,
또 유혹받으면 죄짓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면,
주님께서 유혹받으실 리도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유혹을 받으셨고,
그것도 보통 유혹이 아니라 악령에게 받은 유혹이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받은 유혹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이란 유한한 인간의 조건이기에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죄를 피할 수 없는 것은 아니기에 히브리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그리고 오늘 성무일도 독서의 기도 독서에서 아오스딩 성인도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 지상에서의 우리의 순례 생활에는 유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진보는 유혹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유혹당하지 않으면 아무도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합니다. 유혹에서 승리하지 않으면 월계관을 받지 못하고
투쟁하지 않으면 이겨내지 못하며 유혹당하지 않으면 투쟁할 수 없습니다.” 하고
유혹의 인간적인 효능에 관해서 얘기한 다음 영적인 효능에 관해서도 얘기합니다.
“그리스도는 악마에게 유혹당하십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유혹당합니다. 왜냐면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고,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구원을 얻었고,
그분은 여러분에게서 죽음을,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생명을,
그분은 여러분에게서 유혹을,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승리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영적 차원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유혹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처럼 성령의 인도를 받아 유혹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똑같이 유혹받으시되
성령의 인도를 받아 악령의 유혹을 받으신 것이고,
유혹만 받으신 것이 아니라 싸워 이기신 것입니다.
이때의 승리로 주님께서는 공생활 내내 악령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영적인 힘을 원천적으로 얻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처럼
성령의 인도를 받아 악령의 유혹도 받아야 하고,
유혹만 받지 않고 싸워서 이겨야 하는 것임을 가르침 받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
260222. 사순 제1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영혼의 사막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 일곱 번째 주간 실천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당신 마음 깊은 곳, 영혼의 성소에 거하심을 느끼며 그 현존 안에서 안식하십시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사막과 변모
영혼의 사막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2026년 2월 21일 토요일
영적인 선생이자 저술가인 크리스틴 발터스 페인트너(Christine Valters Paintner)는 우리에게 사막 수도자들의 삶을 본받아, 영적 수행에 헌신함으로써 자유와 변화를 향한 길을 걷도록 초대합니다:
사막의 수도자들은 우리에게, 삶 속에서 맞닥뜨리는 유혹을 넘어서는 길과 존재의 심장부로 깊이 뛰어드는 모범을 보여줍니다. 이제 그들의 모범을 우리 시대와 삶의 자리 안에서 새롭게 살아내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사막의 원로 수도자들은 각자 동굴이나 오두막, 혹은 "셀(cell)"이라 불리는 작은 방에서 살았습니다. 이는 그들의 여정에서 핵심이었는데, 고독 속으로 물러나 자기 삶의 체험에 온전히 현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셀은 단순한 외적 공간이 아니라 내적 삶의 은유였습니다. 곧, 우리 각자가 부름받은 영혼의 작업을 상징하며, 하느님과의 친밀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자리였습니다.
사막의 원로 수도자들은 성스러운 현존과의 급진적인 친교를 찾기 위해 나아갔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내적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셀 그 자체가 아님을 가르쳐 줍니다. 그들의 지혜는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군중 속에서도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물 수 있으며, 고요한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여전히 생각과 산만함에 휩쓸릴 수 있다는 것을….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내적 중심으로 돌아가십시오. 깊게 숨을 들이쉬며 의식을 다시 자신에게로 모으십시오. 당신 마음 깊은 곳, 영혼의 동굴 곧 '내적 성소'에 거하시는 사랑하시는 주님 안에서 안식하십시오. 그곳은 단순히 머무는 자리가 아니라, '존재하기' 위해 부름받은 자리입니다. 사막의 교부와 교모 몇 분을 초대하여 함께 머물러 보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당신 앞에 나타나는지 주목하십시오. 혹시 한두 분이 다가와 곁에 앉기를 청한다면, 그들과 잠시 함께 머무르십시오. 지금 당신 삶의 시기와 마음의 질문을 그들에게 나누고, 그들의 응답을 귀 기울여 들으십시오.
References
Christine Valters Paintner, Give Me a Word: The Promise of an Ancient Practice to Guide Your Year (Broadleaf Books, 2025), 81, 82, 83.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Dan Grinwis, untitled (detail), 2017, photo, Namibi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사막으로 자유롭게 걸어 들어가는 순간, 구도자는 어떤 제도나 구조를 넘어서는 광대한 변혁의 자리에서, 스스로 사고하고 온전해질 수 있는 능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
숨영성 묵상글
사순 시기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확신 안에서 과감하게 '나' 중심의 환상적 세상을 깨고 나오기 위한 시기입니다!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이들이 무엇을 알겠는가?"라고 14세기의 신비주의자 헨리 수소(Henry Suso)는 말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고통은 하나의 "경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곧 고통입니다. 인생은 모든 허위와 가식을 불태워 없애는 체험의 도가니인 것이지요....
이 허위와 가식은 '나' 중심의 생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 허위와 가식을 불태워 없앤다는 것은 이 세상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 환상을 깨는 것, 즉 환멸(幻滅: disillusion, disenchanment)은 우리가 참으로 전체의 한 부분, 즉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참된 우주의 현실을 살아가기 위한 첫 걸음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겪는 고통은 아마도 이 환멸, 즉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이 중심이시며,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는 세상이 중심을 이루게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에서 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참으로 인간이 되시기 위해 우리처럼 고통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그분은 영원히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로 머무르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그분은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완전하게 되셨다."(히브리서 2,10)고 증언합니다.
