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그리고 죽음
윤 영 애
오늘 친구 어머님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설 명절을 지나 돌아가셔서 다행이라고 하는 친구의 흐느낌 소리가 가슴을 적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50여년이 넘어서 연락처를 알게 된 친구다. 내가 여중 2학년때 수학여행을 경주로 가는데, 시골에 살던 나를 데리고 가 하룻밤을 재워줘 뵌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살면서 항상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었는데, 지금이라도 가시는 길에 성의 표시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다른 여고로 진학하는 바람에 소식이 끊겼던 친구라 더 애틋하다. 요양원에 계시다 영면하셔서 아무도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했다고 했다.
제 시모님은 신경성 당뇨병으로 고생하시던 모습만 본 것 같다. 42세의 젊은 나이에 홀로 되셔서 7남매를 키우시느라 온갖 고생을 하셨다고 했다. 얼굴도 고우시고 음식 솜씨도 무척 좋으셔서 주변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하지만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아가시느라 잠을 제대로 못 주무시다 보니 당뇨병이 심해지셨다. 그러던 어느날 “에미야~! 교회가면 마귀를 잘 쳐내서 당뇨병을 고친다는데, 너한테 미안해서...”하시면서 말꼬리를 흐리셨다.
“전 괜찮아요. 제가 모시고 살지도 못하는데 어머님 하시고 싶은데로 하세요.”라고 했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지나갔을까~? 점점 더 편찮으셔서 입원을 밥 먹듯이 하셨다. 7남매중 6남매가 이곳에 살고 있었는데도 둘째인 우리가 앞장서서 헤쳐나가야만 했다. 갑자기 호흡이 곤란해지셔서 중환자실로 가셨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오늘 밤을 못 넘기실 거라면서 다 가족들한테 연락하라고 하셨다.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마음속으로 빌었다. ‘지금 돌아가시면 고생만 하셔서 안되니까 좀 더 사셔야 된다고...’ 아들들이 병원에 있기로 하고 며느리들은 집으로 와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밤새워 연락이 없었다.
아침에 병원에 갔더니 입원실로 올라가 계셨다. 너무 감사했다. 그 긴 밤을 삶과 죽음 사이에서 사투를 벌이시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네 시아버님이 꿈에 나타나서 “내가 데리러 왔는데, 지금 안 데려가고 예순 일곱에 데리러 온다.”고 하셨다고 해서 다들 참으로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어머님 연세가 63세였다. 그리고는 1주일째 되던 날에 비보가 날라왔다. 47세이신 시숙모님이 갑자기 쓰러지시더니 금방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와서 고향으로 밤길을 달려갔다.
동네에 들어서니 세 집이나 초상이 났다. 다른 분들은 고령으로 돌아가신 거라고 했다. 기가 막혔다. 시어머님 대신 돌아가신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햇수로 2년 사이에 6명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초상을 치르면서 다들 의아해했다. 뒤늦게 안 사실이었다. 그것이 이 집안의 신의 바람이었다는 사실을...
시간이 지나자 시어머님은 신장투석까지 하셨다. 아침 7시부터 낮12시까지 5시간을 일주일에 세 번씩 하시느라 고생을 심하게 하셨다. 온 집안 식구들의 근심 걱정이었다. 증세가 점점 심하시더니 갑자기 충대병원에 입원을 하셨는데, 막내 아들(시동생) 결혼하는 게 소원이라시는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서 급하게 형님네와 우리가 혼인을 시켜 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더 이상 입원 하셔도 별다른 치료가 없으니 퇴원하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모시고 왔다. 투석하러 다니시는 거 말고는 해 드릴 게 없었다. 집에 오시면 후유증으로 벽에 기대어 거친 숨만 몰아 쉬시는 게 일과처럼 되었다. 서너 달이 흘렀을까 집안에 종교전쟁이 크게 났다. 갑자기 교회 안다니고 사월 초파일에 절에 가신다고 하셔서 하시고 싶은 대로 하시라고 했다. 절에 가셔서 절하고 나시더니 갑자기 언제 아팠었나 싶을 정도로 씩씩해지셔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셨다. 그 해가 아버님 데리러 오신다던 67세였다.
우리를 아시는 분들이 사업장으로 오셔서는 “둘째 아들 며느리가 잘해서 어머님이 살아 나셨다.”며 칭찬을 하시길래 “우린 잘해 드린 게 없구요. 맞는 종교를 믿으셔서 살아나신 거에요.”라고 했다. 추석 명절이 되어서 온 가족이 모였는데 모두들 신기하다고 했다. 바로 밑에 시누이는 교회 집사였는데, 건강하신 모습을 보고 무척 기뻐했다. 한 4년의 세월을 더 사시면서 막내 아들 손주 두 명이나 보시고 즐거워 하셨다. 낙상으로 고관절을 다치셔서 병원에 계시다가 잠깐 자식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혼자 운명하셨다. 너무나 안타까웠다.
시어머님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사시다 가신 분도 드물거라고 생각한다. 아들 낳았다고 구박도 받으셨다고 했다. 남들은 아들 못 낳아서 구박 받는다던데...
이 집안에는 고모할머니 고모님이 안 계셔서 딸을 무척 기다리셨는데, 아들 둘을 낳아서 구박 받다가 셋째로 시누이가 태어나서 너무나 기뻤다고 했다.
그래도 71세에 영면하셨으니 다행이라고 7남매들은 생각했다. 평안한 곳에서 잘 계실거라 믿는다. 삶과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존재한다. 즐거운 삶을 위해서 올 한 해도 최선을 다해야겠다.
2024. 2.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