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잡설 -3/5-
<몽매(蒙昧)의 팡세> (5)
2013년 5월 20일
'신의 척도로서의 인간'(쿠르트 플라쉬 著)을 읽다.
1.
신을 의인화(擬人化)하는 것은 옳을까.
2.
<인간은 만물의 척도.>
-프로타고라스-
3.
<금발에 푸른 눈을 한 트라키아인들은 자기네 신들도 금발에 푸른 눈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디오피아인들은 자기네 신들은 검다고 생각한다. 아,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신의 원래 모습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신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유한성을 신에게 전가하고 있어서 만약 말과 소와 사자가 인간처럼 손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이들 동물은 자기네 신들을 말이나 소 혹은 사자의 형상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크세노파네스-
4.
<신들의 모습이 갖는 다양성은 우리를 현혹시켜 단 하나뿐인 신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내용없는 인간의 산물이다.>
-크자누스-
5.
한복입은 예수 그리스도, 치마 저고리 입은 마리아 (운보 김기창의 그림)
6.
<만물의 척도는 神.(이데아)이다.>
-플라톤-
7.
<신은 사고(思考)의 사고(思考).>
-아리스토텔레스-
8.
이데아의 관념으로서 '인간이 신의 척도'라는 명제는 약화되는가.
9.
이성적인 존재이면서 지극히 비이성적인 유한(有限)한 존재 인간.
신적인 존재에 인간적인 성격을 부여하지 않고 과연 우리는 무엇을 인식할수 있을까.
어떤 대상에 관해서 순수한 이성과 과학과 사상과 상상으로써 그 사물 자체를 파악 할수 없을 때, 신이란 완전히 의인적(擬人的)일수 밖에 무슨 도리가 있을런가.
10.
신의 개념을 나와 연결시킴으로써 신의 초월성은 파괴되는겐가.
나를 까마득하게 초월하여 선계(仙界)에서 노니는 신선은 나의 신이 아니다.
'신'은 '나'없이는 존재할수 없다.
11.
인간에 대한 고찰은 오직 인간으로부터만 가능하다.
인간적인 경험을 통하여 신의식(神意識)에 이르게 되는 것이 부당하지 않다
이것이 어쩌면 이것이 신의 초월성에 대한 근거이다.
12.
아버지 하나님, 어머니 하나님, 양파 하나님('깊은 강' -앤도 슈사쿠-)
우상의 전쟁, '라두사니 마을'의 수호성인 '성 판타레오네'와 '마스칼리코 마을'의 수호성인 '성 콘셀보' (우상숭배자들-가브리엘 다눈찌오-)의 저 피투성이 싸움.
13.
신은 모사(模寫)의 대상이 아니라 의미의 대상이다.
의미로서, 신의 표상이 갖는 것은 부동성(不動性)이 아니다.
14.
문화와 정서와 감성에 따라 다르게 파악되는 신.
어쩌면 그 모순이 사람들에게 척도가 되도록 맞추어진 신의 통일성이 아닌가.
15.
인간은 훌륭한 의미로서 신의 척도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다면 신은 나와는 전혀 무관한 존재, 신을 파악한다는 것은 공허하거나 혹은 불손(不遜)하다.
신이라고 하는 사상의 내용은 나의 사고에 의존하는 것이다.
<몽매(蒙昧)의 팡세> (6)
2013년 6월 24일
알수없는 신
1.
성서.
일점일획무오(一點一劃無誤), 축어영감(縮語靈感), 알파와 오메가.
도그마에 갇힌채 꼼짝 못하는 神.
2.
종교적인 것으로 부터 급전직하 자연과학적인 것으로 변모하는 세계상(世界像).
우주는 지구중심도 아니고 인간중심도 아니다.
그런데도 神중심적이란 사유는 타당한가.
3.
정신분석(개인심리학, 심층심리학등.)에 의한 스스로에 대한 인식.
어린애의 원형이 확대된 <하나님 아버지>
4.
<신앙의 표상인 아버지는, 응징하는 아버지를 두려워 하지만 동시에 어린 날 자신을 보호하여 주는 상대를 그리워 하는 어른의 소아적 동경이 부르는 명칭이다.>
-프로이트-
5.
신이란 원망(願望)하는 꿈이 투영된 이미저리.
아버지가 투영된 신의 면모.
6.
<종교는 환상(illusion)이다.>
-프로이트-
7.
<종교는 아편이다.>
-맑스-
8.
유태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
구약성서에서 비롯된 역사적인 세 종교. (모두 구제사적 사실로 서술된 역사적 사건에서 출발하고 있다.)
고고학과 역사적인 연구에 의한 언어학적 비판과 명백하게 드러나는 비종교사적 사실들.
성서의 전승에 대한 회의.
9.
관념이 아니라 인격적인 신.
관념으로 보듬어 안고 종교적 추상 뒤로 숨는 신이 아닌, 현실에 존재하는 인격적인 신은 어디 있는가?
현대사를 점철한 비극적인 역사적 현장과 자연재해의 현장들.
살아계시고 전능하신 신은 그 현장에 아니 계셨다.
과연 신의(神義)는 어디 있는 것인가.
10.
성서에서 익숙한, 현실속에서 계시되는 하나님은 숨어 버렸다.
