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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창세기 4:1-15 “ 죄의 소원 ”
오늘이 광복절입니다. 광복절 되기 전까지 이 나라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독립이었지요. 그러나 자력으로 이루어진 독립이 아니기에 남북으로 분단이 일어났습니다. 이제 이 나라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지요.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남북통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만유의 통일입니다. 에베소서 1:10절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만유가 통일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음이 복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에 방해세력이 있으니 그것이 죄의 소원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죄인이란, 사람이 원래는 죄인이 아닌데 환경과 상황으로 죄를 짓게 됨으로 죄인이 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란 목록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목이 죄의 소원입니다. 죄도 인격처럼 소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가 소원을 가지고 무얼 하는지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죄된 모습이 오늘 가인과 아벨을 통하여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창세기 3:15절에서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이 서로 싸울 것을 말씀합니다. 여인의 후손이 궁극적인 승리를 하지만 서로의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뱀의 후손과 여인이 후손의 특징이 드러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계시가 어떠한가의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가인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득남 하였다고 가인 즉 얻었다는 이름을 지었는데 한 명은 뱀의 후손의 특징을 보여주고 한 사람은 여인의 후손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창세기 3:15절이 어떤 모습으로 펼쳐지는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본문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인의 제사가 아닌 아벨의 제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는데 아벨이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런 아벨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서 그렇게 간구합니까? 그렇지 않지요. 아벨은 정성껏 드렸으니 받아 주셨을 거야 그러니 우리도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정성으로 예배를 드리자 아마 그런 생각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말씀을 나의 정성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는 말씀입니다. 주의 성령이 임하여서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라는 의미이지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드린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런 정성이라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 잘 합니다. 비록 제물로 정한수 한 그릇 떠놓고 빌지라도 얼마나 지극 정성으로 빌고 또 빕니까? 심지어 겨울이라도 찬물로 목욕재계까지 합니다. 마을의 동제를 지내려면 제주를 마을의 어른 가운데 뽑습니다. 제주로 뽑히면 그 기간동안 술도 먹지 않고 여자를 가까이 하지도 않고 이발하고 목욕재계한 다음에 동제를 지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형태가 신에게 나의 정성을 바쳐서 화는 멀리 쫓아 버리고 복은 불러들이자는 원화소복(遠禍召福)의 내용입니다. 이런 생각이 우리에게 먼저 내장되어 있기에 가인과 아벨의 제사 그러면 앞 뒤 말씀을 보지도 않고 그저 정성껏 예배하라 최선을 다하라 그런식 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도 그 원인을 사람에게서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에게 덮쳐온 죄의 소원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는데도 자꾸만 사람의 드림의 조건을 보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보는 경우 -즉 사람의 조건으로- 어떻게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구별합니까? 가인은 땅의 소산 즉 곡식으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아벨은 양으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양의 첫 새끼를 드렸기에 하나님이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가 우리가 이미 어린양의 의미를 아니까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과 아벨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어떤 예물을 드려야 한다는 말씀이 아직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신의 소산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나중에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예물이 율법으로 주어졌을 때에도 곡물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됩니다.
신명기 26:2절을 보면 모든 토지 소산물 즉 땅의 소산물의 맏물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맏물이라고 하였기에 가인은 땅의 소산이지 첫 소산 즉 맏물이 아니다 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물의 내용과 방법을 계시하기 전이기에 제물의 내용과 방법 때문에 받고 안받으신다는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한 가지 차이는 아벨은 믿음으로 더 나은 제물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아벨은 믿음으로 드렸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가 믿음으로 드리면 된다 그렇게 쉽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우리의 어떠한 선행 조건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벨이 믿음으로 드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제물을 은혜로 열납하여 주셨다는 것이 믿음으로 드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사람에게서 어떤 조건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약 15년전쯤 기독교사상이라는 월간지에서 이 말씀의 설교를 보고서 많이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습니다. 어떤 내용인가 하면 가인이 첫 아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가 장남 선호하듯이 우리 장남 우리 큰 아들하면서 아담과 하와가 키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뜻과 자기의 고집대로 다 이루어지는 그런 아들이었다는 가정을 합니다. 오늘 우리의 가정을 보면 이해가 됩니다. 모든 아이들이 전부 자기가 왕자요 공주인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요구사항을 안들어 주면 마구 때를 쓰는 것입니다. 그저 오냐 오냐 키워 놓으니 거절당하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무언가 거절되어 지면 얼마나 많이 화를 냅니까? 그러므로 김용옥씨 같은 경우는 이렇게 아이를 키우면 모두가 잠재적인 독재자를 키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전두환 같은 독재자가 되는 것이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 안에 수백만의 독재자를 키우는 것입니다.
