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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을 찾아서
나도 남도 이익 되는 일 분명 있다, 그걸 찾아야지요
서울대총동창신문 제511호(2020. 10.15)
성기학 영원무역 회장
스물일곱 청년이 독일 유학의 꿈을 잠시 접고 동업자 둘과 수출회사를 차렸다. 대한민국 전체 수출이 50억 달러도 안 되던 1974년이었다. “젊은이는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고 노래하던 클리프 리차드의 팝송에서 회사 이름을 따왔다. 노랫말 그대로 두려움 없이 전진해 직원 8만명, 매출 2조5,000억원의 글로벌 의류업체를 일궜다.
세계적인 OEM(주문자 상표 부착 방식) 의류업체로 널리 알려진 영원무역은 1980년에 국내 최초로 방글라데시에 진출해 의류 생산 단지를 구축했다. 1990년대에는 국내에 아웃도어 열풍을 몰고 왔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때는 ‘팀 코리아’ 단복을 제작하고 자원봉사자들 의류용품을 후원하면서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뒷바라지했다.
‘2020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으로 선정된 성기학(무역 66-70) 동문을 10월의 마지막 주말 아침 서울 동숭동 자택에서 만났다.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옛집을 헐고 그 터에 새로 지은 현대식 건물이었다. 건물 내부엔 그가 수집하는 앤티크 라디오와 빈티지 장전축(Radiogram) 수 백대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금새라도 클리프 리차드의 올드팝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자랑스러운 서울대인’ 수상을 축하 드립니다.
“깜냥도 안 되는데 과분합니다. 그 상에 걸맞은 훌륭하신 분들이 많은데.”
-2년 전 사재 100억원을 모교에 기부해, 그 돈을 기반으로 우석경제관이 곧 완공된다고요.
“서울대 학생들이 폭넓게 인문사회과학을 섭렵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활용됐으면 합니다. 섬유 연구에 경쟁력을 가진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를 가보니 연구 환경이 참 좋아요. 미국의 톱 순위 대학이 아닌데도 시설이 서울대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건물명에 부친의 호 ‘우석’을 붙이셨지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남다르신 모양입니다.
“아버지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할아버지, 아버지께서 뭔가 개척하는 데 크게 노력하셨는데 그 기질을 제가 물려받았는지 모르지요. 할아버지는 고향 창녕에서 미곡 수출사업을 했습니다. 선친은 1945년 상경해서 출판사를 차렸는데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같은 번역서, 양서를 50권 가까이 출판, 인쇄하셨습니다. 돈 버는 책보다는 양서를 발행해야 한다는 의지가 강하셨어요. 존 스튜어트 밀이 어렸을 때부터 여러 학문을 접할 수 있어서 좋은 학자가 됐다는 말씀도 여러 번 하셨어요.”
-고향이 창녕이라고 하셨지만 회장님은 서울서 태어나신 거지요.
“네. 우리 형제가 4남 2녀인데 절반은 서울, 절반은 창녕에서 태어났어요. 제가 둘째고요.”
성 회장 부친인 고(故) 성재경 선생은 6·25 전쟁 때 고향 창녕으로 피난 가 그곳에서 농장을 운영하면서 농민들을 계몽하고 농업 기술을 보급하는 운동을 펼쳤다. 환금 작물로 창녕에서 양파를 처음 대량 재배한 이도 부친이었다. 성 회장은 어린 시절 아버지 농장 일을 도우면서 사업가 훈련을 받았다.
-사업하겠다는 생각으로 무역학과에 입학하셨던 건가요.
“영화 ‘레 미제라블’ 보면 파리의 하수도가 나오지요. 원래는 토목공학과에 진학해 서울에 그런 하수도를 건설하고 싶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적록 색약이어서 당시 공대로 진학을 못했지요.”
-졸업하고 직장 생활도 잠깐 하셨지요?
“서울통상에 입사해 1년 반 정도 다녔습니다. 당시 그 회사 수출 실적이 국내 2위였어요. 유럽에 스웨터 수출하는 일을 했습니다.”
-창업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신 겁니까.
