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역사는 비류계와 온조계가 통합되어진 이후에도 먼 훗날에.. 쓰여진 것입니다.
1차적으로 당시의 역사서는 정권의 정당성을 설득하는 용도로서 제작되었습니다.
분명 해씨인 해주몽 고구려의 시조가
해씨 왕조를 찬탈하고 성립된 고씨 왕조 시대에 이르러 고주몽으로 둔갑한것도 그러하고
몰락한 비류계 백제 왕조를 온조계 왕조로 변신 시키는 일은
훗날 일본이 분명 백제계 왕통을 일본계 천황으로 변모시키는 일만큼이나 쉬웠을겁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여러왕의 즉위기간을 한데 묶어서 한 왕의 즉위기간으로 정해놓는다던지
(나머지 비류계 왕들은 삭제되는거죠)
아못튼 여러 방법들이 있었을겁니다.
백제본기의 작성 시기를 봐야 합니다.
근거지를 잃고 남하한 백제 왕조는 호남의 호족들과 알력을 빚습니다.
물론 그들은 패망한 비류계 호족들이죠(감정이 좋지 않았을것이고 이것은 백제 패망때까지
계속됩니다.)
그 통합을 위한 차원의 정권의 정당성을 위해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다분히 있고
당연히 그 사서는 초기부터 비류계는 온조계에 복속한것으로 해놔야 했을겁니다.
우리가 가장 착각하는 점은 처음부터 고구려,백제,신라가 한 국가를 이루어 발전했다고
여기는데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현재 사학계도 인정하듯
신라도 6개의 부족이 연합하였고.. 석씨,김씨,박씨 등등의 돌아가면서 왕노릇을 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상당기간 동안요..
고구려?..고씨 왕조가 정착한것은 건국 후 백여년이 훨씬 지난 일이었습니다.
백제가 건국초기 부터 비류왕조가 온조왕조에 복속되었다는 것은 아무리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말이 안됩니다.
아마 먼 훗날 일을 초창기에 벌어진것 처럼 쓰고서 정당성을 찾고자 했다는게 가장 합리적인
설명이라 봅니다.. (다른 나라도 그러짓을 서슴없이 했으니까요)
그럼 문헌과 증거로서 한번 살펴 볼까요?
온조계의 입장을 극명하게 주창하는 백제본기를 한번 살펴봐야 겠습니다.
어딘가 맞지않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백제본기는 최초의 왕을 온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백제본기가 온조측의 역사이기 때문이죠
온조가 형인 비류로 부터 분립한 것은 기원전 5년으로
사서에서 보듯 기원전 18년에 대방고지에 건국한 백제왕은 비류일수 밖에 없습니다.
설마 처음부터 공동 왕노릇을 했다고 여길순 없을겁니다.
비류와 온조가 갈라진 시점부터 비로서 온조왕 계통이 성립되었다고 여겨야 합당하다는
기준에서 시작해 봐야겠습니다.
(뭐 이전을 공통역사 혹은 공통왕조시대라고 불러도 상관없겠습니다만 그게 가능겠는가에
저는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첫 정착후 왕은 형인 비류계이겠지요..
그것을 암시하는것은 소서노가 주몽의 후계를 세운것이 비류였고, 그것이 실패해서
망명을 한것인데 설마 첫 왕이 온조겠습니까?)
이 원칙에 따라
기원전 18년 대방고지 정착한 비류는 기원전 15년 8월에 사신을 낙랑에 보내 수교를 했습니다.
현재 대방고지는 위례라는 학설이 있습니다.
자 백제본기에서 31명의 왕통계보가 있습니다.
상당히 고스란히 전해 내려오긴 합니다.
현제 학계는 단일왕통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만..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설마 이점을 현재 학계가 인정치 않으리라 보진 않습니다.
일부 학자들의 주장으론
온조계->비류계->온조계->비온조계->온조계로 왕통이 변화해 갔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온조계를 해씨, 비류계를 진씨, 비온조계를 모씨, 최후의 온조계를 여씨(후해씨)로 보고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비류국 송양왕은 진씨이고 ..소서노의 첫남편은 비류국 계통임)
삼국유사 제 1권 남부여전에서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해로서 씨를
삼는다"고 했습니다.
실제로도 제1대 온조는 주몽의 아들입니다(이의는 없으시죠?)
그리고 온조로 부터 비롯된 해씨왕조는 제 7대 사반왕까지 계속됩니다.
그런데 그 기간이 무려 239년간입니다.
7명의 왕이 239년간 백제를 통치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1인당 평균 재위 기간은 34년간입니다.
뭐 그럴수도 있지.............그렇다면 일단 넘어가겠습니다.
