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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를 부르신 하나님(2)
거룩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출 3:1-8 / 이필재 목사
출애굽기 성경을 한마디로 해석한다면 “아브라함 자손으로 형성된 애굽의 노예 민족을 하나님이 해방시킨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을 신앙적인 사건이라고 말해도 좋고 정치적인 사건이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해방신학’이라는 말이 있는데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해방을 위한 사역을 하신다는 신학의 기초를 말하는 학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고통으로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자유이었습니다. 율법주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을 하는 사람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었습니다. 출애굽을 시켜서 “자유의 땅으로 가라.” 폭력의 정치, 권력으로부터의 자유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의 사역은 치병 사역으로 질병으로부터의 자유이었습니다. 증오와 복수심에서부터 해방시키는 “원수를 사랑하라.”, 가난에서 해방을 위해 복을 주어서 너희 창고가 넘치게 되는 축복 선언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의 고난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복을 누리는 곳으로 가라.” 이렇게 하나님의 사역의 성격이 나타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자유의 대지에 가서 인간답게 살아가라.” 출애굽기는 폭력 정치권력 밑에서 인간됨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슬픈 한 민족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애정 어린 구원 사역이 펼쳐지는 기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높고 높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낮고 천한 세상에 내려오셔서 인간의 현실에 구체적으로 참여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드라마틱한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이러한 자유운동을 하시기 위해서 오늘 말씀에 제일 먼저 하시는 작업이 나타납니다.
모세라고 하는 사람 하나를 선택하심으로 이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 이루어지는데 절대 필요한 조건이 그 일을 해야 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사람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세의 경우에서 잘 나타났습니다. 그 나타난 경우를 우리가 한번 조명해 보면 모세는 이 엄청나고 큰 역사를 위해서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인데도 그런 일을 하기에는 너무나도 적합하지 아니한 사람이었습니다. 왜 모세가 그런 일을 위해서 적합하지 아니한가? 객관성 있는 평가가 몇 가지 있습니다. 그는 지금 80세 노인이라는 점입니다. 80세 노인이라도 할 일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그 사명은 30대나 40대가 해야 될 종류의 일을 하나님이 시키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는 지금 남의 집에서 밥이나 얻어먹는 아무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무슨 조직을 가지고 있다든지 재정 능력이 있다든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이드로의 집에서 그가 주는 식량으로 겨우 목숨을 연명하면서 살아가는 산골짜기 목동에 불과합니다. 사회적 평가를 하면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는 그런 인생의 말년이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이런 일을 할 수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혀가 둔하고 말도 잘 못하는 이런 주제에 무슨 민족 해방자가 되겠습니까?” 자신이 못한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국가 지도자가 되겠다고 국회의원 출마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자신감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래야 합니다. 모세는 자기 자신이 못한다고 발뺌을 하고 하나님의 공천을 스스로 반납하고 불출마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무엇을 합니까? 아무것도 못합니다. 더군다나 그는 지난 40년 동안 살인자의 신분이 되어서 지명 수배령이 내려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 산골짜기에서 나가지 못하고 ‘그저 생명유지만 해도 감사하다.’ 생각하고 은둔생활을 지금까지 하고 있는 죄수입니다. 애굽 사람하나 때려죽이고 그 길로 도망해서 산속에 숨어 살기를 40년인데 그의 생명을 찾고 있는 애굽의 권력자 앞에 나가라고 하니까 “아닙니다. 저는 절대로 그것을 못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첨부한다면 그는 성격장애인입니다. 다혈질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화가 난다고 사람을 죽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불리한 조건의 모세를 왜 선택하시고 자신의 그 엄청난 역사를 왜 그에게 끝까지 하라고 하시는가? 모세는 끝까지 못한다고 하고 하나님은 끝까지 시키는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진리를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이 구태여 이 모세가 필요하셨다면 그런 일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시절이 얼마든지 그에게 주어졌는데 왜 지금 부르시는가? “십계”라는 영화를 보셨을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왕은 모세를 왕자 책봉했습니다. 내 후계자라고 하며 만족해했습니다.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권세가 있었고 40세의 건강한 체력이 있었고 애굽 궁중의 영화를 다 가지고 있는 조직이 있을 때 모세를 불렀다면 훨씬 일이 쉬웠을 텐데 그런 좋은 시절이 다 지나고 80세의 고령의 나이로 혀가 둔하여 지금은 말 한마디로 똑똑히 하기 힘든 산골짜기의 노동자요 지명 수배가 내려져 있는 죄수를 왜 끌어내고 계신 것일까요?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성경에 보십시오.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쓰셨던 사람들은 거의 다 그러했습니다. 모두 낮은 데 있는 약한 사람들이었고,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일부러 쳐서 약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모세도 지금은 자기 힘이 다 빠져 아무 힘이 없는 이때에 불러내어서 시작하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은 로마 궁중에 태어나시지 않고 유대 땅, 천한 서민의 동네에서 나사렛에서 시작하셨습니까? 불같은 그의 성격이 그대로 살아있을 때 하나님이 그를 쓰셨다면 모세는 그 일을 해내지 못했습니다. 40년 산 속에 틀어박혀서 그 불같은 성격에 인내가 배워졌고 수양이 된 성품을 지녔기 때문에 그때부터 “이제는 됐다. 민중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이 너에게 저축되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쓰시기 시작합니다.
사무엘 성경을 보십시오. 유대 나라가 위기에 처했지 않습니까? 사울 왕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국가 공백상태입니다. 사무엘 영적 지도자가 ‘이거 큰일 났다.’ 생각하고 “그러면 하나님! 이 나라를 인도할 새로운 통치자를 선택해 주십시오.” 이때 하나님은 “이새의 집으로 가라. 거기에 아들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이니라.” 사무엘이 그 집에 가서 첫째 아들에서 일곱째 아들까지 면접 심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제일 훌륭한 엘리압을 공천해서 하나님 앞에 내어놓았습니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르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자신 있게 “이 사람이면 되겠습니다.” 흡족한 공천자로 “이가 왕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은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안 된다.” 차별화하셨습니다. 일곱 아들이 하나도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묻습니다. “아들이 또 있습니까?” “막내가 하나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킵니다. 어립니다. 합당치 않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윗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서 양치기 소년이 왕으로 등극하는 역사를 볼 수가 있지 않습니까? 이게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이상한 광경 하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불속에 가시나무가 타지 않았다는 것이 진리가 됩니다. 맹렬한 불꽃은 무엇이며 그 속의 가시나무는 무슨 뜻이고 왜 타지 않았는가?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불 속에서 가시 채찍을 맞으며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호렙산 산등성의 사막에서 물기도 없이 바짝 마른 가시덤불이 맹렬한 불 속에 삽시간에 타서 재만 남아야 되는데 안 그런 것입니다. 타지 않고 그냥 살아있습니다. 금방 타서 없어질 것만 같지만 절대로 타서 없어지지 아니하는 살아남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애굽의 노예로 살고 있는 아브라함의 후손은 시련의 불 속에 들어있지만 절대로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보호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와 함께 너는 이 일을 해내자.” 그러시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금방 타서 재만 남을 것 같은 시절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로마 황제의 역사는 기독교 박해의 역사입니다. 그때 기독교는 다 타서 없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절대 아닙니다. 어느 나라나 복음이 처음 들어갈 때 불속에서 가시채찍을 맞으면서 살았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만 해도 복음이 오면서부터 6·25 전쟁 당시까지 기독교는 불 속에 있었습니다. 조선 말기와 일본의 식민지 시대, 공산당으로 연결되는 금세 역사에 예수 믿는 사람은 살아남기 힘든 그런 역사를 살았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절대 없어지지 않고 굳건하게 살아남지 않았습니까? 히틀러가 야훼 상을 가진 놈들은 씨를 말려버리겠다고 인간이 향할 수 있는 최악의 방법을 총동원해서 수백만을 가스로 학살했지만 다시 살아 이 세상에 무시 못 할 영향력을 행사하는 민족으로 우뚝 서게 되지 않습니까? 공산 세계에서는 영원히 교회가 말살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절대 살아나고 있습니다. 저는 25년 전부터 중국 선교를 다녔는데 제가 심양 서탑교회에 다섯 번이나 가서 집회했습니다. 문화 혁명 때 어린 공산당원들이 그 교회를 자기 집무실로 사용하고 그 교회 담임목사 오애은 목사 머리에다 잡귀신이라는 고깔을 씌어서 새끼줄로 묶어서 그 심양 거리를 막 돌아다니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없어질 거 같지만 그 교회는 10배로 부흥했습니다. 교회가 너무 좁아서 도저히 예배드릴 수 없다고 해서 그 교회 새 성전 건축하는데 제가 최대 노력해서 도와준 적이 있습니다. 절대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물기가 하나 없는 사막의 불 속에 재만 남을 거 같지만 절대 없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 역사의 불꽃을 모세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본래 애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학대의 동기가 죽이라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애굽의 새 왕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엄하게 하여 고역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었더라.” “아주 힘든 일을 시켜서 신체가 견디지 못하고 소멸되도록 하라.” 국책사업으로 했습니다. 애굽 왕이 산파들에게 이르되 “히브리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 남자거든 죽이고 여자거든 살리라.” 왕의 명령으로 국책사업 1호로 실행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불꽃 속에 절대로 재만 남지 않고 다시 살아 우뚝 선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본래 기독교의 중심 교리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나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부활하는 진리가 기독교 아닙니까? 지금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약한 소수민족 공동체 하나를 선택하셔서 하나님이 이 땅에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지상에 전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에 필요한 사람을 모세로 정하시고 그의 손을 잡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하시는데 결과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자유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곳으로 인도하여 인간다운 하나님 백성의 삶을 누리게 하려는데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이 세상의 모든 선택을 받은 지도자와 국가, 정책적으로 어떻게 세상으로 우리가 다스려야 할 것인가?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이 세상을 모든 인간이 자유를 누리며 젖과 꿀이 흐르게 만들 의무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한 하나님의 계획에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이 세대의 일꾼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일과 모레 이틀 동안 세계 중요 국가 통치자들이 서울에서 “핵 안보 정상회의”를 하게 됩니다. 무슨 성격입니까?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이 시대에 반드시 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가 핵 관리 문제이기 때문에 모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이는 사람들은 현대판 모세의 사명이라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너희가 잘못하면 세상은 망한다. 너희가 잘하면 세상은 젖과 꿀이 흐르는 자유의 땅이 될 것이다. 사람이 필요하다. 너희들이다.” 핵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공동 인식했기 때문에 모이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러한 핵을 가지고 테러를 일으키게 되면 세상은 간단히 끝납니다. 우리는 핵의 위력에 대해서 세 가지 실제적 사건에서 이미 경험한 바가 있습니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탄 한방에 31만 명이 죽었습니다. 도시의 68퍼센트가 폐허가 되어 그 후유증은 67년이 지금 지났는데도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원자병이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1986년 4월 26일 날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건 때 그 후유증으로 이 핵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지금 40만 명입니다. 그때 출생된 아이들은 그 나라가 치료할 길이 없어서 미국에서 해마다 데려다 샌디에이고 병원에서 치료해주고 있습니다. 얼마 전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한 지금 그 현장을 폐허로 만들었는데 그림과 같은 일본의 모든 농장을 들어가지도 못하게 합니다. 후쿠시마 사람들을 일본 정부에서 모두 나가라 해서 수만 명 남아있는 사람들이 다 떠났습니다. 지금 강대국들이 가지고 있는 핵무기의 성능은 히로시마 원자탄의 5천배의 성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100개만 가지면 인류 멸망이 가능하다.” 그런데 지금 핵보유 국가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힘은 얼마나 되는가? 핵보유국은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NPT 공인 핵보유국으로 공식 인정된 핵보유국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사실상의 핵보유국입니다. 세 번째는 아직 인정은 받지 못했지만 핵실험국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눕니다. 공식 인정된 NPT 보유국은 러시아가 1,200개의 핵을 가지고 있으며, 미국이 5,113개, 중국 240개, 영국이 225개, 프랑스가 300개입니다. 사실상의 핵보유국은 인도가 80개, 파키스탄이 90개, 이스라엘이 80개입니다. 핵실험국이 북한입니다. 만약 대한민국도 핵을 가지려고 노력한다면 어렵지 않습니다. 일본도 한국도 1~2년 만에 핵보유국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실력은 다 갖추고 있습니다. 현재 가지고 있는 핵만 가지고도 인류를 10번 이상 멸망시키고도 남는 힘을 인간이 만들어놓고 불안에 떨고 있는 것입니다. 내일 회담을 위해서 세계를 움직이는 국가 정상들이 오늘 모두 서울에 집결됩니다. 핵보유국 대통령들은 누구나 그림자같이 따라다니는 것이 있는데 핵가방입니다. 모든 핵가방이 며칠 동안 서울에서 묵을 것입니다. 그 핵가방들은 어디에서나 핵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장치입니다. 핵보유국 대통령들은 대통령 당선되고 나서 취임하기 전까지 반드시 공부해야 되는 것이 핵가방 작동법입니다. 24시간 365일 어디를 가나 따라다닙니다. 대통령이 휴가를 즐기기 위해서 골프를 치러 가도 따라가야 합니다. 언제 무슨 일이 어디서 터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서울에서 묵는 해 보유국 대통령 중에 한 사람이라도 부부싸움을 하면 세계 운명은 위태로워집니다. 내일과 모레 하나님이 현대판 모세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다면 “모세야, 모세야!” 부른 것같이 “얘들아! 내가 만든 세상은 거룩한 땅인데 너희들이 신고 있는 핵신발을 벗어라. 그리고 자유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만들어라. 내가 만든 이 아름다운 세상을 어찌하여 너희가 이렇게 죽음 골짜기로 만들려고 하느냐? 죽음의 골짜기로 떨어지는 인류를 구원하자.” 그렇게 말씀하실 거 아닙니까? 지금 세계 운명은 핵에 달려 있습니다. 핵을 지구에서 없애는 것이 인류의 구원입니다. 핵전쟁은 상대가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약 러시아에서 워싱턴에 핵을 발사했다고 합시다. 거의 동시에 하와이에 지하벙커가 열려서 모스크바에 날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핵전쟁은 승자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모두 같이 멸망하자.” 이게 핵입니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회담해 보자. 다 같이 살 길을 찾을 것인가? 다 같이 죽을 것인가?” 하나님 보실 때 “너희들은 왜 이렇게 온 세상을 죽이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느냐? 너희가 만든 함정에 너희가 빠질 것이다.” 성경에 수없이 교훈하고 있지만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에 귀를 안기울이고 살아왔단 말입니다.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땅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룩한 곳이다. 하늘나라 상징인 자유의 땅 가나안으로 가라. 핵신발만 벗어도 인류는 젖과 꿀을 넉넉히 먹으면서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다. 서울에서 너희들의 모든 신발을 벗으라.”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모세는 마침내 그 거룩한 사명을 위해서 최종 결단을 하고 길을 나서게 됩니다. 고통당하는 백성의 지도자로 새 역사 하나님의 창조를 위해서 맨발로 서서 하늘을 우러러 봤습니다. 그는 인류 역사에 가장 훌륭한 역사를 남긴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조건이 하나도 맞지 않는 100퍼센트 불리한 현실에서 가장 훌륭히, 가장 오랜 시간 40년을 그 노예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자유의 땅으로 인도하는데 최고의 공로자가 되었습니다. 그 순간 모세의 그 초라한 차림은 거룩함으로 변했습니다. 모세가 입은 그 남루한 목동의 옷은 마치 하늘나라 백성의 거룩함이 보이는 듯 거룩해 보이고 그의 긴 머리카락과 다듬지 못한 수염과 늙은 주름살이 별안간 거룩성을 띄웁니다. 맨발이 된 그의 발은 하나님의 종의 의지로 보이고 그의 손에 들린 양떼를 몰던 그의 남루한 막대기는 하나님의 신비의 능력으로 변해 홍해를 가르게 됩니다. 그의 더듬거리던 언어는 마치 하나님의 목소리와 같이 들려왔습니다. 금번 대한민국 서울에 모인 모든 세계 지도자들의 모습이 그렇게 변하여 그것이 21세기의 하나님의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2012년 서울의 핵 정상회담이 인류의 희망의 불빛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신을 벗고 받은 소명
출 3:1-5 / 김경진 목사
< 현대 문명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것만 같습니다. >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이는 영화 제목입니다. 로이스 던칸(Lois Duncan)의 소설을 배경으로, 1997년에 짐 길레스피(Jim Gillespie) 감독이 제작한 할리우드 공포 영화입니다. 어느 날 밤, 술을 마시고 행인을 친 고등학생들이 바다에 시체를 유기하고 진실을 덮습니다. 그러나 1년 뒤,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라고 적힌 익명의 편지가 그들에게 배달됩니다. 그 사건과 관련된 이들이 하나둘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되는 공포 영화입니다. 사실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제목이 워낙 강렬해서인지 아직도 제목이 기억에 남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신문에서 똑같은 제목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모든 일을 알고 있다.”라고 적힌 제목의 기사를 보니, 오늘날 우리의 삶을 샅샅이 들여다보고 기록하는 다양한 현대 문화와 기술 및 기계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우선 우리가 쓰고 있는 핸드폰은 우리가 어디로 전화했는지, 언제 전화했는지를 모두 기록합니다. 요즘 핸드폰에는 GPS 장치가 있어서 어디서 전화를 했는지도 오차 없이 기록해 둡니다.
물론 자동차도 마찬가지입니다. 내비게이션 시스템을 가진 차량은 대부분 그 차가 어디 있는지, 또 어디로 이동했는지, 분명히 기록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동차가 자율 주행을 하는 단계까지 이르렀습니다.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인터넷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접속한 적 있는 인터넷 사이트들이 차곡차곡 기록으로 남겨집니다. 의료보험조합 컴퓨터에는 우리가 언제 어느 병원에 들렀는지, 어떤 진단을 받고 치료했는지, 어떤 약을 처방받아 어떤 약국에서 구입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행기를 타시는 분들은 각 항공사의 마일리지 관련 자료에서 자신이 언제, 어디로 여행했는지 모든 기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용카드로 계산하면 정보가 남지요. 내가 어디서 무엇을 샀는지 정확하게 기록이 남습니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인데, 제가 부산을 오갈 때 일입니다. 하루는 김해공항에서 비행기로 서울로 오는데, 부산에서 렌트 했던 차에 기름을 넣고 반납한 뒤,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으로 왔습니다. 공항에 와서 공항에 세워두었던 제 차를 몰고 가려는데 기름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근방 주요소에 가서 기름을 넣었습니다. 같은 신용카드로 계산했지요. 그런데 조금 뒤에 신용카드 회사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조금 전 부산에서 기름을 넣었는데, 또다시 서울에서 기름을 넣은 흔적을 보고는 혹시 잘못된 사용은 아닌지 확인하는 전화였습니다. 요즘은 그런 경우 전화 대신 문자로 오는 것 같지만, 그때는 그런 전화가 종종 걸려왔습니다. 전화를 받을 때 섬뜩한 느낌이 들곤 했습니다.