마르틴 부버는 일식(日蝕)에 빗대어 <신식(神蝕)>이라고 했다고 한다.
생각건대, 이른바 신앙인의 신앙적 의식은 카오스의 어떤 모습이 아닐까.
의지(意志)이거나 이중잣대의.
어쩌면 그 감정모체의 진실은 다분히 니힐리즘이 아닐까..
11.
유대학자가 쓴 '알수없는 신'(샬롬 벤코린)을 읽다.
유대교는 기독교보다 훨씬 자유롭고 유도리(餘裕)가 많구나.
그러나 예정론의 품에 안겨 낙낙(樂樂)하는 기독교보다, 인간의 조건에 있어서는 훨씬 더 서슬이 퍼렇구나.
12.
오늘날 드러난 자연과학은 완벽한가, 궁극인가.
<오늘 날> 무의미한 것에 대한 의미부여를 시도하는게 종교는 아니다.
오늘날 자연과학적 인식은 신앙의 관점으로 볼때는 하나의 변증법적 현상으로 보일수 있는 것.
인식의 문 뒤에 무한으로 통하는 새로운 문이 열리는 것을 깊은 외경심을 가지고 파악하게 하는 것이 신앙이다.
13.
정신분석에 의하여 근세기 들어 매우 관념화 된 영혼 그 자체.
사람은 어려서부터 악한 마음을 품게 마련 -창세기-
히브리어는 이 경우 충동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좋은 충동과 나쁜 충동.
캘빈이 말하는바 바울의 섭리, 선택받은 자와 노여움의 대상이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유태교는 인간은 자유롭다는 것에 근거한다.
선행도 죄악도 오직 자유로부터 생긴다
14.
인간은 언제나 도덕적 결단 앞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15.
<신의 율법도 인간의 자유없이는 기만 또는 만담에 불과하다>
-마이모니데스-
<모든 것은 예견되어 있지만 거기에는 자유가 주어져 있다.>
-랍비 아키바-
16.
인간이 신앙의 전거(典據)로 삼고 있는 축어영감설(逐語靈感設)이란 교리는 작금 비판적 정신 앞에 이미 받아 들여질수는 없다.
신앙은 역사적 제약성을 지닌 성서를 신이 말씀하신 본래의 음성으로 생각할 용기를 갖지 않으면 안된다.
구약성서는 신화적 언어를 자주 사용한다. (신약성서에서도 신화적 사건이 지대한 중요성을 차지하지만)
신화를 신화로서 이해하고 그것을 우리 마음 속에 내면화시킬수 잇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문자 그대로 이해되지 않는다면 교회 설교의 타당성 여부가 문제 될 것인데, 유태교는 이 문제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다
유태교에서는 비신화화가 중요한 중심적 문제가 아니다.
17.
<신학은 절대적으로 구체적인 것과 절대적으로 보편적인 것 사이의 긴장의 영역이다.>
-폴 틸리히-
18.
계약의 역사는 성서로 끝나지 않는다.
시나이 계약과 골고다 계약은 역사이자 동시에 현재이다.
19.
신의론(神義論) <히브리어로는 '티두크 하딘'>
심판은 올바르다는 교의는 이 세상에 나타난 악에 대하여 신의 지혜와 정의로움을 옹호하려는 인간적인 노력이다.
욥을 보라.
뇌운(雷雲) 속에서 신이 말씀하신다는 장대한 신 현현(顯顯)의 장. (38장 4절)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인간 욥은 이렇게 답할수 밖에는 없다.
"보십시오, 저는 참으로 비천한 자이니 무엇으로 당신께 대답하오리까?"
그럼에도 인간의 정신은 이해할수 없는 것을 모색하여 알수 없는 신의 뇌운(雷雲) 속으로 들어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특히 격심한 고난을 받으면 '나의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한탄할수 밖에는 없다
이 시험이 가장 엄한 것이다
20.
죄는 자유의 댓가이다.
너희는 살생하지 말라는 신의 말씀에 순종하거나 거역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있다
오직 인간에게만 허여된 자유이다.
그 자유의 어두운 면을 인식해야 한다
21.
아브라함은 묻는다.
"도대체 죄있는 자와 죄없는 자가 싸잡아 멸망해도 좋습니까?" 하고.
여호와는 말씀한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으니라."
22.
신앙은 편안한 잠을 자기 위한 부드러운 베개가 아니라 하나의 모험, 영혼의 위대한 모험이라는 사실이다.
히브리어로 '엠나'라는 의미로서의 신앙은 우리에게 알려진 신에 대한 신뢰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알수 없는 신, 우리가 도저히 볼수 없는 신에 대한 신뢰이다.
너는 어디 있느냐? 하고 신은 우리에게 묻는다
설령 그것이 최후의 순간일지라도 어김없이 우리에게 묻는 것이다.
알수 없는 신 앞에 우리는 서 있고, 우리는 또한 알수 없는 신으로부터 달아난다
어디로 달아날 것인가.
그와 똑같은 신에게로 달아나는 것이다.
신의 노여움에서 자비 속으로.
이것이 유태교 신앙의 최후이자 최고의 인식이다.
23.
자유로부터의 도피.
어디로 갈 것인가.
아아, 신앙이란 삼엄하게 번득이는 칼날이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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