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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3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전 수요일]
요한 1,29-34
내가 어쩔 수 없을 때 착한 사람을 가려내는 방식
린제이 로한(Lindsay Lohan)은 나중에 인생의 개인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경력 궤적이 크게
영향을 받은 아역 스타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사랑받는 아역배우에서 법적, 개인적 문제에
직면하기까지의 그녀의 여정은 언론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한은 아동 모델이자 청순한 아역배우로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명성을 얻었습니다.
출연하는 영화마다 모두 큰 성공을 거두었고 상당한 팬층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성인으로 전환하면서 로한은 연기 이외의 이유로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명성, 압박감, 성인 역할로의 전환 등 아역 스타와 관련된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음주 운전(DUI), 마약 소지, 절도 혐의로 체포되는 등 표면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사건은 종종 법원 출두, 재활 기간 및 보호관찰 기간으로 이어졌습니다.
심지어 임신 상태로 음주와 흡연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녀가 착한 이미지를 가졌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대본에 그렇게 쓰여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본래 착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착해지는 방법은 착한 누군가를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혼자 힘만으로는 전혀 착하지 않고 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착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해도 어려움이 닥치면 그 연극을 멈추고 본색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피조물이 혼자서 착해질 수 없는 이유는 언제는 ‘생존’ 문제 때문입니다.
자존심에 기대고 살며 그것이 무너지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착해지면 죽는 것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그러니 우리 등 뒤에 나를 사랑하는 죽음까지 이기는 엄청난 능력이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합니다.
그가 나의 생존을 책임져주지 않는 한 사실 착한 연극도 힘듭니다.
평화가 없으면 착함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착함도 결국 아버지의 착하심을 드러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자신을 죽이고 아버지의 뜻을 드러냄으로써 본인도 착하게 되신 것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착하신 그리스도를 드러냄으로써 착해졌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어린이들이 어떻게 부모와 자기가 믿는 신을 드러내는지, 그리고 그 모습이 얼마나 착하게
보이는지 tvN ‘프리한 19’에 나온 두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죽음의 문턱 앞에 다다른 13살 소년, 매티. 소년은 엄마에게 재차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충분히 잘해온 거죠?” 13년이라는 짧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노래하며 하늘나라로 간 소년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들려드리겠습니다.
세 살 때부터 시와 짧은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며 천재 시인으로 불린 매티는 안타깝게도 자신보다 먼저 태어난 형과 누나는 모든 신체 기능이 서서히 마비되는 선천성 희귀병인 근육성 이영양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더 안타까운 점은요, 어머니와 매티 자신도 똑같은 병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매티가 쓰는 글은 결코 암울하거나 나약하지 않았습니다.
“아침이면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나는 살아있습니다. 나는 숨을 쉽니다.
진짜 살아있는 아이입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삶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자신을 시로 써낸 것 지난 2000년 아이들에게 희망 메시지와 함께 발간한 첫 시집 하트송은 미국 내에서만 100만 부가 넘게 팔렸습니다.
매트가 글을 쓰는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바로 희망이 있습니다.
매티가 출연하는 토크쇼 방송에서 이런 인터뷰를 합니다.
“때때로 저는 물어요. 왜 나인가? 왜 난 그렇게 힘든 삶을 살아야 했나?
그리고 그때 다시 생각합니다. 왜 내가 아니어야 할까?”
진짜 천사가 아니고선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러나 매티는 처음부터 죽음 앞에서도 다른 이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을까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부모와 신의 선함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착한 것입니다.
또 9살 민규의 이야기.
부산광역시 수영구에 살고 있는 알콩달콩 화목한 여섯 가족입니다.
생글생글 맑은 얼굴에 똘망똘망한 눈을 가진 9살 민규는요 네 남매 중 둘째로, 유난히 정이 많고 의젓해서 “엄마 힘들지?” 하며 늘 엄마 곁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효자였습니다.
그런데 2014년 1월 어느 평범하던 겨울 민규에게 갑자기 펄펄 끓는 고열 증상이 일어났습니다.
아이의 검사를 마치고 민규의 어머니 허현아 씨는 의사에게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뇌염 바이러스 감염입니다.”
너무나 건강했던 아이였기에 도무지 현실이라고 믿을 수 없는 상황 하지만 민규는 곧바로 중환자실로 옮겨졌습니다.
부모라면 아이에게 희망을 걸 것입니다.
그러나 민규도 그것을 바랄 것이라 여겨 부모는 아이의 장기를 기증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렇게 9살 민규는 난치병 환자 네 명에게 새 생명을 선물하게 되었습니다.
착함 안에 착하신 분을 드러내기 위한 십자가가 없다면 그것은 연극입니다.
민규처럼 부모의 착함에 자신을 맡겨 부모의 선함이 자신을 통해 드러나게 하는 것이 진짜 착함입니다.
본성상 인간은 스스로 착할 수 없습니다.
나의 본성을 죽이고 내 등 뒤의 나보다 더 크신 분의 착함을 드러낼 때만 착할 수 있습니다.
착함이 부활이라면 십자가는 기본입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저도 조금이나마 착해지려 하고 또 다른 사람을 굳이 판단해야 할 때도 그렇게 판단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3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전 수요일]
요한 1,29-34
나는 그분을 위해 기쁘게 무대 뒤로 물러섭니다. 형체도 없이 사라집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다가오시자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위 문장에서 우리는 특별한 단어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고대 그리스어로 코스모스(Cosmos)입니다.
