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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미디안 생활(2)
인간 재활용
출 2:15-20 / 이정선 목사
언제부터인가 지구인들은 무한할 것 같던 지구의 자원이 고갈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큰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고민과 걱정 끝에 하나의 해결책으로 재활용이라는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물론 재활용은 오래 전부터 있었던 우리 삶의 일부였지만, 자원 고갈의 위기가 현실로 다가온 이후에 지구인들의 매우 중요한 구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재활용의 정책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흐름에 역행하고 비협조적인 사람으로 낙인 찍히게 될 것입니다.
재활용이라는 것은 쓸모없는 폐품을 손질해서 다시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원래의 기능이 상실되어 용도에 합당하지 않은 것을 고쳐서 다시 사용하거나 또는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다 쓴 종이를 모아 가공해서 새 종이로 만드는 것도 재활용이고, 폐차된 버스를 포장마차로 개조하는 것도 재활용입니다. 그래서 재활용을 잘 하면 자원도 절약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폐차된 버스를 처리하려면 보통 일이 아닐 것입니다. 아무데나 갖다 버릴 수도 없고, 그대로 방치하면 흉물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 개조해서 포장마차로 만들면, 다른 포장마차보다 더 인기 있는 포장마차가 될 수 있습니다.
쓸모없는 물건을 재활용하면 이렇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데, 물건만 재활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도 재활용이 가능합니다. 전에 장재근이라는 육상 선수가 있었습니다. 제 고등학교 후배이기도 합니다. 2회 연속 아시안게임 남자 200m 금메달을 획득한 아시아 최고의 준족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무릎 부상을 당해서였던가 선수로서의 생명이 완전히 끝나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 장재근 선수가 에어로빅 강사로 변신해서 TV 스크린에 화려하게 등장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인간 재활용이라고 농담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 말씀에서 대단한 인간 재활용의 사례를 봅니다. 애굽의 왕자 모세는 완전히 끝장나고 말았습니다. 하루아침에 살인범이 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실패자였습니다. 섣불리 민족을 구원하겠다고 나섰다가 시작도 제대로 못하고 1회 초에 KO패를 당했습니다. 그에게는 희망도 없었습니다. 또 할 수 있는 일도 없었습니다. 애굽 왕실에게는 배신자였고, 동족 이스라엘에게는 압제자 애굽 왕실에 들어가 출세한 매국노였습니다. 모세는 아무데도 갈 수 없었고,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자동차로 치면 폐차요, 물건이라면 폐품입니다.
그 모세가 추적자를 피해 도망간 곳은 미디안 땅이었습니다. 미디안은 아라비아 반도에 있는데, 사람들은 유목민이었습니다. 거기 미디안의 제사장이 있었는데, 딸만 일곱이었습니다. 딸만 연속으로 일곱을 낳을 확률은 1/128입니다. 이 제사장의 집안도 한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제사장이라면 백성들에 대한 통제력을 갖는 위치인데, 제사장의 직분을 물려줄 아들이 없으니 통제력에 큰 손상을 입었을 것입니다. 강력한 부계사회에서 아들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그리고 성숙한 법치사회를 이루지 못했던 고대사회에서 집안에 남자가 없다는 것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힘의 부재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아들이 없다는 것 때문에 이 제사장의 집안은 이래저래 곤란한 점이 많았습니다.
당장 아들이 없으니까 딸들이 아버지의 양을 치는데, 다른 남자 목자들의 횡포를 당할 재간이 없습니다. 우물에 가서 양떼에게 물을 먹이러 갔다가 남자 목자들에게 쫓겨나는 것이 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목자들이 양떼에게 물을 다 먹이고 떠난 후에야 맨 나중에 우물에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아들 없는 집안의 서러움이 잘 표현되고 있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날 애굽에서 도망쳐온 모세가 그 우물 곁에 앉아 있다가 제사장의 딸들이 남자 목자들에게 쫓겨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 동족 한 사람이 애굽 감독관에게 매맞는 것을 보고 흥분해서 그 감독관을 죽였던 모세는, 여기 미디안에서 못된 남자 목자들이 연약한 여자 목자들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섣불리 나섰다가 살인자의 굴레를 쓰고 도망자가 되어야 했던 며칠 전의 사건을 교훈삼아서 이번에는 못 본 척 눈 감고 있어야 할까요? 아니면 엊그제처럼 모든 것을 잃는다 하더라도 약자를 돕고 불의한 일을 멈추기 위해 뛰어들어야 할까요?
목자들이 몇 명이나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모세 혼자서 그들을 모두 물리쳤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서 학문과 무예를 익힌 사람입니다. 군대의 사령관으로 복무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 모세에게 시골의 목자 몇 명쯤은 상대도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은 제사장의 딸들이 일찍 양떼에게 물을 먹이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애굽 사람 하나 때문에 우물가의 질서가 회복되었습니다. 여자라고 무시를 당하던 불평등과, 힘이 있다고 행패를 부리던 우물가의 폭력이 추방되었습니다. 누구든지 먼저 온 사람이 자기 양떼에게 먼저 물을 먹이고 집에 갈 수 있는 자유가 선포되었고, 약자가 도움과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사회정의가 실천되었습니다. 애굽에서는 추격을 당하던 살인자가 미디안에 와서는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경찰이 되었습니다.
집에 갔더니 아버지가 놀란 표정으로 묻습니다. “오늘은 왠일로 이렇게 일찍 들어왔느냐?” 못된 목자들의 행패에 딸들이 늘 시달리는 것을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던 아버지의 고통과 분노는 지금 놀라움과 궁금함이 되었습니다. 딸들이 대답합니다. “어떤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못된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 양들에게 물을 먹일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 말에 아버지가 딸들을 재촉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분을 모셔오지 않고 너희들만 왔느냐? 빨리 가서 모셔오도록 해라. 그리고 빨리 잔치 준비를 하여라.”
한순간에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 집안의 귀한 손님이 되었습니다. 제사장이면서도 아들이 없어서 무시를 당하고 늘 피해를 입어야 했던 이 집안에 모세는 구세주처럼 받아들여지게 된 것입니다. 모세가 익힌 무예와 왕자로서의 품위는 미디안 광야의 유목민 사회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특별한 자질이었고, 그래서 모세는 손상된 제사장 집안의 권위를 회복시킬 수 있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애굽에서 실패하고 목숨을 위협받던 도망자가 미디안에 와서 영웅이 되었습니다. 애굽에서는 영원히 실패자로 남을 수밖에 없던 모세의 인생이 미디안에서 새롭게 재활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실패한 적이 있었습니까? 실패해서 쓸모없게 되거나 용도 폐기되었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까? 직장에서 퇴직을 하거나 사업에 실패했을 때, 또는 하는 일에 흥미를 잃었을 때, 우리는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됩니다. 민족을 구하는 일에 실패한 모세, 왕자로서 용도 폐기된 모세 역시 인생이 끝장났다고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로 재활용되고 있는지 보십시오. 사실 모세의 인생이 재활용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는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자로서 위대하게 재활용될 것입니다.
우리의 실패한 인생을 하나님의 손에 맡길 때, 우리는 위대하고 값있게 재활용될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의 미모도 사라지고, 애 낳은 후에 몸매도 망가지고, 과거에 품었던 꿈은 물거품이 되고, 이제는 눈도 침침해서 돋보기가 필요하고, 그러면서 나도 이제 한물갔다고 느껴지십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재활용이라는 두 번째, 세 번째의 기회가 있습니다.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가장 인기가 없었고 재선에도 실패했던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퇴임 후의 활동과 업적으로 더 많은 존경을 받았고 노벨평화상까지 받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뉴질랜드에 이민 오신 분들은 대부분 재활용되고 있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가지고 있던 자격이나 경력 등이 여기서는 통용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전공이나 경력과는 거리가 먼 다른 일을 개척해서 해야만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민자들은 인생을 잘 재활용하는 분들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또 우리는 재활용되기 위해 더 공부하고 많은 것을 준비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처럼 재활용을 통해서 우리의 인생은 얼마든지 값있고 보람 있게 거듭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실패에 사로잡혀 재활용되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안타까운 인생의 낭비가 없을 것입니다. 영적인 삶의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돌이켜보면 하나님께 충성하지 못했던 모습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셨던 책임과 사명들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실패의 추억들이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실패하고 실수했던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수리하셔서 재활용하실 것인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을 더욱 복되고 아름답게 재활용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과거의 실패에 사로잡혀 있으면 재활용이 불가능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는 선언처럼, 늘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을 변화시켜 더 아름답고 복되게 재활용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복된 만남을 위하여
출 2:15-22 / 안효관 목사
여러분, 만약 여러분의 집에 살인용의자가 찾아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를 순수하게 맞아 집안으로 들이시겠습니까? 아니면 쫓아버리시겠습니까?
여기 살인 용의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모세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살인 용의자가 된 사연은 이렇습니다. 모세는 참 불운한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자기 민족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고, 태어난 모든 남자 아이는 죽어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엄청나게 불어나는 인구로 인해 불안함을 느낀 애굽 왕 바로가 모세가 속한 히브리 민족이 남자 아이를 낳으면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어머니는 모세를 낳은 후 3개월 동안이나 숨겨서 모세를 키우다가, 더 이상 집에서 키울 수가 없게 되자 모세를 갈대 상자에 넣어 나일강에 갖다 놓습니다. 이 때 나일강가로 목욕을 나온 바로왕의 딸 공주가 갈대 상자 안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발견하고는 데려다가 자기 아이로 키우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히브리 민족의 아이인 모세는 애굽의 왕궁에서 왕자로 자라게 됩니다.
