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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깽 - 간악한 일본인들에 의해 멕시코에 노예로 팔려 갔던 조선인들의 이야기
멕시코 선인장(용설란)으로 데낄라 술을 만들고 섬유는 애니깽 실을 만듭니다.
구한말 1905년 멕시코로 사기(?)당해서 이민간 조선인들의 삶을 그린 우리가
잘 몰랐던 몰락하는 조선말기와 일제의 강점하에서 겪을수 밖에 없었던 조선인들의
애환을 그린 영화로 요즘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암살" 보다 더 흥미롭게 보았기에
한번 보시기를 권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b5FcyyUrn0 장미희,임성민,김성수,김청 - 애니깽(1996년)
(유튜브에서 "애니깽" 찾아도 볼 수있습니다.
http://ieave0047.tistory.com/867 한국이민사 박물관-인천
http://blog.naver.com/jcs89225?Redirect=Log&logNo=140153605910 한국이민사 박물관-인천
http://blog.daum.net/munsunby1185/192660 노예무역 --오바마 미국대통령이 노예무역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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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비디오가 보여주는 비극은 지금도 이세상 어느곳에서 상황만 다르지 비슷하게 일어 나고 있을 이야기이다.
인간들이란 대개가 다 자기들의 사리사욕과 향락을 위해서는 세상 물정모르고 남들이 다 자기와 같다고 생각하는 (순박한지 어리섞은 지 모를) 그런 사람들의 인권을 짓밟고 그들위에 군림하여 온갖 죄악을 지으며 사는것이 이 드라마에서도 잘 보여주고 있는 인간 세상사다.
성경을 창조하시고 이시각에도 운영하고 계시는 전지전능하신 창조자는 인간들이 모두 피해자건 피해를 가하는 자건 다 사악하여 그들 모두를 지옥에 보내야 그의 정의가 실현될 것이라고도 알려 준다. 왜냐면 그가 창세기에 인간들에게 부여해준 자유의지를 인간들은 모두 아담의 몸안에 있을 때 아담과 함께 사탄의 말을 따르는데 써가며 하나님의 엄준한 계명을 거역하였기에 그 원죄의 대가로 다 육체적인 죽음을 면치 못하며 결국엔 태어나자마자 모두들 죄를 계속지으며 살고 있기에 그리 하실 것이라고 알려 준다.
그래도 자기의 자비와 은혜로움과 아카페적인 사랑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서 몇몇을 자기의 뜻에 따라 선택하여 구원의 역사를 벌리고 있으며 그 일이 끝나면 이세상을 불바다로 만들어 멸하고 새 세상을 창조하실 것이라고 알려 주신다. 로마서 9:15.
그의 뜻에 순복하는 이 유샤인은 그저 "주님의 뜻이 이루어 지이다 Thy will be done!" 이라고 그가 하시는 일에 그의 소망을 걸 뿐이다.
오늘은 ‘애니깽’들의 슬픈 사연으로 시작해 볼까 합니다. 1905년 4월 4일, 일본의 인력 송출 회사가 모집한 한인 1033명을 태운 영국 상선 ‘일포드ILFORD’호가 제물포 항을 떠났습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그 당시 조선의 어렵고 험난한 상황에서 ‘잠시’ 벗어나 계약된 4년 간 열심히 일을 하고나면 큰돈을 만들어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배와 기차를 몇 번이나 갈아타며 42일 만에 멕시코의 ‘메리다’라는 도시에 도착한 그들 앞에는 가혹한 현실이 놓여있었습니다. 메리다는 제가 사목하고 있는 깜뻬체의 바로 옆 도시입니다. ‘에네껜Henequen’은 선인장의 한 종류인데 그 잎이 용의 혀를 닮았다고 하여 한자어로는 ‘용설란龍舌蘭’이라고 부릅니다. 에네껜 잎은 선박관련 산업이 최고의 호황을 부리던 당시 선박용 로프를 만드는 중요한 재료였기 때문에 그 수요가 폭발적으로 불어났고, 재 멕시코 한인 일 세대 노동자들은 그 에네껜 농장에서 노예와도 같은 생활을 하였습니다. 곧 그들은 ‘애니깽’이라고 불리기 시작했고 멕시코 감독자들의 채찍질에, 방울뱀들의 공격에 쓰러져 갔습니다. 1905년 황성신문에 실린 중국인 허후이(河惠)의 편지는 당시 멕시코 이민 일 세대들의 처지를 이렇게 전했습니다. “이곳 원주민들이 지구상 5, 6등급 노예란 소리를 듣는데 한인들은 그 밑의 7등급 노예가 되어 영원히 우마(牛馬)와 같다” 1909년, 4년간의 계약은 끝이 났지만 이듬해 한일합병이 되자 이들은 돌아갈 조국을 잃고 기억에서조차 잊힌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 많은 멕시코 이민 일 세대 ‘애니깽’들의 이야기입니다. 소설, 혹은 영화에서나 접할 수 있었던 ‘애니깽’의 후손들을 제가 사목하고 있는 본당의 신자들로 만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본당을 맡고 나서 며칠 지나지 않아 제 곁에 수줍게 다가와서 ‘안녕하세요?’라며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는 까를로스를 처음 만났을 때를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까를로스를 통해서 알게 된 한인 후손들을 모두 본당에 초대하여 그들과 대화도 나누며 함께 저녁을 먹기도 했습니다. 그분들 역시 500백년 역사를 자랑하는 싼 프란시스꼬 본당의 주임신부로 한국인 신부가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을 터이지요. 