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어느 모계의 꿈 이야기
선안나
친정엄마의 기일 무렵이라 엄마 생각이 계속 난다. 다른 이야기는 써지지 않을 것 같아서 우리 모녀의 꿈 얘기를 해볼까 한다. 실현하고픈 희망이나 바람을 뜻하는 꿈이 아닌, 예지몽에 대해.
그 전에 먼저 집안 분위기랄까, 배경을 말할 필요가 있겠다.
내 고향은 읍내서 이십 리 떨어진 산골이다. 전깃불 켜지던 순간을 내가 기억할 만큼 문명의 혜택이 늦었던 곳이다. 그런데 천주교 공소가 지어져 있었고, 우리 할아버지가 회장이셨다. 신앙의 오랜 뿌리가 있었던 건 아니고 조부모님 때 처음 세례를 받았다.
신자는 많지 않았다. 그나마 갈수록 줄어, 나중엔 공소 문을 닫았다. 그 후론 가족끼리 집에서 주일 예배를 보았다. 한두 해에 한 번쯤은 신부님과 수녀님이 집으로 찾아왔다. 그때마다 엄마는 점심을 준비했는데, 얼핏 소박해 보이는 정갈한 밥상이었다. 그러나 솜씨 좋았던 엄마의 음식 중에서도 가장 맛있었던 반찬들로 기억한다. 그만큼 정성을 들였던 거다.
삼촌 고모들이 분가하고 우리 형제도 성장하면서, 언제부턴가 가족 예배는 사라졌다. 교통도 안 좋고 농사일도 바쁘다 보니, 어른들의 읍내 성당 미사 참례 횟수도 뜸해졌다.
엄마가 꿈 얘기를 종종 한 것은 그 무렵부터였다. 그때는 흘려들었는데, 내가 결혼하여 멀리 떨어져 살면서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다. 몸이 몹시 아프거나 임신을 했을 때, 등단과 수상을 할 때도 바로 전화가 왔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어보면 간밤에 꿈을 꿨다고 했다.
꿈은 엄마만 꾸는 게 아니었다. 나 또한 가끔 스스로 믿기 어려운 예지몽을 꾸었다. 길몽도 잘 맞지만, 흉몽이 실현되면 서늘하고 두렵다.
예컨대 한번은 친정집 조부모님 방으로 화살이 마구 날아오는 꿈을 꾸었다. 방문 앞에서 팔을 휘두르며 내가 막아보려 애쓰다 잠에서 깼다. 기분이 이상해서 다음날 친정에 전화했더니 할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졌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그날 이후 일어나지 못했고, 여러 해 누워 지내다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특히 밤마다 꿈자리가 사나웠다. 이가 몽땅 빠지는 꿈을 꾸었고, 먼저 돌아가신 할머니가 슬픈 표정으로 처마 밑에 서 있는 모습도 보았다. 친정집 담장 옆으로 탈 것이 흔들리며 지나는데, 잠에서 깬 순간 상여인데 싶어 섬뜩했다.
며칠 후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후에야 꿈의 의미를 알았다. 예지몽은 실현된 후에야 해석이 가능하다. 전문 연구자나 수행자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웬 꿈 타령이냐고, 미신을 좋아하나 할지 모르겠으나 그렇진 않다. 내 과거고 미래고 남에게 물어볼 생각은 해본 적 없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엄마는 종종 무속인을 찾아갔다. 처음에는 신년 운세를 보는 정도이더니, 나중엔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 먼 곳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엄마가 뭘 물어보고 싶은지는 무당이 아닌 나도 알았다. 자식들 중에 가장 기대했으나 꼬이기만 하는 장남의 앞날이 언제쯤 풀릴지 궁금한 거였다. 삼 년 지나면 괜찮단다, 마흔 넘으면 편안한 거란다, 엄마는 무속인의 말을 위로 삼아 현실을 견뎠다. 세례받은 사람이 왜 그런데 가느냐고 완곡하게 말한 적은 있지만 비난하진 않았다. 오죽 했으면 싶어서.
그러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뒤, 나는 혼자 남은 엄마가 걱정되었다. 그래서 날마다 전화를 하여, 이 얘기 저 얘기 해달라고 청했다. 어디서 태어났고 어디서 자랐으며, 가족들은 어떠했는지 캐물었다. 그 얘기들을 들으며 엄마를 얼마나 모르고 있었던가를 알았다.
양반가의 자부심이 강했던 외할아버지의 가정교육 덕분인 듯, 엄마는 사려 분별 바르고 말씨나 행동이 남달리 반듯했다. 그런데 초등학교를 마치지 못했음을 그때 처음 알았다. 집이 가난해서가 아니라, 할머니가 무병을 앓아 일상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는 사실도. 아파서 방바닥을 기며 고통스러워하는 할머니 대신, 맏딸인 엄마가 넷이나 되는 동생을 돌보고 살림을 살아야 했던 거다.
내림굿을 받고 신을 모시자, 할머니 병은 씻은 듯 나았다. 아프지 않으니 울긋불긋 차린 신당이 보기 싫어 부숴버리곤 했는데, 그러면 다시 죽을 듯 아프길 반복했다. 엄마는 학교에 가다 말다 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졸업도 못 했다고 했다.
할머니뿐 아니라 가족들 삶이 엉망이라, 할아버지는 백방으로 해결책을 알아보았다. 그때 누가 교회에 나가면 괜찮다고 해서, 사십 리 떨어진 성당에 할머니를 데려갔다. 거짓말처럼 그때부터 아프지 않아서, 온 식구가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 후 외할머니 김마리아 여사는 성당에서 살다시피 하며, 근동 백 리를 펄펄 날아다니며 전도했다고 한다. 우리 엄마가 아버지와 혼인하게 된 것도, 양가 어른이 성당에서 맺은 인연이었다.
그 얘기를 듣고, 우리 모녀의 예지몽이 우연만은 아님을 알았다. 내가 왜 가끔 알지도 못하는 무속의 신이나 공간을 꿈에서 보는지도 이해되었다. 그렇다고 큰 의미를 부여하진 않는다.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도 있구나, 할 뿐이다.
엄마는 아마 삶이 더 힘들어서 꿈에, 무속에 더 끌렸을 것이다. 많은 재능과 욕구가 있으나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할머니나 엄마와 달리, 나는 글로 풀어내며 살기에 꿈이든 무속이든 덤덤할 수 있을 터이고.
내 딸은 꿈 얘기 같은 건 안 한다. 어릴 때부터 하고픈 일 몸으로 뛰어들어 해보며, 현실 속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는데 에너지를 쓸 뿐이다.
예지몽은 설명하기 어려운 면이 있지만, 통상 꿈은 자기 무의식의 반영이다. 의식이 숨기거나 자각하지 못하는 부분을 말해주기에, 꿈을 주시함으로써 자신을 좀 더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건 현실을 자기답게 사는 일이리라.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구애받지 않고, 딸이 자신을 활짝 실현하길 바란다. 나 또한 그랬으면 하고, 누구든 그러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