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8주일[2021. 8. 1]
사람은 욕구(욕망)하는 존재이다(Homo desiderans). 나 아닌 것을 굳이 내 것 삼아야 살 수 있다. 먹어야 산다. 하지만 성경은 처음부터 먹어서 죽는 길로 갔다는 사실에 대해 보도한다. 에덴에서 사건을 필두로 하느님 백성으로 거듭 나는 데 있어서도 먹는 것이 다시금 발목을 잡는다. 기껏 홍해를 건너간 히브리인들이 두고두고 이집트를 그리워했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 불평했다. 만나가 주어졌지만 고기 타령이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줄까?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생선이며,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마늘이 생각나는구나. 이제 우리 기운은 떨어지는데 보이는 것은 이 만나뿐 아무것도 없구나.”(민수 11,4; 탈출 16,3 비교) 종살이하며 고기는 무슨 고기, 이 모든 것은 (이집트인들을 보며 누리지는 못한 채 같이 욕망한) 자신들의 욕구가 투영된 허세요 환상이었다. 이를 두고 바오로 사도는 “지난날의 생활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에페 4,22)이라 칭한다. 남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그야말로 작은 출애급이었고, 자기를 넘어 자신을 탈출하는 것이 진짜 출애급이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을 넘어 탈출하기는커녕, “썩어 없어질 양식”을 사기 위해 ‘영혼까지 탈탈 털어 파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작금의 ‘영끌족’이라는 신조어가 우리가 처한 상황을 잘 반영해준다. 스스로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를 파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 “생명의 빵”을 둘러 싼 담론이 펼쳐지는 오늘 복음 장면이 전제하는 ‘오병이어’ 기적에서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어놓은 ‘아이’가 스스로 무엇을 이미 지니고 있었는지 몰랐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는 이제 이미 지니고 있던 것이 놀라운 방식으로 오천 명에게 차고 넘치게 나누어지는 것을 보고 놀랄 뿐이다(요한 6,9-13). 이는 마치 성령께서 사도들의 한 언어로부터 온 세상의 모든 언어를 창출하는 것에 비길 수 있다(사도 2,1-13). 이미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는 한 인간일 뿐인 바오로 사도 역시 당대를 넘어 모든 시대 모든 공동체 모든 신학을 위해 무한히 배가시키셨다. 바오로 사도는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게”(에페 4,22-24) 종용한다. ‘옛 인간을 입게 하는’ 욕망은 공허를 전제로 하고 결국에는 공허에로 이끈다. ‘텅 빈 나’를 거듭 무엇인가로 채우려 욕구하지만, 이는 결국 영적 교만일 뿐이다. 스스로 자신을 채울 수 있는 것이 있다고 믿으며 계속 헛발질이다. 하지만 인간을 위시해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충만은 오직 하느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빵으로 허기를 채우기 위해 욕구하지만, 빵이 하느님이 아니라면 결국 돌아오는 것은 더 큰 공허와 실망일 뿐이다. 빵이 되는 하느님이 필요하다.
세례를 통해 이미 ‘그리스도를 입고’ 빵이 되신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은 내 안에 계신 성령을 만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될 때, ‘오병이어 기적의 아이처럼’ 내 안의 성령께서 나 자신을 많이 ‘불리시어’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일을 확인하는 일만 남았다. 내가 남 안에 들어가고 남을 상대로 새로운 집이 되어주어야 한다. 의식주 문제가 새로이 해결된다. 가톨릭 교회의 입문성사(Initiatio Christiana)는 이 사실을 전례적으로 재현하고 현실 안에서 실현시킨다. ‘옛 인간’인 여태까지의 나를 벗어던져 탈출하여 ‘새 인간’을 입고 ‘생명의 빵’을 먹는 것으로 대표되는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는 원래 견진성사와 한날한시 동시에 거행되었다. 그래야 자모이신 교회가 나의 새로운 집이 되었다는 사실이 구체적으로 공표되기 때문이다. 교회는 ‘오병이어 기적’이 계속 벌어져 그것으로 함께 먹고사는 식구의 집이다. 그러기 위해 내 안의 성령께서 아직 ‘아이’인 내가 무엇을 이미 지니고 있는지 볼 줄 아는 은총을 베풀어 담대히 나 자신을 내어놓아 성인이 되게 하는 견진성사의 효력, 곧 ‘성령이 주는 선물’을 다른 모든 이와 향유하는 용기를 주셔야 한다. 견진을 통해 주어진 선물인 ‘볼 줄 아는 눈’을 통해 보는 새로운 나를 나누는 새로운 한 주간 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