시편은 "주님의 말씀은 도가니에서 일곱 번 정련된 은"(시편 12,7)과 같다고 노래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유다 광야의 불시험 속에서 "유혹을 받으심"으로써 정련되셨습니다.
따라서 신앙의 눈으로 볼 때, 그리스도의 수난은 단순한 인간적 체험이 아니라, 우리 구원을 위한 속죄 제사이며, 그분의 인성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 사랑의 완전한 계시입니다. 그렇기에 고통은 단순히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짊어질 때 성화(聖化)의 길인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시련과 고통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결합될 때, 정련된 은처럼 순수한 믿음으로 변화되어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끌어 줍니다.
사순 시기는 곧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단식하시며 유혹을 이겨내신 모습을 마음에 새기며 우리 삶에 이 현실을 적용하기 위한 때입니다(마태 4,2). 이 단식은 단순한 금욕이 아니라, 악마의 유혹을 이겨내기 위한 영적 투쟁이었습니다. 그 유혹의 핵심은 바로 성부께서 예수님을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로 선포하신 말씀(마태 3,17)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사탄은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마태 4,3.6)이라는 말로 두 차례나 유혹을 시작하며, 성부의 사랑과 아들 됨을 흔들려 했습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단식은 끊는 것이 아니라 잇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단식은 우리가 그간 세상적인 정신구조를 따르면서 타성에 빠져 하느님 사랑에서 멀어져 있는 우리 자신을 깊이 바라보며 다시 이 사랑의 하느님과 더 깊은 친밀함과 사랑의 관계성 안으로 깊이 들어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 자녀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미 이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받고 있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삶과 신앙의 여정을 해가면서 가장 크게 받게 되는 유혹은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연약함과 죄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연약하고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강하다 하더라도 하느님은 우리의 어버이로서 우리를 극진히 사랑해 주시고, 또 그렇기에 우리를 절대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기억이 바로 가장 근본적인 기도라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하고 우리에게 권고하신 바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대한 깊은 확신이며, 이 확신을 토대로 하여 우리의 삶을 통해 하느님 사랑이 실현되도록 우리를 내어 맡기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생을 통해 이러한 유혹을 극복하셨습니다. 겟세마니에서의 극심한 고뇌 속에서도 "아빠, 아버지"(마르 14,36)라 부르며 기도하셨고,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시편 31,6)라고 고백하셨습니다. 그분은 어떤 상황에서도 성부의 사랑을 끝까지 신뢰하셨습니다.
따라서 사순 시기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모든 의심과 유혹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죽음이나 두려움, 비극이나 고통이 닥쳐 우리의 믿음을 흔들기 전에, 지금 이 시기에 신앙의 전투를 치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사순 시기에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인생이 이해되지 않을 때, 죽음이 가까이 다가올 때, 길을 잃고 외로움을 느낄 때에도 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순 시기는 단순히 절제를 위한 시기가 아니라, 십자가의 신비에 참여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통을 통해 당신 아버지와의 관계성 안에 완전하게 들어서게 되셨듯이(히브 2,10), 우리도 사순 시기를 통해 정화되고 성화되어, 하느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사랑을 더욱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이 사순 시기 동안, 우리 마음 안에 지워지지 않는 글씨처럼 새겨질 것은 바로 성부의 사랑입니다.
오늘 창세기의 독서에서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받은 악마의 유혹과 이 유혹에 빠져 하느님과의 관계성에서 떨어져 나가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 보게 됩니다. 사실 이들은 이미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성 안에 있는 존재, 하느님과 일치되어 있는 존재, 즉 이미 하느님과 같은 존재인데,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는 악마의 속임수에 넘어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가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유혹 세 가지, 즉 '나' 중심의 삶에 빠져 '내' 배를 채우고자 하는 유혹, 남들의 인정과 명성을 얻기 위한 유혹, 남들보다 위에 있고자 하는 권력의 유혹은 모두 '내'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이 튼튼한 토대를 흔들려는 악마의 속임수이며,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과 사람들의 인정에 매달리기보다 이 하느님의 사랑을 더 깊이 확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토대 위에서 우리는 '나' 자신과 '나'와 함께하는 이들의 연약함과 죄에도 불구하고 이 하느님 사랑에 대한 확신 안에서 우리 서로를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연약성 때문에 연약한 우리 인간들의 사랑을 모두에게서 다 받을 수는 없을지라도, 하느님의 사랑만은 온전하게 다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누구라도 모든 사람에게서 같은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그럴 수 있다고 착각한다면 우리는 마음의 기쁨을 잃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서 100퍼센트의 사랑을 다 받거나 다 주며 살아갈 수는 없을지라도 하느님에게서는 이것이 가능합니다! 이 관계성에서 주도하시는 분이 바로 완전한 사랑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순 제1주일에 새겨야 할 화두인 것입니다! 이 현실을 우리가 진정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서로간의 관계성도 회복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
260222. 사순 제1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사순 첫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유혹입니다.
<제1독서>는 에덴동산에서의 유혹이요, <복음>은 광야에서의 유혹입니다.
그리고 <제2독서>는 아담이 유혹에 걸려 넘어진 결과와 예수님이 유혹을 이기신 결과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인류의 대전환을 가져온 거대한 두 사건을 말해줍니다. 곧 아담이 모든 것이 풍요로운 낙원에서 유혹에 걸려 넘어지고, 예수님께서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사막에서 유혹을 이기신 사건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예수님의 의로운 행위로 생명을 받게 되었던 사건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예수님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된 사건입니다.