그렇게 40년 동안 애굽 왕궁에서 자란 모세가 어느 날 히브리 사람들이 노예로 사역하고 있는 고센 땅에 찾아갔다가 살인을 저지르고 맙니다. 애굽의 감독관이 자기 동족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는 순간적인 화를 참지 못하고, 히브리 사람을 때린 애굽의 감독관을 죽이고 만 것입니다. 그 때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죽은 애굽 사람을 모래 속에 몰래 숨겨놓았습니다.
다음 날 모세는 또 다시 히브리 사람들이 사역하는 현장에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히브리 사람들끼리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잘못해 놓고서는 자기 동족을 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잘못한 그 사람에게 ‘왜 네가 잘못해 놓고선 형제를 때리느냐?’고 나무랬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모세의 비밀을 폭로하고 맙니다. ‘어제는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이더니 오늘은 나를 죽일테냐?’ 모세가 어제 애굽 사람을 죽일 때 그는 자세히 주위를 살펴보았습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애굽 사람을 죽여 모래 속에 시체를 감추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애굽 사람을 죽인 것을 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목격자에 의해서 폭로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이 바로 왕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모세가 사람을 죽였다는 소식을 들은 바로가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당시 애굽은 전제군주 체제였습니다. 이런 제도 하에서 왕이나 왕족은 절대 권력을 가졌습니다. 비록 양자이긴 하지만 모세는 왕자의 신분이었습니다. 왕자가 평범한 사람 하나를 죽인다고 하는 것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는 모세가 사람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애굽의 정치적인 상황에서 이해해야 할 문제입니다. 모세가 애굽인을 죽였을 당시, 애굽왕 바로는 투트모스 3세(Thutmose Ⅲ)였습니다. 그는 아버지 투트모스 2세에 이어 왕이 되었는데, 어머니는 왕비가 아니라 이시스라는 궁녀였습니다. 첩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왕비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첩의 아들인 그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아버지 투트모스 2세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불과 10살 때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투트모스 2세가 일찍 죽자 투트모스 1세의 딸이자 투트모스 2세의 왕비인 핫셉슈트가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이 핫셉슈트가 누구냐면 나일강에서 모세를 건져 왕궁에서 키워준 바로 왕의 딸 - 공주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모세를 양자로 입양시켰습니다. 핫셉슈트가 실권을 갖게 되자 그의 양자인 모세의 지위도 점점 격상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가장 두려운 사람은 투트모스 3세였습니다. 비록 자신이 왕인 바로로 등극은 하였지만, 실권을 갖고 있는 핫셉슈트의 아들 모세가 최대의 정적이 된 것입니다. 그러자 투트모스 3세는 점점 세력이 커져가는 모세를 제거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였다는 소식이 들리자 투트모스 3세는 모세가 히브리인임을 강조하면서 민족적 감정을 자극하여 모세를 제거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애굽을 떠나 도망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에 보면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찾는다’는 말은 간절히 탄원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바로가 모세를 찾기 위해서 얼마나 혈안이 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자신의 정적이었던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안 바로는 이번 기회에 모세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 눈에 불을 켜고 찾아 나선 것입니다. 아마도 애굽 전역에 현상수배 전단이 붙었을 것입니다.
더 이상 애굽 땅에 자신이 숨을 만한 곳이 없다고 생각한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가게 되었습니다. 15절에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었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아마도 한 곳에 정착하여 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비록 미디안 광야는 바로가 살고 있는 애굽의 왕궁과 거리가 멀다고 하지만, 언제 애굽의 특수정보요원이 자신을 위치를 알아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방황하며 지내던 모세가 어느 날 한 우물곁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때 미디안의 제사장인 르우엘의 딸들이 양떼를 이끌고 모세가 앉아 있던 우물을 찾아왔습니다.
일반적으로 양떼를 치는 목동 그러면 우리는 남자 목동을 연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르우엘의 딸 7명이 목동으로 등장합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양떼를 치는 목동은 대부분이 남자들입니다. 그런데 우기가 되어 광야에 풀들이 제법 많이 자라게 되면 목동들을 양떼를 멀리 데리고 가지 않습니다. 집 가까운 곳에도 양떼를 먹일 풀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는 여자들도 양떼를 이끌고 다니며 풀을 뜯게 합니다. 그러다가 집 주변에 양떼를 먹일 풀이 없어지면, 이번에는 남자들이 양떼를 이끌고 먼 곳까지 가서 양떼에게 풀을 먹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여자들이 목동 일을 하지 않습니다. 며칠씩 들판에서 잠을 자야 하기 때문에 여자들이 양떼를 데리고 나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밤에 들판에서 잠을 자지 않아도 될만큼 집 주변에 풀이 많을 경우에는 여자들도 양떼를 이끌고 가서 풀을 먹이고는 당일에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르우엘의 7명의 딸들이 아버지의 양떼를 먹이고 있었다는 것은 가까운 곳에 르우엘의 집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르우엘의 딸들이 양떼에게 물을 먹이려 할 때에 어려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17절에 보면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쫓는다’는 말은 괴롭힌다는 말입니다. 여자 7명이서 양떼를 끌고다니며 풀을 먹이고 물을 마시고 있으니까, 남자 목동들이 여자들을 괴롭게 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차례로 우물물을 사용해야 하는데, 여자라고 깔보면서 늦게 온 주제에 자기들이 먼저 우물물을 사용하겠다고 소리치고, 심지어 르우엘의 딸들이 먼저 와서 길어놓은 물을 빼앗아가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의협심이 강한 모세가 그냥 가만 있지 못했습니다. 본문 17절에 “모세가 일어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일어났다’는 말은 벌떡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남자 목동들이 여자들을 괴롭히는 모습을 보자 모세가 의분에 차서 벌떡 일어나서 도와주었다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애굽 왕궁에서 무예를 배운 사람입니다. 모세가 40년 동안 애굽 왕궁에서 공주의 양자로 애굽 왕실 교육을 받았습니다. 왕실 교육 가운데 하나가 무예입니다. 고대에는 왕이나 장군이 부하들보다 무예가 뛰어나지 않으면 지도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무예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랬기에 애굽 사람을 죽일 때에도 단번에 죽였습니다. 모세가 노동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애굽의 현장감독을 쉽게 죽일 수 있었던 것은 왕궁에서 배운 무예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본문 17절에서 여자들을 괴롭히던 여러 명의 목동들을 단숨에 제압하고 여자들을 도와줄 수 있었던 것도 왕궁에서 배운 무예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보여준 모세의 무예실력이 처음 보여진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보여준 모세의 무예실력은 힘없는 여인들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일곱 명의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여자들을 돕는 바로 이 사건으로부터 모세의 아름다운 만남은 시작되었습니다.
양떼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서 우물을 찾아온 7명의 여인들 - 모세는 그들을 알지 못합니다. 누구인지 모릅니다. 자신은 그냥 지나가는 나그네일 뿐입니다. 여인들이 괴롭힘을 당하는 그 상황을 모른 척하고 지나가도 됩니다. 어쩌면 괜히 참견했다가 어떤 어려움을 당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광경에 눈을 감을 수도 없었고, 자신의 눈앞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여인들을 모른 척할 수도 없었습니다. 나와 상관이 없는 일이지만, 무관심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만남의 첫걸음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i, 1828-1910)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가장 중요한 시간은 바로 지금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지금 내가 대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이라는 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종종 잊고 삽니다. 아무리 미래가 밝고 꿈이 아름답다 하더라도 오늘이라는 시간을 소중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우리가 기대하는 내일은 결코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기를 기대한다 하면서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합니다.
한 때 국민가요라고 불리던 노사연 씨의 ‘만남’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건 우리의 바램이었어.”라고 시작되는 노래입니다. 그 노래가 국민가요라고 불리게 된 것은 강렬하지 않고 담백하면서도 그 가사가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전까지 많은 사람들이 만남은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냥 어쩌다 한 번 만나고 지나가면 잊어버릴 그런 만남들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노래 하나로 만남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깨우쳐주었습니다.
사람은 만남에서 사람다움이 시작됩니다. 홀로 있을 때에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만남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좋은 만남을 가져야 좋은 인생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만남을 가져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좋은 만남이란 어떤 만남일까? 좋은 만남은 내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만남이 아닙니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만남이 좋은 만남이요, 아름다운 만남이요, 축복된 만남입니다.