제 8대 고이왕 원년조에 고이왕을 제 4대 개루왕의 둘째아들..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말미에 제5대 초고왕의 모제"라 했으며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도 후설을
따르고 있습니다.
평균 재위기간 34년의 기간에서 8대 고이왕은 4대 개루왕의 둘째아들이란것이
합당하다..라고 생각하신다면 더이상 뭐라 할말은 없지만
만약 이것이 불합리하다..라고 여긴다면 그다음 설명 들어갑니다
즉 왕통의 계보가 바뀌었다고 보는것이 합리적입니다
(왜 7대왕의 아들이 아니고 4대왕의 아들이 계승한거죠?)
이때부터 호족세력중 진충,진물,진가...등등등 진씨가 들이 득세를 합니다.
고대왕조의 특징으로 볼때..이들은 왕족입니다
따라서 고이왕도 진씨..즉 비류계로 봐야 합당합니다.
그러나 "진서" 제 9권 간문제기 함안 2년 6월조 13대 초고왕을 여구(여씨)라 한것을
보면 고이왕이 부여계의 여씨왕통으로 볼수도 있겠습니다.
종합해 보면
해씨의 온조계 왕통은 7대로 끝이나고(물론 이것은 비류와 온조계의 혼합정권임)
8대 고이왕 시대부터 여씨왕조가 시작된 것이고
여씨왕조는 온조왕을 여씨로 둔갑시켰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면 239년간 7명의 왕이 있었다기 보다는 더 많은 왕들이 있었지만
여씨 왕조는 의도적으로 비류계를 삭제하고 부여계(온조계) 왕들만을 남겨둔 것입니다.
이게 합리적인 설명이라고 보겠습니다.
그러나 백제본기 22대 24대 왕때 일시적으로 모씨왕조가 서게 되는데
이것을 한번 살펴 봐야 겠습니다.
22대 문주왕의 이름은 모도 이고, 24대 동성왕은 모대..입니다.
이런 극적인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 살펴봐야겠습니다.
서기 275년 장수왕은 3만병력으로 북한산성을 공격하고 일주일간의 공성으로 급기야 위례
를 함락합니다.
국왕과 태후 및 왕자들이 포로가 되었고..왕은 아차성 아래서 처형됩니다.
남녀 8천이 피랍되고 온조백제는 사실상 와해됩니다.
백제 본기에 22대 문주왕은 개로왕의 아들로서..라고 씌여 있습니다.
"송서"백제전에 전하는 문주왕의 이름은 모도(즉 모씨)이고 아버지인 개로왕은 여씨입니다.
결코 부자 관계가 아니죠
일본서기에는 "문주왕은 개로왕의 모제"라고 했습니다.. 즉 처남이라고 표현되어 있죠
이것이 훗날 여씨왕조가 다시 정권을 되찾으면서 부자관계로 변했지만
분명 중국과 일본의 기록에는 성씨 자체도 틀리고, 계통이 틀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웅진백제는 온조백제의 남하가 아닌.. 웅진의 호족이 세운 비류왕조였습니다.
비류백제의 재건이지요(상당히 극적인 사건입니다)
하지만 문주왕은 사냥하다 측근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측근의 이름은 해구 입니다..(해구.. 뭔가 집히는점 없습니까?)
23대 삼근왕도 재위 3년만에 돌연히 죽어버리고
24대 동성왕은 22년간 재위 했지만 결국 살해 당합니다.
그다음 단계가 무엇이었을까요
성왕이 집권하고 부여로 천도를 합니다
천도를 하였습니다(뭐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종합해 보겠습니다.
온조백제의 왕통은 해,모,여씨로서 총 31대 669년간 존속했다.(어째서 즉위기간들이 이리도 기냐 하나같이)
해씨왕조는 7대 239년간
모씨왕조는 3대 26년간
여씨왕조는 21대 404년간 집권했다
눈팅만 열심히하는 승병입니다. 글을 읽다가 의문이 있어 질문입니다. 1-7대까지를 온조계 해씨라고 가정하셨고, 8대부터 고이왕을 비류계 진씨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며, 경우에 따라 부여계 여씨로 볼 수도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8대 고이왕을 여씨 왕조로 보고 글을 쓰셨는데, 그럼 여씨 고이왕은 비류계인가요? 온조계 인가요? 비류계이면 여씨왕조가 의도적으로 비류계를 삭제했는 것이 이상하고, 온조계이면 앞에 고이왕이 비류계라는 것이 이상하군요. 아님 문장에서 "8대 고이왕 시대부터 여씨왕조가 시작된 것이고 여씨왕조는 온조왕을 여씨로 둔갑시켰다고 봐야 합니다."의 두 번 나오는 여씨가 각각 다른 여씨인가요?