인터넷을 뒤져서 애니깽과 그 후손들의 어렵고 고통스러운 처지를 더 깊이 알고 난 뒤부터는 대부분 가난에 허덕이고 있는 한인 후손들과 조그만 어떤 일이라도 함께 해보자는 각오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인 후손 대표를 맡고 있는 ‘이르빈’과 그런 생각들을 나누고 먼저 한인 후손 아이들의 교육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구상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쯤 깜뻬체에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개신교 목사님을 비롯한 많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물밀듯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분들의 조직력과 자금력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저는 차츰 한인 후손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고, 저도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무엇인가 해보겠다던 각오를 잊고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어제 ‘정’씨 성을 간직하고 있는 레오씨가 메리다에서 열린 멕시코 한인 이민 1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다녀왔다며 기념 티셔츠 한 장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한국인 본당신부를 위해 티셔츠를 챙겨 오신 마음이 참 고마웠습니다. 한인 후손 자녀들의 교육을 뒷바라지하는 일을 해보겠다던 생각이 물거품처럼 허무한 것이 되어있는 것과는 반대로 그 티셔츠를 받아들고 서 있는 제 마음 한 편은 몹시 무거웠습니다. 무능하고 무기력한 조국에서 태어난 죄의 값을 평생 치르며 사라져간 ‘애니깽’들과 그 가난과 고통을 대물림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온 후손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다시 생각이 깊어지는 오늘입니다. * 오늘도 잊지 않고 세월호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을 위해, 철저한 진상규명을 위해 기도와 미사를 봉헌합니다. 진실과 양심까지 침몰시켜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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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ichannela.com/society/3/03/20130819/57111826/1 <= 챈넬 A's 뉴수 보도
http://news.ichannela.com/society/3/03/20150814/73055140/2 <= 챈넬 A's 뉴수 보도2
애니깽 멕시코 에네켄 이민자들..1033명의 여권
[사랑방손님과 어머니]로 알려진 작가 주요섭의 작품 중에는 1900년대 초에 시작된 미국 이민 1세대들의 파란만장한 삶과 죽음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그려낸 [구름을 잡으려고]도 있습니다. 1930년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장편이었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죄로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고국을 떠나 낯선땅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참혹한 실상이 가슴아프게 그려져 있습니다. 더욱이 아무리 바닥을 기는 것처럼 온몸을 내던져 살았건만 결국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마치 구름을 잡으려는 듯 손을 내뻗으며 죽어가는 주인공 준식의 모습은 삶이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새삼 깨닫게 해줍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진결혼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처음 알게 되었는데, 사진결혼이란 서로 사진만 보고 결혼상대를 택하는 것을 말합니다. 미국이 워낙 먼 곳이어서 만날 수는 없으니 남자도 사진만 보고 아내 될 사람을 고르고 여자도 사진만 보고 남편 될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 떠납니다. 그나마 사진과 실물이 크게 차이나지 않으면 다행이고, 좀 차이가 난다 해도 분복으로 여기지만, 간혹은 예기치 못한 불상사도 벌어져 쓴웃음을 자아나게 하는 대목도 있습니다.
하와이 이민은 [구름을 잡으려고]를 통해 대략 알고 있었지만, 얼마 전 EBS 지식채널e에서 방영한 멕시코 이민세대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었습니다. 에네켄 농장에서 일을 해서 애니깽으로 불렸다는 것도, 또 [애니깽]이라는 영화가 바로 그 에네켄 농장에서 죽을 고생을 했던 멕시코 이민자들의 애환을 그린 영화라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태어난 나라에서도 대접받고 살기가 어려운데 오직 돈을 벌기 위해 남의 나라에 간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래도 꼿꼿한 자부심을 잃지 않았던 멕시코 에네켄 농장의 이민자들..1033명의 여권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애니깽 멕시코 에네켄 이민자들..1033명의 여권
어느 날 신문에서 이민 광고를 본 사람들은 "묵서가(墨西哥)에서 4년만 일하면 부자가 되어 돌아온다"면서 고국을 떠날 생각을 합니다.'4년 계약. 주택 무료 임대. 높은 임금'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이 가난에 찌들려 살던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묵서가란 멕시코를 말합니다.
