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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총 여행한 루트입니다.
여행기간 2011년 12월30 ~ 2012년 2월12일
여행한 국가: 인도, 네팔
캘커타->뿌리->부바네스와르->바라나시->오르차->뭄바이->함피->자이뿌르->푸쉬카르->델리->다즐링->포카라->카투만두
4년만의 배낭여행.. 저번과 다른점은 참 많다. 그중에 하나는 한국에서 인도까지 직행으로 가지 않고 2군데의 공항에서 착륙과 이륙을 하였다. 한국->홍콩->방콕->캘커타 이런식으로 이동을 하였다. 처음 한국에서 비행기를 탔을때는 승객 대부분이 한국사람이었다. 그런데 홍콩에서 이륙할때는 절반으로 줄었고, 방콕에서 캘커타로 갈 때는 한국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혼자 떠나는 배낭여행이 언제나 그렇겠지만 두렵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한다. 전혀 낮설은 신세계같은 땅.. 세상의 모든 더러운 것이 다 모여있다는 여기 땅에서 40일 넘게 해쳐나갈 수 있는지에 대해 확신이 서지가 않았다. 무거운 배낭만큼이나 근심걱정도 무겁기만 했다.
현재시각 오후6:50(방콕시간) 머리는 띵하고 졸립다. 공기는 열대지방아니랄까봐 따뜻하고 끈쩍끈쩍하다. 공기의 무게감이 바뀌니 이 장소가 정말로 낮설게 느껴진다. 주위에는 온통 외국인, 그리고 알아듣지 못할 대화소리.. 그렇다.. 나는 집에서 수천Km 떨어진곳에 배낭하나와 몸뚱이 하나뿐이다..
비행기 이륙시간이 가까워올때 한국인 2명을 만났다. 모두 나처럼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근데 2분 모두 배낭여행이 아니었다. 한분은 아는 지인을 만날 목적이었고, 한분은 봉사활동만이 목적.. 그래 어차피 몇시간 후면 헤어질 사람이어도,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반갑게 느껴진건 정말 오랜만이다.
역시 인디언 타임.. 캘커타로 가는 비행기조차 한시간넘게 연착되었다. 앞으로의 인도여행이 어떻게 될지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그때 나는 생각하였다. 어찌되었던 비행기는 예정보다 늦은 오후8시가 되서야 이륙하였고, 한시간 반후 드디어 인도땅을 밣게 되었다.
허무의 땅 인디아.. 모든 인도여행이 끝나고 쓰는 기록이라 그런지 내가 인도에 갔었다는게 꿈만 같고 비현실적인 일처럼 느껴진다. 한국에 오니 인도에서의 모든게 허무하다고나 할까..
인도에 처음 도착해서 끝날때까지 정말 이리치이고 저리치이고 별의별 경험을 다 해 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희미한 기억과 일지를 발판삼아 어렴풋이 인도에서의 시간을 더듬어 본다.
캘커타에서의 첫 공항노숙. 성옥,미진누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미지의 땅에서의 첫날밤은 두려움과 긴장의 연속이 되었을 것이다. 이미 여러번 배낭여행 경험을 가진 누나들 덕분에 불편하긴 했지만 마음편히 공항에서 노숙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무사히 서더스트리트까지 갈 수도 있었다. 고마운 점은 그것뿐만 아니라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포함한 트리플 룸을 잡아주었다는 것이다. 자칫하면 여행첫날부터 싱글룸에서 혼자 어리버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인도에 대한 첫인상은 극도의 낮설음이었다. 너무나도 더러워서 다가가기 싫은 캘커타의 대기(듣기로는 5분동안 캘커타에서 숨을 쉬면 담배 한갑을 피운 것이랑 똑같다고 한다) 한순간도 긴장의 놓지 못하게 하는 경적소리, 넘쳐나는 사람들, 끝없는 쓰레기더미, 오염된 하우라강.. 첫날 이런 광경을 보면서 내가 40일 넘게 살아야 할 곳이 맞는가 싶기도 하였다.