“독일 가고 싶어 직장 그만두고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업무로 알게 된 스웨덴 바이어로부터 연락이 와 한국의 의류 수출 에이전트(Agent) 하는 분을 소개받았습니다. 3개월만 일을 돕기로 했다가 머지않아 3자 동업으로 회사를 차리게 됐지요. 1984년에 동업자들에게 회사를 맡기고 제가 빠지려고 했는데 그 분들이 떠나고 제가 회사를 운영하게 됐지요.”
-‘회사가 영원히 번창하라’고 영원무역인 줄 알았는데, 클리프 리차드의 1961년 팝송 ‘The Young Ones(젊은이들)’에서 따왔다고요.
“이름을 쉽게 짓자고 해서, 그 노래가 문득 생각났습니다. 처음 회사 이름은 노래 제목 그대로 ‘영원스코퍼레이션’이었어요. 1984년 동업자들과 결별하고 제가 혼자 회사를 맡으면서 복수를 뜻하는 ‘s’ 빼고 영원무역이 된 거죠. 한자 이름도 쉽게 쓴다고 길 영(永)에 으뜸 원(元) 자로 표기했는데 쓰다 보니 발음이 할머니 존함(손영원)과 같았어요(웃음).”
1974년 설립 초기에 영원무역은 세계적인 스키복 브랜드 ‘화이트 스텍’의 제품 수출을 시작했다. 단순 중개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해 의류 OEM에 뛰어든다. 공장도, 생산 경험도 없는 회사였지만 성 회장은 화이트 스텍의 도널드 케네디 회장에게 저돌적인 제안을 했다. 그때만 해도 국내에는 전문 제조공장도 없던 때인데 다운웨어(Down Wear) 제품을 직접 생산해 납품하겠다고 했다. 품질 나쁘면 모두 반품한다는 조건으로 제안이 받아들여졌다. 성 회장은 6개월 만에 공장을 완공하고 밤낮 없이 공장을 돌려 약속을 지켰다. 이렇게 품질과 기술력에서 신뢰를 쌓으며 거래업체를 늘려나갔다.
-국내에 아웃도어 용어조차 생소하던 시절 아웃도어 의류에 눈을 돌리셨지요. 대학시절 산악부에서 활동하신 것과도 연관이 있는 건가요.
“고등학교 때부터 산에 다녔어요. 주로 서울 근교를 다녔고, 대학 가서 설악산, 지리산 같은 전국의 명산을 다녔지요. 1960년대엔 한겨울에 등산 갈 때도 아크릴 스웨터를 껴입고 갔어요. 설악산에 온 일본 등산객을 보니 얇은 내복 위에 다운 옷을 입고 있었어요. 부럽더라고요.”
영원무역은 1980년 방글라데시 진출을 시작으로 일찌감치 해외 생산에 나선 세계화의 선두기업이다. 방글라데시 치타공 공장에 이어 중국 칭다오, 엘살바도르, 베트남, 우즈베키스탄, 에티오피아에 차례로 공장을 세웠다. 전 세계 직원 8만여 명 가운데 국내에 근무하는 1,500명 정도 인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현지 직원이다.
-아무도 서남아에 눈 돌리지 않던 1980년 방글라데시에 진출한 이유가 뭡니까.
“한국산 섬유제품에 쿼터제(수출 할당제)가 실시되던 때였습니다. 큰 기업은 물량 배정을 많이 받을 수 있었지만 우리 같은 작은 기업은 제약이 많았어요. 쿼터제 피하려고 해외 생산을 검토했는데 당시 동업자 중 한 분이 방글라데시 현지인과 합작 공장을 짓겠다고 약속해 내부적으로 이견도 많았습니다. 결국 그 분 뜻대로 방글라데시에 공장을 열었는데 이듬해 공장 가까운 곳에서 대통령 살해 사건이 벌어졌어요. 내란 같은 상황에, 정세가 뒤숭숭했지요. 납품 약속도 해둔 상태였는데 방글라데시 진출하자던 그 동업자가 현지에 가길 꺼려해서 제가 떠맡게 됐지요. 하다 보니 합작한 현지 파트너에게 제품 생산을 맡길 상황이 못됐어요. 결국 그 공장은 합작선에 넘기고, 새로 조성된 산업단지(EPZ)에 공장을 차렸습니다.”
