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405
11월11일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연증 제32주간 월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iWwWB-wBUqs
[서울대교구 김세영 파비아노(삼성산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지칠 줄 모르는 사목적 열정의 소유자,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동료 회원들, 사제들 가운데 정말이지 우러러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타고난 개척정신과 탁월한 선교 정신, 거기다 유창한 외국어 실력...
저는 한국어 하나도 제대로 안 되는데, 제가 잘 알고 지내는 한 살레시안은 구사하는 외국어 수가 엄청납니다. 영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불어, 독어...
그러다보니 당연히 중책이 주어져서, 전 세계를 안방 드나들듯이 드나듭니다. 틈만 나면 장거리 해외 여행이 잡혀있기에, 삶이 참 피곤해보이지만, 교회와 수도회를 위해 참으로 큰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316~397)도 그랬습니다. 그도 다양한 달란트, 그 위에 영혼 구원을 위한 강렬한 에너지를 지녔으며, 이를 바탕으로 당시 유럽 전역을 다니면서 영웅적으로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마르티노의 이력서는 참으로 특별합니다. 그는 평생에 걸쳐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습니다. 그는 원래 이교도였습니다. 헝가리 이교도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요청으로 군인의 길로 들어섭니다.
든든한 빽인 아버지를 생각한다면, 그는 평생 군생활을 하다가 편안히 정년퇴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군 생활 중에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말을 갈아탑니다. 힘과 권력과 출세의 말에서 내려 그리스도의 말로 갈아탄 것입니다.
사제로 서품된 마르티노는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데 헌신합니다.
당시 다양한 이단들이 창궐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복음선포 활동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교도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추방되기를 밥먹듯이 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후일을 기약하며 깊은 산속으로 피신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망하거나 지치지 않고, 또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겨 꿋꿋이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마르티노의 지칠줄 모르는 사목적 열정을 눈여겨본 사람들은 그를 프랑스 투르의 주교로 추대하였습니다. 그는 감동적이고 명쾌한 강론으로 수많은 이교도들을 개종시켰으며, 방황하고 흔들리는 그리스도 신자들의 마음을 다독여주었습니다.
이방인 군인 장교에서 그리스도의 군사로, 그리스도인에서 주님의 거룩한 사제로, 사제에서 주교로 직분이 바뀌었지만, 그의 마음속 갈망은 오직 한 가지 가난하고 겸손한 수도자였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람, 마르티노여!
수고도 죽음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했으니,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는 것을 거절하지도 않았으며,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눈과 손을 항상 하늘에로 드높인 채 그의 무적(無敵)의 마음은 기도에 굳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술피치노 세베로의 서한 중)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xE41KGNbciA
++++++++++++++++++
<쓸모 없는 종의 행복>
찬미 예수님!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는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일의 위대함과 그 허무함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주인공 산티아고 노인은 84일 동안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어부로서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먼바다로 나갑니다.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배보다 더 큰 거대한 청새치를 만납니다.
그는 사흘 밤낮의 처절한 사투 끝에 그 물고기를 잡는 데 성공합니다. 그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성취해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그는 상어 떼의 습격을 받습니다. 그가 항구에 도착했을 때, 그의 배에 묶여 있던 것은 살코기 한 점 없는 거대한 '뼈'뿐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는 지쳐 쓰러져 잠이 듭니다. 이 노인의 모습은, 이 소설을 쓴 작가 헤밍웨이 자신의 상징처럼 보입니다. 헤밍웨이는 노벨문학상까지 받으며 세상의 모든 '일'을 성취했지만, 그 허무함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엽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위대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열정적인 '일'을 했지만, 세상은 그의 '일'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절망 속에서 자신의 귀를 잘랐고, 결국 스스로 생을 마쳤습니다. 그들이 한 '일'은 이토록 위대했지만, 왜 그 '일'은 그들에게 구원을 주지 못했을까요?
영화 ‘쇼생크 탈출’의 브룩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나와 마트에서 '일'을 하지만, 그 '일'은 누구라도 '대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일은 그에게 '꼭 필요한 존재'라는 자존감을 주지 못하고, 그저 생존을 위한 발버둥일 뿐이었습니다.
