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5월3일 목. [(홍)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제1독서
"주님께서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5,1-8
복음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6-14
◈ [수원] 성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 축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5월3일 목. 성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 축일
복음: 요한 14,6-14: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오늘은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이다. 성 필립보는 벳사이다
출신으로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을 만나 사도가 되었다
(요한 1,43-44). 최후의 만찬 때에 주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8절)하고
청한 분이다. 성 야고보도 역시 열 두 사도 중의 한 분이며 알패오의
아들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야고보에게 나타나셨고
(1고린 15,7), 야고보 서간을 저술하신 분이시다.
오늘의 복음은 부활4주간 토요일의 복음이 다시 읽혀지고 있는데,
예수님이 바로 우리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며, 당신이
하시는 말씀은 모두가 진리이고, 살아있는 모든 생물에게 생명을
주시기도 거둘 수도 있는 권한을 가진 분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러한 권한을 가지신 분은 하느님뿐이신 데 하느님께로 나아가고자
하는 자는 누구도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도
알게 될 뿐 아니라 하느님을 “이미 뵌 것이다.”(7절)고 하신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필립보가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8절)하고 있다.
예수님은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9-10절)하신다.
즉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당신은 하나이시며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우리는 잘 알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참 모습을 우리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모습은 아닐 것이며 믿음도 필요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내가 예수님을 한번만이라도 내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열심히 살 수 있을 텐데!”
그러나 나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이는 그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알 수 있고 볼 수 있도록
우리와 같은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고 이 세상에 오셨는데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중심은
바로 예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고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셨는가에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고 어떻게 행동하실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서 순간을 위해 노력한다면 그 안에서 우리는
참된 길을, 진리를, 생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대단히 어려운
큰 일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조그마한 일들 안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2018년 나해 5월3일 목.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언제부터인지 걷는 것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스마트 폰에는 하루에
걷는 걸음의 수가 자동으로 기록되는 웹이 있습니다. 하루에 평균
이만 걸음은 걷고 있습니다. 거리는 대략 14킬로 정도 됩니다.
고등학교 이후로 지금까지 거의 체중의 변화가 없는 것도, 아직까지는
큰 이상이 없는 것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 기도할 수 있는 것도 어쩌면
매일 규칙적으로 걷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명동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걸을 수 있는 곳이 참 많습니다. 청계천을 따라 걸을 수 있고,
경복궁까지 걸어 갈 수 있고, 남산을 한 바퀴 돌 수 있고, 혜화동
신학교도 걸어 갈 수 있고, 장충동 분도 피정의 집도 걸어 갈 수
있습니다.
걷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되지만, 영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걸으면서 묵주기도를 하기도 하고,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기도 하고, 걸으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하기도 합니다. 또
걸으면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새로 생긴 가게를 보기도 하고,
지하도에 전시된 그림도 보기도 하고, 하늘의 구름도 보기도 하고,
뺨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를 걸었고 약속의 땅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걷다가 주님을 만나서 성경 말씀을 들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빈 무덤을 향해 뛰어갔습니다. 박해를 피해 도망가던
베드로 사도는 길 위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걸어가서
순교를 하였습니다. 바쁜 생활이지만 시간을 내서 걸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얼굴은 나이를 먹으면 노화에 이르게 됩니다. 어떤 곳이 가장
먼저 노화가 될 가요? 눈이 가장 먼저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면 감을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현대인들은
텔레비전을 보고, 컴퓨터 모니터를 보기 때문에 눈이 더욱 피로해
진다고 합니다. 안보아도 될 것들을 너무 많이 본다는 뜻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각막을 기증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도를 많이
하고, 기도 중에 눈을 많이 감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음은 치아가 노화된다고 합니다. 물론 많이 씹기 때문입니다.
음식만 씹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험담을 하고, 뒤에서 욕을 하면서
우리들의 입을 가만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험담과, 시기와
질투의 말들은 나의 이를 늙게 만드는 것이니,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귀라고 합니다. 귀는 거의 사용하지 않아서 싱싱하다고
합니다. 우리는 남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은
의식이 없어도 귀는 열려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숨이
넘어갔어도 병자성사를 드리기도 합니다.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부자가 된 젊은이가 자신이 부자가 된 비결을 말했다고 합니다.