종종 거리를 산책하다 보면, 여기저기 감시 카메라들이 전신주나 벽에 붙어 있는 것을 봅니다. 사람들이 잘 안 다니는 으슥한 골목에도 카메라들이 있습니다. 수상한 사람들의 움직임을 경찰서에서 추적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또 무엇을 했는지, 비밀을 알고 있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옛날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들인데, 현대 사회의 각종 기술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제가 하는 설교도 카메라를 통해 송출되고 있습니다. 또 여러분이 인지하지 못하셨을 수 있지만, 여러 대의 카메라가 여러분이 설교 시간에 어떤 태도로 경청하고 있는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감시당하는 것만 같은 상황이 어떠십니까? 혹시 기분 나쁘지는 않으십니까? 이런 감시와 구속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지 않으십니까?
< 세상에서 내가 다닌 길을 내 신발이 증언합니다. >
언젠가 저도 이런 감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 감시 카메라로부터의 벗어남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지속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보고 싶은 충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감시 카메라를 하나님의 시선으로 생각하면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고심하며 나름의 프로젝트를 세우고, ‘감시 카메라 벗어나기’라는 시도를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우선 핸드폰 전원을 종료한 뒤 집에 놓아두고, 거리로 나와 무작정 버스를 탔습니다. 타자마자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만 교통카드로 제 흔적을 남기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버스를 타는 순간, 운전석 옆에 있는 카메라에 이미 제가 노출되었다는 사실도 알아차렸습니다. 이렇게 저의 첫 번째 시도는 아주 싱겁고 무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이제 무조건 걷되 카메라가 없는 곳을 찾아 움직여 보기로 했습니다. 절대 지하로 들어가면 안 됩니다. 지하에는 항상 카메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조심스레 움직였지만, 생각보다 카메라가 없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산에는 카메라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그곳에서 마음껏 시간을 보내고, 자유를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내려오면서 이런 생각을 했지요. ‘아마 내가 산에 다녀온 것은 아무도 모를 거다. 나만 알 거야.’라고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와 즐겁게 샤워하고 기쁜 마음으로 나왔는데, 제 아내가 다짜고짜 물었습니다. “산에 갔다 왔어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놀란 얼굴로 어떻게 알았는지 물었더니, 아내가 대답합니다. “신발에 온통 흙이 묻어 있어서 산에 다녀온 지 알았지요.” 그날 저는 매우 참담했습니다.
현관으로 가 흙이 묻은 제 신발을 보았습니다. 열심히 흙덩어리를 닦았습니다. 도저히 제가 산에 갔다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없을 만큼 깨끗하게 닦았습니다. 가지런히 신발을 놓았습니다. 굽이 많이 달은 구두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저 신발이야말로 내가 어디 있었는지, 어디로 갔는지, 모두 알고 있겠구나. 내 인생의 모든 신발을 모아둘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신발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나는 꼼짝없이 내가 다닌 곳, 내가 다닌 모든 발자취를 들키고 말겠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신고 있는 그 신발로 어디를 다니셨습니까? 어디에 계셨습니까? 혹시 방탕의 길에 있지는 않았습니까? 속이는 현장에 그 신발을 신고 있지는 않으셨습니까? 잘못된 길로 신을 신고 들어가지는 않으셨습니까? 혹시 진흙탕은 아니었습니까? 거들먹거리는 장소에서 그 신을 신고 있지는 않으셨습니까? 오늘 여러분의 신발이 여러분이 그동안 다녀온 길과 발자취를 증언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저 역시 그날 이 질문과 함께 제 신발 앞에서 처참한 심정으로 서 있었습니다. 가지 않아야 할 곳에 놓였던 신발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둠의 자리, 부끄러움의 자리에 벗어 놓았던 신발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탐욕의 길에 신고 다녔던 신발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내가 거기에 있었는지, 왜 그곳에 갔었는지 생각할수록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는 저에게 조용히 속삭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이제 네가 그 신을 좀 벗었으면 좋겠구나.’ 지금까지 지나왔던 길, 세상의 길에서 헤매고 다녔던 그 신발을 벗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제 마음속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 하나님께서 모세의 신을 벗겨 새 신발을 신기십니다. >
수천 년 전에도 똑같은 말씀을 들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모세입니다. 그는 80세가 되어서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40년 동안 애굽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왕자로 살았습니다. 아마 왕궁을 걸어 다녔을 것입니다. 멋진 자리에 그의 신발들이 옮겨졌을 것입니다. 여러 곳을 다녔을 것입니다. 휴양지도 다녔을지 모릅니다. 당시 그가 어디를 다녔는지, 성경은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걸었던 인생 초반의 40년은 화려함의 기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사실 크게 의미 없는 기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인에게 매 맞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리곤 분을 참지 못해 애굽 사람을 돌로 쳐 죽이게 됩니다. 그는 그때도 신발을 신고 있었습니다. 살인의 현장에서 신발을 신고 있었지요.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자리, 살인의 현장을 그 신발이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또 다른 사람들도 증언했습니다.
결국 사람들의 눈을 피해 미디안 광야로 도망갑니다. 그때도 신발을 신고 있었습니다. 우물가에서 여인들을 괴롭히는 목동들을 쫓아낼 때도 신발을 신고 있었고, 이드로를 만나고, 또 아내 십보라를 만났을 때도 신발을 신고 있었습니다. 아들을 낳을 때도 신발을 신고 있었고, 광야에서 양 떼를 몰고 다닐 때도 신발을 신고 있었습니다.
광야 40년의 발걸음은 정처 없는 발걸음이었습니다. 애굽에서의 발걸음이 화려함의 발걸음이었다면, 미디안 광야에서의 발걸음은 정말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는 양 떼를 몰고 이리저리 다니며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렇게 40년이 또 흘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호렙산에 올랐다가 놀라운 장면을 목격합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타고 있는데, 그 나무가 사라지지 않는 신기한 장면을 목격합니다. 호기심이 일어 다가섰을 때, 그는 처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경험한 첫 번째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애굽기 3:5)
어떤 학자는 신을 벗는 행위를 단순히 존경의 표시라고 합니다. 어떤 학자는 유대 풍습에 신 한 짝을 상대방에게 주며 맹세하는 관습이 있으므로, 하나님과 모세 사이에 맹세가 이루어지는 장면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저에게 이 장면은 그 이상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다녔던 모든 곳, 그가 헤맸던 모든 장소, 모든 길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가 돌아다녔던 곳, 도피의 길, 헤매고 다녔던 체념의 광야, 살인의 장소, 그 모든 장소를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5) 네가 지금까지 다닌 길을 알고 있는 신발을 이제 벗으라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과거를 버리라’는 주님의 초청입니다. 잘못된 모든 기록이 담긴 신발을 벗어 버리라는 주님의 초대입니다. 동시에 그 명령 속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내가 너에게 새로운 길을 가도록 해 주겠다는 뜻입니다. 이제 새로운 신발을 신겨주겠다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모세가 그 후에 간 길은 어떤 길이었습니까? 가족을 돌보는 안주의 길에서 벗어나, 광야의 양 떼를 돌보며 인생을 겨우 연명하던 그 길에서 벗어나, 광야를 맴돌던 정처 없는 길에서 벗어나,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위대한 길로 접어듭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세가 바로 왕 앞에 섰을 때, 그는 의미상으로 새로운 신을 신고 있었습니다. 홍해 앞에 섰을 때, 그는 새로운 신발을 신고 있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는 기적을 볼 때, 그는 새로운 신발을 신고 있었습니다. 바위에서 물이 솟아오르는 기적을 경험할 때도 새로운 신발을 신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라. 애굽에서 그들을 구출하라.”라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기 전에, 모세에게 첫 번째로 들렸던 하나님의 음성은 바로 ‘신을 벗으라’라는 초청이었습니다. 자신의 신발을 벗은 후에야 그는 새로운 소명을 받아 새로운 곳, 전혀 가보지 못했던 곳으로 인도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인도된 새 길에는 기적이 있었고, 하나님의 능력이 있었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습니다.
< 내 신을 벗어야 하나님의 소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소명이 무엇인지 고심하며, 그 소명을 발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모세의 이야기 속에서 한 가지 중요한 신앙의 원리를 배웁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모세에게 요청하십니다. “신을 벗어라.”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가던 길을 멈추고, 신발을 벗을 때입니다. 먼저 내 신을 벗어야 합니다. 세상적인 과거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그 결단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진정으로 응답할 수 있습니다.
‘엑소더스’라는 말이 있지요? ‘출애굽기’로 번역됩니다. 그런데 엑소더스는 본래 ‘엑스’와 ‘호도스’의 합성어입니다. 엑스는 ‘밖으로’라는 뜻이고, 호도스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길 밖으로 벗어나는 것’이 엑소더스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생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살던 방식에서 벗어나 광야의 길,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로 들어서는 것이 엑소더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만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그와 같은 명령을 하셨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잘 기억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장 4절 이후의 말씀입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요한복음 13:4~7)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수건으로 그들의 발을 닦아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이야기 속에 한 가지 숨겨진 단계가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제자들을 향해 주시는 “신을 벗어라.”라는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까? 신을 벗어야 대야에 발을 담글 수 있고, 주님께 씻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신을 벗어라.”
안 벗겠다고 고집 피우던 베드로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신을 벗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의 사역이 끝나감을 알고 계셨습니다.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제자들이 그 뒤를 이어 사역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 제자들에게 소명을 주시는 순간입니다. 마지막 유언을 주시는 자리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주님은 제자들의 신을 벗도록 요청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어부의 흔적이 남았던 그 신발, 세리의 흔적이 남은 그 신발, 남의 등쳐먹던 자리에서 신고 있던 그 신발을 벗게 하시고, 이제 새로운 사역으로 보내기 위하여 새로운 신발을 신겨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예수님의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전통은 세족 목요일을 새로운 주님의 명령을 받은 날로, 새로운 계약을 체결한 날로 기억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의 신을 벗기신 후에 주신 새로운 명령입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신고 있던 신발을 벗은 후에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제자들 역시 자신이 신고 있던 신발을 벗은 후에야 주님의 소명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주 짧은 결론을 위해 긴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애굽기 3:5 중)
< 주님께서 신겨주시는 신을 신고 거룩한 사명의 삶을 삽시다. >
요즘 새벽마다 출애굽기를 읽으면서 성도 여러분과 기도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를 묵상하면서 신을 벗어야 하는 또 다른 곳이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바로 ‘성막’입니다. 성막으로 들어가는 제사장들은 물두멍에서 자신의 손과 발을 씻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을 벗은 채 맨발로 성막으로 들어갑니다. 성막의 뜰은 그냥 땅입니다. 어떤 다른 포장이 있는 게 아닙니다. 카펫이 깔린 것도 아닙니다. 그저 땅일 뿐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막이 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성막에서 제사장들이 맨발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셨습니다.
저는 ‘제사장들이 성막에서 어떤 감각 기관으로 하나님을 느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눈으로 성막에 그려진 그룹들, 천사의 모습들을 보았겠지요. 진설병상, 등잔대, 법궤와 속죄소를 보았을 것입니다. 손으로 등잔대의 기름을 채우고, 진설병상에 떡을 교체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직접적이고 세밀하게 느꼈을 또 다른 감각 기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맨발’입니다. 그들은 맨발로 이 땅에 계시는 하나님을 느꼈습니다. 그들이 밟고 있는 바로 그 땅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바로 그 땅에서 내가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오늘은 특별한 날입니다. 소망교회에서 일하실 장로님 세 분을 세우는 날입니다. 우리는 이날을 안수를 받는 세 분만을 위한 날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보다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 자리는 세 사람 개인이 주님에게서 소망교회를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는 소명의 자리가 아니라, 아니 그것을 넘어, 우리 교우 모두가 한마음으로 소망교회를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는 소명의 자리입니다.
지금까지 교회가 걸어왔던 부족하고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 그 신을 벗기 원합니다. 지금까지 세속적으로 살아왔던 잘못된 자리에서 돌아서 그 신을 벗으면 좋겠습니다. 신을 벗고, 새로운 소명을 받는 자리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면, 새로운 길로 들어선 사람들, 과거의 삶을 정리하고 새로운 도전에 매진한 사람들에 의해 교회의 역사가 바뀌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가 루터가 그랬고, 칼뱅이 그랬고, 웨슬리가 그러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차례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애굽기 3:5 중)
불붙은 가시떨기 나무
김영수 목사
기적강해를 하면서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기적의 사건들을 듣고 배우면서도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기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의지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죽었던 이가 살아나고,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받고,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여도 그것은 단지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의 기적으로만 여기고 나와는 별 상관이 없는 전설 속의 이야기처럼 듣고 흘려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주 이렇게 기적강해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과거의 역사를 들려주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에 여러분들이 성령 님의 능력을 통하여 기적의 주인공이 되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온 땅위에 선포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호렙산 가시떨기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모습을 통하여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를 부르사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워 이 땅에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대하여 배우기를 원합니다.
Ⅰ. 호렙산의 목동생활
본문에 나오는 모세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나일강 변에서 건짐을 받고 애굽 공주의 양아들로 궁궐에 들어가 40년 동안 조금도 부족함 없이 살다가 그가 40세 되던 해에 더 이상 바로의 궁중에 머물러 있을 수 없음을 깨닫고 고생 당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살아야겠다는 결심이 싹트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노예처럼 일을 하는 곳에 갔다가 애굽인 이 이스라엘 사람을 해하는 것을 목격하고 견딜 수가 없어서 그 자리에서 그 애굽 인을 쳐서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이스라엘 사람들끼리 서로 다투는 것을 보고 어찌하여 동족끼리 싸우느냐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누가 너로 우리의 주제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고 대들었습니다. 모든 것이 탄로 나자 모세는 바로의 눈을 피하여 애굽을 떠나 저 미디안 광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광야에서 모세는 양을 치는 목자의 생활을 40년 동안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호렙산의 한 떨기나무에 불이 붙고 있는데 나무는 타지 않고 불꽃만 일어나는 것을 보고 그리로 달려갔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음성이 그 불꽃 속에서 들려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절)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애굽에서 고통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라는 사명을 맡겨 주셨습니다. 절망과 고독의 땅 미디안의 광야에서 목자 생활을 하던 모세는 그 떨기나무의 불꽃을 바라보면서 다시 새로 태어나는 중생의 체험을 하였습니다. 새로운 사명감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Ⅱ. 호렙산 가시떨기 나무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모세를 불러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10절)는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왜 가시떨기 나무를 사용하셨을까요? 여기에 담긴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가시 떨기나무는 아무대도 쓸모가 없는 그래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나무로 광야의 뜨거운 햇살과 바람을 받으며 살아가는 잡초와 같은 나무입니다. 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가시 떨기나무를 통해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음성을 들려 주셨고,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만 하면 아무 쓸모 없는 가시나무라 할지라도 소중한 나무, 기적의 나무, 능력의 나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40년 전 모세는 가시 떨기나무 같은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40년 전 모세는 애굽의 황태자로서 공주의 아들로서, 왕의 총애를 받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도망자로서 무엇인가 큰일을 할 수 있는 젊음도 사라져 버린 80세의 노인이 되자 모세는 자신이 자신을 보기에도 가시 떨기나무 같은 존재였습니다. 별 볼일 없는 존재였습니다. 공주의 아들도 아닙니다. 왕자도 아닙니다. 광야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목동에 불과합니다. 가시떨기나무 같은 이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아십니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6절)"라는 겁니다."
이 말씀의 뜻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똑똑하거나 잘나서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쓸모 없는 가시나무가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가시떨기나무 같은 존재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하나님의 사람, 기적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내가 어떠한 존재인가, 어떠한 백그라운드가 있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성경은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시는지를.........
비록 내가 가시떨기나무 같은 쓸모 없는 존재인 것 같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누구를 겁내겠습니까? 요셉은 노예로 팔리고 옥살이를 했으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자 국무총리가 되었으며 가장 천한 직업의 송자 어부 베드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자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모세처럼 나도 기적의 주인공, 능력의 주인공, 치료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가시떨기나무처럼 별 볼일 없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귀하게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가시떨기나무처럼 병들었다고 좌절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치유 받게 됩니다. 할렐루야!
Ⅲ. 불붙은 가시 떨기나무
본문 말씀 3:2절에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모세가 호렙산으로 올라가던 중 가시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타지도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80살의 인생의 막바지에 가까운 모세는 가시떨기나무 같은 존재지만 하나님의 불이 함께 할 때, 쓸모 없는 가시나무가 기적의 나무, 영광의 나무가 되었던 것처럼 기적의 사람,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기적의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의 불이 임해야 합니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불이 오늘날 성령의 불로 나타납니다.
인간은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더라도 심성은 메마른 가시 떨기나무같이 나약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도 사랑과 용서보다는 미움이 앞섭니다. 가시나무 같은 인간성을 변화시키려면 오직 하나님의 성령의 불이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다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승천 하신 후, 누가 이 복음을 전했습니까? 불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가 성령의 불을 받은 후, 설교할 때 하루에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군중들이 회개를 했다고 합니다. 무식한 베드로가 무슨 설교를 했기에 그와 같은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을까요? 베드로의 설교는 유식한 설교는 아니었지만 불 받은 사람이 외치자 청중들의 마음을 떨리게 했고, 그들의 눈에서 눈물이 나오게 되었으며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나 모세는 성령의 불을 받기 전에는 문제와 환란이 다가오면 도망갔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불을 체험한 후 베드로도 담대하게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선포하였으며, 모세도 예전처럼 도망가지 않고 문제를 뚫고 나가는 능력이 생겼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성령의 불을 받으면 문제나 환란 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바라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늘도 지식과 이성과 배경보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을 찾습니다.
