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을 정독해 보자 1번째 단락 <백잔과 신라는 옛날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하였지만 왜가 신묘년 이래 바다를 건너와 백잔, 신라를 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2번째 단락 <영락 6년 병신에 광개토대왕은 친히 수군을 이끌고 잔국을 토벌했다.> 말이 안됀다.
첫단락에서.. 고구려의 속국을 침략한건 왜 인데
두번째 단락에서..고구려는 왜는 안치고.. 잔국을 토벌하고 있다.
백잔과 잔국을 동일 국가로 해놓고 해석해보자..
왜의 침략을 받은 백제와 신라를 구하기 위하여 백제를 공격하였다.
ㅎㅎㅎㅎ
그렇다면 백잔과 잔국을 다른 국가라고 보자..
매끄럽게 해석이 된다..
문제는 잔국이 누구냐는 것이다.
뭐 무법적으로 왜...와 잔국은 동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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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에 저렇게 한글이 나와 있는지 오늘 처음 알았네요. 한글로 나와 있으면 정독이고 속독이고 구분할 필요 없겠죠? :P
(광개토대왕비에서 가장 첨예하게) 문제가 되는 원문을 한번 봅시다.
1면 8행
羊, 不可稱數, 于是旋駕, 因過襄平道, 東來▨城, 力城, 北豊,
王備獵, 游觀土境, 田獵而還. 百殘, 新羅, 舊是屬民,
헤아릴 수 없이 노획했다. 그곳에서 돌아오면서 양평도를 거쳐 동으로 왔다. ▨성, 역성,
북풍에 이르러 왕은 사냥준비를 시켰다. 순유와 사냥을 하며 돌아왔다. 백잔(=백제), 신라는 옛 속국으로
1면 9행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軍至窠(南;10행),
조공을 바쳐왔다. 그러나 신묘년 이래로 왜가 바다를 건너 백잔과 신라를 쳐 신민으로 삼았다.
때문에 6년 병신에 왕은 몸소 수군을 인솔하여 백잔국을 토벌했다. 군사가 백잔소굴의 남쪽에 이르러
비류백제설이 나오게 된 이유는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이설과 북사(北史)에 '백제는 대방군의 옛 땅에서 건국하였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하여 온조가 근거로 삼은 위례보다 북쪽에 또 다른 백제가 (비류에 의해) 세워졌고 비류 백제는 광개토왕의 남진시 멸망하여 그 왕조가 일본의 건국주체가 되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결국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광개토왕이 진짜 비류백제를 공격해서 멸망시켰냐가 관건이 되겠죠. 그래서 주장된 내용이 위 광개토대왕비 1면 구절로 그 근거를 삼아 생긴 가설입니다. 특히, 1면 9행 '토벌잔국'을 '討利殘國'으로 오독하면서 온조가 세운 '백제'와 비류가 세웠다는 '이잔'의 이종의 백제설이 타당하다고 주장되었죠. 그런데, 웃긴건 '토리잔국'으로 읽히는건 일본애들이 광개토왕비를 탁본 뜬 '쌍구본(雙勾本)' 인데 이건 일본애들이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조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죠. 문제는 쌍구본 이전의 탁본이 없기 때문에 현재는 어떻게 왜곡됐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쌍구본의 '토리잔국'은 정밀 비교 조사결과 '伐'자로 밝혀져 어이없는 해프닝으로 끝났죠.
같은(조작된 혹은 오인된) 자료로 정반대의 주장(비류백제설 vs 임나일본부설)을 할 수 있다는게 참 웃기지 않나요?
그리하여, 8면~9면의 해석은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이지만, 백잔, 잔국은 고구려가 백제를 낮게 이르는 말로 광개토대왕비에 10번이상 나옵니다. 그리고, 빠진 글자를 추론해서 정리한 정인보 선생의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백제와 신라는 원래 고구려의 속민이라 조공을 바쳐왔다.
왜가 신묘년에 고구려를 공격해오자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 왜를 깨트렸다.
백제는 일본과 손을 잡고 신라를 침공하였다.
신라는 대왕의 신민이었기에 병신년에 대왕(고구려)은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토벌하고 신라를 이롭게 했다."
여전히 상당한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 단락에서 쓰죠.
첫단락에서.. 고구려의 속국을 침략한건 왜 인데
두번째 단락에서..고구려는 왜는 안치고.. 잔국을 토벌하고 있다.
백잔과 잔국을 동일 국가로 해놓고 해석해보자..
왜의 침략을 받은 백제와 신라를 구하기 위하여 백제를 공격하였다.
ㅎㅎㅎㅎ
그렇다면 백잔과 잔국을 다른 국가라고 보자..
매끄럽게 해석이 된다..
문제는 잔국이 누구냐는 것이다.
뭐 무법적으로 왜...와 잔국은 동격이다.
그래야 비문의 내용이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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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법적 → 문법적이겠죠.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맘대로 잘라붙이고 억지 해석하다보면 저정도는 애교로 봐줘야겠죠?
잠깐 기원무렵의 일본을 살펴봅시다. 일본의 지리적 특성상, 중국,한반도 등지의 청동기,철기 문화가 전파되는게 매우 지연되었죠. 세계의 대부분 종족들이 청동기를 쓰려고 준비하던 기원전 10세기에도 일본애들은 석기를 썼습니다. 조몬시대 흙으로 빚은 공예품을 보면 일본애들이 보여주는 석기문명의 극한을 보여주죠.