여기, 이들과는 정반대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세 시대, 무너진 성당을 재건하는 공사장을 한 여행자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똑같은 벽돌을 나르고 있는 세 명의 인부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첫 번째 인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소?" 그가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보면 모르시오? 빌어먹을 벽돌을 나르고 있소." 그에게 '일'은 그저 고통스러운 노동이었습니다.
두 번째 인부에게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땀을 닦으며 말했습니다.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돈을 벌고 있습니다." 그에게 '일'은 생존을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브룩스나 헤밍웨이의 일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인부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비록 남루한 옷을 입었지만, 눈을 빛내며 환한 미소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지금, 하느님께서 머무실 위대한 성전을 짓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세 사람은 정확히 '같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사람은 고통 속에서, 두 번째 사람은 의무감 속에서 일했지만, 세 번째 사람만이 완벽하게 행복했습니다. 그의 '일'은 더 이상 '대체 가능한' 노동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거룩한 '사명'이었습니다. 그는 "나는 하느님께 꼭 필요한 존재"라는 자존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비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밭에서 돌아온 종에게 주인이 "얼른 와서 식탁에 앉아라"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하고 시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명령한 것을 다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 종에게 고마워하겠느냐? ...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9-10)
이 말씀은 언뜻 들으면 굉장히 차갑게 들립니다.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일'을 했는데, 고작
'쓸모없는 종'이라니?"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노예의 언어'가 아니라, '사랑의 언어'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들은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일'을 합니다. 그 일이 그 자체로 즐거울까요?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압니다. 자신이 공부하는 그 '일'이,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임을 압니다. 그 '일'을 통해 자신이 부모님께 '꼭 필요한 존재'임을 확인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100점 맞은 시험지를 들고 부모님께 달려가며 행복해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세 번째 벽돌공이 "나는 성전을 짓고 있다"고 행복하게 외쳤을 때, 그가 나중에 하느님께 가서 "제가 이렇게 위대한 일을 했으니 상을 주십시오"라고 자랑할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는 "주님, 당신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이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셔서, 그 '일'을 하는 내내 제가 가장 행복했습니다"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이것이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는 고백의 진짜 의미입니다. "주님, 저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그 '일' 자체가 저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고 상급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시키시는 이유입니다.
우리를 부려먹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사명'을 주심으로써, 우리가 '꼭 필요한 존재'라는 자존감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일'을 통해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저는 아침에 눈을 뜨면, "주님, 오늘 제가 무슨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찾아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 그날의 행복도는 매우 높이 상승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세 번이나 배신하고 '쓸모없는 종'이 되어버린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을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베드로는 죄책감에 빠져 자신의 옛 '일', 즉 생존을 위한 고기잡이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실패를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단 하나의 관계를 확인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은 그에게 '일'을 주셨습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7)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맡기시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삶의 의미와 살아갈 힘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민족들의 스승으로, 목자로 불림 받았습니다.
오늘 내가 하는 '일'이, 설거지이든, 운전이든, 아이를 돌보는 일이든, 그것이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헤밍웨이의 허무함이 아니라 세 번째 벽돌공의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반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날 복음 묵상의 내용은 오늘 복음의 내용이었습니다. 많은 분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는 구절을 선택했습니다. 군인이 해야 할 일은 훈련을 통해서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나라를 지키는 것입니다. 공직자는 자신의 위치에서 국민을 위해 주어진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성직자는 서품받을 때 했던 독신, 순명, 신앙고백의 의무를 충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셨던 사명이 있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 병자를 고쳐주는 것, 마귀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성직자는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세례받은 신자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마음에 새긴 하느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과정에서 시련과 고통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과정에서 오해와 시기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과정에서 금전적인 손해를 보거나 모욕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신앙인은 해야 할 일을 충실하게 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곳이고, 우리에게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또 다른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 개업한 병원에서 피 검사를 받았습니다. 