OopsS!? 님.. 지파내 방계 누가 왕위를 이었는지 밝혀 냈답니까?.. 어떤 지파가 있었고.. 누가 왕위를 계승한거죠? 사학계도 확실하게 밝혀내지 못한 사항을.. (분명 보고있다고 했지 밝혀냈다고는 하지 않으셨죠?).. 횡설수설은 현재 사학계도 하는것으로 보입니다만 ^^
뚜드려 맞춘다고.. 진실이 되는건 아니죠?.. 알수없고..이해할수 없는.. 오류 투성이의 과거 기록을 해석할땐..다양한 각도의 접근이 필요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제가 제시한 사항도..횡설수설로 비난받을 일이 아닐것으로 보입니다만.. 구체적 확증을 저에게 들이밀 자료가 없으시면 입을 다무시죠
더 충격적인 말을 해볼까요?..우리가 자랑스러워 하는 단군신화는..기실...우리 민족의 주류인 동이족의 신화가 아닌 천손계..신화를 계승한.. 위만조선과 고구려.. 그리고 백제...일본으로 연결되는 민족신화입니다.. 단지.. 몽고침략기에 몽고에게 빼앗긴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하여 차용한것 뿐이죠.. 단군신화가 처음 문헌에 나타난게 언제인지를 고려해 봐야 할껍니다.. 일본도 천손 신화를 갖고있습니다.. 고구려어는 현재 일본어에 가장 가깝다는 사실(반면에 현재 대한민국어에는 가장 소외되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할껍니다.
현재의 우리가 공통된 한뿌리에서 나왔다는것은 망상입니다.. 고구려와 백제...그리고 신라는 그 뿌리가 다릅니다. 언어와 생활방식도 다른.. 현재의 대한민국과.. 인도..미국과 다른것처럼.. 계통일 틀리단 말씀입니다.. 당연히 그들의 신화 또한 구성과..내용이 다릅니다.. 고조선도.. 짠하고 나타난게 아닙니다.. 석기를 청동기가 밀어내고..청동기를 철기가 밀어내듯.. 끝없이 대륙에서.. 극동으로 밀려오는..민족의 이동 물결에서 우리의 과거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점을 인정해야 할껍니다. 안그러면 현재 사학계의 연구는 계속..오류를 꿰어 맞추려는 챗바퀴 돌기만 반복할껍니다.. 우린 결코 자랑스러운.. 한민족이 아닙니다..
고구려,백제 ,신라가 언어 문화가 다르다는 님의 말씀이야 말로 망상이죠 삼국사기와 양서 남서 삼국지등등 수많은 사서에서 부여,고구려를 위시한 백제신라등등의 언어와 문화가 똑같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어떻게 그런 말도 안되는 말씀을 하시는지 고구려,백제,신라의 영토모두 고조선의 문화권의 강력한 영향권안에 있었던 지역인데 어떻게 완전히 틀릴수 있다는건지 삼국의 언어 문화가 미국,인도와 같이 완전히 틀리다는 님의 말씀에 근거가 되는 자료라도 있나요?
우연히 한반도라는 땅떵이에 몰려든.. 잡다한 민족들의 갈등과 통합의 역사였고.. 우리가 한날 한시에 벌어진것 처럼 여겨지는 과거의 사건 또한.. 수백년에 걸친.. 장기간에 이루어진 사건들입니다. 그것을 한시에 벌어진것으로 가정해서..연구하고 있으니.. 결과가 또다시 오류 투성일 밖에요.. 이점을 인정합시다.. 태백산과 신단수.. 곰과 호랭이.. 단군.. 이 모든것이..한날 한시.. 한반도 혹은 만주 어디에선가 짠하고 발생했다.. 이따위로는 결코 해결볼수가 없는겁니다.. 우리민족을 이룬 구성부족의 한 부류가 대륙 어디선가.. 신화를 간직하고 출발하여 수천리를 이동해서..이땅에 정착하였고.. 그들의 신화의 일부가.. 전해 내려오다
우리의 과거는.. 시작이 결코 한반도가 아닙니다.. 최초의 만주와 한반도 정착자들은.. 아리안계통들입니다.. 혹은 남방계 몽골계통이 최초로..한반도와 만주에 거주합니다..이건 세계적으로도 합리적인 해석입니다.. 안그러면.. 중국과 만주에 분포되어 있는 서양인 모습의 유골 화석들을 해석할 수가 없고.. 일본의 아이누족에 대한 해결도 보지 못합니다.. 최초의 만주 거주자는.. 유럽인들이 북아메리카에 오기전에 거주한 인디언과 같은 최초의 거주민들입니다.. 그런 전제하에 최초의 거주자인.. 아이누족 일족이 만주에서 부족단위의 사회를 건설하였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껍니다.. 또한 여기서 얻어지는..힌트는..
