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지향(何如之鄕) ⸱ 일(壹)
송 욱(宋稶)
솜덩이 같은 몸뚱아리에
쇳덩이처럼 무거운 짐을
달팽이처럼 지고
먼동이 아니라 가까운 밤을
밤이 아니라 트는 싹을 기다리며,
아닌 것과 아닌 것 그 사이에서,
줄타기하듯 모순(矛盾)이 꿈틀대는
뱀을 밟고 섰다.
눈앞에서 또렷한 아기가 웃고.
뒤통수가 온통 피 먹은 백정(白丁)이라,
아우성치는 자궁(子宮)에서 씨가 웃으면
망종(亡種)이 펼쳐 가는 만물상(萬物相)이여!
아아 구슬을 굴리어라 유리방(琉璃房)에서 -
윤전기(輪轉機)에 말리는 신문지(新聞紙)처럼
내장(內臟)에 인쇄(印刷)되는 나날을 읽었지만
그 방(房)에서는 배만 있는 남자들이
그 방(房)에서는 목이 없는 여자들이
허깨비처럼 천장에 붙어 있고
거미가 내려와서
계집과 술 사이를
돈처럼 뱅그르르
돌며 살라고 한다.
이렇게 자꾸만 좁아들다간
내가 길이 아니면 길이 없겠고
안개 같은 지평선(地平線)뿐이리라.
창살 같은 갈비뼈를 뚫고 나와서
연꽃처럼 달처럼 아주 지기 전에
염통이여! 네가 두르고 나온 탯줄에 꿰서
마주치는 빛처럼
슬픔을 얼싸안은 슬픔을 따라,
비렁뱅이 봇짐 속에
더럽힌 신방 속에
싸우다 제사(祭祀)하고
성묘(省墓)하다 죽이다가
염념(念念)을 염주(念珠)처럼 묻어 놓아라
‘어서 갑시다’
매달린 명태들이 노발대발하여도
목숨도 아닌 죽음도 아닌
두통(頭痛)과 복통(腹痛) 사일 오락가락하면서
귀머거리 운전수(運轉手) -
해마저 어느새
검댕이 되었기로
구들장 밑이지만
꼼짝하면 자살(自殺)이다
얼굴이 수수께끼처럼 굳어 가는데
눈초리가 야속하게 빛나고 있다면은
솜덩이 같은
쇳덩이 같은
이 몸뚱아리며
게딱지 같은 집을
사람이 될 터이니
사람 살려라
모두가 죄(罪)를 먹고 시치미를 떼는데
개처럼 살아가니
사람 살려라
허울이 좋고 붉은 두 볼로
철면피(鐵面皮)를 탈피(脫皮)하고
새 살 같은 마음으로
세상이 들창처럼 떨어져 닫히면은
땅꾼처럼 뱀을 감고
내일(來日)이 등극(登極)한다.
(시집 『하여지향』, 1961)
[작품해설]
이 시는 모두 12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시로서 영미 주지주의의 영향을 받고 쓴 실험적 작품이다. ‘시는 문명(文明)의 표정(表情)’이라는 송욱 자신의 시관(詩觀)이 잘 반영된 이 시는 6.25전쟁 이후의 한국 현대의 사회 풍속, 정치적 혼란, 사상적 카오스(chaos), 이지러진 문명 등을 해학 ⸱ 기지 ⸱ 풍자 ⸱ 야유의 수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송욱은 「장미」 ⸱ 「꽃」에서 관능과 감각을 균제한 형식 속에 응축시킨 바 있지만, 점차 풍자와 위트로 현실 비판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그의 장시 「해인연가(海印戀歌)」는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자조와 역설로 이어지며, 「하여지향」에서는 현실에 대한 불안과 그 극복의 의지를 역설과 기지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강렬한 시 의식이 자기혐오에 빠지거나 정서적 파탄에 이르고 있는 것도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의 장시는 전체적인 시적 구성이나 균형을 거의 계산하고 있지 않으나, 지성에 근거한 시 정신의 치열성을 최대한으로 확대시키고 있음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하여지향(何如之鄕)’이란 말은 고시조의 「하여가(何如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더하리의 마을’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마을은 ‘부조리(不條理)가 가득한 현실 세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덩이’, ‘-처럼’ 등 동음(同音)의 나열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율격을 조성하고 있으며, 연쇄법과 특유의 재담(才談)에 의해 무거운 내용을 가볍게 전달하려는 시인의 의도가 나타나 보인다. 전반적으로 실험적 수법은 돋보이지만, 서정성의 결여와 지나칠 정도의 말장난으로 인해 언어적 유희로만 그치고 말았다.
가치관의 전도와 혼란으로 인한 무질서와 부조리의 현실 세계에는 오직 ‘배만 있는 남자들’과 ‘목이 없는 여자들’, 즉 주체성을 상실한 인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화자는 이처럼 타락해 버린 세게에서는 더 이상 ‘내가 길이 아니면 길이 없’음을 인식하고 절망하지만, ‘안개 같은 지평선’으로 제시된 불확실한 미래를 바라보면서도 ‘내일이 등극할’ 것이라며 낙관적인 전망을 펼쳐 보이고 있다.
[작가소개]
송욱(宋稶)
1925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영문과 졸업 및 미국 시카고대학 대학원 수학
1950년 『문예』에 시 「장미」, 「비오는 창」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63년 평론서 『시학평전』 발간
1980년 사망
시집 : 『유혹(誘惑)』(1954), 『何如之鄕(하여지향)』(1961), 『월정가(月精歌)』(1971), 『나무는 즐겁다』(1978), 『시신(詩神)의 주소(住所)』(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