검사 결과를 보며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 몸의 지체들이 62년 동안 불평 한마디 없이 자기 몫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장은 한순간도 쉬지 않고 뛰었고, 허파는 새 공기를 들이고 탁한 공기를 내보냈습니다. 손은 글을 쓰고 음식을 만들고 성사를 집전하도록 도와주었고, 발은 기도하러, 병자를 찾아, 봉사하러 움직였습니다. 이처럼 몸의 지체 하나하나가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었습니다. 우리의 몸이 하느님 안에서 얼마나 충실히 일하고 있는지를 깨달으며, 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일본의 변호사 니시나카 쓰토무 씨는 50년 동안 1만 명이 넘는 사람을 만나며 깨달았다고 합니다. “운이 좋은 사람은 감사할 줄 알고, 자신이 한 선행을 굳이 알리지 않는다.” 반면에,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사람은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하면서도 그 속에 교만이 숨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겸손을 잊으면 봉사해도 그것이 공로가 되지 않는다.”“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는 겸손한 마음을 잊으면 봉사해도 그것이 공로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신앙 안에서 사제는 봉사자여야 하고, 성사를 집전해야 합니다. 봉사는 주님께서 맡겨주신 가장 큰 사명이고, 성사의 집전은 사제에게 주어진 고유한 직무이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특별히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 외로운 사람,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미사와 고백성사를 정성껏 집전해야 합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천하 국가도 가히 고르게 할 수 있으며 벼슬과 녹봉도 가히 사양할 수 있으며 서슬 퍼런 칼날도 밟을 수 있으나 중용은 지키기 어렵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제가 맡겨진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고, 봉사와 성사 집전을 잘할 수도 있겠지만 사제가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 참 힘들다고 하겠습니다. 한 신자분이 제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싫은 소리,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으세요?” 저는 그분에게 대답하였습니다. “머리로는 싫은 소리, 충고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저의 마음과 감정은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는 저의 그런 마음을 알기에 섣불리 남에게도 충고나 조언하지 못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인은 더욱 겸손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종이 주인을 위해서 일하듯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영광은 주님께로 돌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서 갚아주신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지혜의 열매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너희도 분부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겸손하게 섬겨라.”라는 소제목이 달린 오늘 복음은(루카 17,7-10 참조) 조금 모질게 들립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의 관계를 주인과 종의 관계에 비유하십니다. 종은 모름지기 주인의 호의를 기대하기보다는 철저히 종으로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 15,15)라고 하신 예수님의 또 다른 말씀과는 대조를 이룹니다. 왜일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잘못된 전제를 바로잡으시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기본 전제의 오류’라는 것이 있습니다. 논리가 옳게 전개되지만 엉뚱한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경우에 자세히 살펴보면 기본 전제가 잘못된 경우가 많습니다.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만이 아니라 그들에게 영향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은 인과응보 사상에 깊이 젖어 있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켜서 하느님께 그에 맞는 보상을 받겠다는 것이지요. 크게 나무랄 만한 태도는 아닐 수 있지만,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크나큰 호의에 바탕을 둔 계약이라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어릴 적 세뱃돈을 많이 받아 어머니에게 맡긴 적이 있습니다. 며칠 뒤 그에게 돈을 달라고 하였더니 다 쓰고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울며 따졌더니 어머니는 “그래, 그러면 그동안 내가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재워 준 거 다 내놔!” 하셨습니다. 어린 저였지만 어머니가 그동안 키워 주신 은혜가 더 큰 것을 알기에 눈물을 닦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종’이라 하신 것에 섭섭해하기보다는 먼저 나에게 부어진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큰지 돌아보면 어떨까요?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7,7-10: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예수님은 주인과 종의 관계를 비유로 드시며, 종이 주인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당연하지 특별히 칭찬받을 일이 아니라고 하신다. 이는 곧,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때 그것을 자신의 공로로 삼아선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성 암브로시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한 모든 선행은 은총 덕분이다. 우리가 그것을 내세우려 한다면, 은총을 거부하고 자기 영광을 취하는 것이다.”(Expositio Evangelii secundum Lucam 8,31) 즉, 우리의 모든 선행은 하느님 은총의 열매이며, 우리는 그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10절)라고 말하라고 하신다. 이는 우리 자신을 무가치하다고 낮추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봉사가 본래 하느님께 대한 의무임을 고백하는 겸손의 태도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권고한다. “우리가 선을 행할 때, 그것을 빚 갚음으로 여기라. 은총을 얻기 위한 흥정이 아니라, 주님께 진 빚을 갚는 것임을 잊지 말라.”(Homiliae in Matthaeum 25) 따라서 참된 제자는 자신이 행한 것을 자랑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하느님께 돌리며, 더 큰 사랑과 봉사로 나아간다.
예수님 자신이야말로 이 말씀의 완전한 모범이시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필리 2,6-7)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종으로서 순종하시고,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내어주셨다.
