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3일(현지시간) 펜실베이니아 유세 도중 총격을 받았으나 오른쪽 귀를 관통당해 목숨을 건진 뒤 국내 주류 언론과 평론가들은 '우주의 기운이 그에게로 향한다'며 대세를 따를 수 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태도를 보였다. 우리 주류 언론이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대세를 추종하는 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저 '힘이 정의'라며 안주하는 것이 국내 주류 언론의 과거이자 현재다.
미국 언론이 그런 자세를 취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쳐도 우리 주류 언론이 그런 자세에 머무르는 것은 극히 실망스럽다. 민주주의 질서를 위협하고 심지어 대통령 선거 결과를 뒤집기 위해 의회를 겨냥한 폭력 시위를 선동했다는 점에서 트럼프는 대선에 출마할 자격을 갖추지 못했고, 이번에 다시 대선에 나서면서도 비민주적 자세와 태도를 청산하겠다는 결의를 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트럼프는 대선에 나와선 안 될 인물이다.
그의 장남 주니어가 17일 언론 인터뷰를 통해 '아버지도 변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얼마나 사람이 달라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무자격자를 걸러내지 못한 미국 공화당의 한계, 포퓰리즘에 편승한 전제주의 성향의 지도자를 또다시 용납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우리 주류 언론은 진지한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둘째로 우리 주류 언론은 트럼프의 대선 도전과 당선이 대한민국 국익에 부합하는지에 대한 성찰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물론 조 바이든 현 대통령에 대해 실망하고, 그가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 않는다는 현실 인식 때문에라도 '트럼프가 다시 당선돼도 뭐 어떻겠느냐'는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당장 방위비 부담 압력,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충동적인 담판 가능성, 한미일을 축으로 러시아-중국-북한과 편을 갈라 제2의 냉전으로 끌고 갈 가능성 등 많은 우려되는 대목들을 갖고 있다.
이런 점들 때문에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함께 쓴 책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를 다시 펼쳐들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두 저자는 트럼프 전 대통령에 초점을 맞추지만, 나를 비롯한 한국인들은 윤석열이란 못지 않은 괴물을 염두에 두고 읽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 기반이 아무리 튼튼하다 해도 극단주의 선동가는 어느 사회에서나 등장하기 마련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시험은 이런 인물이 등장하는가가 아니라, 정치 지도자와 정당이 나서서 이런 인물이 당내 주류가 되지 못하도록 차단하고, 이들에 대한 지지와 연합을 거부하고, 필요하다면 다른 당의 민주주의 후보자를 지지하거나 경쟁 세력과 적극적으로 연대함으로써 이들이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는가이다.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극단주의자를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서는 정치인들의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기성 정당이 두려움과 기회주의 , 혹은 판단 착오로 인해 극단주의와 손을 잡을 때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선출된 독재자는 사법부를 비롯한 중립 기관들을 자신의 입맛대로 바꾸거나 '무기로 활용하고', 언론과 민간 영역을 (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매수하고, 정치 게임의 규칙을 바꿔서 경쟁자에게 불리하게 운동장을 기울인다.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독재자의 시나리오에서 가장 비극적인 역설은 그가 민주주의 제도를 미묘하고 점진적으로, 그리고 심지어 합법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죽인다는 사실이다.
헌법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상대 정당을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는 상호 관용과 이해, 제도적 권리를 행사할 때 신중함을 잃지 않는 자제, 두 가지 규범이 중요하다. 규범은 트럼프 출현 이전부터 생겨나고 있었으며 당파적 양극화에서 비롯됐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은 국민이 아니다. 극단주의자의 호소에 대한 대중의 반응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치 엘리트 집단, 특히 정당이 사회적 거름망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가이다. 간단히 말해 정당은 민주주의의 문지기인 셈이다.
전제주의 행동을 가리키는 네 가지 주요 신호를 말과 행동으로 민주주의 규범 거부(혹은 규범 준수 의지 미흡), 정치적 경쟁자에 대한 부정, 폭력에 대한 조장이나 묵인, 언론 및 정치적 경쟁자의 기본권을 억압하려는 성향으로 분류한다.
민주주의의 위기를 알리는 구체적인 신호 역시 네 가지로 정리한다. 기성 정당과 정치인들이 포퓰리스트와 손잡는다, 정치인들이 경쟁자에게 반국가 세력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선거에서 패배한 정당이 음모론을 제기하며 결과에 불복한다, 대통령이 의회를 우회해 행정명령을 남발한다.
위 마지막 네 가지 신호는 대충 국내에서 지난 2년 동안 벌어진 일들에 대입해 그리 다르지 않다.
2018년 10월 한글 번역본이 나왔는데 이번에 새롭게 구입한 책은 2024년 5월 인쇄한 19쇄다. 트럼프를 대단한 운명을 타고 난 '우주의 기운을 업은' 지도자가 아니라 옳지 못한 길에 다시 나선 극단적 포퓰리스트로 보고 그 대처 방안을 모색해야 제대로 된 대처법, 우리 국가와 민족의 생존 방법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아래 링크는 트럼프 피격 이틀 전인 11일 뉴욕 타임스(NYT)의 이례적으로 긴 사설이다. 곰곰이 뜯어 읽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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