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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4) *
1,이성계의 반란
1388년 5월22일 이성계는 개경으로 회군하여 4천에 불과한 최영의 수비군을 격파하고 최영을 체포했다
최영은 우왕의 장인이자 군의 원로로서 청렴한 인물이었으며, 이성계에게는 뒤를 돌보아 준 아버지와 같은 인물이었다.
골수 친원파였다가 친명파로 돌아선 이성계는 명의 연호를 사용하고 명의 격식과 의관을 따르게 했다.
전권을 쥔 이성계는 우왕을 강화도로 귀양 보내고 우왕의 아들인 9살 창을 옹립하니 그가 33대 창왕이다.
코너에 몰린 우왕은 최영의 측근들과 이성계 제거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강릉으로 유배되었고
이성계는 다시 정계 숙청에 나서서 이색과 조민수를 폐하고 사람을 보내 우왕과 창왕을 죽였다.
이때 우왕의 나이25세, 창왕은 10세였다
이렇게 이성계가 전 왕들을 모두 참살하고 전권을 쥐자 이에 반발한 사람이 그 유명한 단심가의 주인공 정몽주였다.
*단심가현대판*
이 몸이 죽고 또 죽어 백 번을 다시 죽어서, 뼈가 가루가 되어 흙이 되고
넋(영혼)이 있든 없든 간에,
임(고려 임금)을 향한 나의 변치 않는 붉은 마음이야 변할 리가 있겠는가
이성계는 문병 온 정몽주를 아들 이방원을 시켜 정몽주를 회유하려 했으나 (여러분~하여가 아시져?)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의미: 대세에 따라 조선 건국에 동참하자는 회유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정몽주는 그 유명한 **'단심가'**로 답하며 거절했죠.
정몽주가 이를 거절하자 이방원은 조영규를 시켜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때려 죽여 버렸다.
이성계 일파로 부터 역적의 누명을 쓴 정몽주는 거리에 수급이 효수되었으며 그의 집은 적몰되었다.
이성계는 공양왕을 재위 4년만에 폐위시키고 원주로 내쫓았다가 후에 살해했다.
공양왕은 원래 왕 같은것은 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중신들이 추천한 왕족 중에 후보로 들게 되었다.
후보들이 시원치 않아서 누구로 왕을 시킬지 설왕설래 하고 있는데 그 중에 한명이 기찬 아이디어를 냈다.
이렇게 어영부영 시간을 보낼게 아니라 화끈하게 제비를 뽑아 결정합시다." 그래서 당첨되어 왕위에 오른 사람이 공양왕이었다.
빌어먹을... 제비에 뽑힌 바람에 제 명에 못 살고 겨우 4년동안 왕 노릇을 해 먹은 다음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재수가 없는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로써 고려는 34대 474년으로 수명을 다했다
♧ 한양 천도와 왕씨의 멸절 ♧
고려가 망하자 개경 인심이 이성계에게 좋을리가 없었다.
그들이 존경하던 정몽주, 최영같은 충신들이 처형되는 것을 보면서 힘없는 백성들도 속으로는 이성계를 엄청 씹었다.
개경의 백성들은 만두속에 들어가는 돼지고기를 '성계육' 이라 부르면서 다부지게 칼질을 하였고,
뒷간을 '서각' 이라 불렀다.
서각은 이성계의 집무실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이러니 이성계가 개경에 정을 붙이고 살 수 있었을까?
이성계는 개국한지 2년만인 1394년 정도전을 시켜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도록 했다.
정도전은 도시를 용도에 따라 구획하고 17km 에 달하는 성벽을 쌓았다.
개경에 정이 떨어져 천도를 서둘던 태조는 궁궐의 초석이 채 놓이기도 전에 한양으로 천도했고.
조선 조정에서는 개성 출신을 중앙에 등용하지 않았으니 개성의 선비들은 장사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성계는 조선을 세우자마자 약 3만명에 달하는 전국의 왕씨들을 모조리 검거하여 재산을 압수한 다음
강화도와 거제도로 옮기게 하면서 배에 구멍을 뚫어 바다속에 수장을 시켰다(쯔쯧 이런~)
일부 살아남은 왕씨들은 성을 '전' 씨나 '옥'씨, '신'씨 등으로 바꾸고 숨어 살았다.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5)*
* 두문동의 전설 *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자 그 꼴을 더 이상 볼 수 없어 보따리를 싼 고려의 관리들과 학자들은 조정을 떠나거나 산으로 숨어들어 야인이 되어 살았다.