한편, 오늘 <복음>은 우리를 광야로 인도합니다. 세례 때,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셨던 하느님의 영은 이제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최초로 하신 일은 바로 광야에서 기도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택되고,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겠다고 약속한 곳이요, 오롯이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요, 사랑을 속삭이는 장소이기도 합니다(호세 2,16-18).
또 불모의 황폐한 사막이요 유혹받은 장소이기도 하지만, 야곱을 아껴주신 곳이요(신명 32,10), 이스라엘 백성을 보살펴주고 인도하신 곳이요(신명 2,7; 8,15; 느헤 9,18-19), 시험의 장소이기도 하지만(신명 8,2),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요(1열왕 19,4), 사랑을 알게 하시는 장소이기도 합니다(예레 2,2-3).
또한, 오늘 <복음>에서처럼, 마귀와 승냥이들이 우글거리는 하느님의 부재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천사가 시중드는 곳이기도 하고, 현실적으로는 우리 삶을 뒤흔드는 위협에 맞서, 하느님을 더욱 깊이 만나는 자리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이 세상이요, 우리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마침내 허기지셨던 예수님은 쇠약해지셨고,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상태에 처했습니다. 가장 허약한 순간을 노려 악마의 끈질긴 유혹은 시작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혹을 피하시지 않으시고 정면으로 돌파하십니다. 아니, 역설적으로 말하면, 오히려 유혹은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게 합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사막에서 받은 유혹을 상기시킵니다. 곧 이스라엘 백성은 유혹에 빠져 하느님을 배반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유혹받으시나 승리하시는 예수님은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과 새로운 모세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라는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물질적 유혹입니다. 빵에 대한 유혹이요, 필요와 효용성, 소유와 능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육신을 살리는 물질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말씀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성벽에서 뛰어 내려라. 그리고 천사들이 손으로 받들어 다치지 않게 하라.”는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정신적 유혹입니다. 영예에 대한 유혹이요, 과시와 인기, 교만과 허영, 영웅주의에 대한 유혹입니다. 자신이 하느님임을 증명해보라는 유혹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주 너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마태 4,7)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허영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하느님께 두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이 세상 왕국을 모두 당신에게 주겠소.”라는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영적, 신앙적 유혹입니다. 권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지배와 권위, 존경에 대한 유혹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우상을 믿고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속한 이로서 그분만을 섬기고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믿음과 사랑과 희망을 하느님께 두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 가지 유혹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대체, 악마는 무엇을 노리고 다가왔던 것일까요?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하느님에게서 떼어놓으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이루어야 할 사명을 방해하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위하여 온전히 헌신하셨습니다.
이토록, ‘광야에서의 유혹’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삶을 제시’해줍니다. 곧 이 사건은 우리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신비로 이끌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술이나 기적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믿음으로 유혹을 이기시고, 사랑으로 사명의 길을 가셨으며, 아버지의 뜻에 희망을 두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 헌신에 힘입어, 결코 그 누구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5-38).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주님!
나의 필요보다 타인의 필요를 먼저 헤아리고,
소유하기보다 소유당할 줄을 알게 하소서.
무엇이 유익한가보다 그것이 사랑인가를 보게 하시고,
능력을 가지기보다 가진 능력을 사랑으로 쓸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으로부터 떼어 놓는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 있게 하시고
당신의 사랑에 힘입어 말씀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
260222. 사순 제1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의 고통을 줄여준 커다란 발명이 4가지 있습니다. 불과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폐렴, 상처 감염, 산욕열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아이를 낳는 일, 수술을 받는 일 자체가 생명을 건 선택이었습니다. 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하면서 인류는 처음으로 세균 앞에서 무력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항생제는 단순한 약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끝까지 지키려는 인간의 책임이 가능해진 순간”이었습니다. 저도 1991년 유행성 출혈열로 생과 사의 갈림길에 있었습니다. 항생제 덕분에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18세기 에드워드 제너가 천연두 백신을 개발했고,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의 질병을 완전히 사라지게 했습니다. 이는 중요한 신앙적 메시지를 줍니다. 하느님의 뜻은 고통을 참고 견디는 데만 있지 않고, 고통이 생기지 않도록 미리 돌보는 사랑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코로나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백신’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취제가 없던 시대의 수술은 치료이기 전에 형벌과 같은 고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수술보다 고통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19세기 중반, 마취제가 도입되면서 의학은 처음으로 분명한 메시지를 선언합니다. “치료는 고통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마취제는 말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고통을 미화하지 않으신다. 고통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가능하다면 덜어야 할 짐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저도 2012년 다리가 골절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척추 마취를 통해 큰 고통 없이 수술을 마쳤고, 이렇게 잘 걸어 다닙니다. 1895년,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은 X선을 통해 인간의 몸속을 처음으로 보게 했습니다. 