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반대하다
한국전쟁(韓國戰爭) 처음 1년을 논(論)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년 1월 26일~1964년 4월 5일)입니다.
UN의 권한(權限)을 위임(委任)받아 침략군 저지에 애썼던 그의 노고(勞苦) 덕분에 대한민국은 위기(危機)의 순간(瞬間)을 극복(克復)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일거(一去)에 전세(戰勢)를 역전(逆戰)시킨 인천 상륙작전(仁川上陸作戰)은 그의 명성(名聲)을 빛나게 만들었습니다.
오로지 그의 집념(執念),
나쁘게 말하자면 고집(固執)이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못했을 작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재현 행사 모습처럼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를 빼놓고 이야기하기 힘듭니다
일단 그를 제외(除外)한 모두가 찬성(贊成)하지 않았습니다.
미 합참(美合參)은 물론 맥아더의 직계 수하(直系手下)라 할 수 있는 극동군 참모진(極東軍參謀陳)조차도 조수간만(潮汐干滿)의 차(差)가 너무 커서 극히 제한(制限)된 상륙 시간(上陸時間), 현 낙동강 방어선(洛東江防禦線)으로부터 너무 먼 거리, 장비(裝備) 및 병력(兵力)의 부족(不足) 등의 이유를 들어 반대(反對)했습니다.
충분히 타당(他黨)한 반론(反論)이었습니다.
그러나 계급(階級)이나 경력(經力)으로 미국에서 맥아더의 의지(意志)를 꺾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1948년에 촬영된 인천항 내항 전경
맥아더는 지휘(指揮)에 바빠 워싱턴까지 가서 보고(報告)할 수 없다는 이유(理由)로 트루먼(Harry S. Truman, 1884년 5월 8일~1972년 12월 26일)을 본토(本土)와 일본의 중간인 웨이크(Wake)섬까지 오도록 만든 인물(人物)입니다.
제1차 대전 당시 일개 중대장(中隊長)에 불과했던 대통령의 군(軍) 경력을 은연중(隱然中) 깔보고 있었으니 군부(軍府)의 수장(守長)이지만 까마득한 후배(後背)였던 브래들리(Omar Nelson Bradley, 1893년 2월 12일~1981년 4월 8일) 합참의장의 말이 통할 리 없었습니다.
그 정도로 안하무인(眼下無人)이었기에 모두가 반대한 작전을 실행(實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장 두려웠던 장해물
맥아더가 전략적(戰略的) 이유를 들어 인천을 상륙 목표로 선택하였을 때부터 많은 반대를 불러왔던 대표적(代表的)인 이유가 서해(西海)바다의 엄청난 조수간만 차였습니다.
특히 인천의 경우는 만조(晩潮)와 간조(干潮)의 수면 차이(水面差異)가 평균 8m에 이를 만큼 세계적(世界的)으로도 보기 드문 해안 환경(海岸環經)입니다.
이 때문에 썰물 때는 해안선(海岸線)이 300~500여 m나 빠져나갈 정도인데, 이런 엄청난 밀물과 썰물이 하루에 두 차례 반복(反復)됩니다.
↑우리나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서해안의 썰물 모습
사실 인천은 서울에 가깝다는 이유만 없다면 항구(港口)로써의 입지조건(立地條件)이 결코 좋은 곳이 아닙니다. 지금도 거대한 갑문(閘門)으로 항상 내항(內航)의 수면(水面)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有支)하기 때문에 대형 선박(大型船舶)의 입출항(入出港)이 가능할 정도인데,
하물며 당시에 상륙부대가 항구로 얌전히 진입(進入)하는 것도 아니고 적(敵)의 방어망을 뚫고 대규모로 상륙한다는 것은 이런 자연적(自然的)인 악조건(惡條件)도 극복(克復)하여야 함을 의미(意味)하였습니다.
↑인천은 갑문을 갖춰야 할 만큼 항구로써의 입지 조건이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조수간만(潮汐干滿)의 차이(差異)가 크다는 점이 상륙작전(上陸作戰)을 저해(沮害)하는 절대 요소(要所)는 아닙니다.
서해(西海)바다에서 수영(水泳)해 본 사람들은 잘 아는 사실이지만 썰물 때라고 수영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물이 빠져나간 해안선(海岸線)까지 멀리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다시 말해 썰물 때 상륙작전이 벌어진다면 이론적(理論的)으로 목표(目標)로 하였던 해안두보(海岸頭堡, bridgehead, bridge-head) 지점까지 최대 몇 백 m 정도만 진격(進擊)을 더 하면 됩니다.
↑썰물이라고 상륙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인천 앞바다는 물이 빠지면 엄청난 갯벌로 바뀐다는 점입니다.
만리포(萬里浦)처럼 물이 빠져도 단단한 모래밭이면 작전을 펼치기 수월하지만 인천처럼 썰물 때 드러난 갯벌에 상륙군을 내보낸다면 한마디로 사형장(死刑場)으로 아군(我軍)을 밀어 넣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갯벌에 빠져 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제대로 움직일 수 없고 이 점은 훈련을 많이 받은 특수부대(特殊部隊)라 하더라도 예외(例外)가 아닙니다.
↑갯벌에 빠져 허우적대는 장면으로 유명하였던 영국 코만도의 상륙훈련 모습, 만일 전시에 저런 장면이 연출된다면 해변은 사형장이 됩니다
더구나 서해안(西海岸) 갯벌은 세계적 습지(濕地)에 속할 만큼 엄청난 규모여서 썰물 때 드러난 갯벌 자체(自體)가 상륙군(上陸軍)에게는 최대(最大)의 장벽(障壁)입니다.
만일 상륙군이 배에서 내려 전진(前進)하다가 갯벌에 빠져 전진이 돈좌(頓挫)된다면 그것은 적에게 손쉬운 사격 목표(射擊目標)밖에 되지 않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천상륙작전 당시 가장 큰 장애물(障碍物)은 조수간만의 차가 아니라 갯벌을 피할 수 있는 밀물 때에만 공격을 하여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1948년 촬영 된 썰물 때 드러난 인천항 일대의 엄청난 갯벌, 태평양전쟁으로 건설이 중단되었던 사진 속 도크는 1970년대 들어 완공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아무리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였어도 부대가 상륙할 수 있는 시간이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전초부대(前哨部隊)가 안전한 해안두보(海岸頭堡)를 확보(確保)하면 다음부대가 그곳을 통해 지체(遲滯) 없이 후속 상륙(後續上陸)하여 돌파구(突破口)를 넓혀가는 것이 일반적(一般的)인데 인천은 그럴 수 없는 구조(構造)입니다.
제한(制限) 된 시간이 지나면 다음 밀물 때까지 먼저 상륙한 선봉대(先鋒隊)는 연결(連結)이 끊어지며 일단 고립(孤立)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토에 갈 수 없다는 맥아더를 만나러 웨이크 섬에 도착한 투르먼
그가 상륙작전을 구상(構想)한 것은 전쟁 발발 직후(戰爭勃發直後)인 6월 29일 한강 방어선 시찰(韓江防禦線視察) 당시였는데, 이때만 해도 인천을 상륙지점으로 선택(選擇)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당장 북괴군(北傀軍)의 남진(南進)을 막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보급로(補給路)와 후방(後方)을 차단(遮斷)하여 일거에 적을 섬멸(殲滅)하려는 대담한 작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명령을 받은 미 극동사령부는 작전 수립에 들어갔는데 이때 인천은 여러 후보지(候補地) 중 하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