이때 일본의 인력송출회사가 모집한 인원은 남자 802명, 여자 207명 등 모두 1033명이었습니다. 이 1033명은 2년 전인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1905년 4월 4일 나라 도장이 찍힌 여권을 고이 품고 인천 제물포항에 모여 영국 상선(商船) 일포드(IIford)호에 오릅니다.
그리고 1905년 5월 15일, 그들은 40여 일의 험한 뱃길 동안 심한 멀미와 영양실조로 세 명이 죽고 한 명이 태어난 끝에 묵서가, 즉 멕시코에 도착합니다.
섭씨 45도 살을 찌르는 태양 아래 농장주들이 그들을 데려간 곳은 선인장처럼 날카롭고 단단한 가시들이 솟은 에네켄 농장이었습니다. 그들에겐 하루 에네켄잎 2천 장을 따라는 할당량이 주어집니다. 새벽 5시부터 밤 10시까지 17시간을 일하는 그들의 몸 구석구석은 에네켄 잎의 가시에 찔린 상처로 뒤덮였고 피가 마를 새가 없었으며, 이 와중에도 하루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사람은 농장관리자에게 채찍으로 맞아야 했습니다. 키 2미터에 줄기와 가시가 억센 열대 선인장 에네켄은 잎 모양이 용의 혀(龍舌)와 같다고 해서 용설란(龍舌蘭)으로 불립니다. 그리고 멕시코 이민자들을 가리키는 호칭이 된 <애니깽>은 스페인어 에네켄(Henequén)을 한국식으로 발음한 것입니다.
지상낙원으로 알고 멕시코에 왔던 그들은 그 모든 고통을 참고 견디며 일했지만 임금도 받지 못했고 임대주택이며 식량도 직접 돈을 주고 사야 했습니다. 결국 일을 할수록 빚만 늘어나는 나락에 빠진 그들은 사기 이민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1905년 7월 황성신문에 실린 중국인 허훼이의 편지에 따르면, "이곳 토인을 지구상 5~6등 노예라 칭했는데 한인은 7등 노예가 되어 우마 같다. 제대로 일하지 못하면 구타당해 피가 낭자하여 차마 못 볼 모습에 통탄 통탄이라 하였더라"며 당시의 처참한 생활상을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4년 계약 노동이 끝나고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고국이 사라져 버리고 여권도 쓸모없게 되어버리고 맙니다. 결국 그들은 다시 에네켄 농장의 가시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미주대한인국민회에서는 "우리가 도웁시다! 농장에서 갖은 고초를 겪던 우리 동포들이 또다시 곤경에 빠졌습니다. 멕시코 동포들을 하와이로 이주시킵시다!"라고 외칩니다. 멕시코 동포 구출 계획에 동참한 그들은 1902년 대한민국 최초의 계약 이민으로 먼저 고국을 떠난 사람들이었습니다.
1903년 5월 제국신문 사설에는 "유민원(이민담당기관)에서는 얼마씩이나 받고 허가하였으며 백성이 하와이 건너가서 어떻게 지내는지는 아는가" 하는 글이 실렸습니다. 소와 말, 짐을 싣는 3등칸에서 22일을 견딘 끝에 자국민을 보호할 영사관도 외교관도 없는 하와이에 상륙한 사람들은 3년간 약 7,200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사탕수수밭에서의 10시간의 중노동 속에서도 멕시코 동포들 고생하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던 그들은 일당 60센트를 쪼개고 세탁, 바느질삯을 보태서 모은 멕시코 동포들의 이주 비용을 6000달러를 마련합니다.
하지만 미국 이민국이 노동 입국을 허가하지 않아서 멕시코 이민자들을 구출하려 했던 그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그 후 어느 날 멕시코 에네켄 농장을 찾아온 일본 영사관원이 "조선은 이제 일본에 병합됐으니 일본은 당신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고, 우리는 인구조사차 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멕시코 이민자들은 "우리는 일본 백성이 아니다. 너희는 우리에게 요구할 아무런 권리도 없다. 이게 보이지 않느냐"며 그들에게 뭔가를 내보입니다.
그때 그들이 일본인들에게 내보인 것은 제물포를 떠날 때 받은 조국의 여권이었습니다. 그 후 1920년대 인조섬유가 등장하면서 에네켄 농장은 문을 닫고 한인 이민자들은 생존을 위해 다시 멕시코 전역으로 흩어져 가고, 이 중 270여 명은 쿠바의 사탕수수밭으로도 갑니다.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정착하여 오늘날 4만 명이 넘는 한인사회를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이상, 애니깽 멕시코 에네켄 이민자들..1033명의 여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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