이후 CT와 MRI는 보이지 않던 병을 드러내고, 조용히 진행되던 죽음을 살 수 있는 시간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이는 신앙적으로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겉모습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항생제는 생명을 포기하지 않게 했고 백신은 공동체를 보호하게 했으며 마취제는 고통을 줄이려는 연민을 가르쳤고 영상의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살피는 책임을 일깨웠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역사를 아주 분명한 한 줄로 요약합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영원한 생명이 왔습니다. 아담의 죄는 단순히 금지된 열매를 먹은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 죄는 하느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판단을 더 신뢰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의 결과로 인간은 생명의 근원에서 자신을 떼어 놓았습니다. 그때부터 인간의 역사에는 병과 고통, 그리고 죽음이 함께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죽음의 역사 안에 그대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아담의 불순종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 한 분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편안한 순종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단식하시며 유혹을 받으셨다고 전합니다. 그 유혹은 세 가지였습니다. 빵의 유혹, 권력의 유혹, 그리고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아라.” 이는 배고픔 앞에서 하느님보다 물질을 먼저 선택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이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너에게 주겠다.” 이는 십자가 없는 영광, 책임 없는 권세의 유혹이었습니다. “나에게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 이는 하느님을 이용하거나, 하느님 말고 다른 것을 절하며 쉽게 목적을 이루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유혹을 기적이나 힘으로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말씀을 붙드는 순종이 죽음을 넘어 생명을 여는 길임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유혹의 모습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유혹은 더 조용하고, 더 일상적입니다.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요즘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남들보다 부족한 것 같아.” 이 말은 겸손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존엄을 부정하는 열등감의 유혹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이렇게 만드셨다는 사실보다, 남과 비교하는 기준이 더 커질 때, 우리는 이미 유혹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또 이런 말도 자주 듣습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하잖아.” 작은 거짓, 작은 편법, 작은 타협 앞에서 우리는 자신을 이렇게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죄는 늘 다수결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다수가 한다고 해서 옳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유혹은 양심을 무디게 하고, 죄를 평범한 일상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리고 가장 흔한 말이 있습니다. “다음에 하면 되지.” 기도도, 고해성사도, 화해도, 결단도 미루게 만드는 게으름의 유혹입니다. 이 유혹은 우리를 단번에 넘어뜨리지는 않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게 만듭니다. 회개를 미루는 동안 마음은 점점 굳어 갑니다. 이 유혹들은 우리를 크게 흔들지 않습니다. 대신 조금씩, 조용히, 하느님과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아담은 유혹 앞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내려놓았고, 그 결과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혹 앞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붙드셨고, 그 결과 영원한 생명이 열렸습니다. 우리도 매일 유혹 앞에 섭니다. 그때마다 무엇을 붙들 것인지가 우리의 길을 결정합니다. 말씀을 내려놓으면 죽음의 방향으로 가고, 말씀을 붙들면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
260222. 사순 제1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도 성령과 함께 광야로 들어갑시다!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으로 가득 차 돌아오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거칠고 황량한 유다 광야로 들어가십니다.
사순절을 시작한 우리도, 스승 예수님을 따라 깊고, 황량한 광야, 조금은 외롭고 쓸쓸하고, 춥고 배고픈 광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이번 사순절, 광야로 들어갈 때는, 다른 해처럼 준비 없이 들어가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수님처럼 성령으로 가득 차고, 성령에 이끌려, 성령과 함께 광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우리들 생애 안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온 사순절이 많은 경우 실패로 끝난 이유는, 주님 없이, 성령 없이, 내 힘만 믿고, 나 홀로 광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광야 생활이라는 것,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한낮에는 피할 곳도 변변치 않은데, 엄청난 더위를 온몸으로 견뎌내야 합니다.
밤이 되면 기온은 또 얼마나 내려가는지 모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백 퍼센트 인간 조건을 그대로 지니셨던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허기와 갈증은 또 얼마나 극심했을까요?
어쩌면 그분께서는 언젠가 겪게 될 골고타 언덕에서의 극심한 십자가 죽음의 고통을
광야에서 미리 맛보셨던 것입니다.
올해도 우리의 광야인 이번 사순시기, 여느 해처럼 갖은 고통과 시련, 세찬 모래바람과 극한 체험으로
가득하겠지만, 성령과 함께라면 큰 문제 없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여행길에 밀착 동반하신다면, 광야 생활 결코 외롭거나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맞이한 사순시기 우리 앞에 펼쳐질 광야는 어디일까요?
나와 너무나도 다른 그, 정말이지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용납이 안 되는 그가 득실거리는 우리의 공동체가 광야입니다.
평생토록 혼신의 힘을 다해 한번 벗어나 보려고 그토록 발버둥쳐 봤지만, 그 지독한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반복되는 내 악습과 결함이 광야입니다.
게으름과 나태함, 갖은 유혹 거리로 가득 찬 내 부끄럽고 참혹한 매일의 일상이 광야입니다.
바로 그 광야에서 주님과 함께, 성령과 함께 새출발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40일간 단식해 오신 예수님께서 악마로부터 유혹받으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지니신 하느님이기도 하셨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와 똑같은 육체 조건을 지니셨던 인간이셨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고통과 배고픔을 똑같이 겪으셨던 참 인간이셨습니다.
휴가지에서 40일은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겠지만, 단식하면서 보내는 40일은 정말 지옥 같은 나날입니다.
허기가 져서 거의 탈진상태에 도달한 예수님 앞에 악마가 나타납니다.
갖은 감언이설과 달콤한 유혹거리를 미끼로 내세우며 예수님을 현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유혹들을 의연히 이겨내십니다.
허탈해진 악마는 힘을 잃고 떠나갑니다.
예수님께서 악마의 유혹 앞에 끝까지 굴하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아버지께 대한 항구한 충실성과 철저한 순명, 아버지를 향한 지속적 신뢰와 끊임없는 자아포기,
그 결과가 유혹의 극복이란 결실을 가져왔으리라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아버지와 연결된 끈을 끝까지 놓지 않음으로 인해 우리는 강합니다.
우리는 나약하지만 아버지 현존 안에 뿌리내림으로 인해 우리는 강합니다.
세상 유혹 앞에 설 때마다 예수께서도 유혹을 받으셨음을 기억합시다.
아버지께 대한 간절한 기도를 통해 그 모든 유혹들을 물리치셨음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걸어가는, 사순절이라는 광야 여정에는 악마로부터의 유혹도 많겠지만, 든든하신 우리 주님께서 언제나 동행하고 계심을 잊지 맙시다.
