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는 내내 궁금했다. 2014년작 '보이후드'가 16일 넷플릭스에 올라와 풍문으로만 접했던 리처드 링글레이터 감독의 작품을 뒤늦게 볼 수 있었다. '스쿨 오브 락'과 '비포 선라이즈' 시리즈를 연출한 감독의 최근작 '히트맨'을 본 지 얼마 안돼 이 작품을 뒤늦게 만난 것이 미안하기도 한 일이다.
그런데 '드라마가 아니라 다큐멘터리 같은데' 싶었다. 예민한 주인공 메이슨 주니어의 12년을 연기한 배우가 한 사람인가, 정말 한 친구가 계속 메이슨을 연기하는 건가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12년 동안 한 배우 엘라 콜트레인을 중심에 놓고 같은 캐스트로 영화를 기획하고 찍고 할 수 있다는 것이 마냥 놀랍고 신기했다. 그런데 165분의 러닝타임을 감상하며 감독과 배우들의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는다는 점을 거듭 확인할 수 있어 대단했다. 오죽했으면 국내 한 평론가는 "'나를 찍어줘' 라고 말하고 싶었다"는 평을 남겼을까?
영화는 그야말로 가장 사적인데 누구나 공감하는 여섯 살 무렵부터 대학 입학하는 열여덟 살 무렵까지 12년을 함축해 보여준다. 이 작품의 장점과 매력은 누구나 겪어 특별할 것이 없지만 지금은 빛이 바래 잘 떠오르지 않던 기억을 새로이 되살린다는 데 있다. 이 일이 아주 간단해 보이지만 쉽지 않은 일이란 점은 물론이다. 12년 동안 꿋꿋이, 진득하게 밀어붙인 감독(겸 제작자)이 참 대단하다.
미국 텍사스에 사는 메이슨은 누나 서맨다(감독의 딸 로렐라이 링글레이터), 엄마(패트리샤 아퀘트)와 살아간다. 부모는 스물세 살 무렵 무턱대고 서맨다를 갖게 돼 다투다 이혼했다. 엄마는 휴스턴의 대학에 다닐 생각으로 이사를 한다. 남매는 친아버지 메이슨 시니어(에단 호크)와 주말에 만나 볼링도 치고 야구도 관전하는데 친아버지는 도무지 아이들 미래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엄마는 멘토였던 대학교수 빌과 결혼한다. 처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빌은 결혼한 지 2~3년 뒤 본색을 드러낸다. 알코올 중독으로 폭력성을 드러낸다. 엄마는 남매를 데리고 탈주해 새로운 도시로 이주한다. 엄마는 바라던 교수의 꿈을 이루고 메이슨도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고 여자친구도 사귀며 진로를 걱정한다. 엄마는 퇴역 군인인 제자와 세 번째 결혼을 하는데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집값이 폭락하자 세 번째 남편도 알코올에 빠져 트집이나 잡고 집안을 어둡게 만든다. 결국 둘은 이혼한다.
친아버지는 재혼을 해 자식을 낳았고, 서맨다는 대학에 들어갔다. 메이슨은 사진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는다. 맨날 아내에게 돈 달라고 손을 벌리는 철딱서니 없는 친아버지가 마음으론 자신을 응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위로를 받는다. 새로 마련한 작은 아파트에서 메이슨이 대학 기숙사로 떠나는 날, 어머니는 자식 둘 낳아 대학 보내고 이제는 죽을 일만 남은 것 같다며 한탄한다. 메이슨은 그런 어머니를 위로하고 새로운 곳으로 떠난다.
룸메이트 닉과 그의 여자친구 바브, 그녀의 룸메이트 니콜까지 넷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빼먹고 마약을 섞은 브라우니를 나눠먹고 하이킹을 떠난다. 메이슨은 니콜과 함께 언덕에 앉아 절경을 바라보며 '순간을 잡아라'(Seize the moment)고 말할 것이 아니라 '순간이 우리를 잡는다'(The moment seizes us)라고 말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서로를 마주 바라보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12년 동안 제작하고 촬영하느라 대본은 확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으로 흘러가며 그때 그때 상황을 창의적으로 반영할 수 있었다. 2000년대 초반 우리 곁에 머물렀던 장치들이 반갑게만 다가온다. 소니 브라운관 TV와 드래곤볼 애니메이션,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Oops!... I Did It Again', 이라크 팔루자 만행, 로저 클레멘스와 휴스턴 애스트로스 전성기, 숱한 게임기기들, '해리 포터와 혼혈 왕자' 출간, 부시의 재선 선거, 스타워즈 7편, 버락 오바와 조 바이든 선거 구호판과 존 매케인 선거 구호판. 레이디 가가의 'Telephone', 잠깐 언급된 '다크 나이트'와 '트로픽 썬더', 고티에의 'Somebody That I Used to Know', 아이폰, 페이스북 등 그때 가장 유행했던 아이템을 그냥 등장시켰을 따름이었다. 'The moment seizes us'였던 셈이다.
음악도 빼놓을 수 없다. 메이슨 주니어가 풀밭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 보는 첫 장면에 흘러 나오는 콜드플레이의 'Yellow'는 지금이야 월드 스타 록밴드의 히트곡이지만 당시로선 인디에서 막 올라오며 좋은 반응을 얻던 신인 밴드의 노래였을 따름이다. 그 밖에도 더 하이브스, 윌코, 뱀파이어 위켄드, 아케이드 파이어, 요 라 텡고, 피닉스와 더 블랙 키스 노래들이 전성기 연도에 맞춰 등장한다.
다큐를 보는 느낌을 안긴 것도 그 덕분이었다. 개인적으로 영화 전반은 성장 영화의 틀을 그대로 좇는 데 반해, 영화 후반은 메이슨 주니어의 부모와 어른들도 아픔과 시련 속에 성장한다는 점을 그리는 데 방점을 찍지 않았나 생각한다. 분명 12년 동안 이 작품을 찍는 동안 배우들의 정신적 성숙도 작품에 고스란히 투영됐을 것이란 생각도 해본다.
1년 동안 15분 분량만 찍겠다고 생각했고 주연과 조연 빼고는 감독의 고향 근처에서 무명배우들을 기용해 찍었기에 제작비는 400만 달러 밖에 들지 않았다. 월드 박스오피스 수입은 4800만 달러를 기록했다니 열두 배 장사를 한 셈이다. 하지만 이런 흥행 실적과는 비교되지 않을 영화적, 영화사적 성취를 남겼다. 넷플릭스 창고가 참 대단한 작품을 살려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