그나마 누나들이랑 캘커타를 꼼꼼히 들여다보면서 서서히 인도가 와 닿는것 같았다. 음식점에서 주문하는법, 기차, 버스, 트램, 택시타는 것 어느하나 익숙치 못했던 것이 캘커타에서 있으면 있을수록 내 손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지금와서 성옥, 미진누나에게 참 감사한다. 이 누나들이 없었다면 분명 인도에 적응하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덤으로 2011년 12월31일 캐익안주와 팩소주로 한 조촐한 망년회~
그리고 2012년 1월1일 아주아주 의미있는 신년맞이 ㅎㅎ
신년새해..정말 힘든하루였다. 걷고 또 걷고 또또또!!! 걸었다. 이날 느낀 점은 체력하나는 무지막지한 누나들이라는 점이다. 덕택에 인도이틀만에 인도의 현실 그리니까 처참한 현실을 넘어지면 코닫는 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 끝없이 이어진 더럽고 냄새나는 골목길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을 보았다. 굳은 표정의 인력거꾼을 보았다. 매캐한연기, 넘치는 쓰레기더미속에서 창궐한 파리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마치 유럽의 중세시대, 만화 베르세르크에 묘사된 지옥같은 중세 암흑기의 풍경이 우리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원래 우리는 이런 광경을 볼 계획이 없었다. 최초의 계획은 마하트마 간디 로드에서 하우라철교까지 걸어가는 것이었지만 길을 잘못드는 바람에 끝없는 빈민가를 가르지르게 된 것이다. 덕분에 하우라강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때 나는 강에서 목욕하는 사람들을 처음 보았다. 그리고 인도여행하는 내내 제일 많이 본 광경이기도 하다. 그당시 들었던 생각은 저렇게 더러운 강에 어떻게 목욕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훗날 강은 아니지만 나도 어느 호수에 발을 담구고 세수까지 하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고는 그때는 상상도 못하였다.
인도는 신의 나라이다. 자못 신은 숭배받음으로써 신으로써 인정받는다면 인도는 신들의 나라이다.
하루하루를 간신히 연명하여 살아가는 대부분의 인도사람들에게 현실을 초월한 존재와의 연결이 없다면 정말 이 현실을 살아가기 힘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인도는 정말 변화가 없는 나라이다. 인도방랑이라는 책이 출판된지 30년정도가 되었지만, 그 책에서 보여지는 모습과 지금의 모습에서 크게 차이를 느끼지 못하였다. 가게들의 모습과 사람들의 모습은 거의 똑같다. 단지 파는 물건이 핸드폰같은 최신물건이 몇개 추가되었을 뿐이다. 인도는 여행하기 정말 힘든나라이다. 정말 많은 여행자들이 인도에 방문을 하지만 이들을 위한 편의시설이나 제도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은 것 같다. 하기야..정부에서는 넘쳐나는 인도의 인구도 관리하기 벅찬데 극소수(상대적표현)의 관광객에게 신경쓸 여유가 있기나 할까 싶다. 어찌되었던 관광객인 나의 입장에서는 군대에서 받는 훈련보다 더 힘든 경험을 여행하면서 했다.
인도 흔히.. 정신적이고 신비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지만, 나는 세속화의 끝이 어디까지 갈 수 있나를 확인했다. 가장 신성해야할 종교사원부터 관광객에게 어떻게든 돈을 뜯어낼려고 혈안이 되있고, 심지어 힌두 성직자처럼 보이는 사람도 외국인 여성관광객에게 관심을 끌려고 껄떡거리는 모습이 참 보기 부담스러워 보인다.
인도에서의 2012년 1월1일 정말 힘든 날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난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하고 독특한 새해가 아닐까 싶다. 지친몸을 이끌고 간 어떤 길거리 식당에서 먹은 인도음식.. 사방에 파리가 날리고 깨끗한 것이라고는 도무지 없었다. 당연 그당시 나는 그 음식을 먹는다기보다는 영양을 위해 섭취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것 같다. 누나들도 나중에 나에게 슬며시 한말이 있다. 내가 있었기에 그 빈민가를 뚫고 지나갈 수 있었을 거리고.. 그러면 나는 누나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누나들이 있었기에 캘커타 시내를 도보로 다닐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때는 1월2일 새해첫날의 고행을 마치고 맞이한 다음날은 역시 낮설음의 연속이었다. 물론 이제 의식주를 해결하는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앞으로 여행을 위해 해야할 많은 일들이 남아있었다.