Ⅳ.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본문 말씀 3:5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유대의 법정에서는 신발을 벗어 재판장에게 던지면 자기의 모든 소유권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제 모세의 모든 소유권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40살에 애굽의 왕자 자리를 포기하고 광야로 도망하여 40년을 살았습니다. 히브리서 11:24절에는 모세가 애굽의 왕자의 자리를 포기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기를 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호렙산에서 하나님 앞에 신을 벗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시자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14번의 기적을 일으켰고 그가 가는 곳마다 기적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생애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기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우리가 모세가 아니기 때문이 아닙니다. 모세와 같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전적으로 맡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인으로써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고 믿고 살았습니까? 얼마나 하나님께 나의 모든 소유를 맡기고 살았습니까? 말은 맡긴다 해놓고 다 움켜쥐고 산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으십시오. 그분께 다 맡기십시오.
Ⅴ. 이 시대가 불붙은 가시떨기 나무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가시 떨기나무는 모세의 낮아짐을 상징하는 것 외에도 애굽의 노예가 되어 삶의 소망도 없이 소모품과 같이 비천한 운명 속에 쓰러져 가는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 시대에 우리 민족이 그와 같을 것입니다. 우리도 영적으로 볼 때 떨기나무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습니다. 이 불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이 불은 핍박과 환난의 불입니다. 찬송가 376장에 "불같은 시험 많으나 겁내지 맙시다."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처럼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벧전1:6-7에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 하여도 없어 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 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바로에게 불과 같은 시험을 만났습니다. 지금 이 민족이 불같은 시련을 만났습니다. IMF의 불꽃은 많은 직장과 가정을 파괴하였습니다. 그러고도 부족하여 아직도 실업자문제, 노인문제, 청소년 문제, 카드 연체로 인한 각종 살인 등의 시커먼 연기와 냄새를 내며 타고 있습니다.
Ⅵ. 타지 않는 가시떨기 나무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신 교회와 믿음의 가정은 가시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있었지만 타지 않았다고 말한 것처럼 절대로 타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마치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풀무 불 속에서도 겉옷하나 상하지 않고 살아 나온 것처럼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도 건강하게 살아난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사 끝까지 지켜 주실 것입니다.
바울은 이 신앙을 롬 8:35에서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 이나 위협이나 칼이랴...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이 신앙이 있기 때문에 그가 또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라고 고백하면서 담대하게 승리하였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렇게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얼마나 많은 고통과 시련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 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8:3)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현재의 고난(苦難)은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榮光)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고난을 통하여 인격이 연마되고 신앙이 빛을 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IMF의 고난의 불꽃을 통하여 우리 민족이 하나님께 잘못한 것은 없는가?를 뒤돌아보고 , 또 우리 자신들도 하나님 앞에 지나온 과거를 되돌아보며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철저하게 회개하는 기회를 갖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호렙산의 모세를 찾아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과 여러분들을 다시 찾아주셔서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느니라."(사60:1)는 위로와 축복으로 역사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느 한 순간도 빠짐없이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앞으로 우리들의 남은 생애를 오르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지키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서, 다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당치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 살아가는, 하나님 자녀다운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떨기나무에 붙은 불
이종철 목사
소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어로 calling인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뜻합니다. 소명은 흔히 목회자들에게 묻는 말입니다. 어떤 소명을 받았습니까? 어떻게 소명을 받으셨습니까? 그러나 소명은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직업을 영어로 calling 또는 vocation이라고 합니다. vocation은 라틴어 동사 voco에서 파생되었는데 이는 ‘부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속적 직업도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의미를 우리 신앙선배들은 담았던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는 장면입니다. 모세는 출애굽의 지도자이며 이스라엘 민족의 건국자이자 모세오경을 기록한 대 선지자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은 어떤 위대한 인물의 매우 특별한 신앙 체험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하나님의 만남은 모든 신앙인들의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 체험과 소명 체험의 전형이자 모범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그 분이 어떻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먼저 찾아오시는 하나님
흔히 볼 수 있는 어떤 민담이나 전설, 건국 신화나 역사를 보면 항상 인간이 주도적입니다. 어떤 소원이나 목표를 가지고 간절히 찾다가 결국 신을 만나거나 도움을 받아서 문제가 해결되는 식입니다. 그러나 성서에서 증언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이와는 반대입니다. 먼저 찾아오시고 먼저 말을 거는 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를 찾았습니다. 하나님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셨고, 이를 이상하게 여긴 모세가 자신에게 접근하도록 만드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하며 모세의 이름을 먼저 부르셨던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모세에게 내 민족을 애굽에서 탈출시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라는 비전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때 모세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사실 이런 장면은 성경에서 매우 익숙합니다. 모세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본토 친적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 땅을 향하도록 충동질하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무엘을 통하여 아직 목동이었던 다윗을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민족의 위기 때마다 선지자들을 불러서 세우고 그들에게 전할 말씀을 주셨던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기로 결정하셨던 분도 하나님이셨고, 십자가에서 홀로 죄악과 싸우시고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셨던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어둠과 불의와 허무를 싫어하시는 분이 무엇보다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자식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과도 같습니다. 자식이 잘못 살면, 자식이 엉뚱한 길로 가면 제일 화가 나는 사람은 바로 그 부모님들입니다. 지켜보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바로 개입을 하고 잔소리를 합니다. 물론 우리 하나님은 인간의 부모처럼 자기감정대로 판단하거나 무지한 존재는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이 만든 작품, 자신의 자녀가 잘못된 길로 갈 때 개입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역사가 잘못된 방향으로 갈 때 사자처럼 으르렁 대며 부르짖으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의 소리에 예민하시며 우리 형편을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9절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우리는 그래서 우리 인생이나 우리 역사가 밝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갈 것이라는 확신을 갖습니다. 우리 희망의 근거는 의로우시며, 사랑이시며,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 한편 이런 하나님의 모습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모든 역사는 하나님이 임하실 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노력을 경시하거나 나태함에 대한 변명은 아닙니다. 우리는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행동하며 하나님의 뜻을 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 성공이나 완성은 하나님의 불이 임할 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하나님의 때를 끊임없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라 할 것입니다.
먼저 찾아오시는 하나님은 또한 행동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7절과 8절에는 6개의 동사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보고, 듣고, 알고, 내려오고, 건져내고, 이끄시는 동사의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보면 파우스트가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말씀을 가지고 고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파우스트는 ‘말씀’이라는 정적인 의미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이 단어를 ‘행동’으로 바꿉니다.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 하나님 말씀을 이런 식으로 바꾸는 것은 옳지 않지만 그 의도만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보좌에 조용히 앉아계신 분이 아닙니다. 정적인 묵상이나 관조를 통해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부동의 동자로서 중심을 지키고 있는 분만이 하나님이 아니라, 그분은 움직이시며 행동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는 ‘여호와’라는 하나님 이름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말 개역 성경에서는 3장 14절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여 매우 철학적인 이름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I am who I am”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 am이라는 be 동사는 상태 동사가 아니라 동작 동사입니다. ‘~이다’라는 상태를 규정하는 단어가 아니라 ‘있게 하다’라는 뜻의 생성과 창조의 동사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의 의미가 아니라 “나는 있게 할 것을 있게 하는 자” 곧 창조주 하나님,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의미가 강합니다. 우주 만물을 만드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새로운 출애굽의 역사를 만들어 가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압제자 애굽을 향해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셔서 그 왕 바로를 거꾸러뜨리는 분입니다. 홍해를 갈라서 노예 백성을 해방시키는 분입니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게 하시며 반석에서 샘물을 내게 하시는 생명의 공급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을 만나려면 역사의 현장으로 가야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숲속이 아니라 인생의 한복판에서 지금도 창조와 생명의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분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하나님은 철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행동하고 순종하는 자들이 만날 수 있는 분입니다. 서재나 기도원이 아니라 고난의 현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입니다. 지치고 힘들고 피곤한 우리 삶의 한 복판에서 우리를 위로하고 또 기다리고 계시는 분입니다. 해방신학이 실천, 곧 프락치스(praxis)를 강조하는데 이는 매우 통찰력 있는 인식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실천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의 뜻도 분명해 집니다.
떨기나무 인생
모세는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1절입니다.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무리를 치더니” 성경은 이때가 모세의 나이 80세 되던 해였다고 말씀합니다. 80이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바는 모든 인생의 희망이 꺾인 나이를 의미합니다. 과거에 모세에게도 꿈은 있었습니다. 모세는 40세까지 애굽의 왕자로 지냈습니다. 그러다 자기 민족을 학대하는 애굽 사람을 보고 분개하여 죽였고 이 사실이 발각되어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 나왔습니다. 과거의 영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자신의 꿈을 실현하지도 못한 채 40년이 흘러버렸습니다.
이처럼 무기력하며 희망 없는 인생을 살던 모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의 인생의 놀라운 변화가 막 시작되려는 찰라입니다. 하나님은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불꽃의 모습으로 모세를 찾아오셨습니다. 떨기나무는 히브리어로 ‘스네’라고 합니다. ‘시내’산과 유사한 발음입니다. 시내 산에 아마 스네가 많았던 듯합니다. 스네는 사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시덤불입니다. 사막의 떨기나무는 작고 메말라 사막의 뜨거운 열기에 쉽게 불이 붙어 사그라지곤 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보았던 떨기나무 불은 오랜 동안 타도 결코 사라지지 않았기에 모세가 이상히 여겨 가까이 다가갔던 것입니다.
이 작고 마른 떨기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을 히브리인들이라고 부르는데 그 의미는 ‘강 건너온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온 사람들로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떠도는 유목민들입니다. 지금은 애굽 땅에서 노예살이 하고 있는 비참한 민족입니다. 그들은 강대국의 횡포에 삽시간에 사라져버릴 정말 가시떨기와도 같은 연약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가시떨기는 또한 모세의 인생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모세는 가시떨기에 붙은 불처럼 자기 혈기로 애굽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불붙은 가시떨기가 불기운에 금세 사그라지고 재만 남듯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떨기나무 위에 불이 붙었지만 전혀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불이 붙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분노나 인간의 불이 아니라 하나님의 불이 붙으면 그것은 결코 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불이 붙자 모세는 더 이상 연약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킨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불이 붙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불이 붙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고 주님의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생애는 이 하나님의 불을 기다리던 생애였다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성령의 불을 주시는 분입니다.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12:49) 하나님의 불을 받아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네 신을 벗으라
하나님의 불이 붙었던 곳은 어디였습니까? 그곳은 모세가 평상시에 다녔던 길이었고, 자신이 양떼를 먹이던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메마르고 땀에 배이고 냄새가 나고 또 자기가 항상 생활하던 삶의 현장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5절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거룩한 땅이 어디입니까? 성전입니까? 사람들이 많이 모인 광장입니까? 아닙니다. 먼지 날리는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주님이 임하시자 그곳은 거룩한 땅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그곳에서 신발을 벗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면 바로 그곳이 우리의 성지가 됩니다. 거룩한 땅이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곳이 바로 거룩한 곳입니다.
17세기 중세의 성자 중에 부엌의 성자라 불리는 로렌스 형제가 있습니다. 그가 부엌의 성자로 불리게 된 까닭은 40년 동안 부엌에서만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부엌일을 결코 사소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소한 일을 주님께 하듯 하였고,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란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노동시간은 기도시간과 다를 바 없다. 내가 일하는 주방은 시끄럽고 어수선하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이것저것 찾느라 분주하다. 그 속에서도 나는 말할 수 없는 평온함 중에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다. 무릎 꿇고 성찬을 받을 때와 똑같다. ... 꼭 큰 일만 해야 할 필요는 없다. 나는 프라이팬의 작은 계란 하나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뒤집는다. 그 일도 다 끝나 더 할 일이 없으면 나는 바닥에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한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그 분이 주시는 은혜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일어날 때면 나는 어느 왕보다도 더 만족감을 느낀다. 설사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여도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방바닥에서 티끌 하나를 주워 올리는 것만으로 족하다.”
로렌스 형제는 부엌이 그의 거룩한 땅이 되었습니다. 밭을 갈던 농부에게는 소작농을 치던 그 땅이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땅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고기를 잡다 주님을 만났고 그곳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 삶의 한 복판에서 우리 주님은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눈을 열어 주님을 볼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우리의 거룩한 땅이 될 것입니다.
내가 누구관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면 어떻게 됩니까? 다 사라져버립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의 인격과 성질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모세 특유의 성격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무려 다섯 번이나 거부하거나 머뭇거리는 모습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뚜렷한 개성과 또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대우하시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머뭇거리는 모습은 11절에서 보이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이미 무기력해질 대로 무기력해진 모세가 내가 누구관데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주저하자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으로 모세에게 힘을 줍니다.
두 번째는 13절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 이름을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들에게 하나님을 믿게 하겠느냐며 완곡하게 거부하는 모세의 변명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해 여호와라는 그 거룩한 이름을 모세에게 알려주십니다. 이름을 알려주는 것은 그 존재를 전부 내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세 번째는 4장 1절입니다. “모세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이런 항변에 대해서 하나님은 지팡이로 뱀을 만들고, 모세의 손에 문둥병이 피는 기적을 보여주시며 이런 기적을 통해 모세의 권능을 높이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네 번째는 4장 10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모세가 이번에는 자기는 말을 잘 못한다고 버티자 하나님은 사람의 입을 누가 지었느냐 하시면서 모세의 입술에 내 말을 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다섯 번째 거부는 4장 13절입니다.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모세의 이런 태도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해도 너무 한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도 결국 참지 못하고 화를 내십니다. 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고 가라사대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뇨 그의 말 잘함을 내가 아노라” 하나님은 너 대신 형 아론으로 말하게 할 테니 이제는 염려 말고 제발 내 말대로 가라고 설득하십니다.
누미노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 경외감을 말합니다. 지금 모세는 존엄하고 영광스런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전혀 그런 느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만 한편 자기 개성도 잃지 않습니다. 하나님 또한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고 모세를 설득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믿는 하나님의 모습이고, 하나님이 인간을 대우하시는 방식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전적인 무기력함을 강조하고, 자유의지가 아닌 노예의지 밖에 없다고 하며,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벌레만도 못한 존재로 취급하는 칼빈주의는 오늘 장면에서는 합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꼭두각시처럼 움직여야 한다고 믿는 성령운동파들이 믿는 하나님의 모습하고도 역시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개성을 가진 인간으로 만드셨고, 또 그런 인격으로 대우해 주십니다. 까칠한 성격의 모세를 설득하시느라 하나님이 얼마나 진땀을 흘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3장과 4장에서 하나님은 무려 13번에 걸쳐 말씀을 걸어오고 계십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이런 예우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다른 인간에 대해서, 특히 나보다 못한 약자들에게 대해서 얼마나 함부로 대하고 있는지 반성하게 만듭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비전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애굽을 떠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갈 것을 명하셨고, 모세는 이 일을 수행하는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3장 10절입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모세가 받은 소명입니다. 모세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고 모세의 인생 비전입니다. 소명이나 비전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두에게 비전을 주십니다. 비전을 뚜렷이 붙잡은 사람도 있고, 또 비전이 아직은 흐릿하게 보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비전에 하나님의 불이 붙어 열정적으로 달려가는 사람도 있고 아직 하나님의 불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바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은사로 비전으로 이 생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주셨다는 확신입니다. 하나님은 그 비전에 불을 붙이셔서 우리 인생이 불꽃처럼 아름답게 타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묵묵히 믿음의 길을 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불을 체험하라
출 3:1-10 / 피영민 목사
서 론
출애굽기 2장과 3장 사이에는 4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40세가 된 모세는 출애굽기 2장에서 애굽 사람을 죽이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 갔습니다. 그 후에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의 양을 쳤습니다. 장인 이드로의 집에서 양을 치면서 데릴사위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에게 그 40년의 세월은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정말 별볼일 없는 생활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나이 80이 되어 다 늙었으니 모세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자기 양 한 마리 없고 양이라고 치는 것은 전부다 장인의 양이니 모세는 정말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그런 평범한 세월을 더 보내다 보면 90살, 100살이 될 것이고 조금 지나면 죽을 것이고, ‘인생이란 이렇게 하루하루 살다가 죽어가는 것인가보다.’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이 출애굽기 3장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도 보통날처럼 하나님의 산이라고 불리우는 호렙산에서 자기 장인의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여호와의 사자, 하나님의 천사가 불꽃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보니까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습니다. 보통 떨기나무에 불이 붙으면 불과 몇 분 사이에 다 타버리는데 이 불은 이상하게도 나무가 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지나가다가 이상하다하고 뒤돌아서 다시 불구경 갑니다. 그 때에 모세가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시고 부르십니다. “모세야, 모세야” 그러자 모세가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모세는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하는 음성을 듣고 모세는 황급하게 신을 벗습니다. 신을 벗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에도 하나님 앞에 존경심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그리고 내 백성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되었으니 내가 너로 내 백성을 건져내는 구원자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모세는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의 지도자로서 소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80세부터 120세까지는 남자만 60만 명이 되는 그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 40년의 그 어려운 세월을 보내게 되는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모세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뒤로 일생일대의 대변혁을 경험합니다. 평범하고 아무 이력서 낼 것도 없는 그런 목자가 대 출애굽의 지도자로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름도 없이 미디안 광야에서 양이나 치다가 사라질 존재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출애굽의 구원자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방향이 전환된 것이고 삶의 목적에 근본적인 변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불을 만난 때와 장소를 보십시오. 어디 소망을 걸만한 때와 장소였습니까? 모세의 나이 80이 되었던 때입니다. 80이면 인생에 무슨 소망을 갖겠습니까? 그저 살다가 주께서 부르시면 갈 나이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미디안 광야 사막, 있는 것이라고는 가시떨기 나무밖에 없는 그곳에 무슨 인생이 변할 일이 있으며 무슨 소망가질 일이 있겠으며 무슨 능력 받을 일이 있겠으며 무슨 비전을 가질 일이 있겠습니까? 모세가 무슨 비전이 있겠습니까? 모세는 소망이 없는 때, 소망이 없는 장소에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 하나님의 불이 임하고 그곳에서 모세가 여호와를 만나게 되자 모세의 인생은 획기적인 변화를 하게 된 것이고 평범한 인물이었던 모세가 비범한 인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은 모세에게 소망을 주셨고, 모세에게 사명을 주셨고 모세에게 능력을 주셨고, 모세에게 꿈과 희망을 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런 하나님의 불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가 대부흥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불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을 우리가 체험하게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불은 무엇이며 도대체 무슨 기능을 행하는 것입니까?
1. 하나님의 불은 무엇인가?