근데, 기원전 4세기부터 외부에서 금속문화가 전달되면서 야요이 문명이 시작됩니다. 이를 전해준 사람은 한반도 남쪽을 차지하던 변한지역 사람들이었죠. 이로써 안정적인 농경이 가능해졌고 다른 종족들이 발전한 단계를 거의 몇백년내에 해치우느라 곳곳에서 쌈질을 해대는 독특한 일본만의 모습이 보여집니다.
4세기무렵의 일본은 겨우겨우 야마토정권이 들어서며 통일국가 비스무리하게 만들어지지만, 세습도 이루어지지 않는 성읍국가 연합체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정권의 지배세력은 백제인으로부터 논어, 천자문, 각종 기술 등을 습득하는 등 백제와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죠. 백제가 망할 무렵에는 400척이나 되는 군함을 지원했다는 삼국사기 기록도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믿기지는 않지만, 백제가 왜(혹은 왜구해적들)와 연합 혹은 왜를 부려서 신라를 괴롭혔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4세기말 무렵 한반도에는 걸출한 왕이 여럿 나오는데, 먼저 백제 근초고왕(346~375)이 있습니다. 백제 남쪽에 여전히 버티고 있던 고대국가인 마한을 멸망시키고 영토를 차지한 후, 북쪽으로 눈을 돌려 371년에는 고구려 평양성까지 쳐들어가서 고국원왕(광개토왕 할아버지)까지 전사하도록 만들죠.
안그래도 요서에서 한가닥하던 전연의 모용황이 시도때도 없이 고구려의 서쪽으로 쳐들어왔고, 342년에는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환도(국내성)까지 들어와서 고국원왕의 아버지인 미천왕의 묘를 파고 그 시체는 물론 생모와 남녀 5만여人까지 데리고 환도는 불태워 버리는 등 매우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양쪽(서:선비,남:백제)에서 치이던 고구려는 소수림왕때 힘을 비축하고 드디어 광개토왕이 즉위하면서 확장을 준비합니다. 광개토왕이 즉위한 390년 무렵은 그 잘나가던 모용선비족 국가들이 지리멸렬해지던 상황이어서 당장 급하지는 않았던 반면, 항상 끊임없이 배후를 괴롭히던 백제를 치려고 맘먹고 있는 중, 당시 조공관계였던 신라가 구원을 청하자 '울고 싶은데 뺨때린 격'이었죠. 광개토왕의 즉위초반기에는 배후를 정리하는데 많은 힘을 들입니다. 나중에 장수왕은 아예 수도를 평양으로 옮겨서 본격적으로 남진을 실시하게 되죠.
정리하면, 4세기말은 신라를 괴롭히던 왜(혹은 왜구해적들)와 안그래도 성가시게 굴던 백제와 겨룰 수 밖에 없었던 역사적인 배경이 있으며, 광개토비에다 그에 따른 결과를 제대로 기록해 놓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입장에서 잔국은 왜와 다를바 없음.. 동의 이음어이다..
백잔과.. 왜(혹은 잔국)은 다른 나라다.
백잔을 쳐서 신민으로 삼아 .. 고구려의 위엄에 상처를 입힌 왜(잔국)을 토벌하였다.
어디를 통해서?..한강 이북의 성을 함락하고.. 수군을 이용하여 공주를 공격하였다.
왜는 잔국이며.. 잔국은 왜족이다.
그 나라는 일본에 있는게 아니고 공주에 터를 잡고 한강유역을 장악한 백제의 세력이다.
잔국의 최종항복을 받아낸곳은 일본도 아니요.. 신라도 아닌.. 한강 이북에서 이다..
ㅎㅎㅎㅎ..
비류백제가 왜의 실체임을 조심스럽게 제기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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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 무식하게 주장했다가 산산조각난 이론이니 님께서 조심스러워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무슨 정보를 대하든지 약간의 '의심'을 하는 버릇을 가져보기를 바랍니다.
참고자료)
이기백 - 한국사신론
김한규 - 요동사
초록불님의 광개토대왕비문 (http://orumi.egloos.com/2987936)
남경태 - 종횡무진 동양사
네이버 지식인 mrseagull, thwmunba님 포스팅
첫댓글 백제가 망할 무렵에는 400척이나 되는 군함을 지원했다는 삼국사기 기록도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믿기지는 않지만, 백제가 왜(혹은 왜구해적들)와 연합 혹은 왜를 부려서 신라를 괴롭혔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백제가 멸망했을당시 왜는 663년 군사 2만7천명과 전함 1000척을 이끌고옵니다 ^^ 그래서 당의 함대와싸워 불에탄군함이 400척인것이겠지요
백제와 신라는 원래 고구려의 속민이라 조공을 바쳐왔다. 왜가 신묘년에 고구려를 공격해오자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 왜를 깨트렸다. 백제는 일본과 손을 잡고 신라를 침공하였다. 신라는 대왕의 신민이었기에 병신년에 대왕(고구려)은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토벌하고 신라를 이롭게 했다." 이것은 비문에 나와있는 도해파라는 글을 설명한것이군요. 하지만 이 도해파는 백제와 왜가 동맹을 맺고 신라를 깨뜨렸다는것이지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왜를 깨뜨렸다는것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