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읽을말씀: 마20:1~34
주제말씀: 마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첫째,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20:16)
예수님은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어떤 비유를 말씀해주셨나요? 포도원의 품꾼들 비유입니다(1~15절). 여기서 천국을 누구로 비유했습니까? 품꾼들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는 집 주인입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1절)
그는 하루에 얼마씩 품꾼들과 약속하고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까? 한 데나리온입니다. 참고로,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2절)
언제 품꾼들을 각각 들여보냈습니까? 오전 6시(2절), 오전 9시(제 삼 시, 3절), 정오(제 육 시, 5절), 오후 3시(제 구 시, 5절), 오후 5시(제 십일 시, 6절)입니다.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또 제 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제 육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제 십일 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2~7절)
품삯은 누구부터 지급했습니까? 나중 온 자입니다.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 십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8,9절)
그러나 누가 원망을 하기 시작했습니까? 먼저 온 자들입니다. 어째서입니까? 더 받을 줄 알았는데 자신들을 나중 온 자들과 똑같이 취급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에게도 나중 온 자들과 같이 한 데나리온씩 준 것입니다.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10~12절)
하지만 왜 주인은 잘못이 없었습니까? 처음부터 그들과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했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13절) /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2절)
사실 따지고 보면 집 주인이 나중 온 자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은 아무런 잘못이 없고 오직 그들에게 무엇을 베푼 것뿐입니까? 자비입니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 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은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14,15절)
결국 이 비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얼마든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일이 많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16절)
그러니 우리는 어찌 해야 합니까? 나중 된 자는 먼저 되기를 힘쓰고, 먼저 된 자는 나중 되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떤 자세가 필요합니까? 비교의식, 곧 남들보다 더 받으리라는 생각을 버리고, 또 설령 남들과 같게 여김 받더라도 원망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20:26,27)
예수님께서 세 번째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신 직후(17~19절) 누가 예수님께 자신의 아들들을 위해 청탁해왔습니까? 세베대의 부인입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20절)
무엇을 청탁했습니까? 자신의 아들들, 즉 야고보와 요한을 주의 나라의 요직을 앉혀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21절) 어째서입니까?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몰이해와 무지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22절 상)
이를 들은 다른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분히 여겼습니다.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24절)
예수님은 이와 관련해서 어떤 말씀을 해주셨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세상의 방식과 다르다는 점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25,26절)
어떻게 다르다고 하셨습니까? 크고자 하는 자는 오히려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서로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26,27절)
누가 몸소 이 일의 본이 되어주었습니까? 예수님입니다. 즉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섬기려고 이 땅에 오셨는데,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오셨던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8절)
그러니 우리도 어찌 해야 합니까? 예수님처럼, 우리도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섬기는 자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한편, 여리고를 떠나 갈 때에 누가 와서 도움을 청했습니까? 맹인 두 사람입니다. “그들이 여리고를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29,30절)
하지만 그 두 사람에게는 어떤 제약들이 있었습니까? 큰 무리가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었고,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29절 하) 그 중 상당수가 자신에게 잠잠하라고 꾸짖은 것입니다.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31절 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찌 하였습니까? 포기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계속 부르짖었습니다.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31절 하) 무엇과 함께 부르짖었습니까? ‘다윗의 자손’이라는 분명한 신앙고백(30,31절)과 명확한 소원을 가지고서입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32,33절)
그들처럼 우리도 분명한 신앙고백과 명확한 소원을 가지고 인내로써 구하고 있습니까? 만일 그렇지 못했다면 이제부터라도 그리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