모세가 처음 만난 하나님은 불의 하나님이었습니다. 모세는 그렇기 때문에 신명기를 기록할 때에 신명기 4장 24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말합니다. 신약성경 히브리서 12장 29절에도 이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라.” 신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에는 불 가운데 나타나신 경우가 많습니다. 이 불은 하나님이 임재하신 상징입니다. 하나님이 이곳에 오셔서 함께 계신다는 상징으로서 불이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불은 이상한 것이 지옥불과는 다릅니다. 지옥불은 우리 입에서 나와서 사람의 삶을 파괴하고 생애의 바퀴를 불사르고 인생으로 하여금 망하게 하고 교회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불은 붙기는 붙어도 망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불은 붙으면서 흥하게 하고 파괴시키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강남중앙침례교회는 하나님의 불이 붙는 교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불꽃같은 백성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불붙는 교회(church of fire)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붙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신구약 성경에 하나님이 불이 임한 경우를 보십시오. 어느 경우에도 나쁜 경우가 없습니다. 출애굽기 13장 21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 40년 인도할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진영에는 불기둥이 임했으니 얼마나 밝겠습니까? 바깥은 캄캄한 어둠일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기둥이 가는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불기둥은 갈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상징이었습니다.
레위기 9장 24절을 보면 모세와 아론이 아론의 자손들을 제사장으로 임직시키고 나서 회막으로 나와서 제단위에 제물을 올려놓고 내려왔을 때 여호와의 불이 나와서 제물을 태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불이 떨어져서 제물이 탈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소리를 지르면서 엎드려서 여호와를 경배했다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불이 임하는 곳에 놀람도 있고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경배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8장 24절에 나오는 엘리야라고 하는 선지자 얼마나 외로운 선지자입니까? 여러 가지 핍박 속에서 엘리야 선지자는 바알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 합이 850명과 싸웠습니다. 말 그대로 850대 1로 싸운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담대히 선포합니다. “불로 응답하는 신 그분이 참신이니라.” 그리고는 850명의 바알 아세라 선지자를 얼마나 놀립니까? 너희 신은 어디 잠깐 외출을 나갔느냐? 잠깐 낮잠을 자느냐? 어째서 불이 내려오지 않느냐? 그러자 그들이 몸에 상처를 내고 피를 내지만 불은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기도할 때 여호와의 불이 내려 제물을 사르고 물도 다 태우고, 도랑도 태우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850명의 거짓 선지자를 단칼에 죽이는 위대한 역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 20장 9절에도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씀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 말씀이 슬픈 말씀이라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할 것이라. 차라리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낫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고 항복해라. 너희의 죄가 이제는 분량이 차버려서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포로로 만드시기를 작정했느니라. 고로 바벨론에 항복하라.” 하는 메시지를 증거하려니 얼마나 슬프고 답답하겠습니까? 그래서 예레미야가 이런 메시지 선포하지 않으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려고 하면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중심에 불붙는 것 같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사도들과 120문도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 사람들이 어떤 훈련을 통해서 되었습니까? 요새는 부흥사도 훈련을 시킨다고 합니다. 부흥사라는 것이 훈련 받아서 되는 것입니까? 부흥사 흉내 낸다고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심령이 뜨거워지는 것은 흉내나 훈련으로 되질 않습니다. 이것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불을 받을 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어떤 분이 전도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것을 보고 흉내 내면 전도가 됩니까? 아닙니다. 우리 심령에 하나님의 불, 성령의 불이 우리 속에서 타오를 때에 우리는 예수를 증거하는 사람이 되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2장 3절에도 120문도가 성령을 받을 때 “성령이 임할 때에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위에 임하여 있더니 모두가 성령의 충만을 받고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나와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의 심령이 뜨거워지고 은사도 받고 방언도 말하고 갖가지 신령한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성령의 그러한 역사가 성경 말씀이 책에만 있고 체험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된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불은 우리의 심령에 임하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은 불을 받았더니 몸이 뜨거웠다고 하는데 몸이 뜨거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불은 몸에 임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영혼에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뜨거워지면 그 온도가 올라가서 몸의 뜨거움이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근본적으로 성령의 불은 우리의 심령에 붙는 것입니다. 여러분 심령에 이 하나님의 불이 붙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책 속의 불이 아니라 나의 삶 속에 실체로 체험되는 불이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불은 체험했는지는 몰라도 나는 아니라” 하는 말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불을 체험해서 평범한 나같은 사람도 비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가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불같은 성령의 능력과 임재를 체험하기 위해서 올 한해는 “성령의 불로 내 심령이 뜨거워지기를 원하나이다.”하는 기도제목을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여 모세가 받았던 그 불을 나도 받기를 원합니다.” 하는 믿음을 가지고 올 한해 기도해서 여호와의 대사를 체험하는 해 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흥은 불 떨어질 때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올해는 우리가 다른 것보다도 “모세를 변화시킨 이 불이 우리 심령에 붙게 하여 주시고 우리 교회에 붙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저도 그것을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도 그것을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2. 불은 어떤 특징이 있나?
그러면 하나님의 불은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불은 첫 번째로 붙는 특징이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불은 붙기는 붙되 파괴시키지는 않습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가 “하나님의 불이 당신의 삶에 임하게 되면 사람들이 와서 불붙는 당신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 전에는 술 먹고 바람피우고 죄짓던 사람이 갑자기 어떻게 저렇게 바뀌었는가? 하나님이 계신가보다” 하면서 구경하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불이 행하는 역사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16절에 라오디게아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꾸중을 받습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겠다.” 하나님은 미지근한 신앙을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입에서 토하여 내치겠다는 말은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에게는 구역질의 원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심한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올한해 미지근한 신앙에서 뜨거운 신앙으로 바뀌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뜨거운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불붙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뜨겁다, 불이 붙었다고 하는 것은 사람이 열심이 있고 열정적이고, 뭘 하나 해도 마음을 써서 하고, 말만 하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 뜨겁다고 합니다. 불이 붙은 사람은 기도도 뜨겁습니다. 기도 한마디도 뜨겁게 나가고 봉사도 뜨겁고 찬양을 해도 뜨겁고 전도를 해도 뜨겁고 사랑을 해도 뜨거운 것입니다. 올 한해 뜨거운 사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위대한 다윗도 시편 69편 9절에 자기가 어떻게 위대해졌는가?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켰다고 했습니다. 삼킨다는 말은 영어로 태운다(consume)입니다. 태우기는 태우는데 없어지지 않은 채 자기를 뜨겁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강남중앙침례교회는 주일날만 와서 예배드리고 주일날 외에는 안 오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일만 하루 나와서 예배 잠깐 드리고, 헌금 쪼금 하고 가는 사람은 신앙생활 망치기로 결심한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을 망치기로 결심한 사람은 계속해서 그렇게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런 미지근한 신앙을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겠습니까? 어떻게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불이 체험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변해야 합니다. 우리 심령에 불이 붙어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심령에 불이 붙게 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의 핵폭탄이 터지듯이 터져나가게 될 때에 교회는 놀랍게 부흥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대전에서 예수를 믿었을때 저는 공군 소위였습니다. 대전에서 허랑방탕하며 술도 많이 먹는 건달중의 상건달이였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보고 전형적인 공군이라고 했습니다. 바람기도 있게 생겼고 파란 옷 입고 다니고, 저는 구두도 군대 구두 신은 적이 없습니다. 늘 사제구두 신고 다니고 머리도 길어서 헌병에게 걸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가 변했습니다. 말씀으로 변했고 예수 믿고 변했습니다. 대흥침례교회가 그 당시에 이삼백명 정도였는데 교회가 불이 폭발적으로 터지기 시작하더니 불과 이년 만에 이천 명을 넘었고 지금은 칠천 명이 된 것입니다. 교회 부흥은 이 하나님의 불이 우리 심령에 터질 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이 우리에게 임할 때 부흥되기 싫어도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올 한해 성령의 불붙는 교회 되게 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불은 어떤 능력이 있습니까? 정화(purification)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라기서 3장 2-3절에도 하나님께서 성전을 방문하는 그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같이 앉아서 레위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은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하나님은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같다고 했습니다. 금을 연단할 때 어떻게 합니까? 원광석을 갖다가 불을 일곱 번이나 때면 불순물은 다 제거되고 순금이 나옵니다. 성령의 불이 우리 가운데 임하게 되면 우리는 정화됩니다. 욥기 23장 10절에 보면 욥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은 고난의 단련과정을 통해서 불순물이 제거되고 정금처럼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약점, 숨겨 놓은 죄, 은밀한 허물, 은밀한 모략, 모든 정죄 받을 죄, 이런 것들을 성령의 불길은 태워 버리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불은 먼저 질 병을 태우고, 둘째는 귀신, 셋째는 우리의 죄를 태웁니다. 새벽기도실에서 기도하는 권사님들께서 가끔 기도하다보면 귀신이 와서 목도 막고 할퀴고 별짓을 다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악한 귀신들이 성령의 불이 오면 바짝 태워져 버리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대한민국도 얼마나 많은 귀신들이 난무합니까? 이 강남 지역에도 난무하고 있습니다. 안보이십니까? 우리는 이런 것을 무엇으로 이기겠습니까? 인간의 재주로 이기겠습니까? 윤리 도덕으로 이기겠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무슨 타이르는 말로 해서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성령의 불이 우리 가운데 자유스럽게 역사할 때 우리는 이길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불은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불은 빛을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불이 있는 곳은 어둠이 물러갑니다. 불신의 어둠이 물러가고 절망의 어둠, 방탕의 어둠, 우상숭배의 어두움이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고보서 1장 17절에 ‘모든 빛들의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는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4절에 “너희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빛인 것입니다. 고로 우리에게 성령의 불이 임하게 되면 이 빛이 어떻게 됩니까? 발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빛이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60장 1절에는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 빛이 더 빛나게 되면 사람들이 우리에게 빛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직장생활 할 때에도 “저 사람은 이상해 저 사람에게는 이상하게 알지 못하는 빛이 있어.” 해서 그 사람에게 이끌려 오게 됩니다. 그래서 전도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은 하나님의 불은 우리를 뜨겁게 하고 우리를 정화시키고 우리에게 빛을 비추게 해서 이 빛을 세계만방에 비추도록 역사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어떻게 해서 위인이 되었습니까? 다른 것 없습니다.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함으로 위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어떻게 다가오셨습니까? 불로 다가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우릴 뜨겁게 하시고 우리 죄악을 태워 정화시키시고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 불이 체험되는 교회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예배에 와서 이 불을 체험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 론
우리가 이 불을 체험하려면 첫째로는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23장 9절을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숴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고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곧 불입니다. 두 번째로는 모여서 기도해야 합니다. 합심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 120문도가 어떻게성령의 불을 받았습니까? 모여서 전심전력하여 열흘 동안 함께 금식하며 기도할 때 하늘 문이 열리고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임하고, 은사가 임하고, 심령이 뜨거워지고, 방언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놀라운 역사가 그들 가운데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오늘날도 하나님의 교회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불이 우리 심령을 뜨겁게 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모여서 ‘성전기도’를 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불을 받으려면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죄는 성령을 소멸시킨다고 했습니다. 레위기 4장에 보면 “제사장들은 제단의 불을 꺼뜨리지 말라”는 말씀이 여섯 번이나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재를 날마다 치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재가 막혀 있으면 산소 공급이 되지 않아서 불이 피워 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개신교의 영성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는 간단합니다. 가톨릭은 복잡하고 개신교는 단순합니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와 회개의 단순성을 추구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의 죄악을 깨닫고 회개하고 주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내게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다른 복잡한 영성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름을 바꾸거나 머리를 깎을 일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전에 모여서 말씀과 기도와 회개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믿음으로 여호와의 불을 사모할 때에 우리 여호와의 불이 우리 강남중앙침례교회에 붙을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2020년도에는 저의 심령도 여러분의 심령도 불붙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든 성도들의 영혼에 성령의 불이 활활 타오르는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대 부흥을 이룹시다.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3:1-10, 7-14 / 지태일 목사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명의식(sense of calling)이라고 하면 목회자, 혹은 선교사, 교회의 어떤 특별한 직분을 받은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신자들자신은 소명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교회에서도 구경꾼으로 서 있고,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늘 아웃사이더가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소명, 부르심이라는 단어는 특별한 사람들에게 국한된 어떤 경험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편적으로 해당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목적없는 인생이 없듯이 하나님의 부르심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부르심 때문에 오늘 우리가 여기에 모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에로의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은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죄에서 건져내기 위해 사람들을 불러내십니다. 맨 처음 인간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동산 무서워 동산 나무뒤에 피하여 숨은 아담을 불렀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아담이 어디있는지 몰라서 물으심이 아니라 죄인을 찾아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입니다. 이 부르심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부르심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가 바로 사람들을 죄와 저주, 마귀의 손에서 건져내기 위해 섭니다.
그래서 요3:16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누구든지 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롬10:13)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원자로 인정하고 영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요1:12)
이 구원에로의 부르심은 우리가 얻은 구원이 우연한 사건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어쩌다가 보니 예수 믿게 되었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나를 택하시고 때를 따라 불러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요6:44에 보면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예수님께로 올 수 없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주셨기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원에로의 부르심을 알 때 우리는 구원의 감격과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크게 두 번째의 부르심은 사명(사역)에로의 부르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부르심을 체험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에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에 헌신된 일군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교회에서, 그리고 사회 구석 구석에서, 심지어 저 오지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지지난주 제가 만난 캄보디아 젊은 청년 장기 사역자들, 선교사들... 단기선교 사역을 갔다가 다시 6개월, 1년이상을 장기선교 사역을 감당하는 자매들, 형제들이 많습니다. 아니면 캄보디아 선교사역이 어떤지 3개월 정도 살피러 갔다가 그만 9년씩이나 지금도 그 선교에 사역하는 선교사님도 있습니다. 모두 사역으로의 부르심을 받은 일군들입니다.
이 사역에로의 부르심에 대한 개념이 과거에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중세 로마카톨릭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사제들, 신부들에게만 국한 시켰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사제 자신들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중심한 종교개혁자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의 주장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성직자와 평신도의 계급적인 구분을 철폐하는 만인 제사장의 원리(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입니다. 그런데 이 만인 제사장의 원리는 자연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직업이 바로 성직이 될 수 있다는 논리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일반 평신도들도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평신도들의 모든 직업 활동도 바로 하나님의 소명에 의해 주어진 고귀하고 값진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신적 소명론을 주장했는데, 그가 말한 신적 소명(divine calling)을 받은 자는 사제들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에게서 신적 소명을 받았습니다. 성도들의 직업이 대장장이든, 구두 수선공이든, 푸줏간 주인이든, 슈퍼마켓 주인이든 상관없습니다. 농부든 학생이든 주부든 모두가 하나님의 거룩한 직분과 소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만인 성직자론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소명받은 삶입니다. 교회의 직분을 감당하든, 아니면 세상에서 직장이나 사업이나 모두 사역으로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소명없는 삶이란 없습니다. 단지 문제는 소명감(感)을 갖고 일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소명감을 가지고 일하는 것과 그냥 하는 것은 많은 차이가 납니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헌신하는 것과 그냥 하는 것은 다릅니다. 내가 헌신하는 이 사역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것이라는 확신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필요합니다.
우리의 삶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내 직업, 내 직장, 내 가정에 하나님의 소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거기에 헌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소명을 이루는 삶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부르심의 성격이 어떠합니까? 처음에 소명의식이 없던 모세의 인생은 애굽에서나 미디안 광야에서 실패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난 이후 그의 인생은 진짜 인생을 살게 됩니다. 나이와 관계없습니다. 환경이나 건강도 두 번째 문제입니다. 소명을 받은 모세는 드디어 위대한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먼저 하나님이 부르신 모세의 소명에서 기본적인 것 몇 가지 사실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은 평범한 일상적인 삶속에서 모세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양을 치는 것은 일상적인 삶입니다. 3:1절에 “모세가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호렙산은 시내산의 다른 이름입니다. 아마 산의 다른 능선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 호렙산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먹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평범하게 양떼를 먹이며 치는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양을 치는 모세를 만나주신 것입니다.
보통 세상 종교는 신을 만나기 위해 특별한 것을 준비하고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기도를 해도 예수님처럼 40일 기도, 그것도 금식기도, 100일 기도, 얼마 얼마라는 날짜를 정하기도 합니다. 삼천배, 만배 등 온 정성을 드립니다. 그리고는 무슨 소리가 들리면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인가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고넬료를 만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처럼 비몽사몽간에 말씀하신다고 해서 밤을 세워보기도 합니다. 나중에는 환상인지 꿈인지 정말 비몽사몽간에 뭔가 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뜻이 헷갈리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심니다. 자신이 헷갈리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특별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은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을 때 우리를 만나주시고 불러주십니다. 갈리리 고기잡이하는 현장에서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마태는 세관에 앉아 있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하나님을 만남니다. 기드온은 타작마당에서, 아모스는 뽕나무 농사를 짓다가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너무 신비하게, 헷갈리게 무슨 이상한 소리나, 꿈이나 기적, 충격요법이나 아니면 무슨 방언이나 입신을 통해 소명을 받겠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평범하게 일상적인 일속에서 모세를 부르시듯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2. 모세가 호렙산에서 양을 치고 있는데 아주 평범한 일속에서 부르심니다.
그것은 가시떨기에 불이 붙어서 활활 타오르는데 이상하게도 나무는 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모세는 그 불을 보려고 가까이 가게 됩니다. 무슨 가시떨기 나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떨기나무는 아주 흔한 것입니다. 가시떨기에 불이 붙는 것도 아주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뜨거운 태양빛 아래서 가끔씩 떨기나무가 타버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했습니다. 날마다 보는 나무, 날마다 하는 일, 그런데 그날은 달랐습니다. 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나무가 타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어 이상하다’ 아마 모세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 불붙은 나무를 보기위해 가까이 갔습니다.