자신은 지갑을 열어 돈을 쓸 때, 늘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돈을 쓰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니 돈 들도 기분이 좋아서 다시
돌아왔다고 합니다.’ 우리는 돈을 쓸 때, 아까워하면서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무금을 낼 때도, 헌금을 할 때도, 누군가를 도울 때도
아까워하면서 돈을 쓰면 돈들도 다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버린다고 합니다. 우리는 돈을 쓸 때도 감사하면서 기쁘게 써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돈들도 기분이 좋아져서 다시 돌아 올 테니까요.
현실을 바라보며,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은 성공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래를 바라보면서 현실을 준비하는 사람은 성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의 현실 때문에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현실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를 성공에로
이끌어 준다고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으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고, 하느님 오른 편에 계시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사도들의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들 또한 십자가의 영성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키 작은 꽃도 아름답습니다!
2018년 나해 5월3일 목.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요한 14,6-14
키 작은 꽃도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두 명의 야고보가 등장합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야고보란 이름이 그만큼 흔한 이름이었던가 봅니다. 한분은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 사도이고, 다른 한분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사도입니다.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 사도는 열 두 제자들 가운데, 넘버원 베드로
사도, 넘버투 요한 사도에 이어, 넘버쓰리 사도였습니다. 예수님
제자들 가운데 간부급 제자, 핵심제자단의 일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타볼산에 올라가실 때에도 세 제자만 따로 데리고
올라가신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야고보 사도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사도입니다. 넘버쓰리 야고보 사도(대 야고보)와 구분하기 위해
‘소 야고보’, 혹은 ‘작은 야고보’라고도 불립니다.
넘버쓰리 야고보 사도는 그나마 성경 안에서 그분의 희미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 사도의 형’,‘주님의 형제’란 호칭이 그에게
붙여졌습니다. 핵심제자단의 일원으로 예수님 지근거리에서 활동했던
자취들도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알패오의 야고보 사도에 대해서 복음은 철저하게 침묵하고
있습니다. 열두 제자들을 소개할 때,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임을
밝히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나마 바오로 사도께서 코린토 교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 딱 한 번 그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야고보에 이어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것 역시 둘 중 대소(大小) 야고보 중 누구를
칭하는지 명료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제자들에 비해 성경이 철저하게 침묵하고 있으며, 베일에 가려져
있는 소야고보 사도,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묵상을 해봅니다.
인류 역사 안에 이름이 굵은 글씨로 새겨진다는 것, 자신의 행적과
업적이 만방에 알려진다는 것, 아주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럴 수는 없겠지요. 모든 사람이 다들 무대 전면에 나서서
마이크를 쥘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멋진 한 바탕 무대를 꾸미기 위해서 누군가는 뒤에서 묵묵히 땀흘리며
희생해야 합니다. 행사 며칠 전부터 무대를 설치하기 위해 밤늦도록
망치질을 하는 사람, 행사에 필요한 제반 설비들을 끙끙대며 나르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성격상 아마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가 생각합니다.
다른 사도들이 누가 높은가 길에서 따지고 다툴 때, 다른 제자들이
세상 사람들 앞에 더 드러나기 위해 기를 쓸 때, 무대 뒤에서 그저
아무 말없이, 주님의 일을 하던 사람, 과묵한 사람, 진중한 사람이
소야고보 사도였을 것입니다.
다른 사도들이 세상 사람들 앞에 나서서, 용감하게 스승 예수님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회개시키는 일들 앞에 마치 내 일처럼
기뻐했던 사람, 동료들이 복음선포를 잘 해낼 수 있도록 뒤에서
말없이 기도하고 지지하고 헌신하던 사람, 그가 소야고보 사도였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종류의 꽃들이 있는데, 다들 키큰 해바라기처럼 큰
꽃들만 있다면 얼마나 웃기겠습니까? 다들 화려한 장미꽃으로만
존재하려고 한다면 얼마나 어색하겠습니까? 때로 수수한 싸리꽃도
필요하고, 때로 키작은 난장이 패랭이꽃, 잘 보이지도 않는
‘개미눈물꽃^^’도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도 이런 사람을 더 많이 필요로 합니다. 거침없으면서도
재미있는 강론으로 신자들의 박수갈채를 한 몸에 받는 명 강론가
신부님들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루 온 종일 강도 높은 노동으로
퉁퉁 부은 신자들의 발을 오래도록 정성껏 씻겨줄 키작고 겸손한
신부님들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세상 그 어디도 하소연 할 곳 없는
상처투성이뿐인 신자들의 마음을 고백소 안에서 따뜻이 어루만져줄
자상하신 신부님들도 꼭 필요합니다.