마이크로 소프트(MS)사를 세워 세계적인 갑부가 된 빌 게이츠(William Henry Gates Ⅲ, 1955-)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게는 스티브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 그가 있었기에 나는 기술적인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빌 게이츠가 말한 스티브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창업 초기에 영업의 일인자로 불린 스티브 발머(Steve Anthony Ballmer, 1956-)를 가리킵니다. 빌 게이츠는 소프트웨어 개발에는 천재성을 발휘했지만, 영업에는 문외한이었습니다. 그가 영업의 한계에 부딪혔다고 생각했을 때 대학시절 알고 지냈던 스티브의 얼굴을 떠올렸고, 곧바로 스티브를 찾아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의 도움을 받아 회사를 반석 위해 올려놓았습니다. 스티브 발머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최고경영자였습니다. 오늘날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세계 정상에 우뚝 서게 된 것은 기술개발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던 빌 게이츠가 영업에 천재성을 가진 스티브 발머를 만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람은 서로가 잘 만나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잘 만나야 하고, 학생은 선생님을 잘 만나야 합니다.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은 직원을 잘 만나야하고, 환자는 의사를 잘 만나야 합니다. 그러나 그 반대도 역시 같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잘 만나야 하는 것처럼, 아내 역시 남편을 잘 만나야 합니다. 학생이 선생님을 잘 만나야 하는 것처럼 선생님도 좋은 학생을 만나야 합니다. 이번 동계 올림픽 때 김연아 선수가 세계 최고기록으로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것은 브라이언 오셔(Brian Orser)라는 코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브라이언 오셔 역시 김연아라는 좋은 선수를 만났기 때문에 자신은 선수시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자신이 금메달을 딴 것처럼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서로를 잘 만나야 합니다. 나는 너를 잘 만나야 하고, 너는 나를 잘 만나야 합니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내가 너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주면 너와 나는 좋은 만남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에게 복을 나눠주는 사람이 되면 나와 그는 복된 만남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된 만남을 갖기를 소망합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좋은 사람 만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대하고 소망한 것처럼 복된 만남, 좋은 만남이 우리에게 찾아오지 않는 이유는 만남을 기다리고만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사람이 나에게 찾아와주기를 기다립니다. 나에게 복을 나눠줄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나기를 기다립니다. 그렇게 기다리다 보니 기대했던 복된 만남, 좋은 만남을 갖지 못합니다.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복된 사람으로 그에게 찾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나를 통해서 그가 복을 받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가 나를 통해서 복을 받게 되고, 나 또한 그를 통해서 복된 만남을 갖게 됩니다.
모세가 르우엘의 딸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모세의 도움으로 양떼에게 물을 먹인 딸들에게 집에 일찍 들어오자 아버지가 묻습니다. “어떻게 일을 이렇게 빨리 마칠 수가 있었느냐?” 그러자 딸들이 모세가 자기들을 도와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자 르우엘이 ‘왜 그 사람을 모셔오지 않았느냐?’고 나무랩니다. 그리고는 급히 모세를 찾아 자기 집으로 데려옵니다. 은혜에 감사하며 모세에게 음식을 잘 대접한 후, 떠돌이임을 알게 된 르우엘은 모세에게 ‘우리 집에 머물라’고 요청합니다. 그렇게 해서 모세는 르우엘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르우엘의 집에 머물게 된 모세는 르우엘의 딸 가운데 하나인 십보라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미게 됩니다.
이 르우엘이 나중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 생활할 때 모세를 찾아온 이드로라는 사람입니다. 이드로가 모세를 찾아온 이야기가 출애굽기 18장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루는 이드로가 가만히 보니까 모세가 하루 종일 문제를 가지고 온 백성들을 재판하고 있었습니다. 모세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고, 모세는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재판을 했습니다.
지혜로운 이드로는 ‘이것은 참 좋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제안을 합니다. ‘네가 혼자서 문제를 다 해결하려고 하지 말아라. 너 이러다가 기진하여 쓰러지고 만다. 백성 가운데 지혜로운 사람을 세워 백성들을 재판하게 해라.’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제도가 십부장, 오십부장, 백부장, 천부장 제도입니다. 작은 일은 십부장이 해결하고,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오십부장이 판결합니다. 오십부장으로도 해결이 안 되면 백부장이, 백부장이 해결하지 못하면 천부장이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재판제도의 효시입니다.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 헌법재판소.
이런 이드로의 제안으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이드로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이드로가 말한 것처럼, 모세는 “필경 기력이 쇠하여”(출 18:18) 쓰러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생활을 인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먼저 이드로(르우엘)의 딸들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 사이에 복된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그 집에 머물게 되었고, 그의 딸을 아내로 맞아 가정을 꾸미게 되었습니다. 또 나중에(40년 후에)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 이드로로부터 지혜를 배워 백성들을 잘 인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드로에게 모세는 복된 사람이었습니다. 이드로 역시 모세에게 복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만남이고 복된 만남입니다.
이제 학교에 다니는 우리 아이들에게 새 학기가 시작됩니다.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부모님들은 ‘우리 아이들이 좋은 만남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좋은 선생님 만나게 해 주시고, 좋은 친구들 만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부모님들은 꼭 그런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만남이 정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기도를 좀 다르게 해야 합니다. ‘우리 아이가 복된 사람이 되어 우리 아이를 만나는 사람이 우리 아이를 통해서 복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아이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어서 우리 아이를 통해 하나님의 복이 많은 사람에게 나눠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공부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힘들고 어려운 아이들이 우리 아이를 통해 복을 받아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공부도 잘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좋은 대학 가고 출세하기 위해서 공부 잘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 잘 못하는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아이가 되도록, 또 공부 열심히 해서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을 나눠주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좋은 만남을 가져야 우리 인생이 행복합니다. 만남의 축복을 달라고 우리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서 나를 만나는 사람이 복을 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좋은 이웃 만나도록 기도하기보다는 내가 좋은 이웃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좋은 이웃, 복된 사람이 되면 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너는 복이 된다”(창 12: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복덩이가 된 아브라함을 통해서 세상 모든 사람이 복을 받도록 말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엄청난 복의 약속입니다.
서울 소망교회에 정문술 집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미래산업 회장이셨던 정문술 회장이라고 하면 생각나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분이 10여년 전인 지난 2001년에 KAIST에 300억을 기증해서 세간에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300억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KAIST에 기증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의 사업이 아주 힘들 때가 있었습니다. 너무너무 힘들어 하고 있었을 때 어떤 사람이 그 회사를 찾아왔습니다. 그에게 어렵다고 도와달라고 부탁을 한 것도 아니고, 자신이 어렵다고 말해 본 적도 없는데 그가 찾아와서 첨단기술을 전수해 주었습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회사는 다시 일어서게 되었고, 많은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KAIST의 이광형 교수였습니다. 정문술 회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고마음은 한 평생 내가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300억을 기증했다는 것입니다.
이광형 교수에게 ‘당신은 어째서 그 회사를 찾아가서 그 좋은 기술을 무료로 전수해 주었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국가가 저를 선진국 유학을 시켜주었고, 과학기술인이 되게 해 주었습니다. 어떻게든 사회에 봉사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먼저 베풀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갑절로 우리에게 되돌려 주십니다. 복 받기만을 바라는 사람보다는 복을 나누는 사람이 더 복된 사람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 복된 만남을 기대하는 사람보다, 복을 나누어주기 위해서 복된 만남을 꿈꾸는 사람이 더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미 복덩이들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슴 가슴에 하늘의 복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복을 나누어야 합니다. 내가 받은 그 복을 나누기 위해서 복된 만남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동문학가 정채봉 씨가 쓴 ‘만남’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이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나니까.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 꽃송이와 같은 만남이다. 피어 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 가장 비천한 만남은 건전지와 같은 만남이다.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다 닳았을 때는 던져 버리니까.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와 같은 만남이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니까.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주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만남을 원하십니까? 힘든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계십니까? 우리 아이들이 좋은 선생님, 좋은 친구들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까? 좀 바꿔 기도하십시다. 복을 받기 위한 복된 만남이 아니라, 내가 복된 사람이 되어 내가 받은 복을 나눠주기 위해 복된 만남을 달라고 기도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 아이들에게 복된 만남을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우리 아이가 복덩이가 되어서 우리 아이를 만나는 사람이 내 아이를 통해서 복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좀 더 성숙한 신앙인의 기도 말입니다.
훈련하시는 하나님
출 2:15-25 / 임덕순 목사
모세는 애굽의 왕자의 신분을 얻었지만 자기 동족을 구하기 위해서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자기백성을 도우러 나섰다가 사람을 죽이고 동족에게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는 지명수배를 받아서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여러 날 걸려 사력을 다해 도망쳐 간 곳은 미디안 광야였습니다. 기진해 쓰러져 있다가 기운을 차려보니 우물가인데, 여자 목동들이 양에게 물을 먹이려고 하고 있었고, 그것을 남자 목동들이 방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일어나서 방해하는 남자 목동들을 몰아내고 여자들이 자기 양들에게 물을 먹이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자 목동들이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 이드로에게 보고했고, 아버지 이드로는 모세를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대접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모세는 그 집에서 양을 치며 얹혀살게 됩니다.
우월한 지식, 높은 지위, 월등한 체력을 가지고도 모세는 실패했습니다. 40년을 준비하고 나서 첫 번 시도한 일에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그의 자신감은 비관으로 바뀌었고, 왕자의 지위는 지명수배자로 전락했으며, 환경은 왕궁에서 미디안 거친 광야로 바뀌었고, 그 앞에는 수많은 관료와 권세 있는 신하들이 아니라, 몇 마리의 양떼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모세는 거기서 양치기로 있다가 주인의 딸 십보라를 아내로 맞아 장가를 갔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었습니다. “내가 이방에서 객이 되었다" 는 뜻이었습니다.