가시나무는 보잘 것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애굽에서 겪고 있는박해나 고난을 의미합니다. 그 불가운데서도 죽거나 망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서, 즉 별 것 아닌 사실, 뜨거운 태양빛 아래서 가끔 볼 수 있는 그런 현상이지만 하나님은 거기서 모세를 부르심니다. 다가 오심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도 다가오십니다. 어느 날 일상적인 삶의 환경이 다르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보통 때가 다르지 않는 평범한 일인데 거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우리들을 하나님에게로 이끄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늘 드리는 주일 예배가 어느 날 이상하게 가슴 벅차게, 감격스럽게,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의 붙드심속에 다가올 수 있습니다. 주일예배를 등한히 여기지 마시기 바람니다. 빠지지 마시기 바람니다. 늘 하는 새벽기도이지만 어느 날 마치 주님이 나를 감싸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무슨 40일 철야 금식기도를 한 것도 아니고, 산에 올라가서 소리 지른 것도 아닌데 그런데 늘 하는 평범한 일상의 사건이나 신앙생활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세의 발걸음을 붙잡아 둔 것은 평소에 늘 보던 것, 이 불붙는 보잘것없는 가시나무였습니다.
오늘 우리를 붙잡는 것이 오늘 주일 예배일 수 있습니다. 오후 찬양예배일 수도 있고, 새벽기도일 수도 있고, 수요예배일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광야에서 일어날 수 있는 아주 평범한 일을 통해 모세를 불렀다는 사실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작은 아이들을 통하여 부르시기도 하심니다. 큰 곳에서만이 부르시고 찾지 아니하심니다. 작은 모임이지만, 작은 교회라도 예배당 저 구석의 작은 자리에 앉은 나지만 찾아 오셔서 부르심니다.
3.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구체적인 소명을 주었다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본문 4절에 보면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이름을 두 번씩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모세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 그것도 두 번씩이나 불렀다는 것은 도저히 잘못들을 수 없는 부르심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한번만 불렀다면 ‘잘못 들었나?’ 라고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또렷하게 자기 이름을 그것도 두 번씩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희미하게 마치 안개에 가리워진 것처럼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분명하게 그리고 명확하게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어떤 경우는 헷갈린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헷갈리지 않습니다. 헷갈려는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너무나 자기 생각, 자기 방법으로 가득해서 도무지 하나님의 음성을 안듣고 자기 고집을 피웁니다. 또 자기가 원하는 음성만 듣고 싶어 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음성만을 기다리니까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세의 이름을 정확하게 부른 하나님은 모세에게 계속적으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5절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나님은 그곳을 거룩한 땅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 땅 자체가 거룩한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곳이 거룩한 이유는 그 곳에 하나님이 임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가시떨기에 불이 임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곳에 임재해 있기 때문에 그곳은 거룩한 곳입니다. 거룩의 경험은 장소나 시간에 대한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경험입니다.
왜 교회가 거룩한 곳입니까? 왜 성도라 명하심니까? 건물이 거룩합니까? 아닙니다. 이곳이 거룩한 이유는 이곳에 하나님이 임재해 있기 때문에 성전이라 부름니다. 모세에게 이곳이 거룩하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체험, 그냥 장소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거룩, 임재를 체험하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래서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더러운 신발을 신고 서 있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처럼 어떤 성공앞에서도 두려움으로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고백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신발을 벗는 다는 것은 자기의 권리, 자기의 주장을 다 내려놓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사회적으로 보면 노예들은 신발을 신지 않았습니다. 마치 노예가 주인 앞에 서듯이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이 은혜를 크게 받고, 신앙의 체험을 하고 교회가 부흥하는 것은 이 거룩의 체험, 하나님의 임재 앞에 두려워 떠는 일과 함께 시작됩니다.
교회가 가장 좋지 못한 것은 말이 많은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적으로 가면 갈수록 말이 많고 자기 주장이 많습니다. 그러나 거룩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잠잠합니다. 자기 논리, 자기 생각, 자기 경험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7-8절을 보면 놀라운 구원의 계획을 모세에게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신 목적은 바로 이 일에 사용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십시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브리스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족속 히위족속, 여부스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하나님의 계획은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난안 땅으로 인도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까지만 말씀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맞습니다. 하나님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어서 고통받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 내십시요!’ 아마 모세는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하나님은 모세를 사용하기 원했습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주시면서 ‘모세야 이것은 네가 할 일이다’ ‘이 일에 내가 너를 사용하기 원한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보았습니까? 어쩌면 지금 이 시간에 주님은 여러분들에게 말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소명은 지금까지 내 마음대로, 내 계획대로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뜻 속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8절까지만 듣습니다. 8절까지만 좋아합1니다. 아멘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말씀, 다 좋지요, 맞아요. 그럼요! 라고 반응합니다.
그런데 10절까지는 안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네가 이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8절까지만 읽고 그냥 위로받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까? 소명 받은 자의 삶을 살려면 10절의 말씀을 반드시 들어야 합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소명의식을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갑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에 나를 불렀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소명있는 자의 삶과 소명없는 자의 삶은 다릅니다. 그냥 교회 출석하는 것과 소명을 가지고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은 다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소명에 헌신했을 때 그는 놀라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네가 이 일을 해야 한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귀한 부르심 앞에 서고 신앙생활에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상생활속에서 양치는 가운데 하나님은 부르심니다. 늘 보던 그 가시나무 불꽃, 평범한 자리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심니다. 구체적으로 나를 부르실 때 아멘으로 응답하는 귀한 생애가 다 되시기 바랍니다.
내가 무엇입니까
츨 3:1-12 / 인명진 목사
서양의 철인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습니다. 내가 누구인가 내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아 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 삶의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과거에는 무엇을 했으며 지금은 무엇을 하는 사 람인가 그리고 미래에는 무엇을 하며 살려고 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과거에는 무슨 일을 하였으며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지금은 무슨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 까? 미래에는 무엇을 위하여 왜 살 것 같습니까? 이 질문은 우리의 인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며 인생 을 제대로 사는 사람이라면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 질문에 대답을 하 지 못하는 사람은 인생을 제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지난 날 되는 대로 살아왔고 지금도 그냥 사니까 살아가고 있으며 미래에도 흘러가는 대로 살겠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인생은 불행한 인생이요 마지막 인생의 종점에서 후회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남자의 일생을 일곱 단계로 나누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한 살 때는 임금님과 같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위해서고 떠받들어주니까 임금님 같다는 것입니다. 두 살 때는 어디서든지 뒹굴며 노는 돼지와 같고 여덟 살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웃고 떠들고 뛰어다니는 새끼양과 같아서 인생의 가 장 행복한 때라고 합니다. 열여덟 살 때는 힘자랑하며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말과 같다 고 합니다. 결혼을 하고 나면 가정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끙끙거리며 살아가는 당나귀와 같고 중년이 되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개와 같이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노년이 되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아무 도 그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원숭이와 같다고 합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하 는 의미 있는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에 따라서 우리 인생 이 의미가 달라지기도 하고 내 인생의 결과와 평가가 달라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 이 분주하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분주하게 살아가면서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힘겹게 사는가 내 삶의 존재의미가 무엇이가에 대해 분명하게 대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에게 드는 생각은 나 자신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남의 이야 기가 아니라 나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됩니다. 우리 중에도 내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가에 대해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스스로 나를 생각해도 한심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열심히 바쁘게 사는데 무엇 때문에 사는지 그것이 무슨 의미 인지 의심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출애굽기 3장에는 무엇 때문에 사는가 하는 분명한 이유가 없이 죽지 못해서 사는 사람의 이야 기가 나옵니다.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는 지금 양치는 목자가 되어서 양떼를 돌보며 세월을 보내고 있습 니다. 모세는 히브리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바로의 궁에서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최고의 영광 을 누리며 40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의 동족이 학대를 받는 것을 보고 분에 못이겨 살인 을 저지르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치게 됩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이드로의 집에서 살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결국 처갓집에 얹혀살면서 그 집 양떼를 돌보며 평범한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그에게 꿈이 있던 것도 아니고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죽지 않고 살아있으니까 살아가고 있습니다. 삶의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 의미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제가 오늘같고 오 늘이 어제 같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세의 이와 같은 삶을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목적을 가 지고 의미 있게 살 때 살아가는 것입니다. 양을 치기 위해서 먹고 먹기 위해서 양을 치고 일하기 위해서 먹고 먹기 위해서 일하는 것은 의미 있는 삶이 아닙니다. 이것이 모세의 인생이었습니다.
물론 양을 치는 일이 보잘것없고 천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설사 양을 치는 사람이라도 그의 가슴에 비 전과 꿈과 뜻이 있다면 의미 있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모세의 가슴에 이런 것이 없다는 것입니 다. 인생의 목적도 의미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옛날 모세의 가슴에 불붙듯이 타오르던 동족에 대한 사랑 도 없고 민족을 위한 사명감도 없고 용기도 의지도 희망도 꿈도 사라졌습니다. 비록 양을 치는 보잘것없 고 천한 목자라고 해도 옛날처럼 그 가슴에 꿈과 목적과 비전이 있다면 그는 의미 있는 삶, 위대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문제는 되는 대로 기계적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있으나 마나 한 인생, 없어져도 표가 나지 않는 이 사회에서 중요하지 않은 특별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아마도 모세 스스로도 자신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고 객관적으로 봐도 그렇습니다. 만약 그가 이 세상에서 없 어져도 그만입니다. 별 볼일 없는 있으나마나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일은 내가 없어도 내 가 사는 이 세상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면 참으로 허무한 인생입니다. 물론 집안에서야 남편이 아내가 없 다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사회에 내가 없으면 표가 나고 없으면 안 될 사람이어야 합니다.
별 볼일 없이 살아가던 이 모세에게 하루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면 신음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 엄청난 역사적 인 일을 하게 됩니다. 모세가 아니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됩니다. 양을 치는 일에서 민족을 구원하는 일로 모세의 삶의 차원이 변하게 됩니다. 사람이 변한 것이 아닙니다. 똑같은 모세입니다. 하루 에 세끼를 먹는 모세입니다. 이제 그가 하는 일이 엄청나게 달라졌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서부 터입니다. 모세가 양떼를 데리고 호렙산에 이르러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애굽으로 내려가 네 동족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라 이렇게 되는 대로 살지 말고 이제 그 만 네가 해야 할 일 의미 있는 인생의 일을 하라고 도전하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이 말씀에 쉽게 대답 하지 못하고 온갖 변명을 합니다. 제가 무엇인데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말을 잘 하지 못합니다. 쉽 게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냥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평범하게 지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 나님께서는 간곡하게 권고 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으니 결심하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머뭇거리 지 말고 무의미한 인생을 살지 말고 애굽으로 내려가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인생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 났습니다. 똑같은 모세의 삶이지만 차원이 다른 역사적인 삶이 되었습니다. 똑같은 하루세끼를 먹지만 이제는 살기 위해서 먹는 밥이 아니었습니다. 의미있는 인생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민족을 구원하는 위 대한 일,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었으며 하나마나한 일이 아니라 꼭 해야 할 중요한 일 특별 한 일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의 삶이 이렇게 엄청나게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의 삶은 차원 이 다른 삶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제 나름대로 살아갑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중의 한 사람입니다. 우리들 모두 나름대로 각자의 삶이 있습니다. 하루 24시간 다 똑같은 시간의 삶을 살아가지만 다 똑같은 인생의 삶이 아닙니다. 하루 세끼 다 똑같이 먹지만 다 똑같은 삶이 아닙니다. 하루 세끼 먹는 음식의 의미가 다릅니 다. 어떤 사람은 살기 위해서 먹고, 어떤 사람은 위대한 일을 하기 위해서 먹는 것입니다. 다 똑같은 차원 의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1차원의 삶을 2차원 3차원 4차원의 삶을 삽니다. 인생의 질 이 다르고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데 다 같은 것이 아닌 것처럼 인생도 마찬가지 입니다. 업그레이드된 삶을 사는 사람도 있고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차원의 인생을 사는 사람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집에서 좋은 차 타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사는 사람은 인생의 질이 낮은 저차원의 인생, 있으나 마나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처럼 저 차원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을 먹고 무슨 옷을 입 고 어떤 집에서 어떤 일을 하며 사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생각을 하며 무슨 목적을 가지 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질과 차원을 결정하게 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업그 레이드 해야 합니다.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8-90년 오래 살 것을 생각하지 말고 하루를 살더 라도 의미 있는 삶, 차원 높고 질 높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33년을 살았지만 하늘에 닿는 차원높은 삶을 사셨기에 그의 삶은 영원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영 향을 주고 역사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던 사람이었지만 예수님 을 만난 후 그의 인생이 업그레이드되어 고기를 잡던 베드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혹시 베드로가 그때 당시 엄청난 고기를 잡아 성공했다 해도 그것이 역사적으로 무슨 의 미가 있겠습니까? 2000년 후에 그것을 누가 기억하며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을 낚 는 어부가 된 베드로의 삶은 그 자신만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삶을 살게 되었습니 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처럼 무의미하게 죽지 않아서 살아간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후회하는 인 생이 될 것입니다. 죽은 후에 영정사진을 보며 사람들은 돈 벌려고 그렇게 애쓰더니 다 놓고 죽는구나 하 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말 것입니다. 힘들여 모았던 재산 도 흔적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세상은 내가 있고 없고 아무것도 아쉬운 것이 없이 아무런 일도 없습니 다. 그렇게 무의미하게 살다 죽으면 억울하지 않습니까? 나름대로 힘겹게 사는 인생인데 그렇게 허무한 인생이라면 억울하기 않습니까?
그렇다고 모세처럼 애굽에서 떠나라는 것도 아니고 베드로처러 모든 것을 다 버리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인생의 목적을 바꾸면 됩니다. 내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내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물질이 아니라 높은 뜻을 위해서 내 삶의 인생의 목표를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서 돈을 버는 가 돈이 목적이 아니라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 돈을 벌어야 합니다. 내가 돈을 버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 는 곳에 쓰기 위한 것이고 내가 시간과 재능과 돈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 목표를 바꾸 면 우리 인생은 자연적으로 업그레이드가 되고 우리 인생이 의미 있는 삶이 될 것이고 역사적인 삶이 되 고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 옛날 호렙산에서 모세를 찾아가셨던 하나님, 그 옛날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를 찾아가셨던 예수 님 오늘 이 아침 우리들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무의미하게 살 것인가 무엇 때문 에 바쁘고 힘들고 고달프게 사는가 밥을 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 의미 있는 차원 높은 삶을 살라고 도전하여 말씀하십니다. 한 번 사는 인생입니다.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인생이 아니라 차원 높은 삶, 영원히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삶. 이 사회에 아름다운 발자 취를 남길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위대한 사람만 그렇게 산 것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베드로가 그렇 게 살았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귀 한 깨달음 이 아침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이 부르신 사명의 꿈을 꿉니다
출 3:1-12 / 조재호 목사
1. 하나님의 사람은 어두운 사회를 살려내는 말을 합니다.
교회에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속해 있는 모든 곳에서 축복의 말을 많이 하고 살리는 말을 많이 하며 격려의 말을 많이 하며 살아갑시다.
* 즐거운 대화를 위한 10가지 지혜로운 충고입니다.
1. 밝은 표정, 부드러운 목소리로 상대를 대하라.
2. 상대방의 말을 중간에 자르지 말고 끝까지 주의깊게 들으라.
3. 항상 신선한 이야기로 즐거운 시간을 만들라.
4. 자기 혼자 잘난 척 하지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마음을 열어 칭찬하라.
5. 부정적인 말보다는 긍정적인 말을 사용하라.
6. 대화할 때 상대방과 눈을 맞추라.
7. 여러 명과 함께 이야기 할 때 혼자 독차지하지 말고 소외되는 사람 없게 하라.
8. 얼굴과 목은 가만있는데 눈동자만 굴리지 말라.
9. 말을 또박또박 힘있게 하고 믿음직스럽게 하라.
10. 가르치려고만 들지 말고 재미있게 듣고 배우려고 하는 자세를 취하라.
밤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이 반달보다 얼마나 더 밝을까요?
반달보다 보름달이 2배쯤 되니까 밝기가 2배정도 될까요? 실제는 무려 9배나 더 밝습니다.
우리의 말은 보름달 같아서 교회와 이 사회를 밝힐 수 있습니다.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은 더욱 빛을 냅니다. 모세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2. 모세는 일생을 거치면서 3번 태어나는 과정을 거칩니다.
첫 번째 출생은 어머니 요게벳으로부터의 출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시절에 인구가 많이 증가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애굽나라)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바로는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여 출산 억제정책을 쓰기 시작했고 바로가 산파들에게, "여아이면 살려두고 남아이면 그 자리에서 죽여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을 때, 레위 족속의 가정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건강하게 태어난 감사와 기쁨도 잠시, 남자아이를 숨겨 키워야했습니다.
석 달을 키웠으나 울음소리도 점점 커지고, 더 이상 키울 수 없게 되자 아이의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아이를 상자에 곱게 넣어 나일강에 띄웠습니다. 첫 번째 출생 때 아버지는 이스라엘 레위 사람 아므람이었습니다. 모세는 '아므람의 아들'이었습니다.
두 번째 출생은 나일 강에서부터 건짐을 받은 출생입니다. 아기를 태운 상자는 흘러내려 가다가 나일 강에서 목욕하고 있던 바로의 딸의 눈에 띄었습니다. 비로서 이름이 모세로 정해졌습니다. 모세는 물에서 건져내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때의 모세의 보호자는 세계 최고의 왕 바로였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공주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 출생은 호렙산 기슭에서 다시 태어나는 출생입니다. 궁궐에서 장성한 후에 정치적인 탄탄대로의 길로 나아가다가 뜻하지 않는 사건을 만납니다. 우연치 않게 살인사건을 저지르고 40년 동안의 궁궐생활을 청산하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아내 십보라를 만나고 장인집에서 함께 살아가는 들판의 양치기가 됩니다. 그것도 자기 양도 아니고 장인의 양을 치는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이곳에는 모세를 위한 일생의 놀라운 일이 예비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호렙산 기슭, 풀이 제법 많이 돋아난 곳에 양 때를 풀어놓는 순간, 놀라운 광경이 눈에 띄었습니다. 사람 허리만큼 자란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것이었습니다. 불도 꺼지지 않고 나무도 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불의 형상으로 찾아오신 겁니다. 이상해서 가까이 가서 보려고 하는 순간, "모세야 모세야"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말라" "그리고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네가 밟고 서 있는 땅은 거룩한 땅이니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모세의 세 번째 출생입니다.
첫 번째 출생은 어머니 뱃속에서 출생이고 두 번째는 강에서 건져지는 출생이며 세 번째 출생은 광야 호렙산에서의 출생입니다.
3.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알고 계십니다.