누가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지는 일에 충실한 침묵의 사도가 우리에게 더 많이 필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과 박수갈채보다는 주님께서 주실 상급과
칭찬만을 생각하는 익명의 사도, 익명의 의인, 익명의 천사가 더 많이
필요합니다.
한없이 부족하고 부끄러운 제 글을 끝까지 읽어주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늘 하루도 좋으신 우리 주님의 축복과 따뜻하신
우리 어머니 성모님의 동반 아래 기쁘고 충만한 하루 되시길 빕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 6)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5월3일 목.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 6)
길은 길을 갈망하고 진리는 진리로 이어지고
생명은 생명으로 다시 뜨거워집니다.
비천한 한 사람이 길과 진리, 생명이신
예수님을 드디어 만나게됩니다.
흔들리지 않는 진리는 바로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진리가 진리인 것은 하느님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에게서 소중한 우리자신을
하느님안에서 찾게됩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죄를 없이 하시는 생명이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향하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힘들고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이 계시기에
희망으로 말씀을 받아 삼킵니다.
예수님에게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묻고 배우는 구원의 시간되십시오.
구원이란 성 필립보처럼 성 야고보처럼 이 모든 것을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길을 진리를 생명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기타] 두 가지 눈 : 오늘의 능력말씀
2018년 나해 5월3일 부활 제5주간 목요일
두 가지 눈
오늘은 “두 가지 눈”이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열왕기하 6장 16절 말씀에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괴롭히던 아람 군대는 번번이 공격하여도 실패를 합니다.
어떻게 정보가 새어나갔는지 항상 미리 방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원인을 알아보니 선지자 엘리사가 아람 왕의 침실에서 하는
말까지 다 듣고 이스라엘의 왕에게 고하기 때문이라는 보고를
받습니다.
그래서 아람 왕은 군대를 보내서 엘리사를 포위하여 잡아오게 합니다.
그 때 엘리사의 종이 아람 군대가 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엘리사가 종에게 한 말이 오늘 본문에 있지요.
그리고 엘리사가 하나님께 종의 눈을 열어 보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자 사환의 눈이 확 열리면서 엄청난 불 말과 불 병거가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는 걸 사환에게 보여줍니다. 입이 딱 벌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에게는 두 가지 눈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바로 육신의 눈과 영의 눈입니다. 육신의 눈이 아무리 시력이 좋다
해도 영의 눈이 깜깜하면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영의 눈이 열리면 아무리 많은 악한 마귀가 우리를 공격해
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막강한 하나님의 천군 천사가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의 눈이 활짝 열려
기도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청주]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5월3일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요한14,6-14)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는 옛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짐작하여 알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오래도록
함께 지낸다 해도 마음의 문을 열어 서로를 내 보이지 않는 이상
상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내 보여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 닫혀 있으면 상대를 알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문을 열고 또 읽을
수 있는 관계형성을 다져야 하겠습니다. 비록 어둔 밤일지라도 마치
남의 이목이 집중된 장소에서 하듯 눈속임이 없는, ‘동상이몽’이
아니라 ‘이심전심’의 마음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뵙게 하여 달라고 청하는 필립보에게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동고동락하셨지만
아직도 믿지 못하는 필립보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함께 있었다고 해도 마음의 일치를 이룬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실 가정 안에서도 고부간, 부부간에,
부자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함께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마음’으로 있었느냐가 중요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15,11-32)에서 보면 작은 아들이 방종한
생활을 청산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주며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때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를
타이르자, 그는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하며 불만을
토로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그에게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큰 아들이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고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고 하니 참으로 훌륭한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가 불평을 하는
것을 보면 아버지의 마음을 완전히 읽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 곁에 있었으나 아버지와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섬겼으나 아버지의 마음과 하나 되지 못하였고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지 않았으나 아버지의 뜻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너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하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신앙생활을 합니다.’하고 말하면서도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으니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14,12-13). 고 약속해 주셨음에도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나 봅니다. 그분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은 고사하고 그분의
일에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으니 믿음이 부족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부족한 저의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당신을 안다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은총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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