‘세상’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질서’라는 의미도 지닙니다.
요한 복음에서 코스모스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인간의 극단적 자기 중심주의,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의 그릇된 질서입니다.
위의 세상이 아니라 아래 세상의 질서입니다.
그 세상은 인간의 그릇된 이기심이 지배하는 세상의 질서입니다.
결국 극복되어야 할 세상의 질서입니다.
이런 세상을 위해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때가 이르자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가리키며 외칩니다.
“세상이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세상의 죄’는 결국 우리 인간의 이기심이며 자만심입니다.
세상의 죄는 인간 각자의 개인적인 죄를 넘어서는 죄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고 그분을 적대시하는 세상의 죄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인류, 상처입은 인간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의 어린양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어린양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다는데, ‘없애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치워 버리다.’는 일차적인 의미를 지니기도 하지만, 보다 깊은 뜻은 ‘짊어지다.’입니다.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결국 우리 인간 각자의 죄, 세상의 죄, 집단적이며 구조적인 죄를 당신 어깨 위에 짊어지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 양”이라 외치며, 머지않아 우리들의 모든 죄를 자신에게 짊어진 후, 묵묵히 수난과 십자가 죽음의 길을 걸어갈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암시하고 예언한 것입니다.
주인공이신 예수님, 세상을 구원하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보다 확연히 드러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정말 눈물겹습니다.
그분을 위해 자신은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하나의 불쏘시개가 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더 이상 나 자신의 영예나 체면, 백성들의 관심과 박수갈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아름다운 한 송이 꽃으로 활짝 피어나도록, 한 줌 재로 산화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정녕 감동적입니다.
요즘 또 다시 교회 인사이동 시즌입니다.
다른 임지로 떠나가시면서 걱정이 많은 분들도 계시겠지요.
내가 떠나가면 여기 이곳은 어떻게 될까?
그간 공들였던 탑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내가 좀 더 남아있으면 더 좋지 않을까?
돌아보니 저도 젊은 시절 보따리를 쌀 때 마다 걱정이 참 많았습니다.
내가 떠나면 나만 바라보던 저 아이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운데, 내가 가버리면 이 시설이 과연 제대로 운영이나 될 수 있을까?
저 많은 후원자들 다 떠나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몇년 뒤에 슬쩍 그 소임지를 가봤더니 천만의 말씀입니다.
나 없이도 잘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나 없는데도 다들 환한 얼굴로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공연히 부질없는 걱정을 했습니다.
내가 떠나가야 더 잘 됩니다.
내가 떠나가면 내 뒤에 오실 그분께서 더 큰 사랑으로, 더 활기찬 모습으로 아름답게 모든 것을 이어갈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큰 행복, 큰 충족감을 안고 무대 뒤로 사라집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공현 대축일 전 수요일 강론>
(2024. 1. 3. 수)(요한 1,29-34)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1,29ㄴ-31).”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2ㄴ-34).”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과월절의 어린양과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는 어린양이 합해진 상징입니다.
즉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집트를 탈출할 때 어린양이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해서 죽은 것과, 이사야서 53장의 어린양이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는 것을 합해서,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을(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뒤집어쓰고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이라는 말은, 인간 세상에서 ‘죄 자체’를 없애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인들을(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죄인들 대신에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덕분에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고, 구원에 도달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은 ‘바로 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에, ‘세상의 죄’는 일차적으로 ‘나의 죄’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것은, ‘죄인인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라는 말과 ‘세상’이라는 말 뒤에 숨어 있으면서, “남들은 다 죄인이어도 나는 죄인이 아니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메시아 예수님이 필요 없다고, 예수님이 없어도 자신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이 바로 바리사이들 같은 위선자들의 생각입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라는 말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메시아이신 분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그것을 몰랐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것을 알려 주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메시아이신 분이라는 것은, 인간적인 지식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입니다.
무슨 연구나 공부를 통해서 얻게 되는 지식이 아니라, 또 어떤 수련이나 수행을 통해서 도달하는 깨달음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구원의 진리'입니다.
<엘리사벳 집안과 성모님 집안은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은 어린 시절부터 개인적으로는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러나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는, 하느님께서 직접 알려 주시기 전까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라는 말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루카 10,22).”
오직 ‘믿음’으로만 하느님과 예수님을 알 수 있고,
하느님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경우에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서,
또 그 계시를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우리에게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있고, 또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증언도 있고, 그분들의 증언은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내려진 하느님의 계시와 같습니다.
우리는 그 증언들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간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에는 ‘믿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믿음 없이 성경을 읽는 사람에게는, 성경은 재미없는 옛날이야기책이 될 뿐입니다.
신앙생활은, 지식을 쌓기 위해서 공부하는 생활이 아니고, 또 어떤 깨달음을 얻으려고 수행하는 생활도 아니고,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입니다.
<새해를 맞이해서, 새로운 마음으로 성경 공부와 성경 읽기를 시작하는 이들이 많이 있을 것 같은데, ‘성경 공부’ 라고 표현하든지 ‘성경 읽기’ 라고 표현하든지 간에, 지식을 쌓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살기 위해서, 또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또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려고, 성경을 읽는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라는 증언은,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이라는 증언이고, 이 말은 곧 “예수님은 메시아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는 말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뒤의 3장에서 요한복음서 저자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요한 3,34-36).”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