교황 프란치스코도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교회의 진정한 힘은 권세가 아니라, 봉사이며, 자기 자신을 낮추어 형제의 발을 씻어 주는 사랑이다.”(104항 요지)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다음을 묻는다. 나는 봉사할 때, 은근히 인정받고 칭찬받기를 바라지 않는가? 내가 한 선행을 내 공로로 삼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봉사와 직무를 통해 그리스도의 겸손을 드러내고 있는가?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을 높여주는 태도이다. 우리가 맡은 일을 다하고도 “주님,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우리의 봉사는 오히려 하느님 앞에서 귀한 향기가 된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 곁에 나>
루카 17,7-10 (겸손하게 섬겨라)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당신 곁에 나>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당신 곁에 나
비록 없어도
홀로라도 당신 오롯하시니
당신 곁에 나
당신께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 곁에 나
없어서는 아니 되는 듯
이렇게 있게 하시니
당신 곁에 나
아무 것도 당신께
바라지 않으며
당신 곁에 나
있게 하신 당신께
기쁨이고 싶을 따름입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님께서는 충실한 신앙인들에게 크게 고마워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7-10)
1) 이 말씀은, 자신의 신앙생활을 하느님께 생색내지 말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내가 살기 위해서’, 즉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색낼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살고 싶은 사람이(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여기서 ‘종’이라는 표현은 겸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고, 그 이상의 특별한 의미는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탄생 예고를 들었을 때 성모님께서 응답 말씀에 ‘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경우와 비슷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 말씀은, ‘종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복종한다는 응답이 아니라, 마치 종이 주인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기꺼이’ 하느님 뜻에 순종하겠다는 응답입니다. <성모님 자신이 스스로 낮추신 것입니다.>
2)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라는 말씀은, 하느님이 고마워할 줄도 모르는 엄격하고 차가운 분이라는 뜻이 아니라, 신앙인의 겸손을 강조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충실한 신앙생활을 보시면서 크게 기뻐하시고, 크게 고마워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보면,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온 것을 크게 기뻐합니다.(루카 15,22-24) 아버지가 아들에게 고마워했다는 표현은 없지만, 크게 기뻐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작은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온 것에 대해서 크게 고마워하고 있음이 잘 보입니다. 바로 그런 아버지의 심정이 곧 하느님의 심정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3) 예수님 말씀에는, 우리가 받게 되는 구원과 생명은 신앙생활의 대가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자비와 은총이라는 가르침도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권리나 권한을 가지고서 요구하게 되는.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께 자비를 ‘간청’할 뿐입니다. 만일에 인간에게 무슨 권리나 권한이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 쪽에 무슨 의무가 있다는 것이 됩니다. 정말로 만일에 그렇게 하느님 쪽에 무슨 의무가 있다면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주님이 아닌 분이 되어버립니다.>
4) 들에서 일하다가 돌아온 종에게 다시 집안일을 시키는 주인의 모습도 겸손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일 뿐입니다. 앞의 12장을 보면 정반대인 ‘주님의 모습’을 묘사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5-37)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를보면, 바로 그렇게 시중을 들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요한 21,12-13)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작은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벌이라고 하인들에게 ‘지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아들 곁에 붙어 앉아서 빵과 고기를 집어 주면서 시중을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5) 10절의 ‘쓸모없는 종’이라는 말은, 실제로 우리가 쓸모없다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표현일 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칠삭둥이,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1코린 15,8-9)
그러나 우리는 그가 위대한 사도이며 선교사이며 순교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진짜로 ‘쓸모없는 종’은 위선자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들’입니다.(마태 23,4; 마태 25,30)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도, 사람들에게도, 그 자신의 구원에도 ‘아무런 쓸모가 없는 자들’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경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봉사와 희생을 할 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세상의 기준에 따르면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지배하고 내리누르며 무시하는 것이 낯설어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날은 신분 제도가 있던 시대와 달리 종과 주인이 구분되지 않지만, 오히려 돈과 권력과 지위 같은 가치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갑과 을을 나눕니다. 이러한 기준으로는 나보다 약한 사람을 아무렇게나 대하여도 상관없고, 자신의 욕구 불만이나 짓눌린 감정을 아무런 관련이 없는 힘없는 불특정 다수에게 분출하거나 화풀이하여도 괜찮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세상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 마르 10,45 참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도 그러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스승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와 봉사와 희생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인정받거나 좋은 평가를 얻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하거나 서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곧 겸손하게 섬기는 종의 자세면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와 봉사와 희생은 우리 자신을 향하여 있습니까? 아니면 하느님을 향하여 있습니까?
