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수 높이고, 용적률 초과… ‘배짱 재개발-재건축’ 갈등
[재개발-재건축 혼탁]
서울 부동산 규제 완화 틈타 건설사-설계업체, 기준 어겨
서울시, 고발조치-시정명령 내려
재개발-재건축 혼란 확산 우려
#1. 서울 강남구 압구정에서 핵심 재건축 단지로 꼽히는 압구정3구역. 이곳 조합은 단지 설계업체로 희림 컨소시엄을 선정했다. 서울시가 용적률을 300% 이하로 제한했지만, 희림은 이를 360%로 높인 설계안을 내놨다. 엄연한 규정 위반 행위인 만큼 서울시는 경찰에 희림을 고발하고 조합에 설계업체 공모 중단 명령을 내렸다. 희림은 조합원 투표 직전 용적률을 300%로 낮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지만 서울시는 “현재 압구정3구역 설계회사가 없는 것으로 본다”며 조만간 조합 운영 실태 조사에 착수할 예정이다.
#2. 총사업비 7900억 원 규모의 서울 용산구 한남2구역. 대우건설은 지난해 11월 이곳 재개발 사업을 따내며 한남뉴타운에 적용되는 90m 고도제한을 118m로 완화하겠다고 했다. 이른바 ‘118프로젝트’로 20층 수준으로 제한된 규정을 무시하고 7층 정도를 더 지어 수익성을 극대화해 주겠다는 것. 대우건설은 관련 규제를 풀지 못하면 투입 비용을 부담할 뿐 아니라 시공권을 포기하겠다는 내용의 확약서까지 조합에 제출했다. 대우건설은 “착공 전까지 고도제한 완화를 서울시와 협의하겠다”는 입장이지만, 구체적인 협의는 아직 없다.
최근 서울 주요 재개발·재건축 현장에서 건설사나 설계회사들이 현행 기준과 맞지 않는 조건으로 사업권을 따내며 당국과 갈등을 빚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아파트값 회복세와 규제 완화 흐름에 편승해 조합원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계획을 추진하면서 시장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특히 서울에 재건축이 임박한 준공 30년 이상 노후 아파트가 33만 채에 이르는 데다 대규모 재건축·재개발이 속도를 내고 있는 만큼 이 같은 혼란이 다른 사업장에서도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무리한 정비계획이 사업을 지연시키거나 불필요한 갈등을 가중시킨다”며 “정부가 원칙을 명확히 하되 불필요한 규제는 없는지 살펴 서울 도심 주택의 핵심 공급원인 재개발·재건축이 순항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한남 고도제한, 압구정 용적률 무시… ‘낚시성 개발안’에 혼란
배짱 재개발-재건축
건설사, 시공권 따내려 무리수
조합원들은 수익성 높이려 동조
서울시 심의 걸려 사업 지연땐 비용 증가 등 조합원 피해 우려
서울시 ‘신속통합기획’(신통기획)을 통해 지난해 11월 재건축 밑그림인 정비계획을 확정한 강남구 대치동 미도아파트. 임대주택 비중을 16%로 정하는 대신 최고 높이 50층, 3800채 규모로 재건축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 단지는 최근 입장을 바꿔 계획 수정을 추진하고 있다. 조합원 사이에서 “임대주택 비중이 너무 높다”며 임대주택을 줄이고, 공공시설을 늘려 이를 기부채납하겠다는 의견이 나오는 것. 하지만 서울시는 “기존에 정한 방침을 뒤바꾸면 안 된다”며 반대하고 있다.
재건축·재개발 조합과 건설사 등이 이처럼 규정과 다른 ‘배짱 정비계획’을 내놓거나 이미 정해진 계획을 바꾸려 하는 이유는 추가 규제 완화로 수익성을 높이려는 영향이 크다. 정부와 서울시는 이미 대대적으로 규제를 완화한 데다 서울 주요 지역 아파트값 역시 반등 기미를 보이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해 3월 서울 아파트 ‘35층 규제’를 폐지했고, 정부는 지난해 9월 재건축 초과이익환수제 완화안, 12월 안전진단 규제 완화안을 잇달아 발표했다. 잠실주공5단지, 은마아파트 등 오랜 기간 정비계획이 통과되지 못했던 단지도 속속 계획이 통과됐다. 하지만 현행 규정을 무시하고 사업을 따내기 위한 ‘낚시성 재건축·재개발 계획’이 도시계획 기준 자체를 흔드는 데다 다른 사업장에 혼란을 부추길 것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 높이 규제 완화 안 되는데 “무조건 완화” 약속
한남2구역이 대우건설을 통해 고도제한 완화를 추진하려는 것은 지난달 말 서울시가 발표한 고도지구 완화에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서울시는 국회의사당과 남산, 북한산 주변 건물에 적용되는 높이 제한 규정을 풀었는데, 한남2구역은 남산을 끼고 있어 수혜 예상지로 거론되던 사업장이었다.