현재 일본의 아이누족의 토템은 곰이고.. 곰을 죽일때는..마늘을 사용하고 있다는 .. 민속연구 결과 보고에 대하여..뭔가 깨닳음이 있어야 할껍니다.. 단군신화에서.. 곰과 호랑이가.. 있었는데 마늘만 먹고.. 100일 견뎌서 곰이 사람되고 천손과 결합하여 고조선을 이루었다는것을 고지고식대로 해석하여.. 곰토템족이 천손족과의 결합이다 뭐다 하고 지랄하는데.. 이건.. 므흣한 해석이고요.. 해피엔딩적 해석입니다.. 이런 사례는.. 당시 어디에서도 죽어도 있을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리고 현제 우리의 민속신앙에서 호랑이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고찰한다면..단군신화의 내용을.. 이따위로 해석할 수는 없는겁니다.
천손족..즉 대륙에서 청동기를 들고 밀어닥친 침략자들은... 대륙의 힘싸움에서 밀려난 부족들입니다.. 이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들은 새로운 거주지를 찾습니다.. 그러나 그곳엔 곰토템의 아이누족(원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같이 행복하게 결합해서 사바사바 잘살았다?.. 그런일 있을수도 없고..있지도 않았습니다.. 백일동안 마늘을 먹였듯이.. 곰을 사냥한겁니다.. 즉. 곰토템족에 대한 대대적 제노사이드가 있었습니다.. 인간이 되었다를.. 통합하였다..라고 해석하는건..마치.. 넌센스 입니다.. 곰이 변한다는건..죽음을 의미합니다..한번 죽었다는것을 뜻하고.. 학살뒤에.. 남은것이 없음을 뜻합니다.. 반면 호랑이는 도망을
쳤다..라고 해서.. 곰토템족을 선택하고.. 호랑이 토템족은.. 밀려났다고.. 해석하는데.. 그렇다면 현재 우리나라의 가장 많은 민간신앙에서의 우위를 차지하는 호랑이에 대한 신앙은 어찌 설명할꺼죠?.. 곰을 숭배하는 사당 있으면 한군데라고 가르쳐 보시기 바랍니다.. 없습니다..아니...전멸입니다.. 곰은 그저 웅담 제조기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하지만...삼신, 천신,산신,.. 그 어떤 민간신앙에서도... 호랑이는 항상 같이 있습니다.. 이것은 호랑이 토템신앙이 이어져 오는것이기 때문이죠.. 즉 호랑이는 달아났다는 것은.. 그들은 살아 남았다는 의미입니다..
즉.. 단군신화에서의 해석은 이렇게 되어야 합리적입니다.. 천손신화를 간직한 민족과.. 호랑이 토템의 민족이.. 만주로 밀어닥칩니다.. 그러나 만주에는.. 곰토템의 민족이 원주하고 있습니다.. 1차적으로.. 곰토템족을..제노사이드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천손족과..호랑이토템족과의 거주지 싸움이 벌어지고.. 승리한.. 천손족은 만주에 거주하고..패배한.. 호랑이 토템족은 한반도로 밀려 내려오게 되었고.. 그들의 문화적 영향력은..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다.. 이게 더욱 합리적인 해석이라 이말입니다.. 곰이 변해서 사람이 되었다는것은.. 다른 민족의 신화의 내용을 고찰해볼때.. 화합했다..라는 의미보다는..철저한 말살로 이해해야.
그 어떤 과거의 유물을 뒤집고 헤집고 파해쳐 봐도.. 곰을 신앙화 했다거나..곰을 어떤 문화적 유물에 새겨놓았다던가. 단군신화 이후러 그 어떤..민족신화에서 곰에 대한 표현이 있었다거나..한것을 본적이 있습니까?...과연 천손족과 곰토템족이 평화롭게 합하여 고조선을 세웠다고요?.. 그것을 그대로 믿으란 겁니까?.. 현재 사학계의 학설을 그대로 수용해야 되나요?..오류투성이인데..