=====================
[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사람의 자세에 대한 설명을 위해서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과 주인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종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일을 하고 돌아와서도 주인의 식사를 위해서 허리에 띠를 띠고 시중을 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또 종이 그렇게 했다고 해서 주인이 고마워할 필요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마무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지금 예수님께서 예를 들으신 비유 말씀이 시간적으로 지역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그 뜻이 어려움 없이 전해집니다.
그런데 땅을 갈 든지, 양을 치던지, 일들을 하고 나면 지치고 힘들 텐데, 돌아와서 주인을 위해서 식사 시중을 드는 것이 쉽지는 않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물론 종이 주인을 위해서 일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래도 당시의 ‘종과 주인과의 관계가 너무 한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이 많으신 주님께서 왜 이렇게 표현하실까요. 그것은 우선 제자들에게 당부하는 말씀이십니다.
하느님 나라 선포를 위한 것은 당연한 것이지 선심 쓰는 마음이나 남에게 자기가 하는 일을 생색이 내지 말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온 힘을 다해 복음을 전하되 겸손한 종의 모습을 간직하라는 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어디 그렇습니까? 지금은 그런 표현이 들어 갔지만 한 때는 ‘자기 피알’시대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나발을 불고 알려서 자기의 행적을 알리는 것이지요. 세상의 생존경쟁의 법칙에서슨 그럴 수 있겠지만 적어도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며 말씀을 전하는 주님의 제자들은 그 반대의 모습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도 주님의 이런 가르침을 그대로 사도의 기본 바탕으로 삼고 있음을 알게 해줍니다. “사실은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내가 내 자유의사로 이 일을 한다면 나는 삯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한다면 나에게 직무가 맡겨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받는 삯은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것에 따른 나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입니다.”(1코린 9,16-18)
우리가 어디에서든 우리의 최선을 다해서 봉사하고 나서 주님께서 당부하신 말씀 대로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라고 말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일까요?
교회의 봉사자들이 삶에 새기고 새기는 주옥과 같은 말씀입니다. 특히 남에게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에게 해주시는 주님의 가르침이시지요. 어디에서든 또 어떤 일을 하든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사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겸손이라는 큰 그릇에 담겨 있으면 바라 보는 우리도 평화롭게 행복해집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금은 전쟁 중이라 갈 수 없지만, 이제까지 경험을 볼 때 성지순례 중의 최고는 단연 이스라엘입니다. 예수님과 관계된 성지를 돌아보면, 예수님께서 직접 제게 말씀하시는 것만 같습니다. 이 장소를 통해 주님을 더 뜨겁게 그리고 가깝게 느끼게 됩니다.
나자렛 거리를 돌아다니며 2,000년 전의 예수님 유년 시절을 떠올려 봅니다. 동네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며 장난도 치고 큰 소리로 웃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예수님을 다시 찾았을 때의 사건 이후부터 공생활 시작 전까지의 기록이 복음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완전히 우리와 똑같이 사셨기 때문입니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께 믿음을 보이지 못했던 것이 이해됩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 모습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아이와 다를 바 없었던 어린 예수님을 기억하고 있기에, 현재 보이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어렸을 때의 저는 ‘부수기 대장’ 소리를 들었습니다. 호기심이 많아서 무엇이든 뜯어보곤 했습니다. 문제는 머리가 나빠서 다시 조립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제 손만 다면 다 부서진다고 ‘부수기 대장’ 소리를 들었습니다. 또 장난도 많이 쳤고, 싸움도 했었습니다. 이런 저를 보고 누가 커서 신부가 될 것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과거를 통해 미래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지금을 통해서는 미래를 알 수 있을까요? 이 역시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섣부르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하느님의 일은 늘 뜻밖의 모습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향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쓸모없는 종의 비유 말씀을 하시면서, 겸손과 봉사에 관해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시대의 종은 주인의 소유물이었고, 그의 시간과 노동력은 온전히 주인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힘든 노동을 마치고 돌아왔다고 해서 쉴 수 있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주인의 식사를 준비하고 시중을 들어야 했습니다. 즉, 이 정도 했다고 어떤 보상을 기대하거나, 자기 공로를 내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신앙은 의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적 행위가 하느님께 무언가를 ‘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거래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만큼 했으니, 이만큼의 복을 주셔야 한다는 거래가 아니라, 늘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성실한 주님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
[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쓸모없는 종”이라는 고백은 우리가 무가치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받은 큰 은총에 비해 보답하는 것이 너무 작음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부모에게 받은 사랑이 너무 크기에 아무리 보답해도 모자라는 것을 알아차린 성숙한 자녀와 같습니다.