유명한 두문동 72현을 비롯하여 수많은 벼슬아치들이 산에 올라 조회때 쓰는 관을 벗어 소나무에 걸어놓고
패랭이로 바꾸어 쓴 후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으며 뒷사람들은 그곳을 '부조현'이라 불렀다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시 광덕산 기슭에 있었으며
서두문동에서는 72인의 선비가, 동두문동에서는 48명의 무인이 자리를 잡고 2개의 큰 문을 세워 빗장을 닫아걸고 세상과 연을 끊고 살았다 한다
이성계는 두문동에 들어간 사람들을 설득하려 했으나, 씨가 먹히지 않자 불을 질렀다.
그들이 뛰쳐 나오면 벼슬을 주고 함께 새로운 세상을 도모하려 했던것이다.
그러나 두문동 선비들은 하나도 뛰쳐나오지 않고 모조리 불에 타 죽었다고 전해지며,
여기에서 '두문불출'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겨났으니
이말은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포함한 말인것이다.
두문동 72인 스토리와 정몽주의 선죽교 충절 스토리는 조선후기 영조때 만들어졌다
고려 왕조가 망하면서 두문동에 들어갔다는 72인중에는 이미 그 전에 죽은자도 여럿 있었고,
조선 조정에서 벼슬한 (이래도 흥~저래도 흥! 황희정승)자도 여럿 있어서 두문동 전설은 반은 사실이고 반은 사실이 아닌 것이다.(뭣이 중한겨? ㅎ)
♧ 소설 함흥차사 ♧
이성계는 정변을 일으켜 동생들인 방번, 방석을 죽이고 자신을 찬밥으로 만든 아들 방원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함흥으로 은퇴했다.
(거봐~누가 그리 욕심을 부리래?)
방원은 자신의 잘못을 알고는 있었으나,
유교를 국시로 한 조선에서 부친인 이성계를 모시지 못하자 대외적으로 불효가 말이 아니었다.
그는 신하(차사)들을 보내 이성계를 설득하려 했으나, 이성계는 자신을 설득하러 오는 신하들을 모조리 활로 쏘아 죽였다는 유명한 스토리가 바로
함흥차사 이다
여기에서 잠깐 박순이 이성계를 찾아간 스토리를 알아보자!
아무도 차사로 함흥에 가려는 사람이 없자 이성계의 친구였던 박순이 나섰다.
어미 말과 새끼 말 두마리를 챙긴 박순은 이성계가 가까이 보이는 곳에서 새끼 말을 묶어둔채 어미말을 끌고 이성계 앞으로 나아갔다.
어미말은 새끼가 따라오지 않자 뒤를 돌아보며 울부짖었고, 이를 본 이성계가 박순에게 " 왜 그리하느냐?" 고 물었다.
박순 왈 " 미물조차도 새끼가 따라오지 않으면 발길을 떼어놓지 못하는데 하물며 사람은 어찌 하겠느냐?"
이 말을 들은 이성계는 마음의 감동을 얻어 도성으로 돌아가겠다고 했고
이에 반대한 신하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박순을 끝내 죽여야 한다고 주장을 했다.
친구인 박순을 살리고 싶었던 이성계는 " 박순이 용흥강을 건넜으면 살려주고
아직 건너지 못했으면 죽여라!" 명령을 내렸다.
자신의 일이 성공했음에 안도의 숨을 쉰 박순은 이 사실도 모른채
그만 설사병이 나서 용흥강을 건너지 못한채 주막에서 세상을 하직했다.
(이룬~하필이면 그때에 설사라니..)
사실 함흥차사란 없었다
이성계에게 갔던 사람들이 다 죽었던 것도 아니었으며, 결국 이성계는 무학과 성석린의 권유로 도성으로 돌아왔다.
실제 죽은 것으로 전해지는 인물인 박순도 조사의 난때 반군에게 죽었다.
함흥차사는 완전 소설인 것이다.
(아셨죠? 다 소설이랑께..)
♧ 최대 성씨 김씨의 출현 ♧
김씨는 우리나라 성씨중 20%나 차지해 2000년 기준으로 약 천만명이 김씨이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김씨의 성은 언제 생겼을까?