-지금은 기업의 현지화 전략이 일반화됐지만 80년대에는 언어도, 문화도 다른 곳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듯합니다.
“초기에는 애도 많이 먹었습니다. 방글라데시는 사회주의 경제정책으로 기업들이 거의 다 국영화됐었고,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가 일을 해도 잘 살지 못해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보상도 충분히 했습니다. 1991년에는 사이클론과 해일로 새로 지은 공장이 바닷물에 잠겨서 제품 30만개를 버리고 다시 만들어야 했습니다. 고객사를 설득해 납품을 도착 기준으로 한 달 더 연장 받은 뒤 현지 직원들과 합심해 밤새 공장을 돌리면서 그 위기를 이겨냈습니다.”
-생산 공장을 다 해외에 두셨으니 해외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으시지요. 올해는 코로나 영향으로 어려우셨을 것 같습니다.
“그간 1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일했습니다. 올 초에도 방글라데시와 베트남에서 보냈고, 2주 전에는 베트남을 다녀왔습니다. 내일 방글라데시 가서 일주일 있다가 옵니다. 코로나 조심해야겠어요.”
-영원무역하면 국내 아웃도어 브랜드 1위인 ‘노스페이스’를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미국 브랜드인데 어떻게 인연이 닿은 건지요.
“방글라데시의 치타공에 공장을 크게 지었는데 그 시기가 노스페이스 성장 시기와 잘 맞았어요. 그 공장이 노스페이스의 폭발적인 수요를 충족할 수 있었지요. 한때 노스페이스에 납품하는 OEM 물량의 80%를 우리가 담당한 적도 있습니다. 지금은 15% 정도 담당합니다. 국내에 라이선스 브랜드로 노스페이스를 들여온 것은 1997년입니다.”
-OEM업체로 특화됐는데, 자체 브랜드를 더 육성할 계획은 없으신가요.
“사실 노스페이스도 영원무역의 준 자체 브랜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노스페이스를 인수할 기회도 있었는데, 그랬다가 기존 사업에 누가 될까 봐 포기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양반, 상놈 나누듯이 의류 사업도 먹이사슬의 상위, 하위 개념으로 보고 OEM하면 성장성 없는 걸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어요. 나이키는 공장 없이 잘하는데 왜 그렇게 못 하느냐고도 합니다. 서로 잘하는 분야가 다른 겁니다. 사업은 자기가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선택해서 잘 꾸려 가는 게 중요합니다. 의류브랜드 사업은 직물, 염색, 디자인, 가격, 유통 등 모든 것이 어우러진 종합 예술인데 이 중 하나라도 허투루 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망하면 협력업체들도 어려워집니다. 남에게 피해 주지 않겠다는 노력을 하다 보니 사업 판단을 보수적으로 할 때가 많습니다.”
-세계적인 OEM업체들 가운데 영원무역의 위상은 어느 정도인가요.
“톱20에 든다고 보면 됩니다. 거래선은 50개 정도 됩니다. 올해 저희 예상 매출 25억 달러 가운데 OEM 비중은 절반 가량입니다. 몇 년 전 인수한 자전거 분야 매출이 크게 늘어 9억 달러 가량 됩니다.”
-40년 넘게 사업하면서 단 한 해도 적자 낸 적이 없으시다고요.
“적자를 안 내도록 사력을 다합니다. 말이 적자지, 비유하자면 도랑을 건너뛸 때 폭이 2m인데 1m 99cm만 뛰면 1cm 모자라 도랑에 빠집니다. 그 밑에 오물이 있는지 독극물이 있는지 알수가 없는데 말이죠. 넉넉하게 뛰어 넘어야 합니다. 사업도 그런 거라고 봅니다.”