이웃 사랑은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입니다. 사람과 세상을 위한 이웃사랑을 우리가 죽도록 하여도 우리가 거저 받은 사랑에는 못 미칩니다. 아무리 많은 사랑을 하여도 받은 은총을 다 갚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 우리의 운명입니다.
거저 받은 은총으로 사는 ‘쓸모없는 종’인 우리는 ‘분부를 받은 대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 ‘분부받은’ 일을 합니다. ‘분부를 받은 대로’ 일하려면 먼저 우리는 순명하는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순명하는 마음을 품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주님께서 명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말씀에 귀 기울이고 품는 만큼 우리는 주님과 일치하게 됩니다.
자신에게만 귀를 기울이면 ‘쓸모가 있는 종’이 되려고 애씁니다. 자신의 가치를 높여 ‘쓸모 있는 종’이 되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쓸모 있는 종’의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사람과 세상, 심지어 주님까지도 이용하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과 일치된 ‘쓸모없는 종’은 세상에서는 사라지지만 주님 안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쓸모없는 종’이라는 겸손한 마음을 지닌 사람은 하늘의 가치를 품었기에 이 땅에서 이미 주님을 만나 하늘의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어진 섬김의 새로운 삶>
예수님께서는 어제 복음인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 사도들이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라고 말하자,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루카 17,6) 라고 하시면서, 믿음을 양적인 개념이 아니라 질적인 개념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지는 오늘 복음에서는 율법을 잘 지켜 공덕을 쌓아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겠다는 인과응보 사상과 공로주의에 젖어 있는 사도들에게 '종'의 비유를 통해, ‘겸손하게 섬겨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일하고 보수를 요구하는 품꾼과는 달리 주인의 분부대로 일을 마치고서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 여전히 '쓸모없는 종'일 뿐이라고 말하는 주인을 섬기는 겸손한 '종'에 비유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종'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그것은 우선 '분부 받은 대로'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상을 받으려고 주인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종'으로 삼아주신 주님께 대한 헌신일 뿐입니다. 사실 '주님의 종'은 <이사야서>에서는 말하고 있는 ‘주님의 종의 첫 번째 노래’에서 "그는 내가 붙들어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이사 42,1)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에게 분부가 내려지고 사명이 주어집니다. 그를 신뢰하여 해야 할 일을 맡기는 까닭입니다.
그러니 '종'은 보상을 바래서가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여 분부 받은 일을 수행할 뿐입니다. 따라서 먼저 해야 할 일은 '분부 받은 대로 다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쓸모없는 종'이란 무익하고 불필요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자신의 봉사가 전혀 보상이나 사례를 받을 가치가 없다’는 의미의 겸손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한 일이 자신의 공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주님께 대한 감사요 보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랑하려거든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분부를 주신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자랑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신원을 정확하게 알고, 주인의 뜻을 따라 분부대로 살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어진 섬김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곧 '주님의 종'으로서 ‘자유로이 그리스도와 함께 주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며 의로움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아멘.
------------
<오늘의 말 · 샘 기도>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그렇습니다, 주님!
분부 받은 일이 바로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섬기는 일이 바로 그 일입니다.
제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분부하신 대로 섬기게 하소서!
혹 그대로 하였다고 해서 교만하지도 않게 하소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혹 다 하지 못하였다 해도, 언제나 감사하게 하소서!