모세가 태어났을 때에도 이미 하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바구니에 담겨 강물에 떠내려 갈 때에도 알고 계셨습니다. 왕자 아닌 왕자로 궁궐에서 살고 있었던 40년의 세월 동안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가 광야로 피신할 때도 알고 계셨으며, 양치기 목동으로 살아가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특별하기 때문에 알고 계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저와 여러분을 알고 계십니다.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뿐만 아니라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도 아시고, 우리의 외로움도 아시고, 우리의 생각도 아십니다.
하나님은 친히 찾아 오셔서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이름도 아시고 아브라함의 이름도 아시고 야곱의 이름도 아십니다. 모세의 이름을 아시고 사무엘의 이름도 아십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안드레가 먼저 예수님을 만나고 형 시몬을 예수께로 대리고 오자, 예수님이 보시고,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앞으로는 베드로라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시몬도 아시고 그의 아버지고 아셨습니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외운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름으로 알고 계십니다. 모세를 부르시듯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인생의 진정한 시작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하나님 안에서 나의 할 일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든지 할 일, 해야할 일을 주십니다. 사명을 주십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할 일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해야 할 일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인생의 궁극적인 사명, 살아가며 이루기를 원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사명은 엄청나고 대단한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주님 안에서 올해 할 일이 있습니다.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명입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사명은 확신을 주고, 확신은 식지 않는 열정을 주며, 믿음의 열정이 맡기신 일을 이루어 나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손에 붙잡히십시오. 거장의 손에 붙잡히면 이상한 소리내던 바이올린이 화음을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 달라집니다. 분명히 달라집니다. 변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올 한해 사명을 이루어 나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자세
출 3:1-5 / 임덕순 목사
모세는 그동안 자기가 애굽에서 배운 지식과 무력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 시켜 보려고 시도했다가 애굽 감독관만 죽이고 실패를 합니다. 살인자가되어 왕실의 지명수배를 받자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멀리 도망쳤습니다.
모세가 사력을 다해 도망쳐 간곳은 미디안 광야였습니다. 기진해 쓰러져 있다가 기운을 차려보니 우물가인데, 여자 목동들이 양에게 물을 먹이려고 하고 있었고, 그것을 남자 목동들이 방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일어나서 방해하는 남자 목동들을 몰아내고 여자들이 자기 양들에게 물을 먹이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자 목동들이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 이드로에게 보고했고, 아버지 이드로는 모세를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대접 하였습니다.
그는 거기서 양치기로 있다가 주인의 딸 십보라를 아내로 맞아 장가를 갔고 할 수 없이 장기체류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었습니다. “내가 이방에서 객이 되었다" 는 뜻이었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피난살이를 하고 있지만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나는 가야할 곳이 있고, 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거기서 목동으로 주저앉기에는 그동안 배운 지식이 너무 많았고, 버리기에는 그가 가진 꿈이 너무나 컸고, 그가 겪은 실패는 너무나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언젠가 다시 다가올지 모를 그날을 기다리면서 세월의 칼날을 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낸 날들이 하루 이틀 쌓이다 보니 40년이 지나갔습니다. 그 40년은 남이 보기에는 허무한 세월이요 낭비된 시간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것은 도리어 모세를 모세 되게 한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간 동안 모세를 당신의 프로그램에 맞추어 훈련시켰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지난 6월 12일 주일에 “훈련하시는 하나님”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40년이 지나가는 어느 날, 하나님은 연단 받은 모세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날도 모세는 호렙산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고 있었는데, 모세가 양을 몰아 가다가 건너편 언덕을 보니 산의 가시나무에 불이 붙어서 활활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어떤 나무든지 불이 붙어서 타기 시작하면 몇 분 내에 다 타버리고 불이 다른 곳으로 옮겨 붙든지 꺼지는 것인데, 그 나무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불이 붙어 타고 있었는데도 나무가 사위지 않고 계속 활활 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이상했습니다. 모세는 그 이상한 광경을 자세히 보고 싶었습니다. "내가 돌이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하고 모세는 가시나무가 불타는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모세가 불타는 가시나무에 가까이 갔을 때, 그 불속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 신을 벗으라!”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려고 호렙 산기슭으로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황량한 광야, 불타는 나무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모세는 지금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동반하고 모세를 만나러 찾아오신 것이었습니다.
태풍은 비를 동반하듯이,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에는 당연히 기적이 동반됩니다. 화가가 자기가 그린 그림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가 놀라운 기적이 아닙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당신이 만드신 세상 속으로, 당신이 지으신 인간을 만나기 위해서 들어오시는 것은 기적중의 기적입니다. 따라서 지금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있다는 이 사실은 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타지는 않았다는 사실보다 더 큰 기적이었습니다. 모세의 관심은 즉시 불붙는 기적의 나무에서 자기를 찾아오신 하나님께로 옮아갔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교회에 가서 신앙생활 하다가 불치병이 낫는 것이 큰 기적입니까? 죄인인 내가 창조주요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음성을 듣고 그분이 준비하신 구원을 받는 것이 더 큰 기적입니까?
우리는 지금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은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당부를 내 귀로 듣는 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신비한 기적을 따라다니는 신앙생활을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가서 말씀을 받아들여 순종하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왜 모세를 찾아오셨습니까? 기적을 보여주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기적은 잠시 모세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하나님께로 다가오게 만들려는 과정에 불과했습니다. 기적은 본질이 아닙니다. 인간으로 하나님을 찾아오게 만드는 입문과정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보았다면 그 다음에는 이적에서 관심을 떼고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 성숙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찾아오신 목적은 기적을 보여주어서 그에게 신비한 경험을 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를 불러서 내가 너와 함께 할 테니, 네가 할일을 해라. 하는 명령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애굽에서 고통받는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모세 한사람의 신비한 체험보다 애굽에서 고통받는 수백만명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이 훨씬 더 큰일이었고, 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천하 만민을 구원하려는 일은 더 큰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일을 위해서 부름 받고 쓰임 받는 사람인 모세가 복 받을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부르시는데, 나를 사용하여 큰 일을 하려고 부르십니다. 기적을 보여주려고 교회로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구원하려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완악하여 하나님께 주목하지 않으니까, 잠깐씩 기적을 보여주시기도 하십니다. 병이 낫게도 하시고 방언과 예언도 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기적을 보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하나님의 일군이 되는 그런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과 만민이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러 오셨을 때, 모세는 그 불타는 가시나무를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그때 모세는 어떤 자세로 나아갔는가, 오늘은 그 부문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어 보십시다. 그 장면에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는 참된 자세는 무엇인가를 배워 보십시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세는 무엇일까요?
1. 철저한 겸손과 참된 경건입니다.
모세는 처음에 호기심으로 불이 붙은 가시나무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내가 돌이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이것은 모세의 호기심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호기심으로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경외심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호기심으로 다가오는 모세를 향하여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라. 너는 지금 하나님앞에 서 있어, 당장에 신을 벗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입니다. 그분 앞에 나아갈 때에는 정중하고 겸손하게, 죽은 것같이 엎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뵙는 바른 자세입니다.
권위주의 시절에, 대통령을 만날 때에는 여간 까다롭지 않은 절차가 있었고 대통령을 만나서 어떻게 행동할 것을 미리 연습해야만 했다고 합니다. 오늘도 한 나라의 대통령을 만날 때에는 어느 정도의 예절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옛날에는 임금이 지나갈 때에도 길에 섰던 사람들이 다 땅에 엎드려야 했습니다. 하물며 천지만물의 주인이시며 만왕의 왕이시고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러 가면서 함부로 나아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 탐구의 대상으로 여기고 경외심이나 경건함 없이 호기심이나 갖고 나아간다면 대단히 잘못된 태도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은 자기를 철저히 감추십니다.
마11:25에 주님이 당신을 영접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 앞에서 말씀하시 기를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나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자기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자신을 감추신다는 사실과, 진리가 사람의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식으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역사와 자연법칙과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여 계시는 분이고, 그것을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지식이 아주 많은 사람이라 하여,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지식인 중에는 신령한 세계에 대하여 철저하게 무지하고 무식한 사람 아주 많습니다.
욥37:24엔 “그는 마음에 지혜롭다 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느니라." 고전1:21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 하셨도다." 25절에선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인간의 지식으로 하나님을 분별 하거나 구원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독일의 어느 신학교에서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유명한 교수가 성경책 겉장을 모아들고는 "우리의 명석한 두뇌로 이 성경을 분석하고 하나님을 탐구해봅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경은 두 장의 가죽 겉표지 밖에는 쓸모가 별로 없답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학교에 입학했던 한 학생은 기겁을 하고 한국으로 들어와서 총신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며 교만한 탐구심을 가지고 접근 하는 자에게 자신을 보이지 아니하시지만, 마지막 심판 날에는 엄위하신 심판주로 그 앞에 나타나실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 조상들은 서낭당 신에게 정한수를 떠놓고 빌면서도 목욕재개를 했고, 무당을 불러 궂을 하면서도 어떤 경외심 같은 것을 가지고 대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하여 공부를 한다면서 일말의 경외심이나 경건함도 신학을 연구한다 하니,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결국, 그런 사람들의 입은 진리를 선포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 외에도 구원이 있다. 공산주의를 하는 것이 천국의 첫 단계이다. 성경은 해방신학을 말하고 있다.”는 등 사단의 주장이나 퍼뜨리는 데 이용되었을 뿐입니다.
이런 일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허물어보려는 사단의 하수인이 된 모습입니다. 이들이 아무리 히브리어 헬라어를 잘 알고, 공부한 세월이 쌓여서 박사학위 열개를 취득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하여는 한 줄도 알지 못하는 무식쟁이 일수 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그들에게는 자신을 철저히 숨기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계시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요청과 탐구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주시고 알려주실 때에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서는 자세는, 철저한 겸손과 경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는 경건한 마음, 진지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두려운 마음, 그것이 하나님 앞에 서는 자세입니다.
요즘 우리 곁에는 하나님과 너무나 친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교회에도 하나님과 친구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올 때에도 이웃집 가는 마음으로 갑니다. 모자 눌러 쓰고, 슬리퍼 끌고 옵니다.
그래서 되겠습니까? 하나님앞에 올 때는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와야 합니다. 경건과 옷이 무슨 상관이 있냐구요? 군사훈련을 시킬 때 사복 입혀서 훈련시키는 나라는 전 세계에 한 나라도 없습니다. 마음의 자세는 겉 옷차림으로 표시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경건한 마음은 경건한 자세에서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진지한 자세를 갖추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2. 자기 주권을 버리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노예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신발을 신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신발은 주권을 가진 주인만 신을 수 있었습니다. 신발은 자유를 의미했습니다. 신을 신으면 어디든지 자유롭게 다닐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들은 자기 마음대로 어디든지 갈수가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인이가라 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거기 멈추라 하면 멈추는 사람이 종입니다. 종은 신발도 없고 자유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의 그런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 발에 신을 벗으라.” 고 하신 말씀은 무슨 의미였겠습니까? 너는 나의 종이다. 내 신을 신고 내가 어디든지 마음대로 오고 갈수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제부터는 네 주인 의식을 버리고 내 뜻을 따라 살아라. 하시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주인행세를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들로 근근이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미미하고 미말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분이 가라 하셨기에 생명 갖고 이 땅에 왔고, 그분이 서라 하시면 어디에 정착하여 살다가, 그분이 오라 하시면 미련 없이 세상에서 갖고 있던 것들을 다 놓고 가야하는 존재입니다. 일 분 일초도 내 맘대로 더 버틸 수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근본을 잊어버리면 절대로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마다 “주님, 나는 주인이 아니라 종입니다. 내발에 신을 신고 내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종입니다. 오늘도 내게 말씀해 주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그렇게 살겠습니다.” 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자세가 하나님 앞에 서는 기본자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하와 만물을 다스리게 하리라는 당신의 뜻을 행하게 하려고 사람을 지으셨고, 그들에게 생명과 양식과 환경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어야 하고 명령에 순종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런 자세를 갖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신발은 온갖 더러운 것이 다 묻어있는 물건입니다. 여기 저기 다니면서 온갖 것을 다 밟는 것이 신발이기 때문입니다. 그 더러운 것이 내 발에 그대로 신겨져 있는 채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 갈 수는 없습니다. 온갖 것을 다 밟고 만진 부정한 몸으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다는 것, 내게 묻어있는 더러운 죄를 떨어버리는 회개를 하고서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구약시대에도 성전에 나아가려면 번제단에서 자기를 대신하여 짐승을 희생 제물로 드린 뒤에, 물두멍에서 손을 씻고 그리고야 성전에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상대하지 아니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켜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내어 놓고 회개하고 버려야지, 죄 없는 체하고 감추는 사람은 상대해 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상한심령을 원하십니다. 그러나 상한심령이란 죄를 감추어 놓고 태연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에 숨은 지은 죄 때문에 가슴아파하는 마음입니다. 숨은 죄를 내어 놓고는 용서받지 못하면 어쩌나 하여, 두렵고 괴로워하는 마음이 상한마음입니다.
자기가 저지른 죄 때문에 자존심이 무너지고, 체면이 무너지고, 신용이 깨어지고, 그래서 지금까지의 자기의 생활 기반에 대한 사형선고를 체험하는 절망적인 마음이 상한심령입니다. 그런 모습으로 나아가는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가장 깊숙이 나아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죄에 대한 회개 없이는 하나님 앞에 한 발 자국도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십년을 걸려도 항상 그 자리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가까이 나아가셨습니까? 신앙생활 한 연조로 그 거리가 좁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죄를 솔직하게 고백했는가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상한심령으로 주님께 가까이 가시기 바랍니다.
신발은 오래 신으면 낡고 닳은 것입니다. 얼마를 신으면 바닥이 매끈매끈해 집니다. 우리의 마음도 옛 사상, 옛 경험 등으로 낡아져 있습니다. 닳고 닳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안 그런다고 결심하고도 사흘을 못 넘기고 또 그길로 갑니다. 삶의 자세가 매끈매끈합니다. 도무지 변화가 없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참된 회개는 어떤 사건을 고백하고 후회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옛 삶, 옛 습관을 아예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어제나 오늘이 똑같은 변화 없는 삶, 하나님은 이렇게 하라고 요구 하시지만, 그렇게 곧이곧대로 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 적당하게 하면 되겠지 하는, 닳고 닳은 마음, 그런 마음으로는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삶의 습관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자기의 선입견과 편견들, 육신의 경험에 기초한 부정적인 생각, 낡고 때 묻은 생각들을 버리고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 앞에 서서 그분의 무한하신 계획과 능력을 이해하고 체험할 수가 있으며, 그분의 참되고 능력 있는 일군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실내 수영장에서 수영하던 생각을 가지고 파도치는 바다에서 수영하려고 들어갔다가는 큰 낭패를 당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대하면서도, 무능하고 속이기에 능한 인간들을 대하던 그 자세를 갖고 대한다면, 하나님을 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앞에 서고 하나님과 상대하여 사는 신자의 삶을 바로 살고자 한다면, 지금까지의 우리의 태도를 고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세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창 35:2에 보면, 야곱이『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야곱이라는 사람이 오랫동안 벗어버리지 못했던 형식적 신앙을 벗어던지고 참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장면인데, 거기서 그는 자기 가솔들에게 옷을 바꾸어 입자고 명합니다. 이제는 삶의 태도를 바꾸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을 그제야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로 야곱은 완전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겸손하고 성결 합시다. 하나님만 주인이신 것을 인정하고 엎드립시다.
매끈매끈한 내 생활습관을 벗어버리고 새결심, 새 행동을 시작합시다. 그리하면 주님은 우리 앞에 나타나시고, 자세하게 우리를 인도 하시고, 우리를 놀랍고 위대한 일에 사용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께 가장 귀하게 쓰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라지지 않는 불
출 3:1-5 / 이중표 목사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만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모를 만나서 부모에게서 받은 영향은 지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인물, 성격, 체질, 습관 모든 면에서 자기가 알든 모르든 부모님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월이 갈수록 자신도 모르게 부모를 닮아가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됩니다. 그래서 만남이라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의 운명을 바꾸는 결정적인 만남은 하나님을 만남으로 이루어집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내 생에 결정적인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모세라는 사람을 봅니다. 모세는 부모로부터 남다른 영향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는 어려서 어머니 요게벳에게서 신앙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가 태어난 레위 족속은 혈통이 좋았지만 그는 애굽의 노예였습니다. 당시에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갖 학대 속에서도 번식하고 창성하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성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남자가 태어나면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모세도 남자 아이로 태어나서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 어머니가 죽일 수 없어서 석달동안 숨겨 두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를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갈대로 상자를 만들어 나일강에 띄우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바로의 공주가 나일강에 목욕을 하러 왔다가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히브리인의 아이인 줄을 알면서도 이 아이의 용모가 준수하고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궁궐에 데리고 가서 기르게 됩니다. 데리고 가서 보모를 찾는 중에 모세의 어머니를 보모로 택하여 기르게 됩니다.
모세는 어렸을 때 그 어머니 품속에서 자라면서 어머니의 깊은 기도와, 사랑과, 정신을 잠재하게 됩니다. 그 어머니는 모세를 품에 안고 "모세야, 네가 비록 궁궐에 살지만 너는 아브라함의 피를 받은 히브리인이다. '너는 네 백성의 신음과, 탄식과, 눈물을 항상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장차 이 민족을 구원하는 지도자가 되라' 하는 기도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어머니의 눈빛속에서 히브리인의 정신을 받고 자랐습니다.
모세가 학문과 지혜가 뛰어나고 인간적으로 성숙한 40세 되던 어느날 자기 동족들의 고달픈 고역의 현장을 보게 됩니다. 그는 그 순간 '내 백성들이 너무 고생하고 헐벗고 굶주리는구나!' 하는 연민의 정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히브리 자기 동족이 애굽인에게 맞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가슴속에 타오르는 분노로 애굽인을 쳐 죽입니다. 좌우를 살펴볼 때 아무도 없는 것을 알고 그를 쳐서 죽여서 모래 속에 숨겨둡니다. 그는 마음속에 '분명히 내 동족들이 내가 하는 것을 보았으니 나를 지도자로 인정하겠지' 그런 생각과 꿈에 부풉니다.
다음날 또 고역의 현장에 나갔는데 이번에는 자기 동족끼리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왜 동족끼리 싸우느냐'고 말릴 때 저들이 그럽니다.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14절). 그때 모세는 자기가 애굽인 죽인 것이 탄로난 것을 알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치게 됩니다.
