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자료[1956]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種菊(종국)
種菊(종국)-국화를 심고
東岡 金宇顒(동강 김우옹) 顒=엄숙할 옹
閒來與世總相忘[한래여세총상망]
微雨淸齋一炷香[미우청재일주향]
花塢移栽數叢菊[화오이재수총국]
歲寒要看傲風霜[세한요간오풍상]
한가히 세상과 일체 서로 잊고
가랑비 내리는 맑은 서재에 한심지 향을 사르네
꽃밭에 몇 떨기 국화를 옮겨 심어
이 해가 저물거든 풍상의 견딤을 보려하네
顒=엄숙할 옹
엄숙하다. 엄격하고 근신하는 모양.
有孚顒若 易經 유부옹약
2.온화하다.
顒顒卬卬 如圭如璋 詩經 옹옹앙앙 여규여장
3.크다. 머리가 큼.
四牡修廣 其大有顒 詩經 사모수광 기대유옹
4.우러르다. 덕을 우러름.
蒼生顒然 莫不欣戴 劉琨 창생옹연 막불흔대
炷=심지 주
① 심지 ② 등불 ③ 불태우다 ④ 약쑥
심지. 등불의 심지.
然燈不下炷 有油邦得明 讀曲歌 연등불하주 유유방득명
2.등불.
3.불태우다.
竹爐重炷海南沈 陸游 죽로중주해남침
4.약쑥. 심지처럼 만들어 뜸뜨는 데에 씀.
疢病灸療艾炷 北史 진병구료애주
5.향을 사르다.炷香주향
6.선향(線香) 따위를 세는 단위.
一炷淸香晝日留 蘇軾 일주청향주일류
원문=東岡先生文集卷之一 / 詩
種菊
閒來與世總相忘。微雨淸齋一炷香。
花塢移栽數叢菊。歲寒要看傲風霜。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0
東岡金宇顒
경상북도 성주(星州) 출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東岡)·직봉포의(直峰布衣).
아버지는 삼척부사 김희삼(金希參)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생애
1558년(명종 13) 진사가 되고,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1573년(선조 6) 홍문관정자가 되고, 이어서 수찬·부수찬을 거쳐
다시 수찬이 되었으나, 이두문(吏讀文)을 가르치는 책임자로서
학생들의 성적이 오르지 못한 데 대한 문책을 받아 전적으로 좌천되었다.
1576년 부교리가 되고, 이어서 이조좌랑·사인 등을 지냈으며,
1579년에는 부응교가 되어 붕당의 폐단을 논하였다.
그 해 사가독서(賜暇讀書: 휴가를 얻어 독서에 전념)하도록 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이듬 해 선위사(宣慰使)로 일본 사신 겐소[玄蘇]를 맞이하여
사신의 접대에 여악(女樂)을 금지하도록 진언하였다. 1582년 홍문관직제학이 되고,
이어서 대사성·대사간을 거쳤으며, 1584년 부제학이 된 뒤 전라도관찰사·안동부사를 역임하였다.
1589년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정여립(鄭汝立)과 함께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했다는 이유로 회령에 유배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사면되어 의주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승문원제조로 기용되고, 이어서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듬 해명나라 찬획(贊劃) 원황(袁黃)의 접반사(接伴使)가 되고,
이어서 동지중추부사로 명나라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을 위한
문위사(問慰使)가 되었으며, 왕의 편지를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에게 전하였다.
그 해 상호군을 거쳐 동지의금부사가 되어 왕을 호종하고 서울로 환도하였으며,
한성부좌윤·혜민서제조 등을 역임하였다. 1594년 대사성이 되고,
이어서 대사헌·이조참판을 거쳤다. 1597년 다시 대사성이 되었으며,
이어서 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599년 사직하고 인천에서 한거하다
이듬 해 청주로 옮겨 그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활동사항
그는 경연에서 자주 학문적 문제와 정치에 시책을 진언하여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573년에는 경연에서 요순우탕(堯舜禹湯)의 심법(心法)을 역설하며 유교적 정치 이념과
위정자의 정치 도의를 밝히는 한편, 주경공부(主敬工夫)를 논하여 왕의 정신 수양의 원리를 강조하였다.
이 때 왕명에 따라 「성학육잠(聖學六箴)」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정지(定志)·강학(講學)·경신(敬身)·극기(克己)·친군자(親君子)·원소인(遠小人)
등으로 되어 있다. 또한 송나라의 학자 장식(張栻)과 명나라의 학자
설선(薛瑄)의 문집을 간행할 것을 청하여 이를 실현시켰다. 대사성으로 있을 때에는
학령(學令)·독법(讀法)·치경행재(置經行齋)·택사유(擇師儒)·
선생도(選生徒)·공사(貢士)·취사(取士)의 「학제칠조(學制七條)」를 지었다.
선학을 존경하여 1573년 이황(李滉)에게 시호를 내릴 것을 청했으며,
이듬 해에는 조광조(趙光祖)를 제향한 양주의 도봉서원(道峰書院)에 사액을 내릴 것을 청하였다.
1579년에는 이이(李珥)를 비난하는 정언 송응형(宋應泂)에 맞서 이이의 입장을 두둔하였다.
또한 널리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하여 1574년에는 정구(鄭逑)를 천거하고,
1595년에는 곽재우(郭再祐) 등 33인을 천거하였다.
