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 김애경
우리 아파트에 방음벽이 세워졌다. 반으로 나누어 아래쪽은 나무 재질이고 위쪽은 유리이다. 이 유리에 매일 새들이 날아가다 부딪쳐 죽는다. 유리가 투명해서 아파트 안의 조경이 환히 들여다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반대의 일도 벌어지고 있다. 유리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인간은 투명한 유리벽을 통해서 속 시원한 건너편 풍경을 차경借景해서 사용할 줄 안다. 하지만 멍청한 새는 다르다. 새는 그 다름을 분별하지 못하고 매일 부딪쳐 죽는다. 유리를 투사한 경관을 향해 날아드는 순간 죽음을 맞이한다. 아파트 조경이 가짜 경관은 아닌데 새에게는 실제 경관도 아니다.
유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새의 죽음은 문학과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 자신이 겪은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실제 겪은 일 이상으로 생생하게 다가오는 글이 있다. 또 순전히 3인칭 관찰자 관점에서 주제를 형상화하고 의미화한 수필을 보면 잘 차린 음식을 먹고 체한 것 같은 때도 있다. 그런 글을 읽을 때면 황룡사 금당벽화의 전설이 떠오른다. 솔거 그림을 보고 참새 떼가 실제 소나무인 줄 알고 날아와 부딪쳐서 죽었다는. 그럴 때는 글쓴이가 자신을 제삼자에 투사해서 썼을 것이라고 가정해 본다. 일종의 소화제인 셈이다.
회화나 문학 등등, 예술에서의 명작이란 무엇일까. 어떤 소재를 훌륭하게 형상화해내기란 어떤 장르이건 힘든 과정이 숨어있을 것이다. 각 장르에 맞는 성격으로 의미화해내기 위해서는 새처럼 죽음을 불사하고 질주하는 몰입이 필요할지 모른다.
나는 오늘도 새의 죽음을 보았다. 새에게 유리벽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새 세계에 비유한다면 유리벽은 무엇일까. 새의 죽음을 확장해서 생각해 볼 줄 안다면, 철학과 사상의 깊은 곳까지 들어가 볼 수 있으리라.
또 오늘도 유리벽을 경계로 안쪽에서 죽은 새, 바깥쪽에서 죽은 새를 보았다. 그러나 아둔한 나는 불쌍하다는 생각밖에 할 수가 없었다. 새가 죽지 않도록 대처 방법을 하루빨리 찾아야 할 것 같은 생각 뿐이었다.
어느 날 '버드세이버(조류충돌 방지)'라는 스티커가 방음벽에 붙여졌다. 맹금류의 실루엣을 본떠 만든 것이다. 그러나 새들은 시력이 너무 좋아서 탈이었다. 스티커를 피해서 방음벽의 빈 곳을 향해 돌진했다. 충분한 수량의 스티커를 비교적 촘촘하게 붙였다. 그래도 여전히 빈 곳은 많았다. 멍청한 새의 죽음을 근원적으로 막는 방법은 방음벽을 철거하는 것 외에 없어 보였다. 그 밖에 유리에 새만 볼 수 있는 특수 시트지나 특수 방식의 장치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비용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은 그냥 새가 죽으며 흘러갔다.
나는 이 새와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수없이 부딪쳐 죽으면서도 그 다름을 분별하지 못하고 매일 부딪친다. 문학이라는 경관을 향해 수없이 날아들며 상처를 입거나 죽음과 같은 시간을 맞이하며 세월을 흘려보낸다. 중학교 때부터 낀 안경을 지금도 끼고 사는 나는 근거리를 잘 못 보는 새와 다를 바 없다. 새는 폭넓게나 본다고 한다.
일은 곧 벌어졌다. 공원에서 화장실을 갔다. 잘 닦여진 출입문 유리에 얼굴을 받았다. 급해서 유리 너머에 시선을 고정하다가 낭패를 본 것이다. 유리가 통로처럼 보였다. 유리벽은 경관을 반사할 수도 있고 통과시킬 수도 있다. 같은 유리라도 해의 위치, 건물 안팎의 조도 차이, 빛의 각도에 따라서 그 모습이 수시로 바뀐다. 나는 새가 모르는 이런 지식을 알고 있었다.
얼마나 세게 들이받았는지 무릎 관절이 폭 꼬꾸라질 정도로 충격이 심했다. 코피가 났다. 이마에는 혹이 생겼다. 아무리 급해도 유리 문을 자세히 살펴보는 조심성이 생겼다. 실제로 투명한 유리를 볼 수는 없었다. 다만, 유리에 붙어있는 손잡이나 틀 같은 부속품을 주의 깊게 보는 것이 중요했다. 스티커나 빗물 자국, 손자국이 남아 있다면 식별하기가 더 수월했다. 깊은 시직보다 청소하지 않은 유리창이면 충분했다. 그 조심성이라는 것이 별다른 게 아니었다.
새도 나만큼 조심성이 없는 것 같다. 계속 죽어갔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몇 년이 지난 어느 시점부터 방음벽 아래에 떨어져 있는 새의 사체가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심지어 방음벽 위에 앉아서 암수가 노닥거리는 까치도 보였다. 멍청한 새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영리해진 모양이다. 유리벽을 뚫으려 하지 않고 넘어가는 지혜를 터득했나 보다.
아무렴. 유장한 역사가 있는 새가 아무 의미 없이 단순하게 방음벽에 부딪치며 넘나들기만 했을까. 유리의 얼룩을 자신의 버드세이버라고 생각한 나보다 새가 더 의미 있게 살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새 한 마리가 방음벽을 넘어 유유히 공중을 난다. 겁도 없이 날개를 팍 접더니 뚝 떨어져서 높이를 조절한다. 미끈하게 흐르는 강물 위를 지나 단숨에 강 건너편으로 점이 되어 사라졌다. 내가 그곳까지 두 다리로 가려면 다리를 건너야 하니 몇 시간도 더 됨직한 거리다.
내 몸을 새처럼 진화시켜 볼 일이다. 시간당 4km 정도의 속도로 걷고 있다는 걸음을 새의 속도로 빠르게 한다면 어떨까. 새처럼 뼛속까지 비워낼 정도로 최소한으로 생각을 단순화해 보면 어떨까. 새처럼 넓은 시야각을 가지면서도 예리하게 볼 수 있다면 어떨까. 새가 멍청하다는 생각을 접었다. 새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부끄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