전 환웅족이 곰과 호랑이의 토템을 가지고 있던 부족을 통합내지 제압하는 과정에서 단군신화가 탄생했다고 봅니다 즉 부족단위의 마을사회에서 고을나라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생긴 알력과 통합과정이 단군신화의 모태가 된거죠 호랑이에 대한 토템이 남아있는것은 환웅족과 곰족이 고조선이란 정치체계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활을 했지만 호랑이족 의 힘을 완전히 누르지 못했고 후에 곰족을 능가하는 부족으로 다시 부상했을수 있다고 봅니다 고구려건국에서는 주도적이지 못했지만 후에 고구려의 가장
강력한 외척세력이자 호족이 된 연나부처럼 말이죠 고조선이 곰을 숭배했다곤 전 보지 않습니다 곰은 단지 단군이란 고조선의 통치체계를 탄생시키데 일조한 요소죠 조선에서 주류의 위치를 차지하며 숭배되었던건 고조선을 탄생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활을한 환웅족의 환인 즉 하늘님이었다고 봅니다 우리의 뿌리가 아리안 계통이라고 kimyong 님은 말씀하시는데 한반도와 만주에 이미 구석기때부터 사람이 산 흔적이있고 만주에선신석기 문명이 발견되었습니다 만주와 한반도 사람들의 뿌리가 시베리아나 다른지역에서 건너온 종족이 기존 종족을 학살하고 그 땅을 차지했다고 볼수도 있지만 그반대의 상황도 충분히 가능하죠
왜가 신라와 백잔을 공격하여 신민으로 삼은 사실을 궂이 새겨넣을 필요가 있었을까요? 광개토대왕비는 기본적으로 승리의 기록입니다..절대로 패배한 기록을 넣을수가 없겠죠? 그렇다면 침략한 사실은 있는데.. 그에 대한 합당한 결과가 기록되지 않은 왜..의 실체는 누구죠? 백잔과 잔국을 동일하게 본다면.결코 풀릴수 없으리라 봅니다.. 굳어진 대가리들로는
적은 정보로 답을 얻을려다 보니 음모와 추측이 난무하게 되는 거죠. 애초에 고증이니 (문헌)연구니 다 빼놓고 상식적으로 역사적 사실여부를 판단해보자고 한다면 역사학이라는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걍 꼴리는대로 생각해버리죠 머. 상식이란 그런데 쓰는게 아닙니다. 상식적이란건 '좋소. 당신의 주장대로 왜(잔국)가 한반도내에 존재했었다면, 그에 대해 적시하는 문헌상 정보라던가 고고학적 증거가 나와야 하는데, 아직까지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난 당신의 주장이 근거가 없다고 본다'라고 하는게 상식적인 겁니다.
첫댓글 제 주관하고 너무나 똑같습니다~ 잘읽었습니다~
왕이름중 "루"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비류파라는 통설이 있던데
예 저도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래서 초고왕의 의미가 크다는 것과 고이왕의 경우 어느정도 각색이 들어간거다. 초고왕의 이복아우인데 연도차이는 팔십년 가까이 되니까 말이죠.
상당히 재미있는 글이네요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딴지는 아니고.........진지하게 연구 시작된지 꽤 됐습니다..
눈팅만 열심히하는 승병입니다. 글을 읽다가 의문이 있어 질문입니다. 1-7대까지를 온조계 해씨라고 가정하셨고, 8대부터 고이왕을 비류계 진씨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며, 경우에 따라 부여계 여씨로 볼 수도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8대 고이왕을 여씨 왕조로 보고 글을 쓰셨는데, 그럼 여씨 고이왕은 비류계인가요? 온조계 인가요? 비류계이면 여씨왕조가 의도적으로 비류계를 삭제했는 것이 이상하고, 온조계이면 앞에 고이왕이 비류계라는 것이 이상하군요. 아님 문장에서 "8대 고이왕 시대부터 여씨왕조가 시작된 것이고 여씨왕조는 온조왕을 여씨로 둔갑시켰다고 봐야 합니다."의 두 번 나오는 여씨가 각각 다른 여씨인가요?
또한 부여계 여씨 또한 비류계라고 가정해도 앞의 비류계는 다 지우고 어차피 비류계인 고이왕은 남겨두는 것이 이상하군요. 답변 부탁드립니다.
백제를 잃어버린 제국이라 말하는 이유가 있었군요 잘 잃었읍니다.
초기 백제 왕위가 왕족내 지파(支派)들 사이로 바뀌어서 내려왔다는 사실은 이미 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교체기에 왕들의 나이가 안맞아 들어가는 것은 지파내 방계(傍系)에서 왕위를 받았다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무슨 횡설수설인지..