관직 생활 동안 수시로 시무책을 올렸는데, 1594년 6월「시무칠조」,
7월에 「시무사조」, 9월에 「시무팔조」, 이듬 해「시무십육조」,
1597년에는 여지(勵志)·택상(擇相)·택장(擇將)·임관(任官)·연병(鍊兵)·
적량(積糧)·신상(信賞)·필벌(必罰)의 「중흥요무팔조(中興要務八條)」를 올렸다.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과 가까워 정치적으로도 이들과 입장을
같이하는 동인(東人)에 속하였다. 그래서 서인인 정철(鄭澈)·이경률(李景慄)·
이징(李澂) 등이 쟁단을 일으키려 한다 하여 파직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이이에 대해서만큼은 존경의 태도를 취하였다.
저서로는 『동강집(東岡集)』·『속자치통감강목(續資治通鑑綱目)』 등이 있으며,
편서로는 『경연강의(經筵講義)』가 있다.
상훈과 추모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청주의 봉계서원(鳳溪書院),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청천서원(晴川書院), 회령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1661년(현종 2) 문집이 간행되었으며, 1723년(경종 3) 이현일(李玄逸)이
지은 신도비가 세워졌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동강경연강의東岡經筵講義경연강의
조선전기 |
김우옹(金宇顒) |
1573년∼1585년 |
강론집, 경연록 |
문헌 |
1책(72장) |
종교·철학/유교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요약
조선시대 문신·학자 김우옹이 제14대 왕 선조의 경연에서
강의한 내용을 수록한 강론집. 경연록.
개설
『동강경연강의(東岡經筵講義)』는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이
1573년(선조 6)에서 1585년(선조 18)까지 선조가 군신과 더불어
경서를 진강(進講)하거나 제반 사항에 대하여 문답(問答)한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서지적 사항
선장(線裝)으로 된 필사본으로 책의 크기는 34.4×21.5cm이며
무곽(無郭), 무사란(無絲欄)이다. 반엽(半葉)은 11행 22자이고
주쌍행(註雙行)이며 판심이 없다. 서명은 표제(表題)에 의하였고,
종이는 저지(楮紙)를 썼다. 이왕가도서지장(李王家圖書之章)이 찍혀있다.
내용
34세 때 홍문관 정자(正字)로서 경연관이 된 뒤부터
대사헌(大司憲) 때(1573∼1585)까지 총 43회에 걸쳐 경연에서 강론한 내용이다.
여기에는 경전을 강론한 것은 물론 강의를 마치고 군신 간에
제왕의 학문과 시정의 득실을 논한 것도 실려있다.
경연강의는 『서경(書經)』을 가지고 제왕의 치도(治道)와 경계에 대하여
강론한 것이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 내용은 탕서(湯誓)·태갑(太甲)에서 소고(召誥)·군아(君牙) 편까지인데,
제왕의 치도와 경계에 대한 것이다. 천하의 질서와 어지러움은
군왕의 한 몸에 달려 있기 때문에, 제왕의 학문을 닦고 정심(正心)으로써
의리를 분별하여 일상생활 속에서 성찰(省察)과 극기(克己)로 실천할 것을 강조하였다.
특히, 군왕은 하늘이 백성을 위하여 세운 것임을 명심하여 항상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위민정치(爲民政治)를 실시하도록 진언하였다.
1579년과 1581년에는 총11회에 걸쳐서 『춘추(春秋)』를 강론하고,
1585년에는 3회에 걸쳐서 『강목』을, 또한 1594년에 1회와
1595년에 2회는 『주역(周易)』을 강론하였다. 당시 임진왜란으로 인한
백성의 참상을 계품(啓禀)하여 어진 선비에게 정사를 맡기고 기강을 확립할 것을 논하였다.
김우옹은 매번 강론에 임하여 선조에게 존심양성(存心養性)을 아뢰었고,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분별을 주장하였으며, 특히 경(敬)과 의(義)를 강조하였다.
경연에서 강론할 때는 공정한 입장에서 간단명료하게 논점을 지적하여 분석함으로써
당시 최고의 강관으로 알려졌다. 그는 남명(南冥)조식(曺植)의 외손서(外孫婿)로서
조식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관직에 나아가 경연에서 자주 학문적 문제와
정치에 시책을 진언하여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또한 당시 세자였던 광해군의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서 경연에 나아가 강의하기도 하였다.
1573년 부수찬으로서 경연에서 요(堯)·순(舜)·우(禹)·탕(湯)의 심법(心法)을 역설하며
유교적 정치이념과 위정자의 정치도의를 밝히는 한편, 주경공부(主敬工夫)를 논하여
왕의 정신수양의 원리를 강조하였다. 이때 왕명에 따라 「성학육잠(聖學六箴)」을 올렸는데
, 그 내용은 정지(定志)·강학(講學)·경신(敬身)·극기(克己)·친군자(親君子)·원소인(遠小人)
등으로 되어 있다. 또한 선학을 존중하고 널리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저서로는 『동강집(東岡集)』·『속자치통감강목(續資治通鑑綱目)』등이 있으며,
편서로 『경연강의(經筵講義)』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장서각에 『동강경연강의(東岡經筵講義)』라는 서명으로
소장되어 있으며, 규장각에는 『경연강의(經筵講義)』라는 서명으로 소장되어 있다.
규장각본은 장서각본의 1책 72장보다 10장이 많은 1책 82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