요즈음 왕따와 학원 폭력이 사회 문제가 되는데 오늘 우리 가운데 학교다니면서 한두 번은 왕따도 당해보고 맞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사회 문제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당시 자녀가 보통 5-6명입니다. 형에게 맞아가며 형제간에도 따돌림 당해가며 그렇게 지냈기에 그러한 문제는 극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두 명이니까 그리고 현대 교육을 받았다는 신세대 부모들이 자녀들의 기를 살려 놓은 것입니다. 이러니 거절당해 보지 않은 가인이 자기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안색이 변하고 동생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새롭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의 후천적인 교육과정과 환경으로 보기에 죄로 인한 것임을 보여 주기는 부족한 것입니다.
지금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선악체계에 붙들려 있는 죄인된 상태가 어떤 모습으로 드러 나며,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이 어떻게 대립되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뱀의 후손의 특징이 자기 공로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자기의 제사를 받아주지 않자 왜 자기의 제물은 안받아 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의 제물이 무엇이 부족하여 안받아 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물을 받으시고 안 받으시는 것은 누구에게 주도권이 있습니까? 받으시는 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조건과 행위에 메이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세상의 종교들은 자신들이 정성을 안바쳐서 그렇지 정성을 바치기만 하면 언제나 제물을 받고서 복주는 그런 신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말하면 세상은 싫어합니다. 안색이 변합니다. 이것이 뱀의 후손의 특징입니다. 너보다 내가 어떤 면으로 보아도 내개 나은데 왜 너만 하나님이 선택하고 나는 버리느냐 나는 그런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그 공평을 자신들의 행함을 기준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신들의 어떠한 정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이라고 하니까 그러면 나는 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색이 변하는 이유입니다.
TV프로그램 중에 멋진 만남이라는 프로가 있지요. 이휘재, 남희석이 한 여인을 상대로 온갖 정성을 다하여 데이트를 합니다. 그리고 최후의 선택을 여인이 하게 합니다. 이 때 선택당하지 못한 남자의 표정이 어떻습니까? 안색이 변합니다. 단지 벌칙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멋진 데이트 코스를 정하여 맛있는 것 사 먹여가면서 공을 들렸는데, 왜 나를 선택하지 않느냐고 안색이 변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는 이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안받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며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안색이 변하였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을 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기가 자기의 주인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라는 목사의 책중에 당신의 기도가 하늘나라 창고에서 잡동사니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안해서 그렇지 많이만 하고 정성만 바치면 어떤 기도도 응답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든 제물이든 받고 안받으시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정성과 나의 드림이 당연한 것이지 나의 드림의 행위에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야 안색이 안변합니다. 그러나 안색이 변하였다는 것은 죄의 소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소원이 있기에 그 소원이 지배하는 것입니다.
자기 제물을 받아 주지 않는다고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한 가인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 지니라.