OopsS!? 님.. 지파내 방계 누가 왕위를 이었는지 밝혀 냈답니까?.. 어떤 지파가 있었고.. 누가 왕위를 계승한거죠? 사학계도 확실하게 밝혀내지 못한 사항을.. (분명 보고있다고 했지 밝혀냈다고는 하지 않으셨죠?).. 횡설수설은 현재 사학계도 하는것으로 보입니다만 ^^
뚜드려 맞춘다고.. 진실이 되는건 아니죠?.. 알수없고..이해할수 없는.. 오류 투성이의 과거 기록을 해석할땐..다양한 각도의 접근이 필요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제가 제시한 사항도..횡설수설로 비난받을 일이 아닐것으로 보입니다만.. 구체적 확증을 저에게 들이밀 자료가 없으시면 입을 다무시죠
현재 사학계는.. 어째서.. 여씨왕으로 우리나라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22대 24대 백제왕의 성씨가 중국과 일본 사서에는 모씨로 기록되어져 있는지에 대한 합당한 해석을 하여야 할껍니다.
더 충격적인 말을 해볼까요?..우리가 자랑스러워 하는 단군신화는..기실...우리 민족의 주류인 동이족의 신화가 아닌 천손계..신화를 계승한.. 위만조선과 고구려.. 그리고 백제...일본으로 연결되는 민족신화입니다.. 단지.. 몽고침략기에 몽고에게 빼앗긴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하여 차용한것 뿐이죠.. 단군신화가 처음 문헌에 나타난게 언제인지를 고려해 봐야 할껍니다.. 일본도 천손 신화를 갖고있습니다.. 고구려어는 현재 일본어에 가장 가깝다는 사실(반면에 현재 대한민국어에는 가장 소외되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할껍니다.
현재의 우리가 공통된 한뿌리에서 나왔다는것은 망상입니다.. 고구려와 백제...그리고 신라는 그 뿌리가 다릅니다. 언어와 생활방식도 다른.. 현재의 대한민국과.. 인도..미국과 다른것처럼.. 계통일 틀리단 말씀입니다.. 당연히 그들의 신화 또한 구성과..내용이 다릅니다.. 고조선도.. 짠하고 나타난게 아닙니다.. 석기를 청동기가 밀어내고..청동기를 철기가 밀어내듯.. 끝없이 대륙에서.. 극동으로 밀려오는..민족의 이동 물결에서 우리의 과거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점을 인정해야 할껍니다. 안그러면 현재 사학계의 연구는 계속..오류를 꿰어 맞추려는 챗바퀴 돌기만 반복할껍니다.. 우린 결코 자랑스러운.. 한민족이 아닙니다..
고구려,백제 ,신라가 언어 문화가 다르다는 님의 말씀이야 말로 망상이죠 삼국사기와 양서 남서 삼국지등등 수많은 사서에서 부여,고구려를 위시한 백제신라등등의 언어와 문화가 똑같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어떻게 그런 말도 안되는 말씀을 하시는지 고구려,백제,신라의 영토모두 고조선의 문화권의 강력한 영향권안에 있었던 지역인데 어떻게 완전히 틀릴수 있다는건지 삼국의 언어 문화가 미국,인도와 같이 완전히 틀리다는 님의 말씀에 근거가 되는 자료라도 있나요?
그점은 제가 따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연히 한반도라는 땅떵이에 몰려든.. 잡다한 민족들의 갈등과 통합의 역사였고.. 우리가 한날 한시에 벌어진것 처럼 여겨지는 과거의 사건 또한.. 수백년에 걸친.. 장기간에 이루어진 사건들입니다. 그것을 한시에 벌어진것으로 가정해서..연구하고 있으니.. 결과가 또다시 오류 투성일 밖에요.. 이점을 인정합시다.. 태백산과 신단수.. 곰과 호랭이.. 단군.. 이 모든것이..한날 한시.. 한반도 혹은 만주 어디에선가 짠하고 발생했다.. 이따위로는 결코 해결볼수가 없는겁니다.. 우리민족을 이룬 구성부족의 한 부류가 대륙 어디선가.. 신화를 간직하고 출발하여 수천리를 이동해서..이땅에 정착하였고.. 그들의 신화의 일부가.. 전해 내려오다
고려의 몽고 항쟁기에.. 영토권의 주장과.. 백성의 단합을 위하여 차용되었고..그것이 굳어지게 되었다는 전제 하에 파고 들어야..합리적일 겁니다.
우리의 과거는.. 시작이 결코 한반도가 아닙니다.. 최초의 만주와 한반도 정착자들은.. 아리안계통들입니다.. 혹은 남방계 몽골계통이 최초로..한반도와 만주에 거주합니다..이건 세계적으로도 합리적인 해석입니다.. 안그러면.. 중국과 만주에 분포되어 있는 서양인 모습의 유골 화석들을 해석할 수가 없고.. 일본의 아이누족에 대한 해결도 보지 못합니다.. 최초의 만주 거주자는.. 유럽인들이 북아메리카에 오기전에 거주한 인디언과 같은 최초의 거주민들입니다.. 그런 전제하에 최초의 거주자인.. 아이누족 일족이 만주에서 부족단위의 사회를 건설하였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껍니다.. 또한 여기서 얻어지는..힌트는..