그는 미디안 광야에서 양무리를 이끄는 머슴살이 목동이 되어 40년의 세월을 보냅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호렙산 기슭에서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는데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종종 사막에서 떨기나무에 불이 붙으면 연기가 나고 확 타버리는 것을 보았지만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붙어서 사라지지 않고 불이 계속 타고 있는 모습은 처음 보았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결정적인 순간이 됩니다. 학자들은 이 사건에 대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불로 표시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타난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고난의 역경 속에서 불타 없어지지 않는 이스라엘의 미래를 보여준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 속에는 가시떨기 나무와 같이 쓸모없고 보잘것 없는 초라한 모세에게 하나님의 영광의 불이 임하는 계시적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모세의 생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한 사건으로 임하게 됩니다. 그는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붙은 사건을 통해서 자기 존재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붙었다. 여기에서 모세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가시떨기는 분명히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을 떠난 자의 비참한 모습입니다. 쓸모없는 존재, 죄인된 인간의 가련한 모습, 이것이 바로 가시떨기 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시는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한 나무가 아니었습니다. 가시나무는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하나님께서 땅을 저주할 때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 3:17-18)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죄짓고 난 이후에 나온 것입니다. 가시떨기 나무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그것은 땔감도 못되고, 재목으로 쓸 수도 없고, 관상으로 쓸 수도 없는 아무런 쓸모없는 나무입니다. 오히려 가시나무는 등산객들의 옷을 찢고 상처를 냅니다. 그래서 가시는 곧 인간의 타락한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시떨기는 모세입니다. 애굽인을 쳐 죽인 살인자의 존재, "네가 이 민족을 구원한다는 정의감은 있지만 가시돋힌 존재다."
모세는 광야에서 가시떨기 나무에 종종 불타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막의 뜨거운 태양빛이 정오에 비쳐올 때 사막이 달아오르면서 갑자기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 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연기가 나고 금방 하나의 잿더미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모세는 호렙산 기슭에서 연기가 나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불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불을 볼 때 불은 불인데 연기나는 불이 있고 연기나지 않는 불이 있습니다. 완전히 소화될 때는 연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잘못 탈 때는 연기가 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 은혜를 받기는 받지만 은혜가 잘못되어 연기나서 남들의 옷을 더럽히고, 집안을 어둡게 하며, 남의 눈에서 눈물을 빼는 신자가 있습니다. 이런 신자를 연기 신자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자기 동족을 사랑해서 애굽인을 쳐 죽일 정도로 그 속에 타올랐던 민족에 대한 애국심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동안 생활하면서 하나의 잿더미와 같은 존재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자기 존재에 대하여 종종 놀라는 때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열심을 냈는데 지금은 다 꺼져버렸습니다. 어느 때는 내게 타오르는 첫 열심도 있었고 충성스러운 열심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 열심이 꺼진 것을 보게 됩니다. 불이 꺼진 잿더미로 남아있는 모세와 같이 자기 자신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인을 쳐 죽이면서 좌우를 살폈습니다.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니라"(12절)
모세는 어머니의 믿음으로, 어머니의 기도로 자랐지 자기 신앙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고백하고 만난 은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위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옆으로 사람만 보았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위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좌우로 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좌우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좌우에 부모가 있습니다. 좌우에 친구가 있고 인도자가 있습니다. 좌우에 목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분명히 하나님이 계십니다.
한 때 우리는 타올랐습니다. 열심히 타올랐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서 사람 때문에 시험들고 낙심되고 목사 보다가 시험들고 그래서 다 식어버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람보지 말고 위로 하나님을 보십시오.
교회를 처음 개척해서 규모가 작을 때는 사람이 없으니까 열심히 일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많아지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목사도 나를 안알아주지 전에 개척할 때는 사람이 없으니까 내가 필요했지만 지금은 사람이 많은데 내가 필요하나' 그러면서 스스로 시험에 듭니다. 그러면서 낙심이 됩니다. 그래서 완전히 자기 자신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립니다.
우리는 한 때 인간적으로 열심을 내는 것으로 안됩니다. 위에서 타오르는 불이 있어야 합니다.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불을 주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2절)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3절)
모세는 사라지지 않는 불을 보면서 이상한 생각을 합니다. '어찌하여 사라지지 않는가' 그리고 자기 속에 타던 불이 다 꺼졌던 과거를 회상합니다. 그렇게 타올랐던 정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능력, 박력도 있었는데 모세는 40년동안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내면서 다 꺼져버렸습니다. 모세는 자기 자신이 늙고 초췌하고 애굽의 모든 학문이 사라진 그 시간, 사라지지 않는 불을 본 것입니다.
나의 생애 속에서 다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는 사람이 곁에 있습니까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전에는 가슴 속에 타오르는 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시들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순절날 예수님은 초대교회 사도와 성도들에게 사라지지 않는 불을 내려주셨습니다.
제자들이 3년동안 예수님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말씀을 듣기도 하고, 배우기도 하고, 기적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힘이 없었습니다. 배울 때 뿐이었습니다. 들을 때 뿐이었습니다. 기적을 볼 때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불이 임하고서야 제자들은 달라졌습니다. 사라지지 않는 불이 속에 임한 것을 느꼈습니다. 저들은 약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비겁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담대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 불은 감옥에 가도 꺼지지 않았으며 핍박과 환난이 와도 사라지지 않았으며 저들은 가난해도 그 불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시들지 않았습니다. 누가 자기들을 괴롭혀도 이 불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 불은 인간의 것이 아니요 하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이 불이 임하시기 바랍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불, 이 불을 받아야 됩니다.
베드로는 민족의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모세와 같은 자였습니다. 모세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구원코자 하는 민족적 의협심과 정의감이 타오르듯 베드로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칼을 품고 예수님의 뒤를 열심히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실 때 예수님을 잡으러 온 종의 귀를 칼로 쳐서 떨어뜨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목자들을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할 때 베드로는 '다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나이다' 하고 장담을 했습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그는 장담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불은 하룻밤도 지나지 못했습니다. 하루 밤도 가지 못해서 꺼졌습니다. 그는 두려워서 멀찍이 따랐고 모닥불 옆에 있던 연약한 소녀 앞에서 세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장담하던 불이 꺼져버렸습니다.
장담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의욕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습니다. 그러기에 하늘로부터 불을 받아야 됩니다. 잿더미처럼 되어버린 베드로에게 성령의 사라지지 않는 불이 임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이 사라지지 않는 불 때문에 환난이 오나, 핍박이 오나 로마에 가서 거꾸로 매달렸으나 그 불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필요에 의해 열심내는 불은 언제든지 타버리는 잿더미가 됩니다. 사람 때문에 열심내는 것은 사람 때문에 꺼집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어떤 인정을 받으려고 열심내는 것은 사람 때문에 시듭니다. 목사님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열심을 내는 것은 목사님이 조금만 인정하지 않으면 꺼져버립니다. 하늘로부터 사라지지 않는 불이 임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4절)
여기 돌이켜 오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았습니다. 돌이켜 온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사라지지 않는 불은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와야 보는 불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모세는 제 발로 다녔습니다. 제 혈기로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께로 돌아섭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하는 모습입니다.
누구에게 사라지지 않는 불이 임합니까? 돌이켜 오는 자에게 임합니다. 돌이킨다는 말은 회개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메타노이' 방향을 돌이켰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 편으로, 내 중심에서 예수 중심으로, 나를 위해 살던 것이 하나님을 위하여 완전히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내 중심으로 사는 것은 내 정열입니다. 내 감정입니다. 내 의욕입니다. 내 욕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돌이켜 올 때 하나님께서 사라지지 않는 불을 주십니다. 이 불이 내 속에 타야 합니다. 이 불이 탈 때 우리는 사라지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과, 소망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말씀을 듣고 "형제들아 어찌할꼬" 할 때 "너희가 회개하고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했습니까 가까이 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기도를 회복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했습니까 이 말씀을 읽어야 됩니다. 말씀이 없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열정으로 타올랐던 한시적인 불이 꺼진 이유가 뭡니까?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19절에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차지도 아니하고 덮지도 아니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님께서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말합니다.
열심을 내지 않는 사람은 회개할 조건이 있습니다. 회개하면 열심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절)
모세가 보았던 자리는 보잘 것 없는 땅이었습니다. 돌작밭입니다. 나무 한그루 살 수 없는 사막입니다. 더군다나 가시나무가 불타는 곳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그곳을 가리켜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삶의 현장을 거룩한 땅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내 가정도 직장도, 일터도 거룩한 땅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거룩한 땅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한 곳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나니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의 땅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40년동안 헤맸던 그 자리, 그 광야, 가시떨기 나무 있는 곳, 그는 거기에서 사라지지 않는 불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돌이켜 그곳으로 갔습니다.
우리가 사라지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사라지지 않는 사랑을 가지고, 사라지지 않는 소망을 가지고 사는 그 자리가 바로 거룩한 땅입니다.
모세가 이 은혜를 받은 이후에 가나안 복지 귀한 성을 향하여 광야 길을 40년이나 줄기차게 전진해 갈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의심했으나 모세는 한번도 의심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돌로 쳐 죽이려고 몇번씩이나 달려들었으나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불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이 사라지지 않았으며 백성을 사랑하는 불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을 향하는 소망의 불은 느보산에서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자기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데 전혀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으면서도 가나안 땅을 보고 있었습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추호도 의심치 않는 믿음의 불이 타기를 바랍니다. 내 이웃을 사랑해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불, 그리고 저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소망의 불이 꺼지지 않고 타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전날 볼 수 없었던 사라지지 않는 불, 연기도 없고 가시도 없는 불로 내 가정의 식구와, 이웃들과, 형제들에게 나타날 때 그 자리가 바로 거룩한 땅이요,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가 될 줄로 믿습니다.
불속에서 만나는 하나님
출 3:3-5 / 이정선 목사
지금은 물리학이나 화학 같은 과학이 발달해서 물질의 구성요소가 무엇인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 몸은 아주 작은 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포들이 분열해서 많아지면 몸무게가 늘어나고, 새로 생겨나는 세포들보다 죽어 없어지는 세포들이 많으면 몸무게가 줄어들 것입니다. 모든 물질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분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물은 수소 분자 2개와 산소 분자 하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자를 더 나누면 원자가 되고, 또 원자는 양성자와 중성자로 구성되어 있고, 그것들은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는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과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옛날에는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철학자들이 연구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이 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몸도 70%가 물입니다. 수박은 90%가 물이지요. 나무도 80%가 물입니다. 이처럼 많은 것들의 주요 구성성분이 물이고, 또한 물이 없으면 생명체가 살아갈 수 없습니다. 가뭄이 심하게 들어 비가 오지 않으면 모든 것들이 말라 죽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했던 탈레스의 주장은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피타고라스 학파에서는 만물의 근원을 수(number)라고 했습니다. 수의 조화가 다양한 우주 만물을 만들어내고 그것들을 유지시키는 법칙이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도 상당히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점 두 개를 이으면 선이 되고, 세 개를 이으면 삼각형이 됩니다. 다섯 개를 이으면 별이 되는군요. 수레에는 바퀴가 두 개 있어야 굴러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수가 만물의 원리처럼 생각될 수도 있겠네요.
어떤 철학자는 만물의 근원이 흙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이 흙에서 나옵니다. 나무도 흙에서 자라고 그러니까 사과도 흙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흙에서 나온 풀을 소가 먹고, 그 소를 사람이 먹어요. 그러니까 사람은 결국 흙에서 나온 것을 먹는 거예요. 또 모든 것은 죽으면 흙이 됩니다. 그래서 역시 만물의 근원은 흙이라고 할 만하지요.
헤라클레이토스라는 철학자는 만물의 근원이 불이라고 했습니다. 이건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렵네요. 불은 빛과 열을 냅니다. 에너지란 말이에요. 그래서 인간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또한 불은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위험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불이라는 것은 그 본질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가 없어요. 물은 수소분자 두 개와 산소분자 하나로 구성되어 있는데, 불의 분자구조나 원소기호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불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은 물 그대로 그릇에 담아놓을 수 있지만, 불은 불만 따로 보관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불 자체가 스스로 존재할 수는 없고, 불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항상 연료가 필요합니다. 나무나 기름 같은 탈 것이 없으면 불은 없어져버립니다. 그래서 불의 본질이 무엇인지, 과연 불이 물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모든 물질은 고체나 액체, 또는 기체의 형태로 존재하는데, 불은 그 어느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을 하나의 현상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불에 닿으면 뜨거워지고 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불은 우리가 평소에 늘 가까이 두고 사는 것이지만 신비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불을 통해서 모세를 만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무 속에서 말씀하신다거나 동물의 목소리를 빌어 말씀하시는 것은 너무 시시해서 하나님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과학으로도 파악할 수 없는 불을 통하여 모세를 찾아오셨습니다.
한번은 모세가 양을 치느라고 들판에 있었는데, 저쪽에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곳은 황무지이기 때문에 큰 나무가 없고 여기저기에 부쉬가 있는데, 그 부쉬 하나에 불이 붙은 거예요. 그러면 그 부쉬가 타 없어지고 불이 꺼지든지 아니면 다른 부쉬로 불이 옮겨가든지 해야겠지요. 부쉬 하나가 타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모세는 부쉬가 다 타고 불이 꺼질 것으로 생각하고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쉬에 불이 계속해서 타오르고 있는 거예요. 마치 커다란 횃불처럼 불이 꺼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참 신기한 일이지요. 그래서 도대체 이게 뭔가 가까이 가서 봐야겠다 하면서 모세가 불 가까이에 갔습니다.
그랬더니 그 불속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모세가 얼마나 놀랐을까요? 불에 나무가 타지도 않고 불도 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이 세상의 자연법칙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 세상의 일이 아니라 뭔가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속에서 모세를 부르는 소리가 난 거예요.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곳에 와 계시다는 뜻입니다.
불과 하나님을 연관 지으면 저는 다니엘의 친구들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거대한 신상을 만들고는 모든 신하들로 하여금 거기에 절하도록 하였습니다. 거대한 관현악단을 동원해서 그 음악에 맞춰 경배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만일 누구든지 그 신상에게 절하지 않으면 활활 타오르는 불에 던져버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이 세 사람이 신상에 절하기를 거부했습니다. 화가 난 느부갓네살 왕은 불을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겁게 한 후 그 세 사람을 불에 던지라고 명령했습니다. 군사들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들고 가서 불에 던졌는데, 불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그들을 던지러 불에 가까이 간 군사들이 다 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불속에서 네 사람이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불에 가까이 간 군사들이 타 죽었는데, 불속에 들어간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이것 역시 자연법칙 안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뭔가 신적인 일, 즉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본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서 소리쳤습니다. ‘불속에 세 사람을 던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네 사람이냐? 그 네 번째 사람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그 불속으로 하나님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만나러 찾아오신 것이었습니다.
타 없어져버리지 않는 불꽃 앞에 다가온 모세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그곳에 하나님이 내려오셨습니다. 모세는 거기서 신발을 벗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그곳은 거룩한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겸손과 존중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어떤 종교든지 신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발을 벗어야 합니다. 신발을 더러운 것들이 많이 묻어 있습니다. 새 신발을 처음 신었다면 더러운 것이 안 묻어 있겠지만, 신발이라는 것은 깨끗한 곳을 더럽힌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종종 키위들이 우리들 집에 들어오면서 신발을 신고 들어오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상당히 기분이 안 좋습니다. 물론 자기들의 평소 습관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우리의 관습을 존중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신발을 신고 들어온다는 것은 정복자의 자세입니다. 군홧발은 억압과 폭력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그 발에서 신발을 벗을 때 무장해제가 되고 복종의 자세가 됩니다.
하나님 계시는 곳에서 우리는 신발을 벗어야 합니다. 우리의 교만과 죄악을 벗고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땅에서 신발을 벗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선한 행위입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신발을 벗고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신발 벗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합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더 확실하고 정확합니다. 모세는 나이 80이 되도록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듣고 살아왔을 것입니다. 어려서는 엄마의 품에서부터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젠가 히브리 민족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들었고, 장성한 후에는 이집트의 왕자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자기 민족을 고난으로부터 구해야겠다는 꿈을 품었습니다. 그런데 민족을 구하기는커녕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미디안 광야까지 도망쳐야 했던 모세는 양이나 치면서 40년째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만나려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날도 모세는 평소와 다름없이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을 먹고 아내가 싸주는 도시락을 들고 들판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하루 종일 양떼를 이끌고 다니다가 저녁이 되면 피곤에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40년 동안 아무것도 변한 것 없는 모세의 일과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불속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모세의 인생은 완전히 뒤집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사건으로 만나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에 대하여 많이 듣고 알고 그 문화와 분위기 속에 살았어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면 능력 있고 생동감 넘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불속에서 만난 하나님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불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불속에 던져졌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환란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겪게 되는 환란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타지도 않고 꺼지지도 않는 신비로운 불속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은 이처럼 우리의 일상과 상식을 뛰어넘는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삶 속에 불꽃과 같이 위엄과 신비함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시기 바랍니다. 불같은 환란 가운데 찾아오셔서 구원의 손길을 내미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서 신발을 벗으며 겸손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를 맞이하십시오. 그래서 변화된 그리스도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있는 증인으로 살아가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광복운동
출 3:4-10 / 이필재 목사
출애굽기 성경 전체 내용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은 해방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기초로 정립된 신학이 있습니다. 바로 “해방신학”입니다. 오늘 7절 말씀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려 하노라.” 고통 받는 백성의 해방자가 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당시 애굽 나라의 상황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애굽의 왕을 “바로”라고 부릅니다. “큰 집”이라는 뜻입니다. 대대로 바로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BC 2166년 사람인데 그때부터 왕성하던 나라로 로마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최대 강국으로 역사에서 살아왔습니다. 피라미드가 세계 두 번째 불가사이가 된 것만 보아도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바로왕의 위치는 백성 가운데 존재하는 신이라 사람 이상의 의미가 부여되어서 가장 튼튼한 왕정 통치 국가요 가장 신뢰받는 통치자의 나라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갔다가 식량이 없어 구하러 애굽에 갔을 때 그의 아내 사라가 너무 예쁘다는 소문이 나서 바로가 첩으로 데려간 역사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까? 그때부터 강대국이었습니다. 요셉을 국무총리 자리에 앉힌 것도 바로 왕입니다. 보통 역사가들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있던 시기는 “람세스 2세가 바로왕의 이름으로 통치하던 때다.” 이렇게 분석을 합니다. 우리가 역사에서 많이들은 소리가 있습니다. 클레오파트라, 그의 남편 안토니우스 장군 모두 바로 거기 이집트를 무대로 등장했던 역사 인물들입니다. 로마의 옥타비아누스에게 망할 때까지 절대 권력을 누리던 그런 지역의 권세가들이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쓰러트린 후에 성경에 나오는 아우구스투스 왕가의 1세가 되는 것도 우리가 역사에서 볼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던 나라입니다.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절대 강자의 나라 문화에서 지금 유대 백성은 절대 약자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 민족은 애굽으로 이민을 간 데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요셉이 총리로 있던 시절 요셉이 가족 초청을 해서 70명의 야곱의 가족들이 애굽으로 이민을 갔는데 외국에 가서 나그네 생활을 가장 많이 경험한 민족이 유대인들입니다. 떠돌이 민족, 집시 민족, 방랑 민족이었던 것이 성경에 나옵니다. 신명기에 “우리 민족은 유리하는 아람인이라. 떠돌이 백성이라.”