핸드폰 U-Sim 칩도 바꾸어야되고 기차표도 예약해야 했으며, 돈도 환전하고, 가격 흥정하는 것도 익숙해야져 했다. 물론 시작부터 삐꺽거렸다. 내 핸드폰 Usim칩을 맞추는데 문제가 발생해서 다들 카톡을 하고 있을때 나만 손가락을 빨고 있어야 되는 상황이 캘커타를 떠나는 날까지 이어졋다. 카톡이 되지 않는 바람에 원래 뿌리에서 만나기로 했던 소영이와 영신이와 보지 못할뻔 했다. 그렇다. 정말 혜언이를 만난건 다행이었다. 뿌리에서 올라온 혜언이는 소영이와 영신이가 나를 기다리며 거기서 일주일 넘게 체류중이라는 소식을 전해왔으며, 직접 자신이 영신이한테 연락을 하여 곧 내가 그리로 간다고 알려주었다. 만일 혜언이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의 여정은 정말로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여행이 끝난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뿌리로 가는 것이 탁월한 선택은 아니였다. 하지만 여행, 특히 배낭여행은 탁월한 선택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수많은 예기치못한 상황과 겹겹이 겹치는 우연들.. 이런 것들이 배낭여행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닐까...
그날은 누나들이랑 지내기보다는 다른 몇사람을 알게 되어 그들과 같이 다녔다. 처음에는 영신이, 소영이의 소식을 알고 헤언이와 함께 기차표 예약을 위해 비비디 박까지 가게 되었다. 혜언이에 대해 말하자면, 정말로 한국여자의 강인함을 알게해준 첫번째 사람이다. 혼자서 첸나이로 들어가서 여행 30일째되는 지금까지 절반이상의 기간을 혼자서 여행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씩씩하게 잘 다니고 있었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그정도의 용기와 담은 분명 부러운 점이었다.
혜언이와 함께 기차표를 사고 다시 숙소주변으로 왔을때 누나들을 다시 만났다. 누나들은 새로운 일행과 함께 있었는데 그중에 훗날 나와 가장 오래 동행하게 될 문형이가 있었다. 그때 문형이는 일본인 2명 그리고 19살 청년과 같이 바라나시로 가는 기차표를 예약하러 비비디박에 갈려고 하고 있었다. 어차피 난 그다지 할 일도 없었고 기차표 예약 사무소를 알고 있었기에 그들과 같이 따라나서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월2일 그날도 한번 왕복하면 1시간반이 걸리는 비비디박에 2번이나 가게 되었다. 가는 길은 차와 사람이 넘쳐나는 길이었지만 어제보다 한결 가벼운 걸음이었다. 이미 길도 알고 있고 무엇보다 인도에 적응이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1월3일, 밤 11시에 기차를 탈 때까지 여러 가지 기억이 난다. 숙소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서더스트리트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어린나이(19살)에 인도에 온 사람을 만나 인력거라는 것을 타 보았다. 처음에 영어가 익숙치 않아 150루피라는 것을 15루피로 이해하고 탔던 것은 여행 초반이라 겪을 수 있었던 해프닝 같다. 여튼 150루피를 지불하고 서더에서 한참 떨어진 이슬람 사원을 방문하였다. 뭐..어차피 볼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였기에.. 우리는 금방 트램을 잡아타고 서더로 돌아갔다. 물론 가는 길에 비비디박에 들려서 거기를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비비디 박은 캘커타가 대영제국시절 인도의 수도였을 때 가장 중심지로써, 그 당시의 건물들(150년이상된...)이 비교적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다. 아니..보존되는게 아닌 그 건물들에 지금은 인도인들이 들어앉아 사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오후에 방문했던 빅토리아 메모리얼.. 영국총통이 타지마할에 비견된 건물을 만든다며 건축했다던 그 곳.. 내가 보기엔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물에 불과했다. 물론 건축학적으로 자세히 보면 감탄하거나 독특한 점이 있겠지만, 범인인 내가 보기엔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관리되고 있는 유럽식 건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 도시와 작별해야 할 시간이 오고 있었다.
오후 6시 나를 포함한 7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하우라 역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그 중 나를 제외하고는 목적지는 모두 바라나시.. 뿌리로 가는 사람은 나 혼자, 그리고 내 기차가 가장 늦은 시간이다..다들 서서히 가 버리고, 마지막에는 혼자 남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이번 여행은..언제나 이동할 때쯤이나 마지막에는 혼자 있게 된다.. 혼자 여행하는 사람의 비애랄까..만약 델리로 왔다면 긴 시간동안 함께하는 동행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표준루트에서 크게 벗어나버린 내 여행길을 오랜 시간 같이하는 사람은 결국은 없었다.