미디안에서 사는 모세를 보면, 아직도 의협심과 힘은 좀 남아있었습니다. 여자 목동들을 방해하는 남자 목동들을 쫓아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거기 미디안에서 정착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아들의 이름을 “이방에서 객이 되었다.” 고 지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지난날의 모든 것이 이제 다 쓸모가 없다는 것을 한탄스러워하면서, 언제든지 다시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거기서 목동으로 주저앉기에는 그동안 배운 지식이 너무 많았고, 버리기에는 그가 가진 꿈이 너무나 컸고, 그의 실패가 너무나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정말 진지하게 시작도 해보기 전에, 너무나 허망하게 그가 가졌던 꿈이 무너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장가를 가서 살림을 차림으로 어쩔 수 없이 장기체류를 시작했고, 아들을 낳자 이방에서 객이 되었다고 이름을 지으면서, 언젠가는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잊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우리는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옛날처럼 혈기나 의협심이나 주먹의 힘이나 순간적인 충동으로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깊이 새기면서 언젠가 다시 다가올지 모를 그날을 기다리며 세월의 칼날을 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낸 날들이 하루 이틀 쌓이다 보니 40년이 지나갔습니다.
그 40년을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허무한 세월이요 낭비된 시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그 세월은 도리어 모세를 모세 되게 한 시간이요 하나님이 그를 당신의 프로그램에 맞추어 훈련시킨 기간이었습니다.
미디안에서의 40년 훈련이 없는 모세를 생각할 수가 있을까요?
만일 지식과 자신감으로 가득 찼던 40세의 젊은 모세가 왕실에서 갖나온 모습으로, 인간의 약함과 하나님의 전능성을 체험하지 못한 채로, 젊은 패기와 지식만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기 시작했더라면, 혹 그가 애굽에서 그들을 해방시키는 데는 성공한다 할지라도, 그가 과연 백성들과 함께 광야를 통과 할 수 있었을까요? 물 한 모금 구하기 힘든 거친 광야에서, 그렇게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수 백 만 명을 과연 가나안까지 인도할 수 있었을까요?
모세에게 미디안의 40년 연수기간이 없었더라면, 40세 때부터 모세가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되었더라면, 아마 그는 자기 자신감과 혈기로 일하려다가 하나님의 뜻을 많이도 거역했을 것입니다. 일이 좀 잘된다 싶으면 자기의 힘으로 해냈다고 자화자찬 하다가 하나님의 미움을 삿을 것이고, 일이 좀 안되면 백성보다 더 먼저 절망과 비관을 하며 넘어졌을 것이고, 백성들이 순종하지 않으면 즉시 혈기를 부리다가 지도력을 잃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하나님이 그를 상대해 주시지 않았을 것이고, 하나님앞에 부름 받아 올라가서 율법을 받아오지도 못하였을 것이며, 이스라엘을 법 있는 백성으로 길러 가나안땅에 인도하는 일은 영영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일단 실패하게 하시어 인간의 약함과 그가 준비한 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체험하게 하시고, 그를 미디안으로 보내어 40년 동안 충분히 훈련받게 하셨습니다. 미디안에서 모세가 배운 것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한 가지도 자기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아침에 내리는 이슬 한 방울도 하나님이 내리신다는 것을 배웁니다. 하나님은 천지만사의 주관자이시며, 그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나 보이는 사람들과 사건들과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배우게 됩니다. 그것이 미디안에서 배운 내용입니다.
그런 훈련을 거쳤기 때문에 모세가 40년 훈련을 마치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애굽의 바로와 싸우며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게 되었을 때, 날마다 감당하기 힘든 일을 만났어도 놀라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았으며, 놀라운 기적이 자신의 손끝에서 날마다 나타나는데도 겸손과 온유함을 유지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미디안을 거치면서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상대해주셨고 시내산 위로 그를 초청하여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율법을 기록하게 하셨고, 모세는 그것을 받아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권위 있게 인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 40년 동안 모세가 미디안에서 따로 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몇 마리의 양을 치는 목동노릇을 한 것이 전부입니다. 그는 애굽에서 배운 무술이 부족하다 하여 어떤 무술을 연마하지도 않았고, 어떤 지적인 훈련과정을 이수하지도 않았으며, 앞날에 대한 어떤 구상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거기서 어떤 책을 저술 한 적도 없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냥 세월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날마다 할 일 없이 양떼를 몰고 거친 언덕을 오르내렸을 뿐입니다.
욥의 경우는 자기가 고통 받는 시간들을 적극적으로 이해했습니다. 그 고난의 기간이야말로 내가 정금같이 연단 받는 기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연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경우는 자기가 연단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날마다 비탈진 언덕을 오르내리며 양을 치던 것뿐이었으며, 날마다 자기의 연약함을 비관하며 절망에 젖었던 세월을 살았을 뿐입니다. 그 40년 세월은 모세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낭비한 세월이요 참담한 시간들 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가 애굽에서 실패하고 미디안 낯선 땅에서 40년을 산 것은, 본인이나 남들이 보기에 그저 세월을 낭비하고 푹 썩은 시간으로 볼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당사자인 모세도 모르게 치밀하게 모세를 훈련시키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시키신 훈련은 단 한가지입니다. 그동안 그가 의지했던 지식, 힘, 패기와 자기의 계획을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의 처참한 실패를 통해서 자기의 지식이나 경험이나 힘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포기하고 다 버리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시키는 훈련이었습니다. 모세가 “자기”를 비워놓아야, 앞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명령을 주시고 힘을 주시고 일을 맡기실 때, 전적으로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능력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일부러 실패하게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붙드신다면, 참담한 실패와 비관의 세월까지도 선한 훈련의 기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저는 종종 병원을 심방합니다. 병들거나 사고가 나서 병상에 눕게 되는 분들을 보면 한가한분이 없습니다. 모두 바쁘게 일하던 분들입니다. 그분이 하루라도 없으면 가정이나 직장이나 그분이 하던 일이 돌아가지 않게 되었는데 갑자기 사고를 당하거나, 모르고 지내던 심각한 병이 발견되어 갑자기 병원에 온 경우들이 많습니다. 병원에 갑자기 입원하면 충격을 받습니다. 다행히 치료가 잘 되어서 얼마의 시간만 지나면 완치되는 경우는 참 행복한 경우인데도 병원에 갇혀있는 시간이 안타깝고 고통스러워하게 됩니다. 그럴 때 나는 그분들에게 이런 말을 해줍니다. “이번 기회가 손해라고만 생각하지 마세요. 하도 바쁘게 사느라고 자신을 돌볼 기회도 없었는데 자신을 돌볼 기회를 주신 겁니다. 하도 바빠서 내가 무엇을 위해 어디로 달려가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기회도 갖지 못했는데, 그렇게 가다가는 나중에 영영 엉뚱한 길로 갈지도 모르니까, 하나님께서 잠깐 브레이크를 걸어서 자리에 눕히셨습니다. 이제 누워서 천정을 바라보게 되었으니, 천정 위를 많이 바라보세요. 내가 누구이고, 어디서 왔고, 무엇을 위해서 어디로 그렇게 바쁘게 살아왔는지 한번 점검하는 기회로 삼으세요. 그리고 나에게 누가 필요한지, 나를 도와주실 분을 붙잡는 기회가 되세요. 그러면 병원에 와서 고생하고 돈 버리고 시간을 버린 것만은 아닌 것입니다.도리어 굉장히 유익한 기회가 될것입니다” 라고 일러줍니다.
애굽에서의 실패한 일이나, 미디안에서 목동으로 살면서 허송한 세월이나, 십보라를 아내로 맞아서 게르솜을 낳고, 자기가 나그네인 것을 잊지 않으려고 애쓴 일들은, 모두 장래에 그를 귀하게 쓰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준비시키시는 과정이었습니다. 모세가 의식적으로 준비한 것이 아니라, 모세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 혼자서 준비시키신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도 그런 훈련을 시키실 때가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아가다가 나의 계획대로 일이 되어지지 않고 가로막힐 때, 실패나 심각한 장해물에 막히게 될 때, 우리는 그 현실만 보고 낙담하지 말고 저 높은 하나님의 손길을 보아야 합니다. 나를 훈련시키고 인도하시는 분의 손길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낙망하지도 후퇴하지도 않습니다. 도리어 전진하고 승리하는 것입니다.