----------------------------------------------------
260222. 사순 제1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4,1–11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십니다.
유혹은 “나쁜 일을 하라”는 노골적인 명령이라기보다,
하느님을 믿는 방식 자체를 비틀어 버리려는 속삭임입니다.
• “배고프지? 돌을 빵으로 만들어.” → 필요를 우상으로 바꾸어라.
•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천사들이 받들 거야.” → 하느님을 시험해라.
• “이 모든 권세를 줄게. 나에게 절해.” → 목적을 위해 영혼을 팔아라.
성 예로니모는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마귀는 성경을 인용하지만, 그 뜻을 왜곡한다.”
그러니 싸움의 핵심은 지식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말씀을 어떻게 붙들고 살아내느냐입니다.
오늘 사랑/기쁨 주간에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사랑을 핑계로 통제하려 하지 않는가?
나는 기쁨을 핑계로 회피하지 않는가?
예수님은 유혹을 힘으로 짓누르지 않으시고,
말씀으로—곧 하느님께 대한 신뢰로—통과하십니다.
사랑/기쁨은 결국
하느님을 시험하지 않는 마음,
권력을 숭배하지 않는 마음,
필요 앞에서 중심을 잃지 않는 마음에서 자랍니다.
주님,
제가 사랑을 말하면서도
사실은 제 방식대로 이웃을 움직이려 하지 않게 하소서.
제가 기쁨을 말하면서도
현실과 책임을 피하지 않게 하소서.
광야의 자리에서
당신처럼 말씀으로 서는 마음을 주소서.
아멘.
----------------------------------------------------
260222. 사순 제1주일. 김준수 신부님.
|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최영미 시인의 「선운사에서」라는 시입니다. 시인이 마음에 둔 그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저에게는 33년의 짧은 삶을 사시다 가신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시였습니다. 그분의 삶은 참 힘들었지만 화려한 삶을 사신 분이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주변에 있었지만 고독한 분이기도 했습니다. 주님이시라며 환대받았던 분이었지만 마지막 순간엔 외롭게 삶을 마치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언제인데, 세월이 흘러도 한참이 흘러 까마득히 옛날 일인데도, 아직도 그분을 잊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있으니 ‘잊는 것은 한참, 영영永永 한참’이라는 시인의 노랫말 그대로입니다. 힘들게 피었다, 잠깐의 순간에 저버린, 누구도 쳐다볼 틈 없이 그렇게 쉽게 삶을 마치신 예수님, 그분을 한참 아니 영영 기억하는 이유는 오늘 우리의 모습이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돌을 두고 빵이 되라, 고 외치며 살아온 삶이 부끄럽고, 모든 권세와 영광을 쟁취하기 위해 정신없이 살아온 삶이 부끄러워서입니다. 때론 타인보다 우월한 능력자로 살려고 발버둥 치며 살아온 교만함을 부끄러워한 탓입니다. 그런데 권력-부-능력을 탐하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겐 예수님의 삶은 어리석음, 그 자체일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어리석은 삶, 바보처럼 사셨던 그분의 모습을 닮아가겠다고 다짐한 수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사순 시기는 그래서 회개와 정화의 시기여야 합니다. 입술로는 회개와 정화를 노래하면서도 몸으로는 빵을 구하고 정신과 마음으로는 권세와 능력을 얻겠다며 발버둥을 치고 살아간다면 이는 곧 예수님을 유혹한 악마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유혹받으셨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위안이 됩니다. 예수님마저도 유혹한 악마라면 당연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살아가는 우리를 유혹할 겁니다. 이렇듯 유혹에는 예외적인 존재가 없습니다. 나만 왜 유혹에 시달리는가? 나는 왜 여태껏 유혹받고 있는가? 이런 생각이 든다면 오늘 복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악마를 물리치셨던 예수님을 떠올려야 합니다. 유혹은 죄가 아닙니다. 윤리적인 판단 대상이 아니고 유혹은 그저 유혹일 뿐입니다. 성서가 유혹이라고 말할 때는 인간이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행동하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시오.”(마태26,41)라고 당부하시고, “아버지, 이 잔이 비켜 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26,42)라고 기도하심을 통해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사는 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녀의 온당한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악마가 예수님에게 권하는 것은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라는 것입니다. 이 유혹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4,3.6)이라는 악마의 말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실 주님의 세례 때와 거룩한 변모 때에는 하느님께서 직접,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마태 3,17;17,5)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악마의 유혹은, 예수님이 진정 하느님의 아들로서 아버지께 충실하신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혹받은 장소는 광야입니다. 구약성경에서부터 광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시험한 장소인 동시에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믿음을 시험하셨던 장소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악마의 유혹을 받는 장소이며, 오직 하느님만을 의지해야 살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광야에서 악마가 예수님께 던진 첫 번째 유혹은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4,3)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이 첫 번째 유혹은 결국 인간의 실존적인 필요조건인 의식주에 대한 유혹입니다. 허나 인간 생존에 가장 기본적이고 필요한 의식주에 대한 유혹이 아니라 분수에 넘친 먹거리와 입을 거리 그리고 잠잘 거리를 탐내는 욕심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단호한 대답은 그것들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며, 존재 이유와 의미를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4,4)라는 신명기를 인용해서 대답하십니다. 