하지만 한남2구역의 높이 기준은 고도지구와 직접 관련이 없다. 오히려 서울시가 물길·숲길 등을 서울 자연유산으로 규정하고 경관 보호를 강화하면서 고도제한 완화 가능성은 오히려 낮아지는 분위기다. 기존의 90m 기준이 그대로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건설업계에서는 대우건설이 시공권을 따내려고 무리하게 공약(空約)을 남발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된다. 실제로 대우건설은 시공권을 따낸 뒤 이와 관련해 서울시와 별도 협의를 아직까지 진행한 적이 없는 상황이다. 한 정비업계 관계자는 “조합에 제출한 확약서에 있는 높이 제한 완화가 시공사 선정 계약서에 담기지 않는 한 효력은 없다”면서 “수익성을 극대화하고 싶어 하는 조합원 심리를 이용해 전략적으로 높이 규제 완화를 내세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재건축·재개발 조합들이 서울시 규제 완화 혜택은 받으면서도 정작 그에 따른 기부채납 등 공적 의무는 제대로 지키지 않으려고 해 갈등이 벌어지기도 한다. 압구정3구역은 강남구 압구정동과 성동구 성수동 서울숲을 잇는 보행다리와 덮개공원 등을 기부채납해 일반인이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조건으로 재건축 공공기여 비율을 15%에서 10%로 줄였다. 이를 위해 신통기획안에는 단지 안을 오갈 수 있는 공공 보행통로를 설치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번에 선정된 설계회사인 희림의 설계안에서는 단지 안이 아닌 단지 바깥으로 돌아서 가도록 보행통로가 설계돼 있다. 한강을 건너는 다리로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워진 것. 게다가 서울시는 임대주택과 분양주택을 구분되게 짓지 못하도록 하는 ‘소셜믹스’ 원칙을 적용하고 있지만, 선정된 설계안은 임대아파트와 비(非)조합원 대상 일반 아파트가 모두 별도의 동으로 배치돼 있다.
● “사업 지연과 다른 재건축·재개발 사업 혼란 우려”
문제는 이 같은 무리한 계획이 사업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점이다. 이창수 가천대 도시계획학과 교수는 “소셜믹스, 공공 보행통로 등 공공성을 고려해 용적률 인센티브가 부여되는데 이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서울시 심의 문턱을 넘기 어려울 것”이라며 “사업이 지연되면 금융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조합원들이 오히려 피해를 본다”고 말했다. 2016년 은마아파트 설계 공모 당시에도 최고층수 35층 룰을 어긴 49층 설계안이 당선됐지만 결국 7년 가까이 끌다 지난해 10월에야 최고층수 35층으로 도시계획위원회를 통과한 바 있다.
서울시가 정비사업 속도를 높이겠다며 도입한 신통기획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현재 신통기획 참여 사업장은 △서초 진흥 △영등포 여의도시범·한양 등 82곳으로 이달 초까지 서울시가 44곳(6만2000채)의 기획을 마쳤다. 한 재건축 추진준비위원장은 “압구정3구역에서 이뤄지는 결정을 일종의 ‘참고 자료’로 삼고 압구정3구역에 대한 처분을 근거로 이를 따라 하려는 재건축 단지가 많을 것”이라고 했다. 이승주 서경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조합원 대다수가 본인이 원하는 방식만 고집하고 조언을 거절하다가 때를 놓쳐 10년 넘게 사업이 표류하는 경우가 많다”며 “조합원 스스로 민관 정비사업 교육에 참여해 이해도를 높이고 실현 가능한 방안이 무엇인지 제대로 구별해 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축복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