사서에 따르면 신라4대 탈해왕때 경주 계림의 숲에서 닭 울음소리가 들려 이 일대를 수색하니 한 소나무 위에 금궤가 매달려 있었고
금궤를 여니 사내아이가 들어 있어 금궤의 이름을 따서 김알지라 했다 한다.
김알지가 바로 경주 김씨의 시조이다.
알지의 이름은 금알지가 맞다.
그런데 왜 김알지로 부를까?
(갸우뚱~나도 몰러유~)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그 일파들은 '십팔자위왕' 이라는 요언을 만들어 퍼뜨린 일이 있었다.
십팔자'란 한문으로 '오얏 이'자를 파자한것이고 '나무 목' 자와 '아들 자' 를 함께 붙이면 역시 '오얏 이
자가 된다.
즉 이씨가 나라를 얻을것이라는 억지 동요를 만들어 촌놈들을 헷갈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씨를 오행으로 풀어보니 나무는 흙을 이기고, 흙은 물을, 물은 불을, 불은 쇠를, 그리고 쇠는 나무를 이기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도통 무슨 소리인지? 하여튼 한자로는 이씨에 나무목이 들어가니 그런게야~)
이렇게 보니 조선왕조를 세운 이씨에게 '쇠금' 씨가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백성들중에 가장 많은 금씨를 모조리 바다속에 수장시켜 버릴수도 없고 해서 머리를 굴린것이 '금씨의 기운을 약해 빠지도록 만들자!' 라는 아이디어였다.
그래서 쇠금자를 쓰기는 하되 읽을때는 다른 발음인 '김'으로 읽어라 하는 왕명이 나왔고
그때부터 우리나라의 '금'씨는 모두 '김'씨로 바뀌었다는 말씀!~~^^
이어서~~~~~~~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 왕을 참하라(6)*
* 경세가 삼봉 정도전 *
정도전은 고려말, 조선초 10여년간 개혁의 주체로서,
또한 조선건국의 이념을 제공한 이론가로서 개국공신 중 첫 손가락에 꼽히는 인물이다.
정도전의 집안은 본래 봉화지역의 토착세력인 향리집안 출신이다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은 형조상서를 지냈으며, 평생 청렴하던 당대의 청백리였다.
정도전은 어머니의 신분때문에 여러차례 곤란을 겪었는데, 어머니는 말단 무관 우연의 서녀였다.
우연의 부인은 김전 이라는 승려가 여종과 정을 통해 낳은 여인이었고,
이 여인이 정도전의 외할머니인 것이다
이러한 어머니의 미천한 출신배경때문에 정도전은 관직 허가증을 얻지 못하는 곤경에 처했었고 여러차례 정도전을 반대하는 무리로 부터 공격을 받았다
(예나 지금이나 금수저가 최고군~ㅠㅠ)
정도전은 공민왕 9년(1360) 19세의 나이로 국자감시에 합격했다
정몽주가 장원, 목화로 의류혁명을 일으킨 문익점도 이때 함께 급제했다.
정도전은 고지식하고 청렴하여 대인관계에 쉽게 적응할 수 없었다.
원나라 사신의 마중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유배생활을 하던 정도전은 백성들의 힘든 삶을 직접 목격하면서 민본 사상을 키워나갔다
정도전이 회진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어느날! 들녘에서 한 농부를 만났다
그 농부는 정도전을 보고 당시 관리들이 '국가의 안위와 민생의 안락과 근심 시정의 득실, 풍속의 좋고 나쁨' 에 뜻을 두지 않으면서 헛되이 녹봉만 축내고 있다며 질책하였다
촌로의 이러한 발언은 정도전에게 백성을 위하는것이 어떤것인가를 다시 마음에 새기는 계기가 되기 충분했을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내세우게 된 사상은 민본을 바탕 으로 신하가 중심이 되어 나라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재상중심 주의였던것이다
고려조정의 핍박을 받고 이래저래 10년 정도 야인 생활을 한 정도전은 42세때
여진족 호발도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동북면에 나가 있던 49세의 이성계를 찾아 나섰다.
이성계를 본 정도전은 군영앞에 서 있던 노송에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겨 놓았다.
아득한 세월에 한그루 소나무
푸른 산 몇만 겹속에 자랐구나
잘 있다가 다른해에 만나볼수 있을까
인간을 굽어보며 묵은 자취를 남겼구나
이시에 대해 '용비어천가'에서는
정도전이 이미 천명의 소재를
(이성계를 말하는거니?)