우리는 진정 무엇으로 살고,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는가? 악마의 두 번째 유혹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4,6)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이 유혹은 하느님을 시험해 보려는 종교적인 구원 놀이의 유혹입니다. 엉터리 진리, 기복적인 신앙, 값싼 은총, 진정한 자기 투신이 아닌 안락과 일신의 안일을 위한 거짓된 신앙의 유혹입니다. 또한 이 유혹은 주님의 뜻이 아닌 자기자신의 뜻에 의한 신앙, 제멋대로 살고자 하는 유혹입니다. 자주 우리는 주님과 거래하듯이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4, 7) 우리는 자주 주님을 시험하며 살아오지 않았는가를 반성해 봐야 합니다. 악마의 세 번째 유혹은 성전 꼭대기에서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보여주며 자신에게 경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자신이 모든 삶에 중심이 되고픈 유혹을 받습니다. 가정, 직장, 교회에서 남들이 자신만을 보아주고 인정해 주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경배해야 함에도, 세상의 가치와 사조思潮를 그 중심에 두고 더 소중히 여기고자 하는 유혹에 늘 노출되어 삽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4,10) 우리는 진정으로 주님을 경배하며 살고 있는가를 성찰해 봐야 합니다. 우리는 세례성사 때, ‘끊어버리고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에서 하느님보다는 재물과 권력에 의지하려는 유혹, 자기 명예와 이익을 위해서 하느님까지도 이용하려는 유혹에 시달리며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듯이 신실한 신앙인 역시 두 주인을 섬기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느님만이 우리의 임금이며 주인이시고, 바로 그분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일편단심으로 하느님께 굳은 신뢰심을 갖고 그분 말씀에 의지할 때, 교묘하고 끈질긴 유혹의 목소리를 떨쳐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빈 구멍을 하나씩 가지고 태어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같은 빈 구멍을 인간들은 역사 이래 권력과 부귀와 영화와 지식 등으로 메꾸어 보려 하였지만, 언제나 삶의 공허함 그리고 인생 무상함을 느끼며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인간의 빈 구멍은 하느님으로만 메꿀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만이 우리 존재의 빈 구멍과 텅빈 영혼을 채워주신다는 믿음, 하느님의 세상과 인간에 대한 구원 의지와 경륜을 시험하지 않고 전적인 신뢰와 의탁, 그리고 삶의 고단한 여정 속에서도 하느님만을 경배하고 섬김을 통해서 세상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고, 깨닫고, 느끼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악마는 우리에게서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4,11 참조) 우리를 보호해 줄 것입니다. “주님,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저희를 지켜주시고, 언제 어디서나 당신을 경배하며 섬기며 당신의 은총에 의지하여 살아가도록 저를 이끌어 주십시오. 아멘.” |
----------------------------------------------------
260222. 사순 제1주일. 키엣 대주교님.
유혹
사순절에 금식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금식은 속죄의 의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한 정신을 단련시키기 위함입니다.
우리 주변에 악마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연 악마들은 모두 사라졌을까요? 악마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옛날보다 더 과감하게, 더 적극적으로 세상을 파괴하고 있기에 알아채지 못할 뿐입니다.
악마는 인간의 본능과 인간의 욕구를 유혹합니다. 생존과 권력의 욕구, 배반의 욕구, 이것들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구입니다. 유혹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그 유혹에 빠져듭니다.
기본적인 욕구의 함정에 빠지면 그 다음 주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욕구를 찾으려는 유혹에 쉽게 빠져버립니다.
아담과 이브는 악마의 유혹에 빠져 아버지처럼 되고자 자신들을 창조하신 아버지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효성스런 아들로 살아가기 위해 악마의 유혹을 거절하셨습니다. 인간에게는 물질적인 빵도 필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귀한 영혼의 빵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욕구충족을 위한 권력을 준다는 악마의 유혹을 거절하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아버지 하느님의 손에 당신의 모든 것을 의탁하셨습니다.
“아버지, 저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르게 하여 주소서”
악마는 끊임없이 새로운 유혹을 만들어 내고, 사람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그 유혹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과도한 욕망에 사로잡힐 때, 원하는 것을 즉시 얻고자 할 때 유혹의 노예가 됩니다. 내가 가진 많은 것들을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욕구 충족을 위해 사용한다면 악마의 손아귀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자꾸만 멀어지는 나를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께 돌아가려는 의지가 있을 때만이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악마의 유혹을 물리칠 힘을 얻고자 한다면
나의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사순절을 보내기 위한 희생과 기도,
금식과 자비의 마음이 준비되어 있는 지 돌아보십시오.
당신의 품에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자비의 주님,
저희가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착한 아들로 살아야 함을 알게 하여 주시고
악마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아버지 하느님,
저희가 참회와 겸양의 정신으로 사순절을 맞이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우리 곁에 악마가 있다면 과연 어떤 모습일지 돌아보십시오.
2. 어떻게 유혹을 물리쳤습니까? 왜 유혹을 당했는 지 생각해 보십시오.
----------------------------------------------------
260222. 사순 제1주일. 조명언 신부님.
