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오늘은 백용성조사 탄생 156주년을 기념해 학술 토론회가 조계사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열렸습니다.
아침 7시, 스님은 평화재단에서 북한 전문가들과 함께 남북 관계 개선 현황에 대해 의논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를 비롯해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남북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긴 시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후 평화재단을 찾아온 손님과 미팅을 한 후 12시 30분에 기념 토론회가 열리는 조계사 전통문화예술 공연장으로 향했습니다.
토론회를 시작하기 전 30분 동안 1층 카페에서 발표자인 조명제 교수님, 조성택 교수님, 그리고 사회를 맡은 조민 박사님과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오늘 토론회 주제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특히 용성조사의 활동이 지금까지 세상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스님은 그 이유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습니다.
“제가 처음 서울에 올라와서 대학생 불교연합회 회원들에게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두 부류의 그룹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회참여에는 관심 없는 순수 불교를 주장하는 그룹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회 참여를 강조하는 참여 불교를 하는 그룹이었습니다. 그때는 참여불교를 한다고 하지만 불교는 그냥 신앙이고 사회 운동은 전부 사회과학 서적을 가르치는 방식으로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두 그룹을 앉혀 놓고 이렇게 문제 제기를 했습니다.
‘부처님은 인도 사회 안에서 사회 변화를 위해 아주 개혁적인 삶을 사셨다. 그래서 불교만 공부해도 사회과학을 공부한 것 이상으로 사회의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계승한 전통 사회 참여적인 요소는 불교가 기득권화되면서 사라져 버렸다. 실천적인 행위가 없는 관념적인 학문으로 변해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회 실천적인 가르침이다.’
이렇게 대학생들에게 사회 참여는 하되 불교의 가치관 위에서 출발하자고 제안을 했고, 여기에 감동을 받았던 일부 학생들이 나중에 정토회가 출발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용성조사님도 당시에 그랬습니다. 서구의 가치관을 맹목적으로 따라간 게 아니라 정통의 가르침을 계승하되 사회적인 변화를 살펴보면서 실천하신 분입니다. 당시에는 혁명적인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독립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불교 안에 수많은 제자들을 거느린 고승이었습니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면서부터 대부분의 제자들이 일제와 타협을 해버리고 극소수만 스승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그 후 수많은 제자들이 용성스님을 승려로서는 추앙했지만, 사회 실천적인 면은 아무도 공론화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사회 실천을 이야기하는 순간 ‘그럼 너는 그때 뭐 했냐’ 하는 문제 제기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용성조사님의 실제 활동이 불교 안에 잘 알려질 수 없었던 이유입니다.”
코로나19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 보니 토론회를 시작할 시간이 되어 함께 조계사 전통문화공연장으로 이동했습니다.
당초 백용성조사 열반 80주년을 기념하여 3월 17일 개최로 기획했던 이 행사는 코로나19의 발병과 확산으로 두 차례 연기되었다가 비로소 오늘 열리게 되었습니다. 좋은 취지의 행사가 열리지 못하게 될까 봐 노심초사했던 스텝들은 기쁜 마음으로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원래는 많은 청중이 자리한 가운데 큰 박수를 받으며 발표자들이 등장해야 하는데 카메라 3대가 청중의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오늘 토론회는 영상으로 편집하여 평화재단 홈페이지에 공개하는 방식으로 청중과 만날 예정입니다.
이 행사를 후원한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스님의 영상 메시지로 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조계종 포교원장 지홍스님의 축사가 있었습니다.
토론에 앞서 스님이 무대 위로 올라와 인사말을 했습니다. 토론회를 열게 된 취지를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사회 실천적으로 용성조사가 가진 문제의식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것입니다. 둘째, 다시 되찾은 나라가 가야 할 길은 대한제국의 부흥이 아니라 민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나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다는 것은 외세에 대한 자주의식이라면, 민이 주인이 된다는 것은 반봉건 민주공화제를 실현하려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3.1독립선언을 할 때, 대한제국 부흥을 일으키자 하는 것을 대한민국 수립운동이 되도록 향도하고, 상해 임시정부의 이름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토론회는 이 분의 삶이 좀 더 깊이 있게 연구가 되어서 한국불교와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큰 교훈이 되고 빛이 되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마련되었습니다. 오늘 조명제 교수님과 조성태 교수님, 두 분의 발표가 그 길을 제시하는 하나의 방향이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바쁜 가운데도 이렇게 연구논문을 써주시고, 여기까지 오셔서 발표해주셔서 깊은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이어서 조민 박사님의 사회로 본격적인 토론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조명제 교수님이 ‘용성진종의 불교 개혁과 불교사적 의의’를 주제로 발표했습니다. 특히 교수님은 오늘날에도 비구 중심으로 운영되는 불교 교단과 비교하며 용성조사가 이미 100년 전에 여성들을 대상으로 선원을 연 것에 대해 매우 높게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용성조사의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실천적 측면은 높이 평가했습니다.