인도에 온지 3일째 되는날. 교통신호가 사라진 거리에는 자동차가 사람보다 우위에 있으며, 자동차의 검은 매연은 사람이 감당해야 될 몫이 되어버렸다. 그런 무질서 속에서 나처럼 온실속에서 자라온 사람은 정신을 놓아버리고 원래의 목적을 잊은채 숙소주변과 먹고 마실것을 찾아 거리를 방황한다. 처음 인도에 오기전 캘커타에서 하기로 세워놓았던 계획은 빛을 잃어버리고 그저 정처없이 걷고 또 걸었다. 인도에 있으면 있을 수록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나라이다.
나는 여기서 소영이와 영신이와 존재를 알고 우여곡절 끝에 뿌리행 기차표를 예약했고, 영신이와 통화도 할 수 있었다. 첫 통화를 했을 때의 반가움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정말이지 인도에 지쳐가는 영혼에게 저 멀리서 천사의 부름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부름에 응해 망설이지 않고 뿌리행 기차표를 예약했다.
인도 동부의 제일의 도시 캘커타, 한때 대영제국 인도의 수도였지만 지금은 낡고 허물어져가는 건물들뿐이다. 대부분 그 당시 지어진 건물들로 언제 무너져도 이상해 보이지 않는 건물들에 수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살고 있었다. 이미 대기오염은 상식수준을 뛰어넘었고 물은 갈수록 부족해질 것이다. 이 도시의 미래는 그다지 낙관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30년도 더 되어보이는 낡은 수동방식의 택시들은 도시의 남은 생명력을 쥐어짜고 배설물로 검은 연기를 뿜으며 도시를 활보한다. 칼로 난도질당하고 해머로 두들겨 맞은 것 같은 언제 멈춰서도 이상하지 않을 트램은 도시의 최후의 날이 어떤 광경일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여기에서만 볼 수 있다는 인력거... 결국에 나는 마지막날 타 보았다. 타는 것이 이들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자기암시를 걸고....
아마도 인도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이 캘커타에 가게된다면 어떤식으로든지 충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생각에는 자신만의 여행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여기 꼴까타(캘커타의 새로운 이름)에서 여행을 시작하는 것은 분명 탁월한 선택이다.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은 한국인들과, 잘 갖추어진 여행 인프라(환전소, 숙박시설, 여행사등등) 그리고 처참한 인도인 80%의 현실과 무너져가는 건물들...
지금와서는 묘한 향수병을 불러일으키는 캘커타는 마치 폐허로 변한 유적에서 느끼는 아련한 감성과 크게 다른것 같지 않다.
딱 손에 꼽을만한 볼거리도 없고, 거친 인력거꾼의 호객소리와, 사기꾼 택시기사가 있는 도시였지만, 지금 가장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 장소 중 하나이다. 하우라강을 따라 끝없이 이어진 빈민촌을 걸은 우리 3사람.. 한국에서 다시 재회하기를..
이상 첫번째 도시였던 캘커타입니다.. 제 블로그에서 카피한 것입니다~
문제있거나 게시판 취지에 맞지 않을 때 바로 삭제하겠습니다.
첫댓글 오~ 지도를 보니 엄청 많이 돌아다녔네. 근데 사진이 전부 엑박;;;;
수정했어요~ ㅎㅎ
후기 참 실감나는군요-ㅋ
아.. 관광객들 어떻게든 뜯어먹으려한다는거 절대공감. 저 필리핀갔을때도 마닐라 현지인들이 딱 그랬...
외국인이 걸어다니는 ATM으로 보인다나... 참 귀찮은 사람들이었지~ 한국이 역시 좋은 것 같아 ^^
재밌다!!!!! 2편도 빨리 올려주세요~ㅋㅋㅋ
2편이라...지금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조만간 올리겠습니다 ㅋㅋ
2편도 있는거에요~~기대되는데요^^
아마 쓰다 지치기 전까지는 계속 올리게 될 것 같네요;;
인도.. 한 번도 안 가거나, 가게되면 몇 번이고 가거나. 그런다지요.
즐감했습니다.
네 맞는 말씀입니다~ 인도...정말 묘한 매력이 있는 나라입니다. 당분간 갈 생각은 없지만 제일 강렬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좋은 경험하셨네요^^
좋은, 나쁜, 이상한 여러가지 경험을 하였지요.. ㅋ
낯설은 곳에서의 나홀로여행 대단하십니다 .
이 글을 보니 저도 인도에 가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