분부해 주심에 감사하고, 섬길 수 있게 해주심에 감사하게 하소서!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최후의 심판>
“심판의 잣대는 구체적 사랑의 실천”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내 입으로 그 진실하심을 대대에 전하리라."(시편 89,2)
오늘 화답송 후렴입니다. 오늘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각별한 인연 때문에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의 기념일이 아닌 축일미사를 봉헌합니다. 성 베네딕도 이전 이미 서방의 수도승이자 주교였습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순교자가 아니면서 성인의 월계관을 쓴 최초의 인물이자 갈리아의 사도라 불릴 만큼 특히 유럽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수도승 주교였습니다. 성인은 프랑스의 수호성인이자 군인, 재봉사, 가난한 이, 가축과 목동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성인의 삶을 엿볼수 있는 것은 그의 제자 술피치우스 세베루스가 쓴 <마르티노의 생애> 덕분입니다. 그 전에 성 아티나시우스는 <안토니오의 전기>를,
또 후에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베네딕도의 전기>를 썼습니다. 성 마르티노는 로마제국의 땅이었던 헝가리 사바리아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절인 316년에 태어납니다.
성 마르티노는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15세에 군인이 되었고 그가 프랑스의 아미앵 근처에 주둔하던중 어느 추운 겨울 밤, 전설적 일화같은 사건이 일어납니다. 말을 타고 가던 마르티노는 추위에 떠는 초라한 행색의 거지를 보았을 때 그는 지체없이 칼로 망토를 잘라 반을 거지에게 주고 반은 자기 몸에 걸칩니다. 그가 가진 것이라곤 긴 칼과 망토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날밤 꿈에 예수님께서 반쪽 망토를 입고 나타나 마르티노에게 말합니다.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예비신자인 마르티노가 이 망토로 나를 입혀줬다.”
이 주님과의 결정적 신비로운 만남 직후, 그는 “날아가듯 달려가” 세례를 받습니다. 이 전설같은 사건과 함께 그는 세상의 군인이 아닌 그리스도의 군인이 되는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세상의 군인이었다가 그리스도의 군인이 된 경우는 성 빠코미오, 성 프란치스코, 성 이냐시오 로욜라가 있습니다.
마르티노는 당시 프랑스 푸아티에 교구의 주교였던 높은 영성과 지성의 소유자인 성 힐라리오를 만나 사제품을 받고 수도생활을 시작하니 프랑스에서는 최초의 수도원이 됩니다. 스승인 힐라리오가 세상을 떠나자 투르의 주민들의 간청에 따라 마르티노는 투르의 주교가 됩니다. 거룩한 수도승이자 사목자로 지칠줄 모르는 열정으로 활약했기에 그의 명성은 프랑스를 넘어 갈리아까지 널리 알려집니다.
그는 주교관 밖에 마련한 골방에서 다른 80명 제자 수도승들과 함께 기도와 사목에 전념합니다. 생애 마지막 임종어도 감동적입니다. 나이가 들고 죽음이 다가와도 그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간청하자 기도하니 바로 임종어가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 당신의 백성이 여전히 저를 필요로 한다면. 저는 그 일을 거부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냥 놔두시오. 땅보다 하늘을 더 바라보고 싶습니다. 이제 여행을 떠나려는 순간, 이 내 영혼은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성인은 397년 11월8일 81세의 나이로 칸드에서 사망하였고, 11월11일 오늘 투르에 묻힙니다. 프랑스에서 그에 대한 숭배는 그에게 봉헌된 500개의 마을과 4000개의 교구교회에서 잘 드러나며 그의 무덤은 주요 순례지가 되었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순례자들의 유명한 기착지이기도 했습니다.
위령성월, 성 마르티노의 거룩한 죽음도 우리에게는 귀한 가르침이 됩니다. 문득 4세기 이집트 사망의 한 원로 수도승의 죽음에 대한 일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임종 순간 제자들이 울자 갑자기 눈을 뜨고 세 번 크게 웃습니다. 제자들이 그 이유를 묻자,
“먼저 나는 그대들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기에 웃었소. 두 번째는 그대들 가운데 아무도 준비된 사람이 없기에 웃었소. 마지막으로 내가 세상의 노고를 벗고 영원한 안식을 얻을 것이기에 기뻐서 웃었소.”