하나님의 이 말씀은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고 자신이 스스로 선악을 결정하며 사는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 너의 실력으로 죄의 소원을 다스려보라 스스로 죄짓지 않고 선을 이루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어떻게 합니까? 죄의 소원에 지고 맙니다. 가인을 돌로 쳐 죽이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고도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의 말씀에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이니이까? 하는 가인입니다. 얼마나 죄의 소원이 무서운지를 아시겠습니까? 그 때 하나님께서 네 아우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한다고 말씀 합니다. 이것이 의인의 운명입니다. 그러나 그 피가 증거가 됩니다. 그리하여 그 피의 고발을 근거로 악의 소원에 붙들려 사는 뱀의 후손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다가 성경이 관심하지 아니하는 부분에 관심이 많습니다. 야곱의 꿈에 하늘에 이르는 사닥다리를 보았다고 하니 그게 몇 계단인가 하는 생각을 하듯이 가인이 하나님의 벌을 받아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하셨을 때 그 벌이 너무 중합니다. 만나는 사람이 나를 죽이면 어떻게 하느냐는 말을 보고 아담과 하와가 첫아들이 가인이면 아벨은 죽었는데 다른 사람이 어디서 나오는가 합니다. 아담이 몇 년 살았습니까? 창 5:3-6절입니다. 아벨후에 셋을 낳은 것이 130세인데 이때부터 800년을 지내며 아이를 낳았으니 도대체 몇 명을 낳았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만약 이름만 기록하여도 다 기록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질문은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가인이 그렇게 간구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표를 주셔서 죽지 않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 표도 어떤 표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 표가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표가 되는 것입니다. 왜 가인이 사람에게 죽지 아니합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도 죄인이기에 사람을 죽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뱀의 후손에 의하여 여인의 후손이 먼저 침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 피에 근거하여 뱀의 후손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뱀의 후손이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먼저 상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때 그 머리는 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나타난 승리입니다. 오늘날 주의 피로 거룩함을 입은 자는 그렇지 않은 자에게 괴롭힘을 당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조차 바른 믿음을 가진 자를 핍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힌 것처럼 그렇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4:28-29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가인의 제사를 드리는 것은 왜 나의 이 정성을 몰라주고 안받는단 말인가?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아벨의 제사는 믿음의 제사입니다. 나의 제사는 나의 공로가 아님을 아는 자가 아벨의 계통을 따라 예배하는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히브리서 12:18-24절까지 읽어 봅시다. “ 봉독” 이제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 그분을 믿는 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날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08. 창세기 4:16-24 “ 가인의 후손 ”
창세기 3:15절에서 하나님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의 싸움입니다. 뱀의 후손은 여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지만, 여인의 후손은 그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세상은 두 종류의 인간이 싸움을 하는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배후에는 서로 다른 세력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로마서 5: 12-21절을 봅시다. ‘봉독“ 사망의 왕노릇과 생명의 왕노릇이 나옵니다. 이러한 두 세력의 모습을 구약에서 모형적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두 편으로 나누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이런 식의 대조를 보게 됩니다. 이 두 편의 특징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오늘 본문을 통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 그 벌로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이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을 수가 없기에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며 살아가야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문명을 건설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가인이 무엇을 하며 그의 후손들이 무엇을 하는지 오늘 말씀에 보면 에덴 동편 놋땅에 거합니다. 여기서 아내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녹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이 아니라 가인의 후손 에녹입니다.
가인이 아내를 취하고 자녀를 낳고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성을 쌓는 일입니다. 그 성 이름을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성이라고 합니다. 왜 성을 쌓았을까요? 성이란 외부의 적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제 가인은 자신의 안전을 스스로 지켜야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문명이란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는 방면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글에서 이런 내용을 보았습니다. ‘신은 시골을 만들었는데 사람은 도시를 만들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가인이 최초로 성을 쌓은 것은 도시 문명의 시작입니다. 도시가 형성되는 이유는 사람의 편리를 위하여 형성되는 것입니다.
가인은 성을 만들었는데 그 후손들은 무엇을 만들어 내는지 봅시다. 야발은 장막에 거하며 육축치는 자의 조상이 되고,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의 조상이 되고, 두발가인은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이루어 내는 사회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고서 자기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창상을 인하여 사람을 죽였고 자신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스스로 보호하기 위하여 가인을 위하여는 7배이지만 자신을 위하여는 77배라고 합니다. 자신은 과격한 복수로 사람을 죽여 놓고 자신을 헤치는 자는 벌이 77배라고 임의로 정하여 자신을 보호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의 후손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원리가 가인의 후손들이 사는 방법과 꼭 같은 것입니다. 자기의 안전을 자기가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비극입니다. 하나님의 보호가 아니라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스스로 성을 쌓고 스스로 보호하는 세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셋 계통의 후손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살게 됩니다. 이것이 주를 의지하는 자이며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는 에녹같은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가인처럼 살고 있습니까? 에녹처럼 살고 있습니까? 주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면 마땅히 주를 의지하면 주와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가인처럼 사는 것은 세상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의 안전지대를 만들어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09. 창세기 4:25-5:32 “ 하나님과 동행 ”
하나님께서 아벨 대신에 셋을 주셨습니다. 셋이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사람들이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셋이 아벨 계통을 이어가는 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