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몇 푼 찾아가지고 은행을 나섰을 때 거리의 찬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려 놓았다 대출계 응접 코너에 앉아 있던 그 당당한 채무자의 모습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신촌 일대를 지나갈 수 없었다 인조 대리석이 반들반들하게 깔린 보도에는 껌자국이 지저분했고 길 밑으로는 전철이 달려갔다 그 아래로 지하수가 흐르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시뻘건 바위의 불길이 타고 있었다 지진이 없는 나라에 태어난 것만 해도 다행한 일이지 50억 인구가 살고 있는 이 땅덩어리의 한 귀퉁이 1,000만 시민이 들끓고 있는 서울의 한 조각 금고 속에 넣을 수 없는 이 땅을 그 부동산업자가 소유하고 있었다 마음대로 그가 양도하고 저당하고 매매하는 그 땅 위에서 나는 온종일 바둥거리며 일해서 푼돈을 벌고 좀팽이처럼 그것을 아껴가며 살고 있었다
- 시집 『좀팽이처럼』(문학과 지성사, 1988) ...........................................................................
이 시는 80년대 후반 작품이라 일단 달라진 수치로 고쳐 말하자면, 지금의 세계 인구는 50억이 아니라 75억이다. 그리고 서울은 특별시에 한정한다면 출산율 저조와 함께 수도권 외곽으로 밀려나는 가구가 꾸준히 늘어난 탓에 1,000만이 무너져 984만 (2018년 2월 통계 기준)이다. 토지공개념을 환기시키면서 80년대 중반 우리의 경제 현실을 그린 이 시는 한창 군부독재가 판을 칠 무렵 전아무개가 2천억을 신나게 해먹을 당시의 이야기다. 한국의 부자들이 부동산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각별해지기 시작한 시기도 이 무렵이었다.
여기 등장하는 신촌 땅 부자의 위세도 대단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부동산이라면 대한민국에서는 신촌 보다는 강남이다. 그 잘나가는 강남의 땅값은 어제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물론 땅값은 아파트 가격을 포괄하는 의미다. 이 나라에서 가장 부자 동네인 이곳은 한번 입성하면 절대 나가려하지 않고 밖에서는 새로 비집고 들어가려고 돈 보따리를 꽉 틀어쥔 채 대기하는 곳이다. 돈으로 도색한 그들만의 별종 문화가 끊임없이 생산되는 곳. 우리는 그곳을 서울시 '강남 특별구'라고 칭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선망한다.
되짚어 보면 해마다 혹은 해거름으로 불어 닥친 부동산 이상 열기의 중심지역. 버블이라 규정짓고서도 그 열병은 좀처럼 식지 않아 돈 놓고 돈 먹기와 강남불패의 '아파트 따먹기'전쟁이 끊임없이 진행되는 곳. 그들의 집값을 지키기 위해 사교육 시장을 유지하고, 입맛에 맞는 구청장 의원 교육감 시장 대통령을 뽑으려 했고, 아파트 값 떨어질까 우려해 오래전엔 관할에 있던 공고를 기어이 폐교시켜버리고, 상고 출신 대통령과 여상 출신 영부인을 도저히 아니꼬워서 못 봐주겠다며 내내 뒤흔들어댔던 진원도 그곳이었다.
그들이 뻐기면서 돌아다니는 땅 '아래로 지하수가 흐르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시뻘건 바위의 불길이 타고 있'으나 그들은 토지의 가치를 공유하길 거부하며 배타적 사용권만을 누리고자 한다. 이로 인해 개인, 계층, 지역 간 부와 소득의 골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젠 강남만의 일이 아니다. 서울과 지방의 집값이 사상 최대치로 격차를 벌려 서울 아파트 평균 가격은 8억에 이르렀다. 그들에게 분배의 왜곡을 수정하고자 하는 모든 정책은 불순한 좌익의 수작으로 보일 뿐이었다. 하긴 그들조차 지난 정부의 무능과 깽판에는 혀를 내두르긴 했다.
그 쪽팔림으로 그들 가운데 절반은 이 정부의 탄생을 도왔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와서 투기세력과 부동산업자가 들쑤시니 감춰둔 재테크의 촉이 가동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노무현 정부에서 식겁했던 추억이 있는 문재인 정부로서도 여러 규제카드를 내밀어보지만 약발이 먹히지 않는다. 이 땅에서 돈 버는 길은 사기 아니면 투기라고 했다. 북의 핵 폐기보다 더 지난한 일이 투기를 잡는 일이다. 부동산업자의 집값 띄우기 작전은 사기와 진배없다. 실거래가보다 1억을 더 받아주겠다고 부추기면 그게 곧장 시세로 형성되곤 한다.
부동산업자 입장에서는 거래가가 높을수록 수수료 수입이 늘어나고, 주민들로서는 더 높은 가격에 팔 수 있으니 ‘윈윈’인 셈이다. 일부 주민들은 담합하여 낮은 가격에 집을 내놓은 중개업소를 단속하기도 한다. 그렇게 올려놓은 집값에, '양도하고 저당하고 매매하는 그 땅 위에서' 누구는 목돈을 벌고 누구는 놀아나고 또 누구는 '온종일 버둥거리며 일해서 푼돈을 벌고 좀팽이처럼 그것을 아껴가며 살'아가야 한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아무리 규제한들 정권이 바뀌면 풀릴 테니 그냥 버틴다는 것이다. 어쨌든 사유재산에 대한 선택문제이긴 하나 제발 그들이 ‘공공의 적’만은 되지 않길 바란다. 권순진 |
출처: 詩하늘 통신 원문보기 글쓴이: 제4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