갓난아기가 제일 먼저 하는 말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엄마’입니다. 그렇다면 이 단어를 저절로 말했을까요? 아닙니다. 가장 가까이 그리고 하루 중 가장 오래 같이 있는 엄마가 계속해서 ‘엄마’라는 말을 들려주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엄마의 입 모양, 소리를 따라 하기 시작하면서 ‘엄마’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면 몇 번이나 ‘엄마’라는 단어를 들었을까? 실제로 2,000번 이상 들어야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다고 합니다.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알게 됩니다. 단번에 알 수 있을까요? 쉬어 보이는 ‘엄마’라는 단어도 오랜 시간이 필요한데,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말을 어떻게 단번에 알 수 있겠습니까? 어떤 분은 하느님의 말씀을 도저히 모르겠다며 이런 신앙생활이 과연 의미 있겠냐고 하십니다. 그러나 무조건 알려고 노력하고 또 말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의 온갖 유혹을 거뜬하게 이겨내면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쁨의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신 뒤에 악마의 유혹을 받으십니다. 악마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마태 4,3)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단순히 배고픔 해결을 위해서 사용하라는 유혹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세상의 경제적 문제만 해결해 주는 존재가 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이에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6)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밥만 먹고 사는 동물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라면서, 기적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이제 악마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마태 4,6)라고 유혹합니다. 하느님이 정말로 사랑하시는지 증거를 보여달라는 불신이며, 대중들 앞에서 화려한 기적 쇼를 벌여 손쉽게 메시아로 인정받으라는 영광 주의의 유혹입니다. 그러나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마태 4,7)라고 말씀하시면서, 참된 믿음은 하느님께 증거를 요구하고 화려한 영광만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그분께 신뢰를 갖는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마지막 유혹은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마태 4,9)라고 말하면서, 악마와의 타협을 요구합니다. 하느님의 방법인 십자가와 희생이 아닌, 힘과 지배 등의 세상의 방법으로 세상을 구원하라는 유혹입니다. 곧 하느님 자리에 다른 것을 두는 우상 숭배입니다. 이 유혹 역시 “사탄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라면서 단호하게 쫓아내십니다. 구원은 세상 권력을 잡는 데 있지 않고, 오지 하느님을 섬기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유혹이었습니다. 나의 능력과 재능을 오직 나 자신의 안락함과 욕망을 채우는 데만 쓰라는 유혹, ‘이것만 해 주신다면’ 식의 말로 하느님을 시험하며, 거래 대상으로만 삼고자 하는 유혹,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얻기 위해 불의와 타협하거나 양심을 팔고자 하는 곧 악마에게 경배하는 유혹. 이 모든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이기십니다.
우리도 끊임없이 유혹을 받습니다. 우리 손에 쥐어야 할 가장 강력하고 유일한 무기는 하느님 말씀입니다. 그 말씀에 집중하고, 또 그 말씀을 살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얼마나 의미 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이 내게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소중한 분이 되고, 악마의 유혹을 거뜬하게 이겨내면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기억의 흔적들은 새로운 관계가 형성됨에 따라 다시 배열되고 기억된다(지그문트 프로이드).
----------------------------------------------------
260222. 사순 제1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는 주님의 전사”
영적전쟁, 예수님처럼 영적승리의 삶을 삽시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편51,12)
저에겐 간절한 희망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마음도 이러할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2026년 노벨평화상을 받는 것입니다. 12.3 계엄을 극복하여 빛의 혁명, 비폭력의 혁명을 성취한 대한민국 국민이 노벨 평화상을 받는 다면 참 고무적인 축복의 경사가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말 그대로 <주님 평화의 전사들>이 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 와 더불어 노벨 평화상 타기를 기도합니다.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참 많이 강조해온 영적전쟁에 주님의 전사로서의 우리 믿는 이들의 신원입니다. 주님의 전사는 평화의 전사, 믿음의 전사, 빛의 전사도 됩니다. 인생 광야 여정중 죽어야 제대요 날마다 영적전쟁을 치러내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들입니다.
오늘 광야에서 40일동안 단식 피정중 사탄의 유혹을 물리친 예수님이야말로 주님의 전사의 영원한 롤모델입니다. 숫자 40이 상징하는 바 참 심오합니다. 시나이 산에서 모세는 하느님과 함께 40일간 일체 먹고 마시는 일없이 머물렀고, 엘리야는 이세벨의 살해 위협을 피해 주야로 사십일간 하느님의 산 호렙을 향해 걸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40년만에 광야를 통과해 가나안 땅에 이르렀습니다.
어찌보면 예수님의 40일 동안의 광야단식체험은 우리 광야 인생을 상징한다 싶습니다. 40일 사순시기를 맞이하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광야체험은 참 좋은 공부가 됩니다. 예수님은 요한 세례자에게 세례를 받으신후 광야에서 40일동안 유혹을 받으십니다. 세례시 하늘에서 들려온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말씀이 확인되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 역시 자녀다운 삶을 확실히 배우는 예수님의 광야체험입니다. 여기 나오는 사탄을 일명 유혹자로 칭함이 심오합니다. 바로 우리를 유혹하는 자가 사탄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유혹할 때 본의 아니게 여러분은 사탄이 됨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는 사탄의 유혹에 빠진 아담과 하와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하와가 유혹에 빠져 선악과 열매 하나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 아담에게 주자 그도 그것을 먹습니다. 그리하여 완전 사탄의 승리로 끝나니 존엄한 인간 품위의 실추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도 여기에 근거합니다. 다음 <그 한 사람>은 부부는 한몸이라 아담과 하와를 지칭합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렇게 되기까지 예수님은 이 광야의 유혹기간을 성공적으로 통과해야만 했고 그대로 됐으니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바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참으로 고마운 예수님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실패를 만회하신 새모세, 새아담 예수님은 이스라엘 40년간의 실패도 만회해야 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공생애를 앞둔 40일 동안의 광야시기는 하느님의 기대와 인류의 희망이 전적으로 예수님께 달린 절체절명의 시기였습니다.