-안나푸르나 남벽 코리안 루트를 개척하다 눈사태로 실종된 고 박영석 대장과의 인연에 대해 “스승이자 후배”라고 표현하신 걸 본 적이 있습니다. 박영석 대장의 산악탐험 정신으로 사업을 개척한다고 말씀하신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더 오래 살아서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인데 정말 아깝고 안타깝지요. 박 대장과 인연을 맺은 건 1997년 가을이었습니다. ‘동국대 다닐 때 장충동 영원무역 쇼윈도에 있던 고성능 등산복을 언제 한번 입어보는 게 소원이었다’는 박 대장 말을 듣고 노스페이스 제품을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성 회장은 박 대장의 꿈이었던 히말라야 14좌 완등 원정을 돕겠다고 약속하고 후원 기업이 됐다. 산악인이 기업과 계약을 맺고 생계 부담에서 벗어나 등반에 전념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새 길을 찾아 탐험을 떠나고, 힘든 상황이 닥쳐도 멈추지 않고 도전을 계속한다는 점에서 등반가와 기업가는 공통점이 많다. 성 회장 역시 세계를 무대로 한 아웃도어 의류시장에서 새 길을 개척한 탐험가이자 등반가였다. 노스페이스의 슬로건은 ‘도전을 멈추지 말라(Never Stop Exploring)’인데 성 회장은 남에게 희망을 주며 살자는 ‘Never Stop Dreaming’을 덧붙인다고 했다. 기업인 성기학은 도전의식과 나눔 정신이라는 ‘두 바퀴’로 굴러가는 듯했다.
-우리 사회에서 기업가 정신이 사라져 간다는 우려가 큽니다. 특히 서울대생들이 안정적인 직업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평가도 있고요.
“나라에 기업가를 중시하는 풍토가 없고, 사업에 부담되는 규제들이 양산되고 있어 정말 걱정입니다. 서울대 후배들이 용기 있는 삶을 살았으면 하지만 우리가 다닌 학교에서는 용기를 가지라는 말 듣기가 쉽지 않았지요. 공부 잘 해서 출세해라 정도였죠. 남에게 유익하면서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 찾아보면 있거든요. 후배들이 그런 길을 열심히 찾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직원을 뽑을 때 어떤 잣대로 채용하십니까.
“우리 회사 업무에 필요한 의류 산업 관련 전공자, 영어 능력을 중시합니다. 성격으로는 진솔한 사람을 뽑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요즘 생각은 정직의 가치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이 들어와도 교육과 시스템, 경험 등을 통해 정직이 자신에게 큰 유익이 된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게 좋은 기업이 아닌가 생각하게 합니다.”
-기업 경영의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십니까.
“항상 스트레스 위에서 산다고 해야 하나, 스트레스의 연속이죠. 친구들 보면 나보다 젊어보여요. 섬유, 의류 일을 하다가 다른 일 즉 건축, 수집 등을 하면 나한테는 그게 쉼이에요. 집을 짓거나, 카메라, 오디오를 수집하는 것 등이요. 수십 년간 버려둔 창녕 고택과 정원도 복원했습니다. 한옥은 넓은 회의장을 만들기 어려운 구조인데 고택 복원하면서 지하에 컨퍼런스 센터 공간을 만들었지요.”
인터뷰가 끝날 무렵 성 회장은 300만평 규모의 방글라데시 수출가공단지 영상을 보여줬다. 판교신도시보다 큰 땅에 공장, 기숙사, 태양광발전시설, 병원, 탁아소까지 갖춘 세계적인 의류 생산 기지다. 스물일곱 한국 청년이 뿌린 도전의 씨앗이 반 세기 안 되는 세월 동안 울창하고 거대한 숲을 이뤘다.
대담·글: 강경희(서울대 외교84-88)조선일보 논설위원
성 동문은
△1947년 서울 출생 △1965년 서울사대부고 졸업 △1970년 서울대 무역학과 졸업 △1972~1973년 서울통상 근무 △1974년 영원무역 설립
△1998년 무역의 날 ‘1억불 수출의 탑’ △2008년 금탑산업훈장
△2011~2016년 서울상대동창회 회장
△2014~2020년 한국섬유산업연합회 회장
△2018~2020년 국제섬유생산자연맹(ITMF) 회장
△2020년 자랑스러운 서울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