이 말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간 이들에게 죽음은 불청객이 아니라 오히려 친구요 벗이었음을 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구원의 기쁜 소식은 왜 주님께 치유받고 해방되어 자유로워져야 하는 인간인지, 바로 무지한 인간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무지의 고질적 질병에서 치유해방되어 온전한 삶을 누리는 길은 주님과의 만남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이사야서는 예수님의 사명을 요약한 것으로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시 선포된 내용(루카 4,18-19)입니다.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의 은혜의 때,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 시온에서 슬퍼하는 이들에게 재 대신 화관을 슬픔 대신 기쁨을 맥 풀린 넋 대신 축제의 옷을 주게 하셨다.”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 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무지로부터 치유, 해방,구원되어 온전한 참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최후의 심판 잣대도 온갖 종교적 행위나 신심활동이 아닌 바로 구체적 사랑의 실천임을 깨닫습니다. 종파와 국적, 인종, 문화, 언어를 초월하여 모든 인류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른쪽 구원된 사람들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1.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2.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3.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 들였다.
4.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5.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6.내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6개 항목중 몇이나 지켰는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 마르티노는 4번 항복에 합격했고, 바로 오늘 복음이 인용된 이유입니다. 바로 이런 구체적 사랑의 실천이 최후심판의 잣대가 됩니다. 궁극의 최후심판에 앞서 날마다 점검해야할 사랑의 실천 사항입니다. 예수님은 인류 모두가 종교와 무관하게 당신의 형제들임을 천명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바로 이 말씀안에 환대의 진리가, 환대의 사랑이 환히 드러납니다. 주님을 맞이하듯 형제들을 맞이하는 환대는 바로 이 말씀에 근거합니다. 모두가 주님의 형제들이자 나의 형제들이요 주님의 현존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에 대한 주님의 축복선언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의 최후심판에 앞서 주님의 축복을 앞당겨 받는 복된 시간입니다. 늘 깨어 주님 앞에서 주님을 만나는 구체적 사랑의 실천에 소홀함이 없도록 주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내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34)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어리석은 눈과 지혜로운 눈>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과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오늘 지혜서는 어리석은 사람의 눈을 얘기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어리석은 사람의 눈과 다른 지혜로운 사람의 눈도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리석은 눈과 지혜로운 눈을 얘기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는 공통으로 어리석음과 지혜를 얘기하면서 이것들이 보는 것 곧 관상과 관련이 있음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힌두교와 불교도 바로 혜안(Eye of Wisdom)을 얘기하는데 혜안은 육신의 두 눈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다 봅니다. 꿰뚫어 보고, 너머를 보고, 올려다보고, 내다봅니다.
지혜는 먼저 죽음 너머를 보고 불멸을 봅니다.“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그런데 지혜가 죽음 너머 인간 불멸을 보는 것은 불멸의 시작인 하느님의 창조를 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만 보면 불멸을 볼 수 없습니다. 인간은 죽음을 넘을 수가 없고 그래서 죽음 너머가 없으며 죽음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눈은 하느님까지 보고, 어리석은 눈은 인간만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보는 것은 죽음과 불멸뿐이 아닙니다. 고통과 시련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리석은 눈은 고통과 시련을 인간이 당할 때 그것만 보고 그것밖에는 보지 못하는데 그것 밖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고통만 보는 어리석은 눈은 자기 고통 밖에
그것을 지켜보시는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보지 못하고 밖에서 같이 아파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리석은 눈은 위를 올려다보지 못하고,
밖을 내다보지 못하며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눈이고, 오로지 그것만 보고 그것밖에는 보지 못하는 눈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롭다면 한번 눈을 들어 위를 올려다볼 것입니다. 그리고 눈을 뻗쳐 밖도 보고 미래도 내다볼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렇게 보는 것은 다 지혜가 하느님을 관상하기 때문임을 지혜서를 통해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바람이 불고
때가 되면
가을잎은
저절로
떨어집니다.
떨어지는
단풍잎은
왜 자신을
밑으로
떨어뜨렸냐고
묻지 않습니다.
신앙인의 길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드러내는
여정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먼저 바라봅니다.
쓸모없음은
무가치함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전적으로 의탁하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순수한
봉사의 자세를
회복하라는
초대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충실히
걸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신 일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우리들입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을
비울 때
충만해지는
우리들 삶입니다.
억지로 성과를
만들려 하지 않고,
하느님께 맡기며
자연스럽게
흐르는 삶을
살아갑시다.
하느님께 맡기고
흘러가는 삶이
평화와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삶입니다.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의 공로를
내세울 때,
우리는
스스로를
속박합니다.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낙엽이 또 하나
조용히 땅으로
내려앉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