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1592년 일본이 중국을 정벌하고 자신들도 황제국이 되겠다고 침략전쟁에 나서자,
대명가도의 전장이 다 된 조선은 아비지옥이 되어
그동안 수천 수만년 가꾸어오던 역사유적은
돌로 된 것을 빼고는 대부분 불속에 연기로 사라지고,
백성 또한 인구의 절반이넘는 수백만명이 죽어 없어졌다.
그런 고통을 당하고서도 조선이란 나라가 망하지 않고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다를 철저히 지킨 이순신장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장군은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으나,
그 공로를 인정 받은 것은 그로부터 200년도 더 지난 후에야 당시 임금인 숙종으로부터 였다.
숙종은 이순신장군의 생가에 현충사를 건립하고 사당을 지어 그의 공적을 공인하였다.
그리고 현충사라는 편액을 내렸다. 이로써 충무공은 한민족의 영원한 성웅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조선이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는 시절이 되자
한 때 퇴락의 시절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도 1932년 충무공유적보존회를 조직하고,
당시 동아일보가 성금을 모금하여 현충사를 중건정비하였다.
이후 해방된 뒤에 혼란기를 거쳐
1967년에 경내 구역을 16만여 평으로 확장하고 홍살문을 설치하여 성역화하고,
고택을 복원하고 장군의 영정을 그려서 봉안하였다.
이렇게 이루어진 현충사는 한민족이 존재하는 한
영원한 민종의 영웅인 충무공 이순신장군을 기리는 성역임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현충사는 온 국민들이 역사를 되돌아보고
일본에 당했던 치욕을 잊지 않을 교육의 장소다.
그런 의미의 장소라면 현충사에 있는 모든 시설은
세워진 시설물과 전각은 물론, 돌맹이 하나,
나무한그루까지도 그 의미가 훼손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이순신장군을 모신 성역 현충사에는
여기 저기 왜색 노무라단풍(홍단풍)이
마치 현충사내 군데군데 피어있는 꽃이나 되는 양 자리잡고 있으니...
노무라단풍은 이미 상당한 거목이 된 나무도 있고, 이제 심은 듯 작은 것들도 있다.
또 탐방객들이 지나가는 길 옆에도 있고,
우거진 숲의 안쪽에도 있으며, 현충사 홍살문의 바로 옆에도 있었다.
노무라단풍이 여기 저기 자리잡고 있어
이제 봄의 꽃들이 시들어가는 계절부터
여름 내내 마치 꽃이나 되는 듯 불구죽죽한 모습들을 보니,
마치 한국내 아직도 친일세력들이 곳곳에 틀어박혀
일본의 입장에서 한국이 근대화 현대화를 이루는데
일본이 큰 공헌을 했다고 주장하는 한국내 친일세력들 처럼 느껴졌다.
현충사 경내 이곳 저곳에 마치 붉은 꽃나무처럼 자리잡고 있는 노무라단풍나무
이대로 두고보면서 충무공을 제대로 숭모한다고 할 수 있을지.....
기자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첫댓글 저 붉은 단풍이 노무라단풍인지 이제야 알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