22절 까지는 모세가 미디안에서 그렇게 세월을 낭비하고 있다는 기록을 하다가, 23절 이하에서는 애굽의 왕은 죽고 이스라엘의 탄식은 더욱 심해지고, 하나님은 그들의 탄식을 수렴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미디안에서는 모세를 꺾어 온전한 당신의 종을 만드는 훈련을 하시면서, 또 한편 애굽에서도 백성들의 마음을 탄식과 간구를 일으켜 구원자를 사모하게 하는 일을 하나님 혼자서 진행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사람은 이쪽에 있으면 저쪽에는 있을 수 없고, 여기서 일하고 있는 동안에는 저쪽에서는 일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동시에 다발적으로 온전하게 당신의 일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산을 통과하는 고속도로를 건설하느라고 터널 공사를 할 때, 이쪽에서 뚫어가기 시작하고 저쪽에서도 뚫어오기 시작하여 중간에서 정확이 만나게 하는 토목기술자처럼, 하나님은 미디안에서는 사역자를 훈련시키시고, 애굽에서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간절하게 만들고 계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사람이라면 실패도 성공의 거름이 됩니다. 이것을 믿고 실패 한 환경에서라도 하나님의 손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도 모세가 겪었던 미디안의 훈련이 다가올지 모릅니다. 지금 그런 과정을 겪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이 뭔가를 해보려고 오랜 세월 많이 준비하고 별렀는데, 일답게 해보지도 못하고 허망하게 실패한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세월을 낭비했다고 한탄하고 헛고생 한 것이 한이 되어서 아직도 절망감에 잠을 못 이루시는 분이 있습니까? 여러분 중에 미디안에서 썩고 있는 모세 같은 분이 있습니까? 그동안 얼마나 수고했느냐,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느냐 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지식과 판단, 재주와 사람들의 도움, 사람의 약속과 보장, 인간적인 느낌과 감정,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얼마나 아느냐는 것이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이며, 그 앞에서 자신을 얼마나 비우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자신은 피조물인 인생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무리 준비했고 노력했다 해도 나는 역시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인생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진 찍는 취미가 있습니다. 지난 번 일본에 갔을 때 아침에 600년 된 스기나무 길을 산책하다가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아침 햇빛을 받은 이름 모를 풀잎들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은 별것 아닌 들풀도 햇빛의 조명을 받으면 대단히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인생도 별볼일 없는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 은혜와 구원의 빛을 비춰주시면 그 사람이 부각되고 귀한 일을 할 기회를 얻게 되고, 존귀하게 보이고 높임을 받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작은 꽃 한송이 에서도 하나님의 지문을 읽어내야 하고, 자신이 당한 불행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훈련과 인도하시는 손길을 발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럴수 있을 때, 자신의 마음속에 의지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담고 살겠다는 각오, 내가 준비한 돈이나 인맥이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디안의 훈련의 효과입니다. 여러분에게도 미디안의 훈련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시고 쓰시려는 사람을 종종 미디안에 보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심각한 고난 속에 있더라도 지금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오늘의 고난으로 나를 하나님께 합당하도록 훈련시켜 사용해 달라고 기도하며 순종하시어 도리어 큰 축복의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에서 간과하기 쉬운 숨은 진리를 찾아보겠습니다. 모세는 자기백성을 구하려다가 자기백성에게 배척을 당하여 미디안으로 쫓기게 되었다는 사실과, 거기서 생면부지의 십보라와 결혼했다는 것을 본문이 알려줍니다.
모세가 40년 동안 쌓아놓은 애굽의 왕자의 지위를 내어놓고 노예처럼 되어버린 자기백성을 구원하려고 그들이 노역하는 현장을 찾아갑니다. 모세가 그들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말렸을 때, 이스라엘은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며 대들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모세가 애굽 사람을 쳐 죽였다고 왕에게 고발했는지도 모릅니다. 모세는 자기가 도우려던 형제들에게 버림을 받고 배신감을 느끼며 미디안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자기가 목숨 걸고 구원하려던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미디안으로 도망칠 때 모세의 마음이 얼마나 슬프고 아팠겠습니까?
모세는 자기백성에게 버림을 받고 미디안에 내박쳐진 신세가 되었지만,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보복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나중에 그들의 구원자가 되었다는 것을 성경이 보여줍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 주님은 자기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천국의 영광 보좌를 내려놓고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으며 그를 버렸고, 십자가에 못 박힌바 되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의 구원주가 되셨던 사실을 보여줍니다.
신18:15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시키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어다." 예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가리킨 예언입니다.
요셉도 비슷했습니다. 요셉도 형제들에게 팔려서 노예로 애굽에 갔지만, 거기서 총리가 되어 자기를 팔아먹은 형제들의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모세도 형제들에게 버림받아 미디안 광야로 쫓겨났지만, 거기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성숙하여 돌아왔습니다.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주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왔으나, 영접을 받기는커녕 도리어 버림을 받았으나 결국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구원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모세의 사건을 통하여 미리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버림받아 팔려간 애굽에서 아스낫을 아내로 맞이했고, 모세는 도망쳐 간 미디안에서 십보라를 아내로 맞아 결혼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버림을 당하심으로, 십자가의 피로 죄인을 구속하였고, 그들을 당신의 신부인 교회를 삼으셨습니다.
모세와 요셉이 낯선 이방에서 결혼할 때는 그의 형제들에게 배척을 당하였던 시절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취하신 때는, 이스라엘에게 배척을 받아 죽으실 때였습니다. 죽으시기 전날 밤에 당신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즙을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을 먹고 마시어 나와 하나가 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모세와 요셉이 영화롭게 되는 날, 그들의 아내들도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영광스럽게 오시는 재림 날, 우리도 그 자리에 서게 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모세가 실패하지 않았고 미디안에 가지 않았었다면, 어찌 십보라가 모세와 결혼하여 영광스러운 구원자의 아내가 되었겠습니까? 요셉이 애굽에 종이 되어 팔려가지 않았더라면, 어찌 아스낫이 애굽의 영웅 요셉의 아내가 되었겠습니까? 주님께서 이 땅에 오사 십자가에서 죽으시지 않았더라면, 어찌 우리가 그분의 신부로 부름 받아 그분과 함께 영광의 자리에 설 약속을 받고 그날을 기다릴 수가 있겠습니까? 골 3:4에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고 하셨고, 롬 8장에는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위하여 그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할 것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한번 실패해서 애굽에서 도망쳐 미디안에 간 사건, 그렇게 준비를 많이 하고 그렇게 패기 왕성하고, 그렇게 헌신적 자세를 가졌던 사람인 모세가 자기 동족들을 도우려다가 실패하고 미디안에 가서 40년이나 세월을 죽이며 천한 목동이 되어 살았던 그 시간은, 헛된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를 더 귀하게 쓰시고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모델을 삼으시려고 그를 훈련하시고 인도하신 뜻 깊은 시간이었다는 것을 확실히 볼 수 있습니다.
미디안의 기간은 모세를 모세 되게 한 기간이었고, 십보라에게도 기회를 주는 시간이었습니다. 모세가 느끼기에는 실패의 나날, 절망의 시간이었지만 십보라에게는 모세를 만나게 된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하나님은 실패 같아 보이는 한 사건을 통해서 당신의 일군을 훈련도 하시고, 당신이 은혜를 베풀 사람에게 구원의 기회도 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여러분도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훈련기간을 만나게 되거든, 슬퍼하며 절망하며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는 기회가 되어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내고 쓰임을 받게 되는 기회를 삼으시기 바랍니다.
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
출 2:13-15 / 김명혁 목사
오늘 아침 우리 성가대가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감동적으로 불렀습니다. 제가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가장 감명 깊게 들은 때와 장소는 1993년 2월 14일 주일 로마니아의 오라디아 침례교회에서였습니다. 로마니아인들의 음악적 수준도 높았지만 챠우세스크 공산 독재 치하에서 해방되어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된 200여명의 성가대원들이 감사와 감격에 사로잡혀서 온 몸으로 부른 찬양은 너무나도 깊고 웅장한 감동을 자아냈습니다. 저는 그들의 찬양에 눈물로 화답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설교를 했습니다.
“계7:13에 ‘큰 환난에서 나오는 흰 옷 입은 무리들’이 있는데 바로 여러분들이 큰 환난에서 나오는 흰 옷 입은 무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고난과 환난의 길을 걷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로마니아 교회로 하여금 고난과 환난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난 날 한국교회로 하여금 고난과 환난의 길을 걷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지난 40여년 동안 로마니아 교회로 하여금 고난과 환난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고난과 환난은 버림과 저주의 표시가 아니라 사랑과 은혜의 표시오 훈련의 표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쓸모없는 진흙 덩이를 가지고 쓸모 있는 질그릇을 만드시는데 하나님께서 로마니아 사람들을 쓸모 있는 질그릇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40여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셨습니다. 아니 2000여년의 긴 세월이 걸렸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 속에는 라틴 문화라는 고귀한 문화적 유산이 남아 있고 고난과 환난이라는 보배로운 십자가의 유산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에게는 할 일이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할 일을 맡겨주시고 있습니다. 로마니아를 살리고 동구와 서구를 살리고 세계를 살리는 일입니다. 바울처럼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고 이삭처럼 세계 곳곳에 우물을 파는 일입니다. 로마니아 교회는 서구교회의 자본주의와 세속주의를 결코 따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국교회가 범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인 물질주의와 세속주의도 따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북한의 복음화를 위해서 북한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로마니아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에 깊은 감동이 되 살아남을 느낍니다. 저는 그 후 두 번 오라디아 침례교회를 방문했는데 그때마다 성가대가 저를 위해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부르곤 했고 그때마다 저는 눈물겨운 감동과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들이 너무너무 보고 싶습니다. 어제 비두 목사님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의 찬양과 설교의 일부를 그대로 여러분들에게 들려드리겠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감동적인 장면이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은 우리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고통소리도 들으시고 조선 사람들의 고통 소리도 들으시고 로마니아 사람들의 고통 소리도 들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여종 하갈의 고통 소리도 들으셨고 야곱의 아내 레아의 괴로움도 권념하셨고 엘가나의 아내 한나의 고통 소리도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시편은 이렇기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시118:5). 하나님은 우리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권념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보시고 그 소리를 들으시고 내려와서 그들을 건져내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아침 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고통을 당하도록 섭리하셨습니다.