현재 일본의 아이누족의 토템은 곰이고.. 곰을 죽일때는..마늘을 사용하고 있다는 .. 민속연구 결과 보고에 대하여..뭔가 깨닳음이 있어야 할껍니다.. 단군신화에서.. 곰과 호랑이가.. 있었는데 마늘만 먹고.. 100일 견뎌서 곰이 사람되고 천손과 결합하여 고조선을 이루었다는것을 고지고식대로 해석하여.. 곰토템족이 천손족과의 결합이다 뭐다 하고 지랄하는데.. 이건.. 므흣한 해석이고요.. 해피엔딩적 해석입니다.. 이런 사례는.. 당시 어디에서도 죽어도 있을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리고 현제 우리의 민속신앙에서 호랑이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고찰한다면..단군신화의 내용을.. 이따위로 해석할 수는 없는겁니다.
천손족..즉 대륙에서 청동기를 들고 밀어닥친 침략자들은... 대륙의 힘싸움에서 밀려난 부족들입니다.. 이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들은 새로운 거주지를 찾습니다.. 그러나 그곳엔 곰토템의 아이누족(원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같이 행복하게 결합해서 사바사바 잘살았다?.. 그런일 있을수도 없고..있지도 않았습니다.. 백일동안 마늘을 먹였듯이.. 곰을 사냥한겁니다.. 즉. 곰토템족에 대한 대대적 제노사이드가 있었습니다.. 인간이 되었다를.. 통합하였다..라고 해석하는건..마치.. 넌센스 입니다.. 곰이 변한다는건..죽음을 의미합니다..한번 죽었다는것을 뜻하고.. 학살뒤에.. 남은것이 없음을 뜻합니다.. 반면 호랑이는 도망을
쳤다..라고 해서.. 곰토템족을 선택하고.. 호랑이 토템족은.. 밀려났다고.. 해석하는데.. 그렇다면 현재 우리나라의 가장 많은 민간신앙에서의 우위를 차지하는 호랑이에 대한 신앙은 어찌 설명할꺼죠?.. 곰을 숭배하는 사당 있으면 한군데라고 가르쳐 보시기 바랍니다.. 없습니다..아니...전멸입니다.. 곰은 그저 웅담 제조기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하지만...삼신, 천신,산신,.. 그 어떤 민간신앙에서도... 호랑이는 항상 같이 있습니다.. 이것은 호랑이 토템신앙이 이어져 오는것이기 때문이죠.. 즉 호랑이는 달아났다는 것은.. 그들은 살아 남았다는 의미입니다..
즉.. 단군신화에서의 해석은 이렇게 되어야 합리적입니다.. 천손신화를 간직한 민족과.. 호랑이 토템의 민족이.. 만주로 밀어닥칩니다.. 그러나 만주에는.. 곰토템의 민족이 원주하고 있습니다.. 1차적으로.. 곰토템족을..제노사이드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천손족과..호랑이토템족과의 거주지 싸움이 벌어지고.. 승리한.. 천손족은 만주에 거주하고..패배한.. 호랑이 토템족은 한반도로 밀려 내려오게 되었고.. 그들의 문화적 영향력은..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다.. 이게 더욱 합리적인 해석이라 이말입니다.. 곰이 변해서 사람이 되었다는것은.. 다른 민족의 신화의 내용을 고찰해볼때.. 화합했다..라는 의미보다는..철저한 말살로 이해해야.
의문과 궁금증이 풀리는겁니다.. 고조선 유적중에서 곰과 관련된 유물이 한개라도 나온게 있다면 저에게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없다면.. 곰토템족과 천손족이 합치하여 고구려를 세운것이다..라는 가정은 뻥입니다..
그 어떤 과거의 유물을 뒤집고 헤집고 파해쳐 봐도.. 곰을 신앙화 했다거나..곰을 어떤 문화적 유물에 새겨놓았다던가. 단군신화 이후러 그 어떤..민족신화에서 곰에 대한 표현이 있었다거나..한것을 본적이 있습니까?...과연 천손족과 곰토템족이 평화롭게 합하여 고조선을 세웠다고요?.. 그것을 그대로 믿으란 겁니까?.. 현재 사학계의 학설을 그대로 수용해야 되나요?..오류투성이인데..