“선사를 두 가지로 나누면 학도가 있고, 행도가 있습니다. 용성은 평생 친일을 했다거나 자기 이익을 챙기지 않았습니다. 글과 말로 남기지 않더라도 행을 어떻게 했는가라는 행도의 측면에서 고난스러운 시대에 하나의 오점도 없이 평생을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높이 평가받아야 합니다."
이어서 조성택 교수님이 ‘근대 한국불교에서 용성 선사의 역할과 불교사적 의의’를 주제로 발표했습니다.
스님은 두 분의 발표를 듣고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네. 두 분 교수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한국 불교계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이렇게 객관적으로, 또 비판적으로 문제 제기를 해주셔서 오히려 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조명제 교수님이 비판적 시각에서 이야기하겠다고 양해를 구하셨는데, 이 자리는 신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아니고 학문을 연구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양해를 안 구하시고 그냥 마음껏 비판하셔도 됩니다. 다음에 말씀하실 때도 마음 놓고 편하게 얘기해 주시길 바랍니다. (웃음)
조성택 교수님은 새로운 문제 제기를 잘해주신 것 같아요. 인류 역사는 왕이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 민이 중심이 되는 사회로 변해 왔는데, 서구 문명이 그 길을 먼저 걸었을 뿐이지 서구 문명 자체가 민주, 인권, 여성,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서구 문명도 봉건 시대에는 여성을 차별하고, 민중을 노예로 취급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인도의 문제점을 보면서 힌두교를 봉건적인 사상으로 여기고, 중동의 문제점을 보면서 이슬람교를 봉건적인 사상으로 보는 것은 잘못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회가 아직 봉건적 유산에서 못 벗어나다 보니까 그들의 종교마저도 그 틀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지 그 종교 자체가 봉건적이라고 봐서는 안 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구한말 선각자들의 입장에서는 많은 헷갈림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봉건적 질서를 극복해야 했기 때문에 서구가 그것을 앞서 극복한 것에 대해 희망을 갖는 요소가 있었고, 반대로 봉건을 극복한 시민 중심의 서구 사회가 제국주의로 변해서 우리를 억압하는 것에 대해서는 저항을 해야 하는 요소도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국주의에 저항한다고 서구를 배척하다 보면 봉건적 가치를 옹호하기가 쉽고, 민주적 가치를 존중한다고 서구 문명을 수용하다 보면 제국주의를 옹호하기가 쉬웠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구한말 식민지 조선에서 살아가는 지식인들이 범한 오류가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초기에는 일본의 근대화를 받아들이자는 개화파로 나섰다가 나중에 조선이 일본 식민지가 되자 결국 친일세력이 되어버린다든지, 독립운동에 나섰다가 나중에는 친일을 하게 된다든지, 이런 일들은 개인의 특별한 오류라기보다는 이런 시대 상황의 이중적 구조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고민을 교수님께서 잘 지적해주신 것 같아요.