고통은 어떤 때는 우리의 죄 값으로 주어지고 어떤 때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는 방편으로 주어집니다. 고통이 죄 값으로 주어지는 때에도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는 방편이 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내려가게 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오래 전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15:13,14).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라”(창22:1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내려가서 바다의 모래같이 번성하게 되었고 그리고 괴로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가 일어나서 크게 번성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학대하고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그 신민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갈까 하노라 하고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출1:8-11). 결국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의 학대에 못 이겨 하나님을 향해서 고통 소리를 내며 부르짖게 되었습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출2:23).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당한 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까운 원인으로는 바로의 악함 때문에 그들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궁극적인 원인으로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섭리 때문에 고통을 당했습니다. 현실적인 원인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정착하는 동안 애굽의 문화와 문명을 좋아하고 그들의 우상을 따른 죄 값으로 인해 고통을 당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에게 고통을 주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죄 값일 수도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이루는 방편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고통을 당하지 않은 개인이나 민족이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이룬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수르와 애굽에 노예로 잡혀가서 70여년 동안 고통을 당하게 하셨는데 바로 그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게 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고통은 저주로 끝 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축복으로 바뀌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의 저자들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시119:71).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1:12). 강변의 새벽 성도들도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지난 일년 동안 저희 가족들을 슬픔과 아픔 중에 위로하시고 힘 주시면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금요일 새벽에 드린 감사입니다. “고통의 순간들에 함께 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넘치는 생명력으로 끝없는 사랑으로 사랑의 나무가 자라게 하여주신 하나님 감사 드립니다.” 토요일 새벽에 드린 감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고난과 고통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고통을 통해서 인류 구원의 사역을 이루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고통 중에 부르짖게 하셨습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출2:23). 부르짖으며 고통 소리를 내는 것은 고통을 당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부르짖을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은혜와 사랑입니다. 어린 아기가 울지 못하면 큰 일입니다. 병든 자가 아픔을 느끼지도 못하고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지도 못하면 큰 일입니다. 부르짖음은 고통을 당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지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을 향해서 부르짖으라고 분부했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우리들을 향해서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시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고통 중에서 부르짖는 부르짖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사모함이 있고 자기를 향한 진정한 겸손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통 중에서 부르짖으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을 사모하면서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자리에서 부르짖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5) 이성봉 목사님이 부흥 집회 때마다 읽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시116:1,2). 박윤선 목사님이 자주 읽으시던 말씀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김치선 목사님이 항상 읽으시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향해서 고통 중에서 고통 소리를 내면서 부르짖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소리도 들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출6:5).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찌라”(출22:23).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출22:27).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시81:7). 하나님은 하나님의 분부를 어기고 다시스로 도망가던 요나의 부르짖음도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2:1,2).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통곡하며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고통 중에 있는 우리들을 향하여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시고 그리고 우리들의 부르짖는 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내 보이시는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반드시 하여야 할 최소한의 책임과 의무는 고통 소리를 내면서 부르짖는 일입니다. 부르짖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부르짖을 수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부르짖을 수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 소리를 듣고 내려와 저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려 하노라”(출3:7,8).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 소리를 들으셨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홍해를 건너게 하셨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신 가장 뚜렷한 사건은 출애굽 사건과 시내산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불로 구름으로 바람으로 소리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까이 내려오셨습니다. 저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직접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성육의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요1:14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분이라는 사실을 누누이 지적하셨습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8,39).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6:51). 하나님은 “하늘 영광 떠나서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이십니다. 우리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였고 우리들을 구원의 도구들로 삼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과 시내산 사건을 통해서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성육의 사건을 통해서 하늘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우리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고 우리들을 구원의 도구들로 삼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역사는 반복되고 계속되면서 발전합니다. 출애굽의 역사는 인류 역사의 모형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히브리 노예들의 고통의 역사도 반복되고 그들의 부르짖음도 반복되고 출애굽의 구원의 역사도 반복됩니다. 그러면서 인류의 역사는 천국의 완성을 향해서 달려갑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인들이나 우리 민족이나 세계에 고난과 고통을 주십니다. 우리들이 모두 이 세상이 낙관적으로 발전하기를 소망하지만 이 세상은 그렇게 낙관적으로 발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가 이를수록 큰 환난이 더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마25:21). 사도 바울은 마지막 때가 이를수록 고통하는 때가 임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딤후3:1).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절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큰 환난과 고통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을 보다 순수하게 만들고 우리들을 보다 겸손하게 만들고 우리들로 하여금 보다 간절하게 주님을 사모하게 만들고 그리고 우리들을 구원의 도구들로 만드는 훈련의 방편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하여야 할 것은 우리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향해서 고통 소리를 내면서 부르짖을 것 뿐입니다. 소경이 고통 중에서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부르짖은 것처럼 우리들도 부르짖으면 됩니다.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마9:27). 귀신 들린 아들의 아버지가 고통 중에서 예수님께 부르짖은 것처럼 우리들도 부르짖으면 됩니다. “한 사람이 소리 질러 가로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귀신이 저를 잡아 졸지에 부르짖게 하나이다”(눅9:38).
우리가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우리에게로 내려와서 우리를 고통에서 건지시고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내 보이시는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제가 고통 중에 있던 저의 아들 철원이에게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내 보였던 것과 비슷하다고도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바라보아야 할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은 이스라엘 나라의 땅도 아니고 북미 대륙의 미국 땅도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바라보아야 할 땅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의 그림자인 벧엘 곧 하나님의 집입니다. 고통 중에 계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신음 중에 계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주님을 바라보시면서 고통 소리와 신음 소리를 내시기 바랍니다. 송명희 시인도 이중표 목사님도 아니 사도 바울도 육체의 고통 중에서 주님을 향해서 부르짖었습니다. 그래서 천국을 소유하고 천국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천국을 소유하시고 천국의 기쁨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주의 뜰과 주의 집에 거하는 즐거움과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65:4). 주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고통의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
출 2:23-25 / 김윤기 목사
야곱의 가족 75명(행7:15)이 애굽으로 이주를 했는데 430년의 역사가 지나서는 약 2ㆍ3백만명의 숫자로 증가되었으며 이 때에 애굽의 바로 왕은 이렇게 이스라엘의 증가된 백성을 보고 두려웠습니다. 행여 전쟁이 일어나면 이스라엘의 이 노예들이 이적 행위를 하여 적군의 편이 되어 애굽백성들을 치고 도망갈까봐서 말입니다. 그래서 더욱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역을 통해 자손을 번성하지 못하도록 괴롭혔습니다.
1. 이스라엘의 고역으로 탄식하며 부르짖는 소리가 있습니다.
모세의 출애굽 년대에 관한 학설 가운데 후기 년대 설에 의하면 그 동안 모세의 생명을 끈질기게 노리던 애굽 왕은 세도스 Ⅰ세이고 그는 이미 죽었고, 이제 새로운 왕 라암세스 Ⅱ세가 통치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역의 현장에서 하나님에게 부르짖으며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소리를 들으시고 역사에 개입하시었습니다.
민중이 부르짖었다는 소리! 속박과 고역으로부터 자유를 찾기 위해 부르짖은 정치적 구원의 호소였습니다. 정치적 자유를 찾아 울부짖은 소리는 성서 속에서도 수 없이 증거 되고 있습니다. 본문 외에 시편 142:6절에서 "나를 핍박하는 자에게서 건지소서 저희는 나보다 강하니이다." 라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저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왕과 그의 신하로부터 당하는 고통의 소리를 모세는 외면했으나 하나님은 듣고 계셨다는 것을 성서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왕도 지도자도 다 외면했으나 하나님은 그들의 눈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외면한 그 부르짖음의 소리에 귀를 기우리고 계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의 소리에 영원한 구원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시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가 70년만에 마치리라는 말씀을 보고 하나님에게 기도를 했습니다.
(단9:1-6)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書冊)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 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자시여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와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라고 말입니다.
또 우리나라도 일제의 35년간의 고통과 압박에서 자유와 해방을 위해서 독립군들이 일본 제국주의 군대와 싸우고 독립투사의 독립운동 그리고 기독교인들의 항거와 주 앞에서 부르짖음이 하나님에게 상달되어서 오늘 날 이 독립과 해방을 쟁취했습니다. 우리나라 성결 교단도 일제 때 교단이 해산되는 큰 고난을 당했습니다.