전 환웅족이 곰과 호랑이의 토템을 가지고 있던 부족을 통합내지 제압하는 과정에서 단군신화가 탄생했다고 봅니다 즉 부족단위의 마을사회에서 고을나라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생긴 알력과 통합과정이 단군신화의 모태가 된거죠 호랑이에 대한 토템이 남아있는것은 환웅족과 곰족이 고조선이란 정치체계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활을 했지만 호랑이족 의 힘을 완전히 누르지 못했고 후에 곰족을 능가하는 부족으로 다시 부상했을수 있다고 봅니다 고구려건국에서는 주도적이지 못했지만 후에 고구려의 가장
강력한 외척세력이자 호족이 된 연나부처럼 말이죠 고조선이 곰을 숭배했다곤 전 보지 않습니다 곰은 단지 단군이란 고조선의 통치체계를 탄생시키데 일조한 요소죠 조선에서 주류의 위치를 차지하며 숭배되었던건 고조선을 탄생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활을한 환웅족의 환인 즉 하늘님이었다고 봅니다 우리의 뿌리가 아리안 계통이라고 kimyong 님은 말씀하시는데 한반도와 만주에 이미 구석기때부터 사람이 산 흔적이있고 만주에선신석기 문명이 발견되었습니다 만주와 한반도 사람들의 뿌리가 시베리아나 다른지역에서 건너온 종족이 기존 종족을 학살하고 그 땅을 차지했다고 볼수도 있지만 그반대의 상황도 충분히 가능하죠
외부세력이 기존 토착세력을 무족건 싹쓸이 제압을 했다는건 지나친 오바라고 봅니다 이동해온 세력이 토착세력에 기대에 안주할수도 있는거죠
곰잡을때 마늘이 아닌 쑥을 사용하는거 아닌가요?? 만주의 원주민은 아이누족이라는 말씀과 학살 시켰다는것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ㅋ
에구 많이도 쓰셨는데 새겨 읽어야 할건 별로 없어보이는 군요. 그나저나 아래글에 '백잔'과 '잔국'에 대한 주장은 접으신건가요? 다른 근거를 좀 들어봤으면 좋겠는데..
OopsS!? 님.. 애쓰진 않았습니다.. 백잔과 잔국이 동일국가라는 님의 말씀을 한번 고찰하고 넘어갑시다.. 백잔과 잔국이 동일국가라면.. 님의 말씀대로?... 한번 상식적으로 생각해봅시다..귀찮은 고증이니 연구니 다 때려치우고 상식적으로요 ^^ .. 만일 님이 장수왕이고..아버지의 업적을 기리는 비문을 작성한다고 칩시다. 신민인 신라과 백잔을 침입한 왜구를 축출하지 못하고 백잔(혹은 잔국을 혼내주어) 신라를 구하였다고 기록한다고 칩시다.. 왜 는 어디있는거죠?. 졌을까요? 이겼을까요?.. 토벌은 하기나 한겁니까?.. 지아버지 잘났다고 기록을 새기는데 정작 토벌해야할 왜에 대한 토벌은 어디에 새겨놓았죠?.. 설혹 졌다고 칩시다..
왜가 신라와 백잔을 공격하여 신민으로 삼은 사실을 궂이 새겨넣을 필요가 있었을까요? 광개토대왕비는 기본적으로 승리의 기록입니다..절대로 패배한 기록을 넣을수가 없겠죠? 그렇다면 침략한 사실은 있는데.. 그에 대한 합당한 결과가 기록되지 않은 왜..의 실체는 누구죠? 백잔과 잔국을 동일하게 본다면.결코 풀릴수 없으리라 봅니다.. 굳어진 대가리들로는
헷갈리게 같은나라를 다른이름으로 굳지 부를 이유가 있을까요? 그 나라에 어떤 사정이 생겨 나라이름을 바꾸더라도 고구려입장에선 쬐깐놈이 헷갈리게 뭔짓이야 하면서 자기편하게 옛전그대로를 썻을겁니다.
적은 정보로 답을 얻을려다 보니 음모와 추측이 난무하게 되는 거죠. 애초에 고증이니 (문헌)연구니 다 빼놓고 상식적으로 역사적 사실여부를 판단해보자고 한다면 역사학이라는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걍 꼴리는대로 생각해버리죠 머. 상식이란 그런데 쓰는게 아닙니다. 상식적이란건 '좋소. 당신의 주장대로 왜(잔국)가 한반도내에 존재했었다면, 그에 대해 적시하는 문헌상 정보라던가 고고학적 증거가 나와야 하는데, 아직까지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난 당신의 주장이 근거가 없다고 본다'라고 하는게 상식적인 겁니다.
'역사는 제일 그렇듯한 거짓말이다(맞나? 잘 기억안남)'라는 말이 있죠. 유물조차 없을땐 여러사서를 대조해가며 그 당시 상황에서 생각할수있는 상식선에서 봐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