간디가 인도의 봉건적 제도는 거부하고 민족주의는 받아들이고, 영국의 식민지주의는 반대하고 민주주의는 받아들이면서, 인도의 독립을 추구했다는 점은 좋은 사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근대와 전통이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묘하게 융화가 될 때 성공적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용성조사를 다시 평가하는 좋은 관점을 제기해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두 박수)
이어서 학자들의 연구에 도움이 될 수 있게 용성조사가 민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된 그 배경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러면 용성조사는 서구의 근대 교육을 전혀 안 받고, 일본 유학도 안 했는데, 어떻게 그런 민주의식을 가졌을까 의문이 들 겁니다. 왜냐하면 어떤 선사도 그런 의식을 가진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식을 갖은 경우는 일본 유학을 갔거나, 서구의 근대 교육을 받았던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이것은 용성조사가 가졌던 독특한 삶의 환경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용성조사가 모셨던 스승이 바로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 선생과 인연이 깊은 혜월선사였기 때문입니다. 최제우 선생은 경주에서 동학을 선포하다가 체포되어 구금이 되었는데,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도는 동쪽에서 이루었지만, 도를 전파하는 것은 서쪽에 가서 해야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호남 쪽으로 갔습니다. 그때 남원 덕밀암에 계시던 용성조사의 스승인 혜월 선사에게 머물길 부탁하여 일 년간 그곳에서 숨어 있었습니다. 거기에 숨어 있으면서 동학의 중요한 저서가 대거 집필이 됩니다. 이것은 두 분이 새로운 세상, 즉 ‘개벽’이라는 것에 뜻을 같이 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최제우 선생은 다시 경주로 돌아와 체포가 되어 결국 사형을 받고 순교를 하셨고, 혜월 선사는 최제우 선생을 숨겨준 죄로 승려 자격을 박탈당하고, 요즘 말로 가택 연금이라고 하는 처벌을 받게 됩니다. 용성조사는 14살의 나이로 그 절에 가서 스승을 만나 출가를 하게 되거든요.
이런 인연을 모르면 용성조사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용성조사가 손병희 선생과 손을 맞잡고 3.1독립선언을 하기 위해 배후에서 모든 일을 보이지 않게 할 수 있었던 것도 두 분의 스승끼리의 옛 인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가 달랐지만 함께 할 수 있었던 거예요. 국호를 정할 때도 용성조사가 민이 주인이 되는 ‘대한민국’을 국호로 하자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던 이유도 이런 배경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용성조사는 경주 남산 천룡사에서 9년간 말을 하지 않는 노승을 시봉 했는데, 그분의 스승의 스승이 바로 한국 안에서 민족화한 불교의 맥을 잇는 분이었습니다. 결국 유생들이 천룡사를 불태울 때 돌아가시고, 그 시자가 화상을 입고 살아남아 법을 전했는데 용성조사는 그 법을 계승한 겁니다. 한국 불교 안에는 중국에서 들어온 불교를 그대로 따르는 불교도 있었지만, 우리의 전통과 결합한 민족화한 불교도 있었어요. 그 맥이 용성조사와 연결이 되었기 때문에 그냥 민족주의가 아니라 불교의 본래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 외세의 침략에 평화적으로 항거하는 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겁니다. 한 사람이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에요. 이런 배경을 충분히 이해해야 용성조사의 독특한 개혁적 성향과 항일적 성향, 그리고 그것이 평화적으로 행해질 수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용성조사는 처음에는 우리나라의 독립만을 요구했지만, 일본이 1937년에 중국을 침략하자 바로 중국으로 건너갑니다. 그리고 중국 정치 지도자들을 만나 ‘조중 연합군을 건설해서 일본을 물리치자’ 이렇게 굉장히 외교적이고 정치적인 제안을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용성조사는 선사이기도 했지만 사회적인 문제를 함께 해결해가려고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선불교에 말하는 ‘내 마음만 깨달으면 된다’ 하는 것이 불교를 굉장히 왜곡시키는 요소로 작용한 측면도 있거든요. 그래서 용성조사가 자기의 마음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들도 함께 해결해가려고 했던 측면들은 새롭게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용성조사의 3대 교화 지침이 갖는 의미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용성조사는 3대 교화 지침을 말했습니다. 첫째, 불교의 지성화입니다. 어떤 학문이나 철학으로서의 불교가 아닌, 어떤 믿음으로서의 종교도 아닌, 자기 삶을 변화시켜서 자유와 행복으로 가는 수행으로서의 불교로 돌아가자는 것이 ‘불교의 지성화’입니다. 그래서 5대 수행을 정립했습니다.