43년 5월 전국 성결교회 일제 검속령이 내렸습니다. 이 때 강원도 철원교회의 박봉진 목사는 철원경찰서에 구속, 수감됩니다. 목사님은 유치장으로 들어가기 전 텍타이와 허리띠를 풀게 하고 좁쌀과 콩밥을 주는 색다른 환경에서 박 목사는 차디찬 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습니다. 그러나 박 목사에게는 더 큰 고통과 형극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형사 앞에 불려간 박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절한 이유를 하나님 이외에 참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했고 하나님이 천황보다 더 높다고 여기냐고 묻는 질문에도 언제나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의 강직한 신앙은 왜놈들의 원하는 대답을 절대 허용치 않았습니다. 목사님을 때리는 소리가 마치 장작 패는 소리로 들렸다고 합니다. 그의 아들은 이렇게 그 당시의 상황을 증언합니다. "기절하면 다시 물을 끼얹어 깨우고 갖가지 방법으로 3개월간을 주야로 고문했지요 온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마른 볏집처럼 말랐지만 항복을 얻어내진 못했습니다. 일본천황에 충성하겠다고 자술서 한 장만 쓰면 풀려나올 수 있는 것을 아버님은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키신 거지요." 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수많은 순교자들의 울부짖음과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시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어려울 때 하나님에게 부르짖어 아뢰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 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고통과 탄식 가운데서 도움을 호소한 당신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고통소리와 신음소리가 마치 향이나 연기가 위로 피어오르듯 백성들의 부르짖음이 기도가 되어 위로 올라가 하나님께 닿았습니다.
다시 성서는 말씀합니다. 자유를 구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은 자유를 갖다 주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은 반대로 고통을 주셨습니다. 광야 40년의 고통 말입니다. 이 고통의 경험을 거치는 훈련을 통해서만 하나님은 가나안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자유의 기쁨을 주셨습니다. 자유를 부르짖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왜 고통을 주셔야 했는가요?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의 고통을 아는 신앙 안에서만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성서는 말씀합니다. 영혼의 구원을 울부짖는 소리 앞에 하나님은 "영혼의 구원"을 하나의 완성품으로 선물하시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반대로 아기 예수로 주셨습니다. 로마의 학정 밑에 배고프고, 부자유했으며, 메말라가는 영혼의 절규를 부르짖는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 하루아침에 로마를 넘어뜨리고 새 왕국을 건설하는 메시야를 기다리는 그 민족 앞에 하나님은 가장 무기력한 아기 예수를 주셨습니다.
또 성서는 하갈의 부르짖음을 창 21:14-19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창21:14-19)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를 취하여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자식을 이끌고 가게 하매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더니 가죽 부대의 물이 다한지라 그 자식을 떨기나무 아래 두며 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참아 보지 못하겠다 하고 살 한 바탕쯤 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放聲大哭)하니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하나님의 사자(使者)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가라사대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 부대(負袋)에 물을 채워 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웠더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목이 말라 애타는 하갈과 이스마엘 앞에 "물"을 갖다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서의 하나님은 "하갈"의 눈을 밝게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눈"을 밝히셨다는 말은 하나님은 인간에게 세계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새로운 "눈"- 신앙관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물"이 없는 것이 아니라 물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하갈의 울부짖음에 하나님이 눈을 열어 준 것처럼
이렇게 수많은 순교자의 피의 호소와 핍박받는 성도의 눈물의 기도와 부르짖음이 하나님에게 상달되어, 하나님은 이 백성에게 독립을 통한 구원받을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들이 부르짖을 때 구원받을 수 있는 소망의 빛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저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그 들은 바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실행 여부까지를 준비하고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언약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던 일을 마침내 실행에 옮기기로 하셨습니다. 그들의 조상과 맺은 언약 즉 이미 650여년전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었었고(창 15:13-16), 이삭과 야곱에게 재확인되고 비준된 약속의 땅 가나안에의 복귀 언약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비록 침묵 속에 계셨으나 이스라엘의 모든 한숨과 눈물과 상처를 일일이 기억하셨으며 곧 그들을 구원하실 계획을 세워놓은 것을 실현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때를 위하여 모세를 준비시켰습니다.
모세가 애굽 땅에서 애굽인을 살해하고 도피하던 당시의 나이가 40세였고(행 7:23-29). 모세가 바로 앞에 나아갔을 때가 80세였습니다(7:7). 그는 미디안 광야에서 약40년 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한 인생의 경로에서 40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짧지 않습니다. 더욱이 당시 모세가 삶의 지향점을 상실한 무료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40년 기간은 하나님의 연단 기간이었습니다. 즉 장차 선민 이스라엘을 이끌 지도자로서 육체적으로는 광야 생활 및 지리에 익숙토록 하고, 영적으로는 순종과 겸손 및 자아를 철저히 깨닫도록 한 하나님의 학교였습니다. 이렇게 고난과 훈련으로 준비된 모세를 부르시고 그 에게 사명과 능력을 주어 그 일을 감당하도록 하시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라고 하는 학교에서 가장 어려울 때 힘든 장소에서 하나님은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인물을 훈련하고 연단 시키어 사용하시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기독교가 힘이 있었을 때는 좋은 환경에서가 아니라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은 인물을 양육하고 훈련시키어 역사의 무대에 등장시키십니다.
알버트 까뮤는 "기독교가 가장 힘있던 때는 로마제국에 대항하던 초대교회였다" 고 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는 수가 많아서 힘있는 것이 아니고 그 신앙고백이 투철할 때가 가장 힘있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는 수는 많으나 과연 민족의 문제를 제대로 짊어지고 가고 있는가 한번 반성해 볼 일입니다. 3.1운동 당시에 기독교인은 불과 25만명 채 넘지 않았습니다. 소수의 인구가 국가적 십자가를 의연하게 지고 갔습니다.
일제말기에 너무 혹독한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비록 신사참배에 굴복한 치욕이 있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한국교회는 이처럼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민족문제를 늘 선교의 과제로 안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전통이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고난과 힘든 고역과 같은 삶 속에서 울부짖는 성도의 부르짖음과 기도를 들으시고 이 백성을 구원하시어 강대국의 힘을 빌리어 이 나라에 해방을 주시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 백성을 굽어살피신 하나님의 도웁는 은혜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부르짖는 기도와 신음(呻吟)소리를 들으시고 역사에 개입하시어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민족의 시작
출 2:23-25 / 김영준 목사
마피아라는 범죄조직이 있지요. 그런데 마피아는 한 종류만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영화 대부로 잘 알려진 ‘코사노스트라’는 주로 시칠리섬 출신 사람들로 구성됐고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합니다. ‘알 카포네’로 유명한 시카고의 유명한 마피아는 나폴리 출신의 사람들로 구성됐고 같은 마피아지만 시칠리아 마피아는 시카고 마피아가 하도 사납기 때문에 자기들의 모임에 끼워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탈리아 출신 사람들이 성질이 폭력적이어서 이런 범죄단체를 만든다는 얘기냐. 그건 아니고 마피아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려면 그들의 과거 역사를 돌아봐야 된다고 합니다. 오랜 세월동안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그들의 정부든 그들의 임금이든 지도자가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지도자가 백성을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고 스스로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존재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들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고 스스로를 보호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문제 해결의 방법을 찾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보호해 줄 수 있는 단체를 필요로 하게 되고 그것이 마피아라는 범죄조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 대부의 서두를 보면 한 이탈리아 이민자가 마피아 보스를 찾아와서 도움을 청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미국에 건너와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열심히 돈을 모으고 자식을 키웠습니다. 그런데 그만 딸이 불량배들에게 욕을 당합니다. 경찰에 신고해서 그 불량배들이 재판을 받았어요. 그런데 집행유해로 풀려났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 사람이 미국 사회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고 미국의 정부가 자기를 보호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래서 마피아의 두목을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정서적으로 보면 우리의 조상, 우리 민족과 이탈리아 사람들이 흡사한 면이 있습니다. 소위 민초들이 힘이 없어요. 그리고 힘 있는 자들이 그들을 보호해 주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민초들은 늘 윗사람들에게 시달렸어요. 그래서 우리나라에 탐관오리라는 말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만 우리의 조상들은 시칠리아 사람들보다는 소극적인 방법으로 대처했던 것 같습니다. 마음속으로 그것을 품었어요. 그것이 마음속에 한이 되었습니다. 왜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가장 선호하는 직종이 벼슬이었습니까. 그것은 벼슬이 있는 사람이 제일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권세 있는 자리에 있기 때문이에요. 동시에 우리 민족의 정서에는 반골의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힘 있는 사람에게 늘 당하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도자가 자기들을 도와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가장 불쌍한 사람은 누구냐. 아무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보면 강도를 만나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피 흘리고 있는 사람을 제사장이 보고 지나쳤어요. 서기관이 보고 지나쳤다고 했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오기 전까지는. 또 탕자의 비유를 보면 탕자가 유산을 탕진하고 가난해지고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어서 들에 나가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려고 할 때 아무도 그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또 죄를 짓고 끌려온 여인이 예수님 앞에 끌려 왔을 때 어느 누구도 그 여성을 두둔해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 그를 탓하고 비난하고 돌을 던지려고 했지 어느 누구도 그를 두둔하거나 변호해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어떤 특정인을 가리키는 말씀이 아니고 모든 인간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탕자든 강도만난 사람이든 죄를 짓다가 끌려온 사람이든 어떤 특정한 사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강도를 만나든, 모든 유산을 탕진하든, 죄를 지었든 간에 아무도 우리를 두둔해주려고 하지 않고 우리의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려고 하지 않고 관심을 갖더라도 도와줄 의사가 없든가 도와줄 능력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와서 그를 도와주고 그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고 그리고 죄지은 여인을 예수님이 사람들이 던지는 돌로부터 지켜주신 것처럼 결국 사람을 궁극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분은 한분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자든 가난한 자든 권세가 있든 없든 그것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결국 궁극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홀로에요. 자녀들이 수능시험 보러 수험장에 갈 때 누가 가서 옆에서 도와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수술 받으러 수술실에 들어갈 때 누가 옆에 같이 누워있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마음속에 괴로워하고 밤에 잠들지 못할 때 누가 옆에서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설 때 누가 곁에 같이 서 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결국 인간은 결정적인 순간에 홀로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나를 돈도 도와줄 수 없고 힘 있는 사람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시지만 그 상황에서는 부모님도 나를 도와줄 수 없습니다. 만약에 그런 상황에서 아무도 그를 지켜보지 않고 아무도 그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괴롭고 또 절망적인 것은 없을 것입니다. 사르트르라는 철학자가 출구가 없다는 책을 썼지요. No Exit. 그 줄거리를 보면 주인공이 어떤 어두운 방에서 의식을 찾는데 아무리 벽을 더듬어 봐도 나갈 문이 없더라. 그래서 출구가 없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상실한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지만 태어났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한국 사람이든 선택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생명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만일 나를 돌아보는 자가 없고 아무도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홀로 있다는 얘기입니다.