알고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병법에도 대단히 해박했던 정도전은 이성계와 죽이 잘 맞아 이성계의 야망을 부추겼으며 모사를 자청했다.
이성계가 역성혁명에 성공한후 정도전은 자신을 한나라의 모사인 장량(장자방)에 비유하여 자신의 공을 자랑하곤 했다.
유방이 장량을 이용한것이 아니라 장량이 유방을 이용하여 한나라를 세운 것같이 자신이 이성계에게 꿈과 포부를 불어넣어 조선을 개국했다는 자부심을 잔뜩 가지고 있었다.
정도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법전인 '조선경국전' 을 편찬해 경국대전의 기초를 쌓았고,
'불씨잡변'을 통해 불교를 비판 숭유억불의 정책을 이어 나갔다.
(불씨잡변이란)
불씨(佛氏): 부처(석가모니)를 낮추어 부르는 말입니다. '부처가 하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잡변(雜辨): 조목조목 따져가며 비판(변박)한다는 뜻입니다.
즉, **"부처의 잡스러운 이야기들을 조목조목 논박한다"**는 공격적인 제목입니다.
*집필 배경*
"왜 불교를 공격했나?"
고려 말기, 불교는 국가 정신의 중심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며 부패가 심해졌습니다.
사찰은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면세 혜택을 누렸으며, 승려들은 정치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정도전은 **성리학(신유학)**을 바탕으로 한 '새 나라 조선'을 만들기 위해, 불교의 사회적·철학적 기반을 완전히 무너뜨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주요 비판 내용 (핵심 논리)*
정도전은 논리적인 비판을 위해 불교의 교리를 여러 각도에서 공격했습니다.
*구분 주요 비판 내용*
인륜 파괴 부모를 떠나 출가하는 것은 효(孝)에 어긋나며, 이는 곧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라고 보았습니다.
경제적 폐해 승려들이 생산 활동을 하지 않고 구걸(탁발)이나 시주에 의존하며, 군역과 세금을 피하는 것을 국가 경제의 좀으로 규정했습니다.
철학적 허구 윤회설이나 인과응보설이 증명할 수 없는 허구이며, 사람들을 현혹시켜 현실 정치를 외면하게 만든다고 비판했습니다.
공(空) 사상 유교가 현실의 '삶'을 중시한다면, 모든 것을 '비어 있다'고 보는 불교의 허무주의는 국가 운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
이 책이 나온 후 불교계에서는 함허득통(涵虛得通) 스님이 『현정론(顯正論)』 등을 통해 정도전의 비판에 맞서 불교의 정당성을 옹호하기도 했습니다.
다시돌아가서^^
정도전은 몸이 비대하고 각기병에 시달리고 있어서 병법에 해박함에도 불구하고 직접 병사를 지휘할수는 없었다.
정도전은 제1차 왕자의 난때 60대 초반의 나이로 이방원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방원과의 갈등은 앞으로 전개될 1차 왕자의 난때 좀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경복궁을 세울때 오고갔던 무학대사와의 파워게임을 다루며 글을 맺으려한다.
경복궁의 마스터플랜을 세울때 무학대사는 인왕산(서쪽)을 등에 진 동향궁을 주장했으나
결국은 정도전의 의지대로 남향궁으로 지어지게 되었다.
이때 무학대사가 북악산을 주산으로 한 남향궁을 지을 경우 일어날 갖가지 풍수적 예언과 경고를 남긴 것이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무학은 예언하기를, 영천 무악재 고개에는 3천선사가 수도할 것이라고 했는데 거기엔 일제강점기에 3천명을 수용하는 서대문형무소가 생겼고
낙산 아래에서 인재가 쏟아져 나온다고 했는데 나중에 서울대가 자리잡았다
(요것 봐라~~ 무학대사가 아직 살아있다면 한수 물어보러 가야하는것 아님?)
또한 서쪽은 인왕산이 너무 강해 군부가 장악하게 된다고 했는데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고
동쪽 낙산은 너무 약함을 걱정했는데 임진왜란, 한국전쟁때 적군이 동대문으로 입성했다
남쪽에서 한양을 내려다보는 관악산은 병오가 낙맥한것(빨간 말이 어쨌다구? )
이기 때문에 경상도 정권이 생긴다고 했다는 것이다.
왕십리의 전설을 갖고 있는 무학대사는 풍수의 논리에서도, 정치적 파워게임에서도 정도전에게 패배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은 결국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정도전과 무학중 누가 더 상수였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