둘째, 불교의 대중화입니다. 단순히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것이 불교의 대중화가 아닙니다. 불교의 대중화란 대중이 수행의 주체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승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이 법을 알고 진리를 깨달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거죠. 여성도 일반인도 누구나 이 법을 알아야 하고, 이 법을 알려면 경전을 읽어야 하는데 한문으로 되어있어 이해하기 어려우니까 경전을 한글로 번역한 겁니다. 그리고 대중이 직접 수행을 해야 하니까 여성이나 재가자도 참선을 하도록 지도한 겁니다. 즉, 용성조사님이 행한 불교는 이미 그 당시에 승려 중심의 불교가 아니라 대중 중심의 불교를 주장한 거예요. 100년 전에 이미 대중이 변화의 주체라고 봤던 겁니다.
셋째, 불교의 생활화입니다. 단순히 밥 먹을 때 합장하고, 공양게송 하는 게 불교의 생활화가 아닙니다. 불교의 생활화란 앉아서 명상만 하는 것은 소비적인 행위이지 생산적인 행위는 아니라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수행을 생산적 행위와 결합시켜야 합니다. 앉아서 코끝에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과 고추를 따면서 손이 고추를 따는 동작을 알아차리는 것은 ‘알아차림’이라는 동일한 정신적 작용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선농일치(禪農一致)’라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생산 활동과 수행을 일치시키는 것이 바로 불교의 생활화입니다. 그래서 용성조사는 금광을 운영하기도 하고, 화과원을 운영하기도 하고, 농장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제대로 계승이 안 되고 미완성으로 남아있긴 하지만, 그 문제의식만큼은 지금 불교가 가야 할 길을 미리 실험하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 가지 문제의식은 글자만 보면 간단한 것 같지만 아주 근원적인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삶을 변화시켜서 자유와 행복으로 가는 수행으로서의 불교를 해야 하고, 그것의 주체가 일반 대중이라는 것이고, 그것을 생활과 분리시키지 않고 삶 속에서 실현해 나가야 한다는 거예요.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행으로서의 불교를 추구했다는 겁니다.”
사회자는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서 “3대 지침이 아주 명쾌하게 다가왔다”라고 소감을 말하면서, 두 분의 발표자에게 다시 발언 기회를 주었습니다.
두 분은 서로 반대되는 주장을 펼치는 것처럼 열띤 토론을 주고받았습니다. 조성택 교수님은 근대화 속에 담긴 제국주의적 요소를 지적하면서 우리의 전통 속에서 근대성을 찾아낸 용성조사의 업적을 높이 평가한 반면, 조명제 교수님은 우리의 전통이 갖는 한계성을 지적하면서 일본 불교가 추구한 합리성과 근대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토론을 듣고 나서 스님은 두 분의 주장이 상반되지 않는다며 양쪽을 모두 수용하며 이야기했습니다.
“조명제 교수님이 제기한 내용에 대해 저는 전부 다 수용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전통’과 ‘정통’이라는 말을 구분해서 쓰고 있습니다. 전통이라는 것은 위에서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서 문화적 요소가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반해 정통은 고타마 싯타르타가 문제의식을 가졌던 본래의 관점을 뜻합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이 연기되어 있고, 제법이 공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평등성입니다. ‘유아’에 기초할 때 차별이 일어나지, ‘무아’는 이미 평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정의는 차별이 없는 평등성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통을 지키는 것보다는 정통을 회복해 나아가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정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조선시대 불교냐, 고려시대 불교냐, 신라시대 불교냐, 이런 의문을 가질 텐데, 저는 2600년 전 고타마 붓다가 가졌던 문제의식을 정통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테라밧다에서 말하는 근본 경전이라는 것도 구전되어오던 것을 문자로 기록한 시기가 AD 1세기경입니다. 붓다 입멸 후 500년 정도 시간이 지난 시점이기 때문에, 경전조차도 AD 1세기 전후에 살았던 인도 사람의 사고방식, 문화, 이념이 담겼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경전은 문자 그대로 진리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글을 기록한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반영되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경전에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기록된 것을 보고, 실제로 어린아이가 태어나자마자 그렇게 부르짖었다고 믿으면 그건 신앙인 겁니다. 그러나 그 기록을 인류 문화사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즉, 부처님이 돌아가신 지 500년이 지난 시점에 부처님의 일생을 기록한 사람이 붓다의 삶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겁니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인 붓다가 됐다는 것, 그리고 자기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 길로 갈 수 있도록 대중을 이끌었다는 것을 기록자가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태어날 때 실제로 아이가 그렇게 외쳤다고 볼 수는 없어요.