성경은 히브리 민족의 조상이 애굽의 종 출신이었다고 말합니다.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은 자기 민족의 시작을 말할 때 전부 다 신화라든가 그래서 우리는 임금의 후손이라든가 우리 조상들이 어디를 다스렸다든가 이런 식으로 자기 민족의 시조를 말하는데 유일하게 우리 민족의 조상은 남의 나라의 노예출신이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히브리 민족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기록을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가 일부러 그것을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누가 일부러 우리 조상이 노예출신이라고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게 사실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요. 제가 김해 김 씨 삼현파인데 저희 작은 아버님이 한번은 족보를 연구하는 단체에 가서 우리 가문의 족보를 알아보셨더니 김유신 장군의 후손이래요. 누가 그걸 믿겠습니까. 아니 김해 김 씨가 이렇게 많은데 그럼 이 많은 김 씨가 전부다 김윤신 장군의 후예라는 얘기입니까. 그건 기분 좋으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걸 누가 실제로 믿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의 조상이 노예출신이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 노예들을 건져서 당신의 백성을 만드시고 선민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게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은 인간의 상황을 미화한다고 주장하는데 그건 성경을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상황을 결코 미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적나라하게 표현합니다. 인간의 죄든 인간의 고독함이든 고통이든 더 적나라하게 그것을 말하지 결코 인간을 미화하지도 않고 인간의 상황을 미화하지도 않고 도덕성을 미화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이 위대하다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죄인이고 병들고 사람에게는 길이 없는데 하나님이 그를 건지신다는 말씀이에요. 성경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 위대할 수 있지만 그들이 주인공이 아니에요. 다윗이 주인공이 아닙니다. 다윗이 주인공이라면 다윗의 범죄를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주인공이었다면 아브라함의 그 많은 실수를 거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세가 주인공이었다면 모세가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무엘이 주인공이었다면 사무엘의 아들들이 아비만 하지 못한 것을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인공이었다면 예수님을 부인하고 또 연약한 순간이 있었다는 것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사람은 사람이에요. 목회자든 선지자든 세리든 사람은 사람이에요.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보니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화와께로서 온다’고 했습니다. 내 도움이 내 안에서 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가족에게서, 아는 사람에게서, 재벌에게서, 대통령에게서, 미국으로부터 도움이 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서다’ 어떤 방법으로 도움이 올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어디서 오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람을 통해서 올 수도 있고 친구를 통해서 올 수도 있어요.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이 도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돕지 아니하면 우리에게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무력하다고 느끼고 뭔가 일이 풀리지 않고 길이 열리지 않고 마음에 평강을 얻지 못하고 일이 안된다 그러면 일이 안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려고 하지 말고 더 근본적적으로 어디에 문제가 있는가를 봐야 됩니다. 결국은 우리가 예수님을 떠났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예수님을 떠나는 것이 문제에요. 탕자가 아버지를 떠난 것이 문제입니다. 그 탕자는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를 떠나도 아버지에게 받은 유산이 있기 때문에 이 유산이 나를 지켜줄 것이다.’ 이 유산만 있으면 든든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유산이 오래가지 못했어요. 재물이 오래가지 못합니다. 재물이 나를 지켜줄 줄 알았는데 그 재물이 오래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 재물이 남아있지 않았어요. 그 돈이 남아있었다면 탕자가 탕자가 되지 않지요. 그런데 아버지를 떠났더니 그 유산이 오래남아 있지 않았어요. 그냥 다 없어져버렸어요. 근원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것이 민족의 시작이고 민족의 신앙의 시작이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본격적인 시작입니다. 이것을 구속사라고 부릅니다. redemptive history.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신 역사적인 과정 사건을 구속사라고 하는데 구속사의 본격적인 시작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출애굽 사건이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도움을 보여주는 표상입니다. 여기 몇 가지 성격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것이 혁명이나 반란을 통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에요. 이스라엘이 바로에게 대들지 않았고 애굽 사람들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성경 어디에서 이스라엘이 그들을 종으로 부렸던 애굽 사람들을 미워했다는 구절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 이것은 폭력을 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폭력을 행한 사람은 한 사람뿐입니다. 모세가 사십년 전에 애굽 사람을 죽인 것, 그것이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지 않았습니다.
셋째로 이것은 빽을 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국 전쟁 때 빽이 없는 사람은 전쟁터에 끌려가고 빽이 있는 사람은 안 끌려가서 전쟁에서 죽을 때 ‘빽’하고 죽었다고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빽을 통해서 구원받은 게 아닙니다. 그들을 알던 바로는 이미 죽었어요. 그들을 기억하고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사람이 도와줄 줄 알았는데 그 사람이 죽고 나니 이스라엘을 모르는 사람이 왕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생각을 갖더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민족주의 적인 방법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민족은 민족이지만 민족주의 적으로 모인 게 아니고 그들의 구심점은 공동의 신앙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공동의 신앙이 구심점이 된 것이지 그들의 혈통이나 전통이나 가문이나 이런 것, 공동의 과거의 경험이 구심점이 된 것이 아닙니다.
다섯 번째는 신앙으로 구원을 받은 것도 아니고 다시 말하면 신앙의 힘이 아니고 하나님의 역사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서 구원을 받은 게 아니고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그들을 건져낸 것입니다. 여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정성과 열심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내가 열심히 믿기만 하면 잘 되겠지. 그렇지요.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이 허락하셔야지 내가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게 되는 게 아닙니다. 주도권은 하나님이 쥐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시고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시고 하나님이 바로를 물리치셔야지 내 종교적인 열심으로 이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걸 알아야 됩니다. 만약 우리의 종교적인 열심이 관건이라면 그건 또 하나의 율법이 되는 것이고 공로가 되는 것이고 내 의로움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나를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의지로 되는 것이지 내 노력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한 건 뭐냐. 그들의 고난 중에 부르짖은 것뿐입니다. 유념할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하지 않고 그냥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23절에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냥 부르짖었는데 그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 것입니다. 여기에만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고 3장 7절에도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에게 부르짖었다고 하지 않았지만 그냥 부르짖었어요.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그들이 부르짖었는데 그것이 하나님께 상달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걸 들으셨어요. 백성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신 것입니다.
가장 불쌍한 사람은 부르짖어도 아무도 들어주지도 않고 고생을 해도 아무도 봐주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절대적인 고독이고 그것이야말로 불쌍한 인생입니다. 만일 그것이 이제껏 모든 인간의 경험이었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가 굳이 하나님 믿지 말라고 말하지 않아도, 누가 굳이 신앙을 핍박하지 않아도 이제껏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중에 부르짖었는데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아무도 봐주지 않았다면, 그게 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경험이었다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사라져버렸을 것입니다. 이건 누가 강조하고 누가 가르치고 설득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전히 박해나 핍박이나 무신론이나 어떤 것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용수철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고 그 기도에 효험이 있는 것을 믿는 이유는 부르짖었을 때 누군가가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이 강도만난 사람이 제사장이 지나가고 또 서기관이 지나가고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는데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찾아왔어요. 그건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또 탕자가 아무도 그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지만 돌아갈 집이 있었어요. 그를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가 있었어요. 또 죄짓다가 끌려온 여인이 아무도 그를 두둔해주지 않고 모두가 그를 비판하고 돌을 던지려고 했을 때 예수님이 거기에 서 계셨어요. 예수님이 그 여성을 두둔하지는 않았어요. 두둔할 수 있는 건 없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정죄로부터 뿐만이 아니고 사람들의 돌로부터 그 여성을 지켜주신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나는 연줄도 있고 나는 재물도 있고 나는 친구도 많고 나는 기댈 데가 많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수 있지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여러분의 친구가 도와줄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재물이 그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유일하게 우리의 대언자가 되고 우리를 대신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선한 이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돌아갈 집이고 예수님이 심판과 사람들의 던지는 돌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실 유일한 방패요 산성이요 유일한 피난처가 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