그런데 요셉이 애굽 총리로 있을 때는 유대 민족의 애굽 이민은 그 나라의 도움을 주었습니다. 인구 증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시대인데 유대 여인들은 건강해서 어린이들을 많이 낳았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인구가 증가하니까 자연히 노동력이 증가하게 되고 경제력이 발전하고 피차 아주 살기 좋은 나라로 점점 더 강성해 졌습니다. 가끔 보면 선진국들은 어느 나라나 이민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자기들이 피땀 흘려 건설한 나라에 다른 나라 사람, 아무 공로가 없는 사람들을 데려다 여기 살라고 하겠습니까? 그래야 자기들도 행복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진국들의 모든 경제학자들은 다 똑같은 경제 논리를 폅니다. 이민정책이 자국에 해로운가, 이로운가? 이롭다는 겁니다. 많이 올 수 있게 할수록 좋다는 겁니다. 맞는 말입니다. 지금 대한민국도 외국인 노동자를 다 빼버리면 노동계가 큰일 납니다. 올수록 좋다는 겁니다. 그래서 선진국들이 이민정책을 써서 우리나라에 와서 살라고 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고센 땅에 와서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고센 땅은 그때부터 기름진 들판이 되어서 식량 생산이 아주 풍성하게 나오고 주택가는 날로 날로 아름다워지고 얼마나 강성한 나라가 되는지 모릅니다. 유대인들이 애굽에 가서 많아졌습니다. 국민성에 따라서, 또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서 차이는 나지만 어떤 환경이 닥쳤을 때 그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에 있어서 유대인들은 뛰어납니다. 자생능력이 얼마나 강인한지 지금까지 역사에 나타난 대로 말하면 가장 강인한 민족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몰려간 나라들은 유대인들 차지가 됩니다. 대한민국에는 유대인들이 오지 않았습니다. 너무 멀고 와봤지 얻어먹을 것이 없어서 안 왔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안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대한민국은 유대인들에 대해서 경험한 것이 없어서 잘 모릅니다. 하지만 어느 나라나 유대인들이 몰려가면 얼마 안가서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출애굽 시절부터 그랬다고 나오고 있습니다. 근래 역사를 보시면 더 확실해집니다. 유대인들이 유럽에 흩어졌는데 얼마나 강성하고 강인하게 성장하는지 유럽 나라에서 유대인 반감이 생겼습니다. “이러다가는 유럽 전체가 유대인들의 나라가 되겠다.” 그래서 히틀러는 유대인 학살 명령을 내리고 다 죽여야 된다고 하는 일까지 벌어졌지 않습니까? 그래서 유럽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이 찾아간 곳이 미국입니다. 미국에서는 얼마든지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일 나중에 찾아간 나라가 미국이지만 지금 유대인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금 미국의 400명 재벌 명단에 23퍼센트가 유대인입니다. 대한민국은 노벨수상자가 1명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조그만 나라가 대한민국의 절반도 안 되는 나라인데 노벨 수상자만 50명입니다. 한분도 놀라지 않으시지만 사실입니다. 세계 교육의 중심지가 뉴욕인데 뉴욕 중고등학교 선생님 50퍼센트가 유대인입니다. 그 유명한 하버드 법과 대학의 교수 50퍼센트가 유대인입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공신력 있는 신문이라고 하는 뉴욕타임스 사장이 유대인입니다. 워싱턴포스트, NBC방송, CBS방송 사장이 모두 다 유대인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얼마 안가서 유대인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유대인보다 미국에 살고 있는 유대인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이처럼 강인한 민족, 강성하는 백성이 유대인인 것입니다.
애굽에 가서도 그렇게 되니까 이민 정책이 바뀌었습니다. “이러다가는 이 나라가 유대인 나라가 되겠다. 큰일 나겠다. 어떡하느냐?” “막아야 된다.” “어떻게 막느냐?” 두 가지 정책을 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어린 아이 학살입니다. 태어난 어린 남자 아이는 모조리 다 죽여 버렸습니다. 실제로 죽였습니다. “더 이상 유대인은 이 땅에서 번성하지 못하게 하자.” 그 다음에 “이미 성인이 된 사람들은 극심한 노동에 시달리게 함으로 삶의 의욕을 잃게 하고 건강에 막대한 손해를 보게 하라.” 그래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때 법의 정신이나 인권이나 재판이나 아무 것도 없습니다. 유엔 인권이 없던 시절입니다. 임금님이 하라면 그대로 하던 시절입니다. 때리면 맞을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고 죽인다면 빨리 죽는 것이 훨씬 행복한, 고통의 절대 약자의 괴로운 삶을 유대인들이 그때부터 살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십계”라는 영화를 다 보셨지요? 벌거벗은 몸으로 그 뜨거운 사막 기후에서 말할 수 없이 빈약한 식사를 제공 받으면서 진흙 속으로 들어가서 당해낼 수 없는 노동을 강요당할 때 조금이라도 꾀를 내는 듯 하면 그 가죽 채찍으로 등을 때려서 피가 줄줄 흘러내립니다. 이때가 되면 유대 사람들은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어디서 올까? 구원의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일까?’ 세상에는 그들을 구원할 만한 아무런 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은 비로소 한 생각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바로 조상이 가르쳐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조상의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에 오늘 여기 6절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너희가 조상으로부터 말만 들어온 하나님이 곧 나이니라.” 2장 23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은 고욕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이런 말로 시작이 됩니다. 조상의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는 새로운 신앙문화가 그들에게서 싹트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출애굽 사건의 첫 번째 일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하나님을 향하여 조상의 하나님께 부르짖는 일에서부터 출애굽 광복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왜 부르짖었는가? 그들에게는 아주 분명한 이유가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 세상의 모든 역사는 지배자와 지배를 받는 사람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 두 그룹을 연결하는 것이 법이라는 것입니다. 법에 의해서 지배자가 지배를 받는 사람을 조절하는 것이 세상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법에는 공정한 법이 있는가하면 악법이 있습니다. 악법을 만들어놓으면 지배자 그룹은 아주 행복합니다. 그러나 지배를 받는 백성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때 유대인들은 악법에 시달렸습니다. 엄마가 아기를 낳았는데 죽여 버리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바로가 명령을 했습니다. “이게 명령이니까 그대로 했습니다. 무조건 남자 아기는 다 죽여 버려! 그렇지 않으면 유대인한테 이 나라는 다 빼앗기는 거야! 알았지?” 다 죽였습니다. 가정생활을 인정하지 않고 남녀를 따로따로 기숙시키면서 오직 노동에만 집착하게 하는 것은 사람을 인격대우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일종의 기계의 부품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주 최악의 인간 이하의 생활을 유대인들이 하게 되었으므로 부르짖은 것입니다. 악법 중의 악법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됨의 고귀성을 무시하는 일이요 잘된 법이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법입니다. 이제 그들은 “이 나라의 법이고 바로고 어떤 것도 구원의 대상이 아니다. 방법이 없나? 조상이 가르쳐준 것이 있는데 하나님을 찾으라 하지 않았는가? 그 길 밖에 없으니 우리가 그 길을 가자.” 그래서 그들은 탄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이 출애굽의 첫 번째 스텝이었습니다. 이것부터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영적 시각을 잘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적인 신앙생활을 이렇게 부르짖음으로부터 뭐든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강조하지 않습니까? “한 가정에 한 사람은 부르짖으라.”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는 있어야 합니다. 한 교회 안에 항상 기도하는 교인이 전체 교인의 10분의 1은 되어야 합니다. 한 나라 안에 기도하는 사람이 절대의 수를 유지하면 하나님의 관심은 떠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증명할 수 있는 성경이 어디 있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성 심판하실 때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지요? “의인 50명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나이까?” “안한다.” 점점 내려가서 “만약 이 성에 의인 10명이 살아있다면 어떻게 하시겠나이까?” “그래도 나는 심판 안하겠다.” 이것이 굉장히 보이지 않는 영적 파워입니다. “나는 그 사람들 소수의 부르짖음을 듣고 심판 안하겠다.” 그러면 우리가 갈 길이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네 집에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만 있다면, 너의 교회 기도하는 사람 10명만 있어도” 이렇게 우리가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유럽의 교회들이 어느 때 성장했고 어느 때 쇠퇴했는가? 교인들이 기도 열심히 할 때, 그리고 기도를 안 할 때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이 말은 “평면의 세계에 아무리 보아도 나를 구원할 힘이 없어서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이제 우리는 주만 바라보나이다.” 전능자를 향한 기도의 표현들을 성경에 이렇게 남겼지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끊어지고 나면 마귀가 교제하자고 달라붙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은 그 인간의 탄식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인간 역사 안에 참여하시겠다는 선언을 이렇게 하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다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하나님은 하나님의 소원대로 되지 아니하는 인간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 인간 역사에 구체적으로 참여하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출애굽기의 중요한 신학이 되고 시작이 됩니다. 어떤 때는 우리 인간의 역사라는 것이 대단히 구질구질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구질구질한 인간 역사를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구체적으로 동참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시킵니다. 오늘 말씀 7~8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리라.” 하나님의 인간 역사의 참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무엇하러 세상에 오시는가?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 형상의 고귀성을 회복시키려는데 하나님의 인간 참여의 목적이 있습니다. 인간답지 못한 모든 억압의 굴레에서 인간을 자유스럽게 하려는데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확실한 증거는 복음서에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무슨 의미입니까? 본래 인간은 죄인이 아닙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었습니다. 죄인이 된 인간을 본래 모습대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죄를 다 용서하고 하나님 자녀의 자리에 회복을 주시는 것이 십자가 사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 부활의 사건은 무엇입니까? 죽음에서의 해방입니다. 본래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죽지 않게 되어 있잖아요? 죄로 인하여 죽음이 이루어졌지 않습니까? 그런데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본래의 모습대로 인간을 회복시켜 자유를 누리게 하는, 그래서 부활하심으로 그 영생의 진리를 우리에게 확실하게 선물해 주신 거 아닙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그렇게 쉬게 하리라.” 예수님은 병자들도 많이 고치셨습니다. 본래 인간은 병이 없습니다. 죄로 인한 병이 인간을 괴롭힐 때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누구를 만나도 본래 모습대로 회복시키셔서 건강하게 살라고 하셨습니다. 복을 받아 잘 살라고 성경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굶주리거나 가난하게 살라고 절대로 그렇게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복을 받아서 행복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역 가운데 가난에서의 해방도 있습니다.
오늘과 같은 이 출애굽의 사건은 정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심으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을 고통의 자리에서 자유와 해방을 선물해주시는 이 작업을 내가 지금부터 할 터이니까 너희는 내 말을 듣고 나를 따르라. 너희들의 부르짖음을 내가 들었다.” 오늘 8절에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데려가려 하노라.”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도 가끔 신문에 문제가 되는데 우리가 식민지로 살 때 이 나라의 젊은 처녀들을 무조건 위안부로 잡아갔습니다. 아직도 살아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지금도 그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어서 데모를 하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런 대접을 받고 살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내가 너희의 편이 되어서 마침내 너희를 자유와 평안이 있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할 것이다.” 역사한 것이 오늘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유와 해방의 나라가 되었는가 하면 세계의 200개 국가 가운데 무엇을 하든지 10위권입니다. 경제력도 10위권이 되고 올림픽을 해도 10위권에 들어가고 K-POP이 10위권에 넉넉히 들어가고 교회는 1위권이 되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식민지 백성의 처녀들을 끌고가서 변한 이 고통스러운 자리에서 너희의 손을 잡고 젖과 꿀이 흐르는 광대한 자유의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줄 것이다.” 이루어졌지 않습니까? 이런 것을 영적 시각이라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와 함께 하신 역사, 이것이 광복절입니다. 때로 우리는 많은 고난스러운 삶의 과정을 거치고 살아갑니다. 때로는 우리가 겪는 고통이 너무 커서 하나님을 원망할 때가 있고 살아계시다고 하는 하나님의 현실성에 대한 의문을 갖는 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너를 마침내 저 아름다운 땅, 눈물이나 아픈 것이나 통곡하는 것이 없는 평안의 세계로 너를 인도할 것이다. 그 아름다운 땅에서 너는 나와 똑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약속은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세세토록 네가 왕 노릇 할 것이다. 지금은 밤의 한 경점 같고 아침이슬 방울 같은 이 짧은 세상의 출애굽 역사를 조금은 고난스러워도 나와 함께 가자. 마침내 나는 그 땅으로 너를 인도할 너의 조상의 하나님이라.”
내일은 우리 대한민국의 최고의 국경일 광복절입니다. 당시 상황으로서는 이 민족의 독립은 계산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무 힘이 없었습니다. 두 가지 일이 생겼습니다. 그 고난스러운 과정에서도 생명을 걸고 독립투쟁을 하는 독립 운동가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분들의 투쟁에 하나님의 도움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가능치 아니하기 때문에 외부의 힘을 이 땅에 심어주어서 마침내 이 땅에 외부의 힘에 의해 자유와 해방의 선물이 찾아온 지가 66년이 된 것입니다. 역사의 주인이 되신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이 민족이 받은 선물인데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뜻은 이 지구상의 어떤 종족도 타 종족에 의해서 자유와 희망을 구속당하고 사는 것을 방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참여하여 주어서 억울한 백성을 해방시키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조금 길게 말하면 로마가 지배했던 세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성경에 유대 나라도 로마에서 팔레스타인 거리가 얼마인데 예루살렘에 로마 사람 빌라도가 총독으로 와 있었지 않습니까? 유럽의 모든 땅을 로마가 다 지배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 독립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뜻입니다. 칭기즈칸이 지배했던 나라가 당시 44개국이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 독립했습니다. 지금은 몽골이 모래사막 위에 빈민국 하나로 초라하게 남아버렸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뜻입니다. 대영제국에 해가 질 날이 없다던 영국이나 동남아 일대를 침략했던 일본도 지금은 본토 하나 지키기로 되돌아갔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근래 소련의 위성국가는 15개국이 독립을 했습니다. 어떻게 소련에서 독립을 합니까? 무슨 힘으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앞으로도 분명한 세계 역사가 있습니다. 민족 분쟁이 있는 나라들은 마침내 독립합니다. 위대한 국가가 되려면 빨리 독립시켜 주어야 합니다. 왜? 그것이 하나님의 광복 운동입니다. 어떤 국가도 어떤 힘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은 그대로 두지 아니하시고 “너희가 왜 약한 민족을 괴롭히고 있느냐? 나는 약한 민족의 편에서 일을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인간 역사에 참여하시고 “너희들 출애굽 나와 함께 이 길을 가자. 내가 바로의 이 억압으로부터 너희를 빼내겠다.” “어디로 데려가실 겁니까?” “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자유의 땅으로 너희를 인도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이러한 역사 진행 과정에서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절대 교훈하나를 남겨 주셨습니다. “너희 중에 있는 외국인이나 나그네를 괴롭게 하지 말라.” “이유는 무엇입니까?” “너희가 경험했지 않느냐? 이제는 너희가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너희들도 똑같이 학대하면 나는 너희들을 향해서 싸울 것이다. 그래서 너희 중에 거하는 나그네나 식민지 백성 누구든지 너희와 똑같이 살게 하라.”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한 표시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만약 대한민국이 지금 이곳에 와있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불이익을 주고 학대하면 하나님은 “나는 대한민국과 싸우겠다. 너희들도 과거에 식민지였잖느냐?”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축복받으려면 나그네와 외국인에게 너희와 똑같은 권리를 보장하라.” 성경에 철저하게 나오지 않습니까?
저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버스를 타고 아이다호를 구경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무엇을 구경하러 갔느냐? 감자밭입니다. 성경에 보십시오. “추수를 할 때 마지막 고랑의 추수는 하지 마라. 남겨두어라. 왜? 너희 중에 나그네나 가난한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 먹게 하여라.” 이것이 성경 말씀에 있지 않습니까? 아이다호는 끝없는 감자밭인데 성경말씀그대로 마지막 한 고랑은 감자를 안 캤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 나그네 된 사람은 호미를 가져와서 그것을 캐서 먹고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이다호 감자가 세계에서 제일 맛있어졌습니다. 전 세계 맥도널드 후렌치후라이 아이다호 감자가 아니면 맛이 안 납니다. 그래서 아이다호 감자 농장주들이 다 부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가서 지금도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지금은 놔두어도 다 부자가 되어서 캐가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너희도 식민지로 살았지 않느냐? 너희들도 경험했지 않느냐? 그러면 너희들도 이제 베풀어야지!” 이런 절대 교훈을 남겨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대한민국 광복 운동가였으며 그 싸움은 승리했습니다. 만약 대한민국이 옳지 않은 침략의 길을 간다면 하나님은 대한민국과 싸우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베푼 은혜를 잊어버렸어? 너희가 똑같이 해?” 광복의 기쁨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인류 역사의 주인은 지금도 고통 받는 자를 보고 내려오셔서 그들의 편에서 전쟁을 하시면서 “걱정 마! 마침내 나는 너를 젖과 꿀이 흐르는 저 세계로 인도할 것이야.” 그러면 북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걱정 마! 내가 내려가서 너희들의 고통을 보고 마침내 너희들을 자유와 해방, 그리고 식탁이 풍요한 그 세계로 너희들을 인도해 줄 거야. 가만히 있어. 하나님은 보이지 않게 지금도 역사하고 계시는 거야.” 인류 세계 어떤 강한 힘도 하나님 앞에 다 굴복했습니다. 오늘 광복절 기념 주일을 맞이해서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께 영광,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대한민국 만세!”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