이렇게 인류 문화사적으로 살펴보면, 부처님이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자국을 걸었다고 하는 것도 실제로 걸었냐 안 걸었냐를 따질 게 아닙니다. 인도 문화에서 여섯 발자국은 육도윤회를 상징합니다. 붓다는 육도윤회를 벗어나서 해탈 열반을 증득했기 때문에 일곱 발자국을 걸었다고 기록한 겁니다. 붓다가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붓다의 일대기를 쓴 사람의 관점에서 그렇게 쓴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이미 2600년 전에 계급 차별을 부정하고 여성의 출가를 허용한 것은 지금의 관점에서 봐도 상당히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후대에 내려오면서 오히려 시대적인 한계 속에 갇혀버린 측면이 큽니다.
근본불교라고 불리는 남방불교에서는 비구니 제도를 아예 없애버렸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허락한 것을 없애려다 보니 그 책임을 아난다에게 떠넘겼습니다. 부처님은 비구니 제도를 허용하지 않았는데 아난다가 계속 간청해서 비구니 제도를 허락하게 됐다는 식으로 근거를 만들어서 비구니 제도를 없앴습니다.
이런 과정을 살펴보면, 전통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고, 정통은 회복해야 할 대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는 조명제 교수님이 문제제기한 것도 수용이 되고, 조성택 교수님이 문제제기한 것도 수용이 됩니다.
조명제 교수님은 종교 속에 들어 있는 반봉건적 요소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근대화의 좋은 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셨다면, 조성택 교수님은 근대화가 서구 문명의 제국주의적 속성을 함께 갖고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하다 보니, 마치 두 분의 주장이 반대 입장처럼 들리는데, 저는 반대 입장으로 안 느껴지고 두 가지 문제의식을 우리가 다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님의 발언을 듣고 다시 두 교수님은 토론을 이어나갔습니다. 조성택 교수님은 한국 근대 불교가 만해 선사에게만 너무 많은 시선이 집중되어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3시간 동안의 토론을 끝내고 드디어 마칠 시간이 되었습니다. 사회자는 마지막으로 스님에게 닫는 말씀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한국 근대 불교가 만해 선사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조성택 교수님의 지적에 대해 혹시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설명을 덧붙인 후 다음 토론회 주제를 제안했습니다.
“저는 우리 역사 속에 있던 모든 일들에 대해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그것을 아우르고 개선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성택 교수님이 만해 선사에 대해 몇 가지 말씀하신 것은 만해 선사를 비판하려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근대 불교를 좀 더 종합적으로 이해하려고 하기 위해서는 좀 더 폭넓게 봐야 한다는 지적으로 이해하셔야 오해가 없을 것 같아요. 단순히 용성조사와 만해 선사를 비교할 게 아니라 ‘근대 불교에 수많은 선각자들이 활동을 했는데,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종합적으로 이해할 것인가’ 이런 관점에서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봉암사 결사의 한계에 대해 지적해주신 부분도 같은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만 갈래의 물줄기가 모여서 하나의 강이 되듯이 수많은 것들이 모여서 오늘날 한국불교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중에 어느 한 가지에 치우치게 될 때 편협해질 수 있다는 문제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조명제 교수님의 이야기 들으면서는, 주제를 더 좁혀서 토론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면 불교에서 젠더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토론해볼 수 있겠죠. 어떻게 하다가 차별적으로 비치게 되었는지, 용성조사의 행적뿐만 아니라 불교 전체에 대해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조성택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는, 용성조사의 위상을 단순히 한국 근대 불교 안에서만 찾지 말고, 인류 문화사적으로 또는 세계 역사의 변천 과정에서 어떻게 자리매김시킬 수 있겠는지에 대해서도 한 번 토론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향후에는 두 가지 측면에 대해서 각각 토론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큰 박수와 함께 토론회를 모두 마쳤습니다. 서로 악수를 나눈 후 다 함께 기념사진 촬영을 했습니다.
조계사를 나와 곧바로 서울을 출발해 두북 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차로 4시간을 달려 밤 9시에 두북 수련원에 도착했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생방송으로 수행법회를 한 후 하루 종일 두북 특별위원회 회의를 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