세례시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주님 위에 내려 오셨고,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십니다. 예수님의 양편에는 성령과 악마가 있음을 봅니다. 유혹시 함께 하시는 성령께 귀기울여야 함을 배웁니다. 결과를 말하건데 예수님의 광야에서의 악마와의 전쟁에, 악마의 유혹에 승리할 수 있었음은 순전히 믿음의 힘, 말씀의 힘이었음을 봅니다. 믿음의 힘, 말씀의 힘은 그대로 하느님의 힘과 직결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새삼 위로와 힘이 됩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바로 이 예수님의 고백이 입증되는, 오늘 예수님의 유혹자 악마에 대한 광야에서의 승리체험입니다. 유혹자 사탄의 제안이 아주 솔깃합니다. 사탄과 대화하지 않는 것도 승리의 지혜입니다.
1.“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사십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신 뒤라 참으로 시장하실 때 달콤한 유혹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의 품위를 위협하는 유혹입니다. 말 그대로 믿음의 시련이자 시험입니다. 예수님은 구구한 설명없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답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믿음의 힘, 하느님의 힘은 구체적으로 말씀의 힘으로 표현됩니다. 말씀의 진리, 말씀의 지혜입니다. 말씀은 생명이자 빛이요 영입니다. 참으로 말씀에, 하느님에 굶주린 마음으로 이번 사순시기 말씀공부와 실천에 전념하시기 바랍니다.
2.“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시리라.’”
1차 유혹에 실패한 악마는 예수님을 데리고 거룩한 도성 성전 꼭대기에 가서 성경의 예를 들면서 2차 유혹을 시도합니다. 악마의 유혹을 꿰뚫어 통찰하신 예수님은 단칼에 정리하십니다. 그대로 하느님께 대한 아드님의 철석같은 사랑과 믿음의 반영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성경의 하느님 말씀에 얼마나 정통하신 예수님인지요! 악마의 유혹이 참으로 집요합니다. 악마는 쉽사리 포기하지 않습니다. 평생 유혹이 뒤 따를 것입니다. 유혹없이는 영적성장도 없습니다. 유혹을 통과해 가면서 영혼의 근육도 튼튼해집니다.
설상 유혹에 빠졌다 하더라도 즉시 회개하고 벗어나도록 하십시오. 그러니 유혹을 없게 해달라 기도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기도대로 악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 기도하는 것입니다.
3.“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드디어 사탄의 3차 공격입니다. 악마는 다시 예수님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정말 유치하게 유혹을 시도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말마디도 거두절미 생략한채 노골적으로 예수님께 거래를 시도합니다.
어불성설입니다. 세상 모든 나라와 영광은 이미 아버지 하느님의 것이며 그 아드님 예수님의 것인데 이것을 사탄이 준다니요!? 너무 황당하지 않습니까? 사탄인 제가 무엇인데, 제 분수를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예수님의 통쾌한 답변이 뒤 따릅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듭니다. 예수님의 최종적 승리의 선언입니다. 예수님의 악마와의 영적전투중 참 조마조마했을 하느님이요 천사들이었습니다. 치열한 영적전투중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천사들을 통해 예수님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셨습니다. 말씀의 위력, 믿음의 위력이 악마의 유혹을 물리칩니다.
그러나 사탄은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를 통해 예수님을 유혹했던 사탄은, 십자가 죽음이 현장에서도 우매힌 군중을 통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예수님을 유혹하며 조롱하지 않습니까? 아마 이번 사순시기는 물론 우리의 전 인생광야여정중에도 악마의 유혹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니 늘 깨어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 말씀의 전사, 평화의 전사, 빛의 전사가 되어 하느님의 자녀답게 영적전투를 수행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의 전사로 영적승리의 삶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주소서.”(시편51,14). 아멘.
----------------------------------------------------
==========================================================
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공유할 묵상글(강론글)로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
260222. 사순 제1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10:30 추가
<타협의 여지가 없는 단호함으로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분께서는 사십 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신 뒤라 시장하셨다.
그런데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데리고 거룩한 도성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 악마는 다시 그분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마태 4,1-11).”
1)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할 때, 그것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을 텐데, 복음서 저자들은 그 일을 어떻게 알고 복음서에 기록했을까?
예수님께서 직접 그 일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경험담’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주시려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나는 이런 일을 겪었다.”가 아니라, “너희는 유혹을 받을 때 이렇게 대처하여라.” 라는 가르침.>
유혹을 물리치는 첫 번째 방법은 ‘기도’이고(마르 9,29), 그 다음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타협의 여지가 없는 단호함’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탄의 유혹’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 유혹을 물리칠 때 하신 ‘말씀’입니다.
2)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라는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요한 6,27).”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누구에게나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긴 하지만, ‘일용할 양식’이 신앙생활의 목적인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7-10).”
<이 말에 대해서,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공동체가 나서야 합니다.>
3)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신 말씀에 연결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아마도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수난 예고 말씀을 들었을 때,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반박했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까’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면’과 ‘같은 말’입니다.>
어떻든 베드로 사도의 말은, 예수님께 ‘사탄의 유혹’이 되었는데, 사실 베드로 사도 자신에게도
‘사탄의 유혹’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아주 엄하게 꾸짖으신 것은, 그를 사탄의 유혹에서 지켜 주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4)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라는 말씀은, ‘빵의 기적’ 후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던 일에(요한 6,15)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적의 빵’을 먹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은, 예수님이 임금이 되시면 날마다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일은 예수님을 믿고 섬긴 일이 아니라,
‘빵’을 섬긴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속의 부귀영화만을 원한 것과
다르지 않고, 사실상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일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유혹한 일이기도 합니다.
<신앙인들은 ‘이리 떼 가운데에 있는 양들’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마태 10,16),
온갖 유혹에 끊임없이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 또한 모든 신앙인이 참고 견뎌야 할 고난과 시련에 포함됩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